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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해도 참아 (153/304)

궁금해도 참아

수안이 기화 차에 매달려 K시리즈 출시를 위해 달리는 동안 발등에 불이 떨어진 사람도 있었다.

“젠장! 대체 뭘 준비하고 있었던 거야?”

정영수 회장은 그랜저를 고급화하며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강운모 회장의 기자 회견으로 모든 것이 틀어져 버렸다.

“K시리즈라니 대체 뭐지? 차에 무슨 짓을 했지?”

분명 수안은 자신의 패를 훤히 읽고 있었다. 그런데도 강운모 회장은 혁신을 입에 담고 소비자에게 기다려 달라는 강수를 두었다.

“뭘 준비했길래 그렇게 자신만만하냐고?”

고민하던 정영수 회장은 수화기를 들어 기화 차 사장실로 연결했다.

“강 부회장.”

-안녕하십니까. 정 회장님. 기화 자동차 강수안 사장입니다. 직접 뵙고 인사를 드려야 했는데 말입니다. 취임 축하 화분은 잘 받았습니다. 제일 큰 걸로 보내셨네요. 감사합니다.

정말로 사장실엔 정영수 회장의 화분이 가장 크고 예뻤다. 서양란이 예쁘게 피어 있는 엄청난 크기의 화분이다.

‘쓸데없이 이런 걸 보내고 그래.’

수안은 이런 화분 낭비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감사 인사는 그냥 하는 말이었다.

“취임 축하해. 이제는 경쟁 시작이야.”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으십니까? 요즘 일이 재미있어 죽겠습니다. 정 회장님과 붙는다고 생각하니 더 재미있어요.

“재미있기는….”

‘재미 느끼지 마! 즐기지도 말고!’

안 그래도 똑똑한 녀석이 일을 즐기고 재미까지 느끼면 어쩌라는 말인가.

-정 회장님은 신차를 개발하며 항상 이 재미를 느끼셨겠죠. 저는 너무 늦게 알았습니다. 새로운 차를 개발하는 것이 이렇게 즐겁고 행복할 줄은 몰랐습니다. 이거야말로 남자의 로망이 아니겠습니까? 장난감 차에서 크기만 커졌다 뿐이지 재미는 똑같습니다. 하하하.

“…….”

정 회장은 걱정만 더 쌓여간다.

‘난 그런 재미가 뭔지도 모른단 말이다!’

“…대체 뭘 만들고 있어? K시리즈라는 말 말고! 좀 자세하게 말해 봐.”

-그야…. 말씀 못 드리죠.

“뭣?”

-나중에 놀라게 해 드리겠습니다. 정말 재미있는 차를 만들고 있거든요.

“일전에 내가 그 얘기 했던 거 기억 안 나나?”

-무슨 얘기 말씀이세요?

“부품사 말이야 부품을 공유하려면 개발한 차량의 정보를 부품사에 미리 공유해야….”

-흐흐. 괜찮습니다. 이미 기존 기화 차 부품사가 전부 협조하고 있습니다. 강 회장님 발표 못 보셨습니까? 기화 차 협력사는 이미 꽉 잡아 놨습니다. 그래도 부품사는 함께 사용하면 좋겠죠. 나중에 대현 부품사의 내구성이 더 좋다면 변경도 생각해 보겠습니다. 대신 대현도 기화 차 부품사의 물건을 후보에 올려보시죠. 저희만 혜택을 받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수안은 시리즈의 그 어떤 사양도 노출하고 싶지 않았다. 부품사를 공유하더라도 나중에 할 일이다.

“당장은 필요가 없다?”

-협력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사장을 맡아 꾸려가는 동안 천천히 진행하시죠.

“…….”

-아직 기화 자동차는 준비 기간이 필요합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그랜저 출시나 빈틈없이 준비하십시오. 기화 자동차는 도전자일 뿐입니다. 시장의 지배자는 대현 자동차입니다.

“천천히 쫓아와. 요즘 내가 뒤통수가 간질간질해.”

정 회장은 수안을 향해 앓는 소리를 해 보지만, 돌아오는 답은 뻔했다.

-아무리 1등으로 달려도 뒤를 돌아보면서 달리면 넘어지기 마련입니다. 앞만 보고 달리세요. 이쪽은 신경 쓰지 마시고요.

녀석에게 이런 소리를 들으니 불안감만 가중된다.

“끄응.”

-저 바빠서 먼저 들어갑니다. 나중에 또 뵙죠.

수안은 전화를 끊고 들리지도 않을 정 회장에게 말했다.

“궁금해도 참으쇼. 최대한 서두르고 있으니까. 흐흐흐.”

정영수 회장은 뚝 끊어진 전화를 보고 있었다. 누구도 자신에게 이렇게 대할 수 없지만, 수안 만큼은 예외였다.

“젠장…. 괜히 전화했어.”

* * *

수안은 K시리즈 출시를 위해 기화 자동차에 매달려 있었고, 강운모 회장은 법정 관리에 돌입한 대운 그룹 계열사를 쪼개 먹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아현은 둘째를 임신해 배가 불러오고 있었기에 복귀를 또 미뤄야 했다. 그래도 종종 CF에 얼굴을 드러내며 대중에 존재감을 환기하고 있었다.

수진은 상준과 연애에 빠져 모으려고 했던 월급도 제대로 모으지 못하고 있었다.

깨가 쏟아지는 연애.

결혼을 생각하는 둘은 조만간 집에 인사하러 온다고 했다.

수현은 오빠가 초청한 디카프리오와 케이트를 맞이하여 성대한 환영회를 하고 기자들을 불러 뉴월드 호텔 광고 효과를 제대로 누렸다. 전국적인 관심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여기다 뉴월드 호텔에서 지원한 여성 골퍼가 맥도널드 LPGA 챔피언십에서 우승하며 또 다른 파란을 예고하고 있었다.

수용은 형이 자신에게 맡겨 준 사업을 계속 진행하면서도 형님의 행보에 눈을 뗄 수 없었다. 자신의 형 수안은 해외에 설립한 자신의 회사를 통해 기화 자동차를 인수하고 신차를 개발하면서도 더블 스타 계열사를 챙겼고, 강운 그룹 계열사의 부회장으로서 계열사 사장단을 이끌어 간다.

‘형은 일에 미쳤어….’

그렇다고 가정에 소홀하지도 않았다. 형과 형수의 금슬은 집안에서도 알아주는 편. 귀여운 조카 정원이는 아빠와 엄마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고 있었다. 형은 곧 태어날 둘째를 위해 방도 꾸미고 있다. 병원에서 딸이라고 들었다며 공주풍으로 만들고 있는데, 둘째 조카가 그 방을 쓰려면 아직 몇 년이나 더 있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정치권과 관계된 일도 있는 것 같았다.

“형은 도대체 언제 쉬는 거지?”

자신은 대학과 더블 스타에서 맡은 일을 병행하는 것도 버거웠다.

수용의 생각대로 수안은 자신만의 시간을 갖거나 쉬는 시간을 갖지는 않는다. 다만 외부의 생각과 달리 스스로는 쉬고 있다고 생각할 뿐이다. 아내와 보내는 시간, 아들과 보내는 시간이 수안에겐 휴식이고 힐링이다. 가족을 위한 시간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할 뿐이다.

수용은 오랜만에 더블 스타로 모습을 드러낸 형의 집무실을 찾았다.

“잠시 면담 요청입니다. 회장님. 흐흐흐.”

수용이 넉살 좋게 웃으며 수안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이제 때에 따라 적절한 처신을 배워간다.

“앉아. 시원한 음료로 줄까?”

“난 콜라.”

수안은 비서에게 콜라와 오렌지 주스를 부탁하고 소파에 앉았다.

“요즘은 얼굴이 많이 살아났네. 보기 좋다. 살도 적당히 빠졌어.”

“예전엔 내 체력이 영 꽝이라 그랬던 거고, 지금은 평범해졌지.”

“그러니까 내가 너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운동하라고 했잖냐.”

수안이 운동으로 몸이 단단하게 변하는 동안 동생들에게도 운동을 권했던 수안이다.

“요즘 헬스장도 나가고 있어.”

“젊어서 쌓은 체력이 나이 들어서도 그대로 간다고 하더라. 좋은 선택이야.”

수용은 방금까지 수안이 뚫어지게 쳐다보던 서류를 힐끗 쳐다보며 물었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이야? 더블 스타에서 형이 나서야 할 일이 있어?”

“아. 별거 아냐. 올해 미국 환경청에서 나온 독성 물질 보고서야.”

“…형이 하는 일 하고 관련이 있어? 우리가 그런 물건을 팔아? 안 그래도 김 사장님이 관련 자료를 검토하길래 좀 궁금하긴 했어.”

“없지. 그래도 독성 물질은 미리미리 파악하고 국가에 전달해 줘야 해. 정부 기관이 이런 데서 좀 느리잖냐.”

가습기 살균제에 관련한 독성 물질 보고서였다. 수안이 직접 김현성 사장에게 지시해서 자료를 모으고 정부와 공유하고 있었다. 특히 PHMG, PGH의 흡입 독성에 대한 위험을 강조할 생각이다. 수안은 훗날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피해가 국내에 발생하지 않도록 준비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일부 기업의 제품은 생산부터 불가능해지지만 사람이 죽는 것보다야 나았다.

“하여튼 형은 오지랖이 태평양이야.”

“내가 좀 그렇지.”

이 외에도 국내에서 일어난 사건 사고 중에 기억나는 것들은 최장호를 통해 사전에 막고 있었다. 최 실장의 잦은 출장은 이로 인해 발생했다. 수용의 말대로 태평양만큼 넓은 오지랖이다.

“하나 물어볼 것이 있어서 왔어.”

“뭐든 말해 봐.”

“형은 언제 쉬어?”

“응? 지금 쉬고 있잖아.”

“아니 평소에 말이야. 기화 자동차에서 일하고 강운 홀딩스 갔다가 본사로 갔다가 여기까지 와서 일하잖아. 요즘은 BE 인베스트먼트 지점에도 들른다며? 집에 와서는 정원이랑 놀아주고 형수님에 관심을 쏟고…. 거기다 수진 누나 연애에 수현 누나와 나까지 챙기지?”

수안이 수진의 연애를 챙긴다는 건 본인을 통해 확인했다. 맞선까지 해 줬으면 충분했다.

“그게 뭐?”

“형님 그러다 쓰러질까 걱정돼서 그러지. 형님도 일만 하지 말고 좀 쉬어야 몸과 정신을 충전하고 다시 일하지 않겠어? 일은 좀 놓고 쉬어도 된다 이거야. 형은 아직 젊잖아. 늙어서는 몸이 안 따라줘서 못 놀아.”

“야. 죽으면 푹 쉴 수 있어.”

“그러다가 과로로 40년 먼저 훅 간다고요. 형님이 아무리 건강하다고 해도 너무 무리하지 않았으면 해서 그래.”

“어쭈? 막내가 형 걱정할 나이가 됐어?”

“옆에서 보니까 너무하다 싶어서 그래. 그나마 김현성 사장님이나 배영성 사장님은 한계치에 아슬아슬하다 할 정도는 되는데, 형은 하는 일이 아득하게 한계를 넘었어. 이렇게 몇 년 일하면 몸 축나는 건 순식간이라고. 김 사장님 말 들어 보니까 아무리 얘기해도 콧방귀도 안 뀐다며?”

수용이 이렇게 수안의 집무실에 찾아온 이유다. 김현성이 수안에게 쉬면서 하라고 조언하곤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수용을 통해 다시 휴식을 권하는 것이다.

“김 사장이 이제 너를 통해서 얘기하나?”

“김 사장님보다 내가 더 걱정되더라니까. 혼자 다 하려고 하지 말고 쉬면서 하자. 형.”

“…….”

수안은 시간이 아까웠다. 죽음을 겪어 본 사람이라 그렇다.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 미래를 준비하는 시간, 회사에서 일하는 시간도 모두 소중하고 아까웠다. 일분일초도 허투루 보내고 싶지 않은 심정이다.

“수용아. 만약에 말이다.”

“응.”

“네 수명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해 봐. 딱 1년만 살 수 있다고 가정하면 넌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 거야?”

“으응?”

“1년. 단 365일만 살 수 있어. 그 뒤엔 무슨 일이 있어도 죽는 거야. The End. 그렇게 산다고 생각하면 너 쉴 수 있을 것 같아?”

“그야….”

못 해 봤던 일, 평소에 하고 싶었던 일들이 수용의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형.”

“그래.”

“누가 그러더라. 인생의 승자는 마지막에 웃는 자라고.”

“큭. 그렇지.”

“그런데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도 있어. 나도 이쪽에 손을 들어주고 싶어.”

“뭔데?”

“죽는 날까지 많이 웃은 자가 승자라고. 마지막에 아무리 웃어 봐야 과정이 행복하지 못하면 소용없어. 1년 동안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마지막에 웃어 봤자 뭐 할 건데? 1년 동안 죽음을 앞둔 사람이 행복했을까? 리스트 써놓고 한 줄 한 줄 다 지웠다고 마지막에 행복할 수 있어? 평범한 하루, 익숙한 사람들과 지내는 평화로운 일상 속에서 웃을 수 있으면 그게 진짜 죽음을 준비하는 행위가 아닐까?”

“…허. 너 진짜 잘 컸다. 내 동생답네.”

“형이 어떤 책임감을 짊어지고 있는지 난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냥 동생으로서 말했어. 옆에서 보기에 형이 너무 힘들겠다 싶었거든. 특히 수진 누나는 제발 내버려 두자. 형이 뭐 하러 수진 누나를 챙겨?”

김현성 사장의 부탁이 아니라도 자신이 나서고 싶었던 이유가 이제야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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