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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인 가치 (154/304)

상대적인 가치

“형이 돈이 얼마나 많냐. 내가 이 돈 다 죽을 때 짊어지고 갈 수 있을 것 같아? 어차피 사회에 남겨두고 가야 하니까 미리미리 좀 쓰자는 거야. 그리고 수진이가 돈이 어딨어? 월급이야 얼마 안 될 거고, 그간 내가 증권 계좌로 모아 준 돈은 지분 인수하면서 다 썼잖아. 박상준 그 사람도 아직 월급쟁이로 살잖아.”

“그래도 용돈은 너무하잖아. 누나 나이도 있고 회사에서 직급도 있는데….”

수안은 요즘 연애에 빠진 수진을 위해 약간의 용돈을 투척했다. 수용은 이건 아니다 싶어 형을 찾은 것이다. 용돈 받았다고 얼마나 자랑을 하던지 욱하고 올라오는 말을 필사적으로 참아냈다.

“수진이는 좋아하던데?”

오랜만에 받는 용돈에 수진은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애교를 부렸다.

“그야 누나가 연애에 정신이 빠져서 그렇지. 아파트도 사겠다고 난리인데….”

아파트 얘기는 수용의 실수나 다름없었다.

“아파트? 수진이 나가서 살려고 해?”

아직 여기까지 듣지 못한 수안이다.

“…나한테 아파트 알아봐 달라고 하더라고.”

“그런 일은 나한테 말했어야지.”

“형은 말 안 해도 뻔하잖아.”

“뻔하긴 뭐가 뻔해?”

“형은 아파트가 아니라 저택을 사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

“…어떻게 알았어?”

수안의 생각을 딱 맞춰 버린 수용이다.

“진짜?”

아주 작은 의심이었는데, 형은 정말로 누이에게 집을 사 주려고 생각했단다.

“정말로 누나 집 사 주려고?”

“요즘 기업체들 나자빠지면서 빈집 많아졌어. 가격을 내려도 사는 사람이 없다더라. 게다가 아파트가 아니라서 거래가 더 힘든가 봐.”

“그야 사장들이 사업체 부도로 길거리에 내몰렸으니까….”

수용도 근래 수도권 부동산을 공부하며 파악한 바다. 사업이 망하면서 개인 자산을 보존하는 꼼수를 쓰기도 하지만, 대부분 회사의 사장은 회사 대출에 대표인 자신이 보증을 선다. 회사가 부도로 쓰러지면 사장 개인의 자산까지 모두 은행으로 넘어가 버리고, 은행으로 넘어간 자산은 다시 경매를 통해 시장에 등장했다. 유찰을 몇 번 맞고 나면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거래되기도 했다.

“그래도 가격이 상당해. 아파트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 가격이잖아.”

“서울에 집이 몇 푼이나 한다고 그래. 너 형이 돈 얼마나 많은지 몰라?”

“…많지.”

형에게 국내 집값은 일반인이 지나가다 봐도 허리를 숙이기 귀찮아 줍지 않는 10원짜리 동전과 같은 가치일 것이다.

“그것도 그냥 많냐? 내가 미국 대통령하고도 만나고 오고 한국 대통령하고도 편하게 지내고, 국정원장 이랑도 형 동생 하는데? 권력이면 권력, 돈이면 돈. 부족한 게 없어요. 내가 BE 인베스트먼트에서 이번에 얼마 입금했는지 말 안 했어? 가볍게 융통한 자금이 200억 달러야. 그런 내가 동생이 집 구하는데 집도 못 사줘?”

“그럼 진짜 누나 집 사 주려고?”

“네가 알아봐. 겸사겸사 수현이와 네 집도 한 방에 해결하자.”

수안은 아예 집을 세 채 알아보라는 말이다.

“개인 주택 살 돈이면 아파트가 몇 갠데….”

“예산은 인당 30억. 넌 네가 사고 싶은 아파트로 몇 개 사든지.”

인당 30억. 총 90억. 1998년 서울에서 3층짜리 개인 주택을 매입하기에 어렵지 않은 돈이다.

“형!”

“왜 부족해? 인당 50억씩 줄까?”

수안은 조만간 BE의 보험을 통한 개인적 투자로 1천억이 넘는 이익을 기대할 수 있었다.

“형! 미쳤어? 그 돈을 왜 우리에게 주냐고?”

수안은 저런 태도를 아버지에게 숱하게 겪어 봤다.

“수용아.”

“…….”

“재벌가도 재벌가 나름이다. 너희가 정신 차린 거 나도 다 알아.”

수안이 돈을 나눠 준다고 해서 언제까지고 빨대 꽂을 녀석은 없었다.

“형이 괜히 돈 벌겠냐? 쓰자고 벌었는데 동생들에게도 못 쓰게 하면 어떡하냐. 응? 게다가 내 돈은 나눠 써도 표시도 안 나.”

“형…. 그래도 그렇지….”

“아버지도 너희가 제대로 된 경영자가 되라고 압박하셨을 뿐이야. 없이 살라고 너희를 내몰지 않아. 그래서 내가 너희에게 해 주는 일들을 눈감고 계신 거고. 너희들이 나이 들면 나도 이런 재미가 있겠어? 그간 내가 너희 함부로 돈 못 쓰게 한 건 미리부터 경제 관념을 갖게 하려는 의도였지 죽을 때까지 아껴 살라는 말은 아니었거든?”

“…….”

“네가 알아보고 수진, 수현에게 얘기해 줘. 개인 주택 사고 남는 돈은 아파트로 채워서 넘기고, 그래도 자투리 몇억 남으면 너 가져라. 오케이?”

“하! 억이 무슨 자투리야?”

자투리든 뭐든 수용이 가질 일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농담으로 한 말이었다.

“큭. 너도 나만큼 벌어 봐 인마. 70억도 반올림해서 100억 만들고 그래.”

“푸흣.”

수용은 자신의 기준으로 형을 판단한 것부터가 잘못이라는 걸 깨달았다.

‘형은 형만의 기준이 있는 거야. 내 기준에서 형을 판단하는 게 아니었어.’

돈의 상대적 가치만 생각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형은 동생들에게 뭔가를 해 주는 것에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형은 나처럼 속 좁은 놈이 아니야….’

수용은 김현성 사장이나 배영성 사장이 왜 형을 따르는지 알 수 있었다.

주변을 챙기면서 행복을 느끼는 형이라면 자신이라도 신봉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네가 알아서 잘 찾아봐. 회사에서 일하면서 해도 어렵지 않지?”

“지금 맡아서 하는 일은 시간이 필요하니까 괜찮고. 주택이야 발품 팔면 좋은 주택을 찾겠지.”

“여유롭게 찾아봐. 이번 여름 지나면 너희 계좌에 30억씩 쏴줄 테니까.”

바쁘게 살다 보니 벌써 한여름이 다가와 있었다. 올여름엔 굉장한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다.

이 이벤트만 제대로 마무리하면 30억이 아니라 300억을 쏴 줘도 상관없다.

LA에서 타이타닉 성공을 축하하는 파티가 열리는 시점에 러시아는 공무원 감축을 발표하며 재정 긴축 계획을 발표한 바 있었다. 이후 잠시 잠잠하던 러시아는 6월 기준 금리 인상을 발표하고 7월 IMF와 세계 은행, 일본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합의하며 동남아시아와 같은 전철을 밟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후 러시아는 엄청난 발표로 전 세계 채권자에 공평한 패닉을 선사한다.

* * *

시간이 흐르고 흘러 1998년 8월 17일.

러시아는 국가채무에 대한 모라토리엄을 공식 선언했다.

“……!”

“What the….”

“Holy….”

러시아의 모라토리엄 선언에 가장 직격탄을 맞은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BE 인베스트먼트가 보험의 대상으로 삼은 헤지 펀드 롱텀 캐피털 매니지먼트(LTCM)다.

BE 인베스트먼트는 빠르게 움직여 지금까지 사들인 보험을 발효하기 시작했다. 보험의 지급 기한은 단 2주. 2주 안에 보험금을 지급하지 못하면 월스트리트의 거대 금융사도 파산이다.

효자 보험 상품은 거대 악성 채무로 변신했고, 호갱님은 무시무시한 채권자로 돌변했다.

“미스터 리! 기한 연장을 부탁합니다. 오늘 보험을 발효하면 난 끝장이오!”

-마커스. 나도 시간 없습니다. 더 할 얘기가 있거든 메일을 남겨 주시오. 당신 같은 사람이 한둘인 줄 아시오?

“자, 잠깐! 내 얘기 좀 들어 보고….”

-당신하고 할 말이 있을지 모르겠군. 차라리 모건 스탠리 잭 회장에게 내 연락처를 남기시오.

뚝.

본래 9억 달러를 팔았던 모건 스탠리의 마커스는 이후에도 금액을 늘려 결국 10억 달러를 채우고 말았다. 러시아의 모라토리엄 선언으로 롱텀 캐피털 매니지먼트(LTCM)는 최소 1조 달러 이상의 손실을 확정했기에 보험이 발효되고도 남는 상황이다.

“지급할 돈이 800억 달러….”

모건 스탠리에서 지급해야 할 보험금은 무려 800억 달러. 당장은 갚을 수 없는 돈이다.

이방효는 미국 재무부와 연방 준비 제도 이사회(FRB)가 움직이기 전에 빨리 보험을 발효하고 자금을 회수해야 했다. 그래야 나중에 생색을 낼 수 있었다.

골드만삭스에서도 보험 상품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팔아 준 보험은 7억 달러로 560억 달러의 보상금이 책정되어 있다. 나름 저렴한 수준이다.

“새뮤얼 대표. 말씀드린 것처럼 이미 해당 상품은 저희도 파생 상품으로 만들어 해외에 매각했습니다. 골드만삭스에서 이를 지급하지 않으면 거액의 소송에 시달릴 수도 있음을 기억하시오. 말이 좋아 소송이지 파산도 염두 해야겠군.”

-하, 하지만!

“2주 남았소. 골드만삭스 프랭크 회장에게 안부나 전해 주시오.”

딸깍.

전화를 끊은 이방효는 거물 중에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는 JP모건의 토마스에게 연락했다.

“보험에 관한 서류는 도착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2주 내로 돈을 준비해 주시오.”

-…지금은 그만한 돈이 없습니다. 리 대표.

“지급을 거절하겠다는 뜻입니까? 이것도 참신하지 않아요. 난 오늘 비슷한 소리만 듣고 있답니다.”

-당장은 힘들다는 뜻이오. JP모건은 중소 은행에(LTCM) 보험의 개설을 요청했고 BE와 같이 보험금을 회수하는 처지입니다. 이에 2주일 이상은 소요될 것으로 보입니다.

“호오.”

토마스는 일전에 수안의 경고를 듣고 고민했다. 그 결과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 롱텀 캐피털 매니지먼트(LTCM)를 대상으로 판매했던 자신의 보험과 같은 상품을 타 은행에 요청, 수급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도박은 절반의 성공을 달성했다.

-하지만 우리가 BE에 판매한 보험 금액 전부를 보상하기엔 부족합니다.

무려 12억 달러를 판매한 JP모건은 960억 달러를 지급해야 했다. 금액이 커 위험을 전부 회피할 수 없었기에 절반의 성공이다.

-외부 보험 상품 발효로 마련할 자금은 약 400억 달러입니다. 추가 100억 달러는 JP모건에서 자체적으로 수습 가능합니다. 나머지는 도저히 방법이 없습니다. 현실적인 대책 논의가 필요합니다.

이렇게 솔직하게 나온다면 이방효도 차갑게 돌아설 필요가 없었다.

‘토마스. 당신은 말이 통하는 사람이었어.’

-리 대표. BE 인베스트먼트에서 JP모건의 어려움을 이해해 주길 바랍니다.

토마스와 이방효는 보험 상품에 대한 줄다리기를 이어 갔고, 이방효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마지막 제안을 던진다.

“내가 졌다고 합시다. 좋소. 매년 갚아야 할 원금은 100억 달러. 연 이자율은 10%로 계산하겠소. 매월 이자를 납입하고 연말에 원금을 상환하시오. 500억 달러를 먼저 갚고 매년 상환하면 마지막 해에 60억 달러만 갚으면 되겠군.”

-……!!

다른 금융사도 비슷한 조건을 걸 예정이었다. 어차피 그들에겐 그만한 현금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절반만 보험금을 받아 내고 나머지는 차입과 분할 상환으로 처리하면 깔끔하다. 물론 이 과정에서 연방 준비 제도에 앓는 소리를 할 수 있는 손해까지 증명할 수 있다.

‘어차피 한 번에 받아 낼 방법이 없어. 망하게 만들어서 돈을 날리느니 대출로 바꿔서 오래도록 빼먹어야 해.’

-1년에 100억 달러는 무리입니다! 그리고 이자율도 너무 과합니다!

이런 얘기가 나올 줄 알았기 때문에 처음 100억 달러를 제시했다.

“2주 이내에 지급해야 하는 보험금을 5년으로 늘려줬는데도 문제라는 말입니까? 그럼 미국 재무부에 부탁해 보시오. 460억 달러 정도는 융통해 주지 않겠소?”

보이지 않는 수화기 너머에서 토마스가 부르르 떨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좋소. 10년으로 연장하고 매년 50억 달러를 갚으시오. 대신 기간이 늘었으니 이자율은 11%로 올리겠습니다.”

-리 대표!

“Yes or No. 이제 선택은 둘 중의 하나만 가능합니다. 난 지금까지 충분히 양보했소.”

-…….

“아직 2주나 시간이 있으니 고민해 보시오. 다른 금융사에도 조건을 전달해야겠소. 모든 금융사는 평등한 조건 아래에서 BE 인베스트먼트와 협상하게 될 겁니다. 당신들이 내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오.”

본래 보험 상품이라는 것이 금융사마다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97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희대의 경제학 박사들이 운영하는 롱텀의 보험 상품은 80배가 아니라 그보다 더한 배수가 가능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서로 정보를 공유하고 담합을 통해 80배라는 낮은(?) 배수를 강요했다. 이방효는 이를 꼬집고 있었다.

“아! 새뮤얼과 마커스는 조만간 경질된다는 말이 있더군요. 프랭크와 잭의 연락을 받았죠.”

두 회장은 아쉬운 소리를 해가며 거액의 보상금을 대출로 돌려야 했다.

-아!

“당신은 괜찮습니까?”

-난 아직 모르겠군요.

“당신이라도 자리를 보전하길 바랍니다. 굿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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