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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환

홍정욱은 장준필과 함께 수안의 집무실로 향했다.

“너 여기서 대기해. 부르면 들어와라.”

“옙.”

비서실에서 확인하고 문을 열어 주자 홍정욱은 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어. 정욱 씨. 갑자기 무슨 일이죠?”

“일을 시작하기 전에 상황을 보고하려고 합니다.”

“이게 뭡니까?”

“제보 편지입니다.”

수안은 홍정욱이 내민 편지를 받아 읽기 시작했다.

“글씨하고는….”

글씨는 갈매기가 날아가듯 했지만, 내용은 심각했다.

수안은 편지를 모두 읽고 처음부터 다시 꼼꼼하게 내용을 확인하며 다시 읽었다. 특히 후반부에 나와 있는 관련자들에서 눈길을 떼기 어렵다.

“…청부 자금이 일본을 경유해서 한국까지 들어왔다고 생각해야 합니까?”

“예. 저도 그렇게 예상합니다. 밖에 편지를 들고 온 놈이 있습니다.”

“들어오라고 하세요. 얼굴이나 봅시다.”

편지에는 나라를 향한 애국심과 강수안 선수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이번 의뢰를 포기하고 관련 정보를 제공한다고 작성되어 있었다.

‘…설마 그럴 리가. 이득은 눈앞에 있고 위험은 막대하니까 내린 결정이겠지.’

한국에서 자신의 청부 살해를 받아들일 조직을 찾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나라를 빛낸 영웅, 전 국민이 좋아하고 사랑하는 스포츠 스타, 타이틀이 막강하다. 여기에 정치 권력과 재력을 틀어쥐고 강운 그룹의 맏아들 신분까지 더하면 감히 누가 청부 살해를 선택할 수 있겠는가.

홍정욱은 어색하게 밖에 서 있는 장준필을 안으로 들여보내며 같이 들어왔다.

“……!”

수안은 남자의 얼굴을 보자마자 알아볼 수 있었다.

과거 자신이 죽기 전에 사채를 빌려줬던 그 사람이다. 당시 험상궂은 얼굴은 그대로였다. 저 얼굴이 그대로 나이를 먹어 주름 몇 개와 오른쪽 눈 끝에서 귀 아래로 가로지르는 칼자국이 더해지면 당시의 사채업자 얼굴이 된다.

“여기 장준필은 조직에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번 일에 버리는 패로 활용되었습니다.”

“…….”

장준필을 보자 과거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자아… 어디 봅시다. 지금 뭐 하시는 분인지?]

[어휴. 그런데 그런 꼴로 일을 할 수나 있소?]

[이자도 안 듣고 오케이야? 나 참. 그러다 못된 놈들에게 걸리면 어쩌려고?]

200만 원을 빌리는데 선이자를 60만 원이나 떼어간 놈이다.

‘문제는 내가 빌린 돈도 갚지 못했다는 거지.’

돈을 빌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어 버렸다. 연고자 하나 없는 자신에게 대금을 회수할 방법은 없었을 것이다. 지금은 오히려 그 이전이지만, 수안에겐 27년이 지나도록 갚지 못한 돈이라고 생각됐다.

“이 녀석은 어떻게 처분할까요.”

홍정욱 입에서 처분에 관한 말이 나오는 중에도 장준필은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눈앞의 수안이 자신을 노려보며 눈을 돌리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이라도 잡아먹힐 것 같았다.

“너….”

으르렁거리는 듯한 수안의 목소리에 장준필은 잔뜩 겁에 질렸다.

“예, 옙!”

“조직 들어가기 전엔 뭐 했어?”

“보험사기 몇 건하다가…. 나이트 기도 좀 보고…. 요즘 형님 밑에서 일수도 좀 돕고…. 이것저것 했습니다.”

“…….”

수안은 조금 더 장준필을 노려보다가 인터폰을 들었다.

-예. 회장님.

“한 개 들고 와. 아니, 두 개 가져와.”

수안은 대답도 듣지 않고 수화기를 내려놨고, 비서는 잠깐 사이에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여기 있습니다. 회장님.”

수안은 작은 쇼핑백을 받아 옆에 내려놨다.

“앞으로 범죄에서 손 떼고 살 수 있겠어?”

“제가 배운 기술이 없어서….”

“너 지금 국정원 직원을 옆에 두고 앞으로 계속 범죄를 저지르겠다고 말하고 있어. 안 잡힐 자신 있냐?”

“……!!”

경찰이라고 생각했지, 국정원 직원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저, 절대로 착하게 살겠습니다.”

“앞으로 지켜볼 거야. 물론 내가 아니라 국가에서 말이야.”

홍정욱의 무심한 눈이 장준필을 향하고 있었다.

“힉!”

수안은 곁에 있던 작은 쇼핑백을 장준필에게 안겨 줬다.

“가지고 가. 심부름 값이야.”

“가, 감사합니다.”

“다음에 네가 다시 범죄에 손을 대면 그땐 경고 없이 그대로 끝이야. 그 돈으로 뭐든 시작해 봐.”

수안의 말에 쇼핑백 안을 들여다본 장준필은 입만 벌리고 있었다.

“…….”

‘이, 이천만 원!’

“정말 감사합니다!! 회장님!! 이 장준필! 앞으로 착하게 살겠습니다!!”

이자까지 넉넉하게 쳐서 빌렸던 이백만 원을 이천만 원으로 갚았다. 2020년 당시의 물가 상승까지 생각하면 지금의 이천만 원은 2억이 넘을 것이다.

“정욱 씨. 이 사람 내보내고 앞으로 잘 감시하세요.”

“예. 회장님.”

진짜 감시하라는 말이 아니었고, 홍정욱도 수안이 일부러 하는 말임을 알 수 있었다.

“야. 이제 나가.”

“예, 예.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장님! 진짜로 착하게 살겠습니다!”

홍정욱은 다른 보안직원에게 장준필을 인계해서 밖으로 내보냈고 다시 수안과 둘이 남았다.

“…일본에서 작업 시작하겠습니다.”

“어디까지 생각합니까.”

“여기 적힌 대로라면 일본 야마구찌파에 빌붙어 활동하는 하위 야쿠자가 연루되어 있습니다. 이들을 통해 최종 의뢰자를 확인하는 단계까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도망친 국내 청부 업자 조직원들도 찾아내야죠.”

“그 과정에서 우리 요원들이 다칠 가능성은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국정원엔 UDT 출신의 요원들이 즐비했다. 어지간한 조폭이라도 감히 비빌 수 없다.

“좋습니다. 진행합시다. 최종 의뢰자가 확인되면 나머지는 그때 생각합시다. 놈들이 더럽게 나온다고 우리까지 더럽게 나갈 수는 없으니까요.”

“…예. 회장님.”

홍정욱에겐 더럽게 나갈 수 없다고 했지만, 속으론 다른 생각도 있었다.

‘짖는 개는 무섭지 않은 법이야.’

수안의 신경을 건드리는 두 금융사의 처분을 곧 결정할 생각이다.

‘조용히 다가가서 단숨에 목을 물어뜯는다.’

* * *

위협이 가해지는 와중에도 할 일은 해야 했다.

조만간 기화 차에서 K-5가 출시되기 때문이다.

“광고 나왔습니다.”

“봅시다.”

수안은 기화 차 대회의실에서 임원들과 함께 K-5 광고를 시청했다.

-기화 자동차 케이 파이브.

성우의 말과 함께 검은 화면에 미세한 라인이 그려지기 시작하며 실루엣이 드러난다.

점차 드러난 자동차의 외형은 지금껏 한국에서 보지 못한 진보의 정점이라 할 수 있었다.

날렵한 차의 곡선과 날카로운 헤드라이트, 깔끔하게 떨어진 후미 디자인까지 완벽하다.

광고를 보는 임원들의 눈도 몽롱하게 변해 있었다.

수안이 참고한 디자인은 물론 기존 K5 디자인이다. 1세대와 2세대의 강점만 빼서 접목했다.

1998년에 존재할 수도 없는 미래지향적 디자인.

사람들이 자동차의 아름다운 디자인에 빠져들어도 이상하지 않다.

검은 도시를 배경으로 달리는 차량의 붉은 미등이 아름다운 직선을 그리고 있었다.

성능이고 뭐고 설명할 필요 없었다. 오로지 감성으로 승부하는 광고였다.

주행 중에 은은하게 빛나는 내부의 조명은 탑승자의 손가락 끝으로 조절 가능했다.

주행을 끝낸 차에서 내리는 모델은 바로 수안 본인이다.

광고 속 수안은 차에서 내려 차의 보닛을 손끝으로 스치며 지나갔다.

마지막 방점은 수안의 손에 들린 스마트키에 있었다. 스마트키를 들어 올린 수안이 멀리 떨어져 버튼을 누르자 차가 반응했다.

-삐빅.

차는 불빛을 발하며 잠겼고, 차량의 사이드미러가 다소곳이 접혔다.

-1998년 11월. 오랜 기다림의 끝.

광고가 끝나자 수안이 손뼉을 쳤고 회의실에 자리한 임원들이 동참했다.

짝짝짝짝.

“광고 집행하세요. 월 1 만대 목표로 생산을 조율하면 됩니다.”

“예! 사장님.”

월 1 만대라는 엄청난 목표설정에도 아무도 토를 달지 않는다. 가능하다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도한 주문으로 차량 배송이 늦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오케이. 홍보에 활용하세요.”

“예. 사장님.”

* * *

K-5 광고가 TV에 송출되기 시작했다. 네이보와 다움을 포함한 사이트에도 광고가 집행되고 있었고 라디오에서도 K-5 광고를 들을 수 있다. 신문에도 K-5 제원과 함께 광고가 나가고 있으니 모든 매체에 광고를 집행하는 셈이다.

“나왔다!”

“우아….”

“직접 보러 가자!”

업무 시간 중이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8월에 출시한 대현의 차를 애써 기억에서 밀어내고 지금까지 기다려온 기화의 새로운 차량이다. 기화 자동차 대리점에 분명 실제 모델이 전시되어 있을 것이다.

“김 부장님은 벌써 가셨어. 우리도 가자.”

“달려!”

둘은 근처 기화 자동차 대리점으로 달려갔지만, 대리점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었다.

“뭐야? 어디 불났어?”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차는 보이지도 않는다. 야.”

대리점 안에도 K-5 실물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로 가득하다. 통유리를 통해서 보려 해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김 부장은 빠르게 회사에서 나와 대리점 내부에 진입해 있었다.

“후아.”

깔끔하고 미래지향적인 디자인이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다. 못생긴 대현의 소나타와 비교도 민망할 수준으로 아름답다. 외형은 날렵하면서도 내부는 충분한 공간을 제공하고 있었다.

“강운 그룹 강 회장이 자신만만한 이유가 있었어.”

앞뒤 양쪽 차 문을 모두 열어 둔 K-5 전시 차량에 탑승한 딜러는 다른 직원을 향해 손짓했다.

조명이 꺼지고 약간 어두워진 전시실.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시동 버튼을 누르자 차량 내부 가변형 무드 조명이 은은하게 밝혀졌다. 고급스러운 가죽시트와 함께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한다.

““오오오~~~””

딜러는 사람들의 반응을 들으며 계속 다른 기능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전면 창에 비추는 네비에 사람들이 눈을 의심했고, 스마트 리모컨으로 열리는 트렁크와 잠금장치도 놀랍다.

딜러는 설명을 이어 가다가 대리점 가득한 손님들의 반발에 부딪혔다.

“대체 주문은 언제 받아 줄 겁니까? 구경은 알아서 할 테니까 설명 그만하고 주문이나 받아요.”

“아….”

K-5는 따로 설명이 필요 없는 차였다. 대현의 동급 모델보다 200만 원이 비쌌지만, 가격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옵션 대부분이 기본 옵션에 들어가 있었기에 실제 대현의 모델과 가격을 비교하면 오히려 저렴하다고 할 수 있었다.

주문 계약이 밀려들었고 전국의 기화 자동차 대리점은 눈코 뜰 새도 없이 바빠졌다. IMF로 얼어붙은 소비 심리가 K-5로 인해 녹고 있었다.

기화 자동차 공장도 여파를 맞았다. 기화 자동차 주요 거점 공장에서 K-5 생산이 가능하도록 조치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맞출 수 없는 주문 수량이다.

“…일주일 만에 3만?”

“예. 지금 고객이 주문해도 4개월은 있어야 인수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매일 계약이 새로 들어오는 상황이라 앞으로가 큰일입니다.”

국내 주문을 맞출 수 있는데도 문제가 있는 이유는 판매처가 국내로 끝이 아니기 때문.

“이 상태로 가면 향후 수출이 불가능합니다.”

주문 폭증을 예상하고 생산 대수를 늘린 상황에서도 해외 판매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또한 국내 소비자의 신뢰에도 타격이 있다. 앞으로 추가로 들어올 주문을 생각하면 기약 없이 인수 기간이 늘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야심 차게 해외 진출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지금 상태로는 일이 틀어지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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