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대비
수안은 이현창과 전화를 끝내고 최장호와 배영성을 불렀다.
작은 의심이라도 무시할 수안이 아니다.
아내와 아들, 형제를 비롯해 모든 가족의 경호 상황을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다.
국내에선 그들의 힘이 덜 미치겠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저는 각 계열사 경호 취약점을 파악하겠습니다.”
“최 실장이 눈으로 확인한 것만 믿어. 그리고 최근 들어온 신입 직원 신상을 재검토하고 앞으로 새로운 직원을 선발할 때도 각별하게 조심해야 해.”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클락슨의 경호 업체도 뚫렸으니 기업의 보안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수안은 최장호를 닦달하는 수밖에 없었다.
“예. 회장님.”
“저는 최학주 실장님에게 내용을 전달하겠습니다. 회장님 경호 수준도 올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아버지는 나중에 큰일을 하실 분이야. 각별하게 챙겨야지.”
마음이 급해진 둘을 내보내고 수안은 어둑해진 창밖에 시선을 뒀다.
‘괜히 골드만삭스와 모건 스탠리를 존속시켰어. 프랭크 골드만, 잭 피에타.’
마음만 먹었으면 월스트리트의 거대 금융사를 망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일반 미국 시민이 받을 고통을 생각해 존속시킨 일이 이렇게 돌아오고 있었다.
수안은 다시 전화를 들었다. 이번엔 국제 전화였다.
“이 사장.”
-예. 회장님.
“이 사장은 BE 인베스트먼트와 계열사들 보안 상황 재점검하고 추가로 보안업체 계약해. 가족들 경호 인원도 두 배 이상 늘려.”
-…예. 지시대로 하겠습니다.
이방효도 마커스의 사망 소식을 확인한 참이다. 분풀이가 BE로 향할 것이라는 추측은 자신도 하고 있었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는 말이 있어.”
-……!
“골드만삭스 채권을 외부에 팔아치워. 모건 스탠리 채권도 마찬가지야.”
거대한 규모의 채권을 그대로 갖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관련 채권의 위험을 외부로 돌려 버리면 둘을 망하게 만들어도 BE 인베스트먼트에는 전혀 영향이 없다. 기일이 도래하지 않아 현재 가치만큼 할인되겠지만, 이조차도 BE에는 큰 영향이 없다. 어차피 눈먼 돈이다.
-저희가 중계 판매한 보험을 지급한다는 명목이 있으니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그리고 골드만삭스와 모건 스탠리의 투자 방향을 파악해. 인수할 수 있는 금융사가 있으면 인수해서 덩치도 키워. 최종적으론….”
이방효는 뒷말을 듣지 않아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었다.
-두 회사를 정리하실 생각입니까?
“아무래도 괜히 살려 줬다 싶어. 흡수를 가정하고 움직여.”
이방효는 긴장감에 크게 숨을 내쉬었다.
-휴우.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실탄은 충분히 확보했잖아.”
-그렇습니다. 지금 BE의 자금이면 못 할 일이 없지요.
일부만 받았음에도 1,000억 달러 이상의 실탄이 마련되었다. 채권을 할인하면 더 많은 자금을 마련할 수 있다. 기존 BE 인베스트먼트의 자금을 건드리지 않고 채운 새로운 실탄이다. 여기에 공매도로 인한 추가 자금까지 더하면 뭘 못하겠는가.
“공격 시점은 앞으로 2년 후인 2000년. 녀석들이 매집한 주식을 공매도로 깔아뭉갤 거야.”
-그동안은 저희도 경쟁하는 척하겠습니다.
“내가 이 사장에게 바라는 일이 바로 그거야. 서로 경쟁하듯이 바짝 날을 세우고 마지막 시점에 빠져나와서 카운터 펀치를 날려야 해.”
폭등 장에서 주식을 쓸어 담다 보면 어느 순간 모든 자금이 말랐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지만 증시를 우리 자금만으로 움직이긴 무리입니다. 소로스와 석유 자본에도 도움을 요청하겠습니다.
“증시에 거품이 붙고 있어. 앞으로 2년간 키운 거품이 2000년에 가라앉을 거야. IT를 주시해. 우린 이득을 보고 빠지고 공매도에 레버리지를 더해 추가 수익을 노린다. 골드만삭스와 모건 스탠리는 겸사겸사 정리할 뿐이야.”
-…새로운 기회가 또 온다는 말씀이군요.
수안의 미래 예측은 기이할 정도로 완벽하게 들어맞아 왔다.
그동안 숱하게 겪어 온 이방효는 이제 일말의 의심도 하지 않는다.
“그때 애플 주식도 털어내고 다시 담기로 하지.”
-예. 회장님.
“몸조심해. 이 사장. 녀석들 행보가 심상치 않아서 이 사장이 제일 걱정이야.”
-새로운 사설 경호 업체를 찾아보겠습니다.
“기존 사설 경호 업체를 믿을 수 없다고 했지만…. 클락슨에게 따로 연락해서 파악해 봐. 휘하 경호원들 몇을 회유했을지 몰라도 클락슨만큼은 불가능했을 거야.”
-이번 경호 실패로 상당한 충격을 받았을 겁니다. 아예 보안 회사를 설립하고 흡수하는 방향으로 진행해 보겠습니다. 매번 나가는 보안 비용도 무시하기 어렵습니다.
“그게 좋겠어. 그 전에 프락치는 잡아야겠지.”
-물론입니다.
수안과 통화가 끝나고 이방효는 전화를 들었다. 며칠 전 일을 끝낸 사람을 다시 불러야 했다.
* * *
클락슨은 어두운 바에서 독한 술을 들이붓고 있었다.
그의 곁에 한 남자가 다가와 앉았다.
“여기 버드와이저 둘. 예쁜 잔에 담아 줘.”
클락슨은 눈길도 돌리지 않고 술만 마시고 있었다.
“술로 문제를 해결하려면 고작 그거 가지곤 어림도 없지.”
“…….”
남자의 말에 클락슨의 고개가 살짝 돌아간다.
“술은 해결책이 되지 못해. 현실을 외면하고 싶은 나약한 자들에게나 어울리는 방법이지. 당신은 그런 나약한 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남자는 바텐더가 내려놓은 두 잔의 맥주 중 한 잔을 클락슨이 앉은 방향으로 빠르게 밀었다.
“이거만 먹고 일어나. 당신은 나하고 할 일이 있어.”
주르륵. 턱.
미끄러지던 잔은 클락슨의 손에 잡혔다. 술이 넘쳐 클락슨의 손을 적시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남자는 손에 들린 잔을 치켜들며 말했다.
“Cheers.”
“…누가 보냈나.”
“그리스도의 첫 번째 순교자가 당신을 구원하겠다는군.”
“……!”
클락슨은 잠시간 고민으로 눈앞의 남자를 보낸 사람을 유추할 수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첫 번째 순교자는 스테파노. 미국에선 스테판이라는 이름으로 주로 불리지만, 자신이 아는 그 인물은 스테판이 아니라 스티븐이라고 발음하도록 강요한다.
‘스티븐 강.’
누가 보냈는지는 파악했지만, 여전히 의문이 남았다.
“어째서 내가 용의 선상에서 벗어났지?”
외부와 협력했다는 의심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을 거라 여겼다. 자신이 운영하는 사설 경호 업체의 직원들이 일을 이렇게 만들었고, 그 직원들은 자신이 믿는 직원들이었다. 계약을 해지하고는 어째서 자신을 다시 찾는단 말인가.
“당신은 용의 선상에 오른 적도 없어. 보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긴 모양이야.”
“…당신 말대로 이것만 마시고 일어나지.”
그렇게 말한 클락슨은 휴대 전화를 꺼냈다. 다른 직원들과 함께 출발하려 한 것이다.
“당신 혼자만 나와 함께 갈 수 있어. 다른 사람에겐 연락하지 않는 편이 좋을 거야.”
클락슨은 자신 이외의 모든 인물이 의심받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버드와이저가 아니었다면 어림도 없었어.”
클락슨은 결국 휴대 전화를 다시 집어넣었다. 그 자신도 경호원 중 누가 문제를 일으켰는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큭. 나와 취향이 비슷해서 다행이군.”
클락슨은 남자가 말하는 사이 맥주를 단숨에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제를 해결할 생각에 마음이 급했다.
“지금 가지.”
“이봐. 난 방금 자리에 앉았단 말이야.”
“…내가 기다려 줘야 하나?”
“젠장.”
남자도 클락슨이 그랬던 것처럼 잔을 단번에 털어 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트림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는 생리 현상이다.
“꺼억. 이건 자네 탓이야.”
클락슨이 남자의 차에 오르며 물었다.
“어디로 가면 되나.”
“내 사무실. 우선 자네 경호 업체의 스파이를 먼저 정리해야 해.”
“…나의 전우들을 의심하긴 쉽지 않아.”
“술집에서 애도는 이미 끝내지 않았나? 전우의 명예를 더럽힌 놈을 가만두려고?”
클락슨은 운전 중인 남자의 옆얼굴을 보며 직업을 추측할 수 있었다. 자신의 속마음까지 꿰뚫어 봤기 때문이다.
“당신 사립 탐정이로군.”
“아서 마틴이네. 스티븐 회장님의 두 번째 의뢰를 수행하고 있지. 첫 번째는 이미 자네의 경호 업체가 말아먹었어. 이번엔 부탁 좀 하지.”
자신이 경호에 실패해서 아서의 의뢰도 실패했다는 말이다.
“술은 내가 샀어야 했군.”
“신경 쓰지 마. 의뢰는 실패했지만, 의뢰 대금은 다 받았으니까.”
“스티븐 회장은 그런 사람이지.”
자신의 경호 업체가 이번 일을 일으켰어도 파고들어 문제 삼지 않았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거액의 위약금을 물어야 했다.
* * *
수안은 이현창이 보낸 국정원 직원들을 마주하고 있었다. 인원은 총 다섯이다.
“안녕하십니까. 부회장님.”
“홍정욱 씨는 그래도 아는 얼굴이라 반갑습니다.”
단 한 번 만났어도 그래도 아는 얼굴이긴 하다.
“함께 온 직원들과 함께 부회장님 경호에 만전을 기하겠습니다.”
“오케이. 그리고… 제가 누구랑 얘기하면 되죠?”
수안은 이현창이 보낸 심복이 누구인지를 묻고 있었다.
홍정욱이 뒤로 물러서고 다른 인물이 앞으로 나섰다.
“안녕하십니까. 장세진입니다. 앞으로 저를 통하시면 됩니다.”
“이쪽도 얼굴이 낯이 익네요?”
“부회장님이 간혹 원장님과 만나실 때 저도 곁에 있었습니다.”
이현창이 국회의원으로 일할 때부터 함께했던 보좌관 중의 하나였다. 배영성 사장도 아는 얼굴인 모양이다.
“기억납니다. 저랑 몇 번 연락하셨죠?”
“예. 배 사장님.”
“그럼 장세진 씨만 남으시고 나머지 분들은 최장호 실장과 앞으로의 경호 업무를 협의하시기 바랍니다.”
“예. 부회장님.”
홍정욱을 비롯한 국정원 직원들이 최장호를 따라 집무실을 나섰고 수안과 배영성, 장세진이 자리에 앉았다.
“원장님이 이번 일을 엄중하게 보고 계십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까지 이렇다 할 위협은 없었지만, 안심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국정원에선 골드만삭스, 모건 스탠리 국내 지점에 관련해서 입국한 외국인들의 동태를 추적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최근 해외에서 입국한 인물들을 파악하는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부회장님의 안전을 위해 전방위로 국정원의 힘이 투입되고 있습니다.”
“…….”
이현창이 다른 건 몰라도 맡은 일은 확실한 사람이다.
“방금 나간 홍정욱 씨는 강운 그룹을 비롯한 관련 회사들의 보안 상황을 체크하고 미비한 부분을 보완하기로 했습니다. 공격은 99번 실패하고 단 한 번만 성공해도 성공입니다. 방어는 그와 반대이기 때문에 엄밀한 방비 태세가 필요합니다.”
“이해합니다. 장세진 씨 얘길 들으니 그나마 조금 마음이 놓이네요.”
진짜 전문가들의 능력은 달랐다.
장세진의 말을 들으니 국정원에서 파악한 인물 중 일부는 사전에 움직임이 파악되어 구금되기도 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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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역을 동반한 국정원 요원이 경찰을 대신해 외국인을 심문했다.
“당신은 불법 총기 소지 혐의로 긴급 체포되었습니다. 입수한 총기로 뭘 하려고 했죠?”
“…….”
묵묵부답. 외국인은 자신의 변호사를 대동하고 아무런 말이 없었다.
대신 변호사가 요원의 말에 답했다.
“절차에 따라 처리해 주십시오. 미국 대사관에 이분을 인계해 주길 바랍니다. 미국인 드레이크 씨는 범죄를 저지른 것이 아닙니다. 국내법을 인지하지 못한 실수에 불과합니다.”
“국내법에 따르면….”
“별일 아닌 총기 소지로 미 대사관까지 나서야 합니까? 미국 정부는 자국민이 불합리한 상황에 처하는 것을 두고 보지 않습니다. 이번 일이 외교 문제로 비화할 수도 있음을 기억해 주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