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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 VS 세종대왕 (156/304)

벤자민 VS 세종대왕

‘놈이 그랬을 리 없어. 자살을 한 것이 아니라 당한 거야!’

“…….”

“BE 인베스트먼트의 스티븐 회장님은 이번 일을 엄중하게 보고 있습니다. 금융업에 종사하면서 손해도 볼 수 있고 이익도 볼 수 있는데, 일이 잘못되었다고 사람을 상하게 하는 것은 기업인으로서의 자질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근본이 잘못된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서. 당신이 날 살려 줄 수 있습니까?”

“당신을 살리기 위해 제가 여기 왔습니다. 지금 BE에서 보낸 사설 경호 업체가 당신을 지키고 있습니다.”

두려운 듯이 창문으로 가서 주변을 두리번거린 마커스는 구석구석에 거대한 덩치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휴우.”

“안심할 때라고 생각합니까? 그들은 미국의 거대한 금융사를 손에 쥐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힘은 때로 그 이상의 힘을 발휘하죠.”

“……!”

“당신도 이미 알고 있지 않습니까. 당신이 속한 모건 스탠리가 어디까지 힘을 발휘할 수 있을지 말입니다. 특히 정부에 가진 힘이 대단한 이들입니다.”

모건 스탠리와 골드만삭스의 힘이 어디까지 닿는지 잘 알고 있다. 그들은 막후에서 미국을 움직이는 거대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자신도 불과 며칠 전까지 그들의 힘을 등에 업고 위세를 부렸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재판은 최대한 뒤로 미루길 권고합니다. 재판이 길어져야 그들도 조심할 겁니다.”

“내 변호사에게 부탁하겠습니다.”

“그들의 약점이 될 만한 자료를 가져오세요. 그래야 BE 인베스트먼트가 당신을 살해 위협에서 막을 수 있어요.”

“아!”

“당신이 모른다면 아는 사람이라도 알려 줘야 합니다. 새뮤얼은 이미 죽고 없으니 그가 알고 있던 일들이라도 풀어 놓으십시오.”

“아, 알겠습니다.”

* * *

수안은 요즘 기분이 매우 언짢다.

큰 이익을 얻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사람 목숨을 가볍게 생각하는 미국의 권력자 때문이었다.

-스티브. 조사해 봤지만, 그가 타살이라는 증거는 전혀 없었네. 너무 과한 추측이 아닐까 싶어.

“로버트 장관님. 새뮤얼은 장관님과 같은 골드만삭스 직원이었습니다. 골드만삭스에서 행한 일이 아니라고 확신하십니까? 장관님이 아는 프랭크 회장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미국의 경찰이 새뮤얼의 죽음이 타살이라는 증거를 찾지 못해 로버트 장관에까지 연락한 것이다.

로버트 장관도 골드만삭스 출신이라 프랭크 회장의 성품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프랭크 회장은 상당히 융통성이 있는 사람이야. 하지만 회사에 손해를 일으켰다고 사람을 죽일 정도는 아닐세. 그런 식이라면 골드만삭스에서 누가 살아남았겠나. 나도 죽었어야지.

“우리가 조사한 바로는 새뮤얼의 차명 자산도 모두 골드만삭스에서 회수했습니다. 새뮤얼의 유언은 적법하게 집행되기도 전인데 말이죠.”

-차명 자산이라는 것도 참 우습군. 그 자산이 새뮤얼의 것이라는 증거도 없었잖나.

“장관님.”

-스티븐. BE 인베스트먼트도 이번에 상당히 곤혹스럽다고 들었네. 이번 일에 더 끼어들면 골치만 아플 거야. 자네 같으면 고작 그 돈을 얻자고 뒤에서 위험을 감수하겠나? 괜한 의심으로 고생하지 말고 지켜보게.

“…장관님의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 고작 그 돈을 얻자고 사람을 해할 필요는 없죠. 생각해 보니 너무 적은 돈이네요. 제가 영화를 너무 많이 본 모양입니다.”

이해한 것이 아니다. 로버트의 말투에서 알 수 없는 거리감이 느껴졌기 때문에 더 묻지 않기로 한 것이다.

‘로버트 장관은 뭔가를 알고 있는 거야.’

미국의 재무부 장관까지 손을 쓸 수 있는 상대라면 정말로 위험하다.

-그보다 이번 롱텀 캐피털 구제 금융에 상당한 자금을 투여했더군. 36억 달러를 지원하는데 BE 혼자서 30억 달러를 지출하다니 말이야. 연준에서 BE의 대응을 흡족하게 여기고 있어.

수안은 연준(the fed)의 소집 명령 이후 이방효와 논의해서 지원 규모를 키우기로 했다. 너무 많은 수익이 생겼기 때문이고 너무 큰 피해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BE를 제외한 미국 각 은행에서 지원한 자금이 고작 6억 달러. 나머지를 BE가 채울 수밖에 없었다.

“개인들이 너무 큰 손해를 입었습니다. 새뮤얼의 일까지 자꾸 떠오르더군요. 롱텀 캐피털 매니지먼트(LTCM)의 파산이 뒤로 미뤄진다면 개인들도 일부 자금을 회수할 수 있을 겁니다. 자살은 막아야죠.”

-미국의 어느 금융사보다 낫군. 이러니 BE 인베스트먼트가 미국에 자리를 잡을 수밖에.

“앞으로도 위기에 가장 먼저 나서는 BE 인베스트먼트가 되겠습니다. 장관님.”

-잘 부탁하네. 스티븐. 자주 좀 보세.

“…물론입니다. 내년 연말엔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자주 못 가도 벤자민을 자주 보내서 인사하겠습니다.”

100달러에 그려진 인물 벤자민 프랭클린을 말함이다.

* * *

수안은 며칠 뒤에 마커스의 사고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모건 스탠리의 전 CEO 마커스가 교통사고로 사망했습니다.

“……!!”

-타살 혐의점은 없습니다. 마커스는 술에 취해 운전대를 잡았고, 그 모습이 CCTV에도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아서가 확인하기엔 어땠죠?”

아서 마틴은 BE 인베스트먼트에서 따로 고용한 사설탐정이다. 새뮤얼의 죽음에 대한 의문과 마커스의 보호를 의뢰하고 이후 간간이 보고를 이어오고 있었다.

-제가 봤을 때는…. 분명 타살입니다. 술을 마시긴 했지만, 당시 함께했던 사람들 말을 들으니 정신을 잃을 정도로 마셨던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하지만 마커스는 뭔가에 쫓기듯이 차에 올랐습니다.

“그 시간에 우리가 보낸 사설 경호원들은 뭘 하고 있었기에….”

수안은 이해할 수 없었다. 클락슨의 사설 경호 업체는 그렇게 허술하게 경호하지 않는다.

-그 부분도 이상합니다. 항상 마커스를 보호하던 사설 경호 업체 직원들의 경호가 느슨해진 그 틈에 이런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클락슨 대표가 자리를 비운 시각입니다.

“…미국은 안전한 나라가 아니군.”

-회장님이 믿고 있던 사설 경호 업체도 믿음직하진 않은 것 같습니다. 그들이 제대로 경호했다면 이번과 같은 일은 없었습니다.

“…정보가 그들에게서 새어 나갔다고 생각합니까?”

-증거로만 봤을 때는 10% 미만입니다. 하지만 정황으로 봤을 땐 100%라고 해야겠죠.

“…….”

-그리고 마커스가 죽었습니다. 계속 추적해야 합니까?

“의뢰는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당신까지 위험할까 봐 걱정이군요.”

-제가 하는 일이니까요.

“BE 인베스트먼트에서 보수를 지급할 겁니다. 수고 많았습니다. 몸조심하십시오.”

-언제든 다시 불러 주십시오. 지금까지 얻은 자료는 일전에 말씀드린 은행 금고에 넣어놨습니다.

“알겠습니다.”

* * *

수안은 거대한 권력자와 마주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고민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집에 가서 아내를 보고 아내의 불러오는 배를 쓰다듬으면서도 걱정을 떨쳐 낼 수 없었다. 아들이 활짝 웃으며 반기는 모습에 오히려 걱정의 깊이가 더해진다.

‘미국 정부조차 겁내지 않는 자들이야.’

믿고 있던 클락슨의 경호 업체에도 그들의 손길이 닿아 있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그들의 힘이 미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다음 날 수안은 강운 그룹에서 부회장의 업무를 보다가 저녁 무렵 펜타그램으로 향했다.

서랍에서 한참 쓰지 않던 전화를 다시 들었다.

-어이쿠. 이게 누구야?

“선배님. 격조했습니다.”

-하하하. 이거 내일 해가 서쪽에서 뜨는 거 아닌지 몰라.

“그간 별고 없으셨습니까? 벌써 내일이 추석 연휴네요. 즐거운 한가위 되십시오.”

-이런 때나 돼야 연락할 텐가?

“죄송합니다. 선배님.”

-후배 탓이 아니라 내가 하는 일이 문제지. 괜한 소리니까 신경 쓰지 마.

“저…. 한 가지 부탁이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부탁? 후배가 나한테 부탁을 해? 정말이야?

“일전에 제가 돌려보낸 직원을 다시 보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뭐?

“홍정욱 씨 말입니다. 코너링이 좋다고 했는데 그 기막힌 코너링도 못 보고 그냥 보냈지 뭡니까.”

외부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현창이 장악한 국정원이라면 믿을 수 있었다.

-후배. 무슨 일이야? 위험한 일에 연루됐나?

“예.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이현창은 수안에게 하나씩 묻기 시작했다.

-국내?

“미국입니다. BE 인베스트먼트와 관련한 일입니다.”

-미국이라니! 미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홍정욱 씨를 포함해서 몇 명 더 보내 주셔야 합니다. 신변 보호가 필요합니다.”

-자세하게 설명해 봐. 그래야 인원을 정하지!

“…일의 시작은 월가의 금융사와 보험을 거래한 일부터 시작입니다. BE는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번에 엄청난 손실을 보고 연준(the fed)의 지원을 받는 롱텀 캐피털 매니지먼트(LTCM)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BE 인베스트먼트는….”

수안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이현창은 벌어지는 입을 다물기 어려웠다.

-그런 보험을 샀으면서 다른 곳에 다 팔았단 말이야?

“그땐 상당히 위험해 보였으니까요.”

-으아. 아깝다. 그대로 뒀으면 대체 돈이 얼마야?

수안은 이현창에게 이번에 벌어들인 돈의 실체를 알릴 수 없었다. 서류 작업은 완벽했기에 대외적으로도 BE 인베스트먼트에 이익이 생겼다는 사실을 숨길 수 있었다.

“문제는 손해를 본 골드만삭스와 모건 스탠리입니다. 이미 자사의 최고 경영자 두 사람을 죽여 화풀이했습니다. 이번에 탐정을 통해 알아보니 제가 미국에서 사용하던 사설 경호 업체에도 손을 써 둔 것 같고요.”

-자기 회사 직원에도 화풀이를 한 놈이니 당연히 후배에게도 손을 뻗을 수 있겠어. 그런 놈들은 누가 돈을 벌었는지는 관여하지 않아. 오직 분풀이가 중요한 놈들이지.

수안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새뮤얼이 죽었을 때만 해도 설마 했지만, 마커스까지 일이 이렇게 되자 위기감이 엄습한 것이다.

‘오판한 직원들을 처리한다고 해서 돈이 돌아오진 않아.’

결국 두 금융사의 회장이 분풀이하고 있다는 뜻이고, 그 끝에는 수안이 있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국내에선 선배님밖에 믿을 사람이 없습니다.”

-암. 난 믿어도 되지!

이현창을 국정원장에 추천한 일이 이렇게 돌아오고 있었다.

“미국 정부와 척질 수도 있습니다. 로버트 재무부 장관과도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직원들에게 전달해 주게.

“예. 선배님.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우린 고통과 즐거움을 함께하는 사이야.

정치에 입문하면서부터 도움을 받았고, 북한 잠수함 침투에서도 함께했다. 이후 자신의 모든 정치적 행보는 수안의 조언으로 시작되었다. 이제야 제대로 된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 이현창은 오히려 뿌듯한 마음이다.

“선배님이 그리 말씀하시니 감사 인사는 앞으로 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직원 중 한 명은 선배님이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보내 주십시오. 그 직원을 통해 이런저런 일들을 전달하겠습니다.”

-요즘 후배 조언을 듣지 못해 답답했는데 잘됐군.

이쪽에는 세종대왕님을 준비해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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