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흐흐흐. 오빠랑 아빠가 소개해 줬으니, 걱정하지 말게. 어리석은 동생.”
수진의 말을 듣고 수용의 표정과 말투는 완전히 달라졌다. 드라마틱한 태세 전환이다.
“아~ 아휴.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집안 막내 강수용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매형.”
아까완 전혀 다른 태도였다.
“어, 어. 저도 잘 부탁을….”
“벌써 매형이라니 너무 빨라. 얘.”
수진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형이 주선했으면 안 봐도 뻔하지. 누나도 형 알잖아? 아버지가 강에 있는 돌다리를 해체하고 다시 지어서 건너갈 분이면, 형은 철골 다리를 세우고 지나갈 사람이잖아. 아예 비행기를 타고 지나갈지도 몰라.”
아버지 강운모 회장도 안전한 경영으로 이름 높았지만, 옆에서 지켜본 형은 그보다 한참 더했다. 그 어떤 낌새도 놓치지 않고 위험을 회피하는 사람이 바로 형 강수안이다. 형이 고른 누나의 남편감이라면 더 볼 것도 없다. 덕분에 일말의 의심도 없이 매형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여기서 형님의 흔적이 또 느껴지네요.”
“벌써 형님을 만나셨습니까?”
“일전에 한 번 뵈었습니다.”
장소와 때가 좋진 않았지만, 보긴 했다.
“좋은 분이죠? 하하하.”
‘뒈질 거냐고 묻기는 하셨지만, 때리진 않으셨지. 좋은 분 맞아.’
박상준은 어색할 줄 알았던 만남이 강수안이라는 존재로 인해 달라졌음을 알 수 있었다.
“차라도 마시면서 얘기할까요?”
바쁘다던 수용도 자리에 앉아 대화하기 시작했다. 수용은 박상준이 금강 그룹 아들임을 듣고 말했다.
“아~ 금강 건설. 저도 압니다.”
“그래요?”
“금강 건설이 아파트는 정말 잘 짓지 않습니까. 물론 입지가 중요하긴 하지만, 아파트의 만듦새와 마감도 중요하니까요. 금강 건설이 지은 아파트는 방음도 좋고 하자도 많지 않다고 알고 있습니다.”
“밖에서 회사 칭찬을 들으니 감회가 남다르네요.”
둘의 대화에 수진이 끼어들었다.
“그래서 말인데 동생아.”
“응. 뭔데?”
“괜찮은 입지를 가진 아파트를 찾고 있어. 네가 골라 줄 수 있을까?”
“나도 요즘 한창 공부 중이니까 알아봐 줄 수는 있지.”
“역시. 오길 잘했네.”
수현의 말을 듣고 수용에게 아파트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그런데…. 벌써 집을 알아봐? 매형은 아직 집에 인사도 안 오셨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곧….”
상준의 대답을 수진이 가로챘다.
“그냥 미리미리 알아보는 거야. 앞서가지 말고 그냥 얘기해 줘.”
앞서 나가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법이다.
“결혼하면 나가서 살려고?”
“그럼 집에 들어와서 살아야겠니? 신혼인데? 상준 씨는 어쩌고. 데릴사위는 좀 아니잖아.”
둘의 관계는 급진전하고 있었다. 상준은 답답한 집에서 나오고 싶었고, 수진도 결혼하면 제대로 신혼을 즐기고 싶은 마음이었다.
“나 참. 별일이다. 누나가 결혼할 남자가 생긴 것도 놀라운데, 이렇게 일을 먼저 진행하려고 할 줄은….”
“그래서 어디가 좋아?”
수용은 말없이 손부터 내밀었다.
“뭐? 어쩌라고?”
“통장 꺼내 봐. 준비된 금액에 따라 내가 추천할 물건이 달라져.”
“…….”
“…….”
“뭐야? 왜 말이 없어?”
상준이야 애초부터 돈이 없었다. 집에서 먼저 받은 돈은 없고, 일하며 모은 돈도 당연히 없다.
회사에서 수습 딱지를 떼고 고작 두 달 지났을 뿐이다.
수진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일전에 수안이 불려준 돈은 모두 강운 그룹 지분을 사는 데 들어갔다. 월급이야 꼬박꼬박 들어오지만, 아파트를 살 정도로 돈이 있진 않았다. 쓰느라 바빴지 모을 줄을 몰랐기 때문이다.
“돈도 없이 아파트를 어떻게 사려고? 아무리 융자를 받아도 최소한의 자금은 있어야지.”
“…오빠가 도와주지 않을까?”
빠직.
수용의 핏대가 불쑥 튀어나왔다.
“어지간히 빨아먹어! 형이 아무리 우릴 챙겨 줘도 그렇지. 언제까지 형을 귀찮게 하려고 그래?”
수용도 수안에게 많은 것을 받고 있지만, 나중에 모두 갚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빨아먹긴 뭘 빨아먹었다고….”
“아버지가 단 한 주도 안 주려고 했던 지분을 형이 얻어서 우리 줬잖아. 게다가 그 지분은 무슨 돈으로 샀어? 누나 돈으로 샀나? 내 돈으로 샀나? 아니잖아.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너… 말이 너무 심해.”
수진의 표정이 냉랭해졌고 수용도 잠시 생각에 잠겼다.
“…휴우. 그래. 내가 심하게 말하긴 했어.”
“…….”
수용도 이제 성인이다. 누나라고 해서 함부로 대할 생각은 없었다.
자신이라고 누나와 뭐가 다르단 말인가.
“매형 되실 분도 죄송합니다. 제가 예의 없이 언성을 높였네요.”
“아. 저도 아파트 매입 자금에 관해선 궁금했는데, 이제야 들었네요. 제가 죄송합니다. 아파트 얘기는 못 들은 걸로 해 주세요.”
“누나. 매형은 사람이 괜찮네. 역시 형님이 선택한 분답다.”
“됐어. 나 그냥 갈래.”
“에이. 그러지 말고 앉아봐. 내가 미안해. 사과할게.”
수용은 일어서는 수진의 손을 잡아 자리에 앉히고 말했다.
“요즘 아파트 가격이 내려서 괜찮은 매물이 좀 있어. 필요 자금 뽑아 줄 테니까 한번 마련해 봐.”
수용은 본격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요즘 은행에서 대출이 힘들긴 하지만 아예 못 받는 것도 아니야. 게다가 두 사람 다 어엿한 직장인이니까 신용 대출도 상당히 나오겠지. 주택 자금융자에 개인 대출 더하면 종잣돈은 조금만 있어도 아파트 살 수 있어.”
수용의 예상 금액을 확인한 둘은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고개를 저었다. 조금이라던 종잣돈도 마련하기 쉽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것도 힘들면…. 내 아파트라도 빌려줄 수 있고.”
“응? 네 아파트?”
수용은 아파트 부자라고 할 수 있었다.
“네 아파트는 어디에 있는데?”
“강남 쪽에 셋.”
“헙!”
“한강 변에 하나. 한남동에도 하나 있고.”
“너 뭐야? 어쩌다가 그렇게 됐는데?”
“뭐긴. 누나들이 쇼핑에 돈 쓸 때 나는 아파트를 샀으니까 이렇게 됐지.”
“…….”
여기엔 수진도 할 말이 없었다.
“생각 많이 해 보고 알려줘. 그래도 처음 사는 집인데 내 돈으로 사야지 않겠어? 형이 아무리 돈이 많아도 형한테는 말하지 마. 형은 누나 얘기 듣자마자 아파트가 아닌 저택을 사 주겠다고 하겠지만, 누나도 이제 성인이고 회사에 일하는 직장인이야.”
“어, 어. 알았어.”
수용은 둘과 헤어져 사무실로 돌아가고 있었다.
‘강남에 일곱, 한강 변에 다섯, 그리고….’
수용은 수진에게 말한 것보다 더 많은 아파트를 갖고 있었다. 아파트는 융자가 쉽고 그 융자는 전세금으로 보전할 수 있었다. 이렇게 융자와 전세가 회전을 시작하면 아파트 숫자는 얼마든지 불릴 수 있었다. 수용도 그와 같은 방법으로 아파트 숫자를 늘려온 것이다. 요즘 가격이 내려가서 약간 염려되긴 했지만, 김 사장님의 말대로라면 오래가지 않는다고 했다.
[화폐의 가치가 내려갔으니 앞으로 오를 것은 실물 자산이라고 할 수 있는 부동산이다. 그리고 국내에는 매력적인 투자처로 아파트가 있다. 앞으로 국내에서 돈이 몰릴 곳은 아파트밖에 없다.]
수용은 그 말을 믿고 아파트 수를 늘리는 데에 더 힘쓰고 있었다.
“여차하면 한 채는 줘도 되겠네. 누나한테는 괜히 빌려준다고 했나?”
* * *
상준은 수용을 보내고 수진과 마주하고 있었다.
“자기야. 아파트 산다는 말이 결국 부회장님께 도움을 받겠다는 말이었어?”
“자기까지 뭐라고 하지 마. 동생한테 저런 얘기 들으니까 내 얼굴도 화끈거린다고.”
“그래도 자기 동생은 생각이 바르다. 게다가 일찍부터 경제 관념까지 있었던 모양이네.”
“…….”
자신과 수현의 꼬임에 넘어가 강운 그룹을 갖겠다고 했던 녀석이지만, 여기서 그런 말을 해서 뭐 하겠는가.
“부회장님이 더블 스타 그룹을 경영하고 계시긴 하지만, 거기서 나오는 월급으로 뭘 하시겠어. 게다가 부회장님은 이미 가정도 있으시잖아. 우린 우리가 알아서 하자.”
“알았어…. 그런데 오빠가 가진 회사는 더블 스타가 전부가 아니야.”
“새로운 회사라도 인수하셨나?”
“나도 얼마 전에야 알았는데…. 엄청난 회사가 또 있더라고.”
수안은 일전에 가족 앞에서 중대 발표를 했다. BE 인베스트먼트의 소유자임을 밝힌 것이다. 이미 알음알음 알려지는 중이라 가족에게 숨기는 것은 아니다 싶었다. 아버지도 허락하셨기에 마음 놓고 밝힌 것이다.
“엄청난? 더블 스타 정도 되는 회사야?”
“그런 회사도 하나 있고….”
펜타그램의 존재도 함께 알렸다. 현재 강운 그룹은 본래의 강운 그룹 계열사에 더블 스타 계열사와 펜타그램을 더해서 엄청난 규모로 성장하고 있었다.
“있고?”
“해외에 두 개가 더 있더라.”
BE 인베스트먼트는 미국과 일본에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해외? 그럼 지점이나 사무소 정도 아닐까?”
“…강운 그룹보다 더 커.”
“비교 대상이 좀…. 어떻게 지사가 강운 그룹보다 더 클 수가 있어?”
믿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이거 가족에게만 알리라고 해서 당신한테 말하는 거야. 그 회사 이름이 뭐냐면….”
수진의 말을 들은 상준은 잠시 말이 없었다.
“…….”
“내 말 들었어? 이거 상준 씨 가족에게도 말하면 안 되는 비밀이란 말이야.”
“저기…. 내가 잘못 들은 것 같아. 다시 얘기해 줄래?”
“비. 이. 인베스트먼트. Bald Eagle. 흰머리수리.”
“…진짜로 BE?”
“그럼 가짜 BE가 있어?”
“…요즘 국내 투자 전문가들이 서로 들어가려고 난리를 친다는 그 BE?”
BE 한국 지사에서 모집하는 채용에 엄청난 인파가 몰렸다고 했다.
“이번에 기화 차를 인수한 BE?”
“응. 바로 그 BE 인베스트먼트를 오빠가 세웠다고 했어.”
“…자, 잠깐!”
잠시 기억을 더듬던 상준이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로 말했다.
“아냐. 아냐. 농담은 그만. 충분히 재미있었어. 깜빡 속았네.”
“엉? 농담이라니?”
“BE는 미국 월스트리트의 거대 금융 회사란 말이야. 짧아도 나름의 역사가 있는 금융사라고. 부회장님이 BE를 일으키려면 14살에 창업을 했다는 건데, 말이 안 되잖아.”
“14살에 미국과 일본에 사람을 보내서 BE를 창업했다고 했어.”
“…정말이야?”
“응. 이거 오빠가 말한 날에 엄마 쓰러질 뻔했어. 미국과 일본 BE의 지분이 전부….”
수진의 입에서 상세한 정보가 계속 흘러나오자 상준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이라고? BE가 그럼 한국 기업?”
기화 차가 왜 BE에 넘어갔는지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BE는 달러를 가진 요정. 그것도 한국계 기업이었다.
“아빠도 사실을 안 지 얼마 안 됐다고 했어. 오빠가 아빠까지도 완벽하게 속인 거지.”
“…….”
“어쨌든. 내 말은 오빠가 고작 더블 스타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진짜 부자라는 뜻?”
“그것도 상대를 찾기 어려울 만큼. 국내에서는 비교 대상이 없어.”
“BE의 자산 규모가 얼마였더라….”
“운용하는 자산이 최소 1천억 달러라고 들었어.”
“……!”
수안의 모친도 이 부분에서 목을 잡았다.
최근 1,500원에 육박하는 환율을 고려하면 150조에 이른다.
“침 흐르겠다. 자기야.”
“츄릅.”
입이 벌어진 것도 인지하지 못할 만큼 큰 규모였다.
“내가 왜 오빠한테 손을 벌리려고 했는지 이제 이해하겠어?”
“그 돈이면 충분히 수진이가 한 말이 이해되네. 수용 씨가 한 말도 이해되고.”
개인 자산이 100조 원을 넘긴다는 건 상상도 어려웠다. 몇억을 호가하는 아파트라도 어렵지 않게 사 줄 수 있으리라.
상준은 아득한 표정 끝에 씁쓸한 표정으로 바뀐다.
“후아. 그래도 당신에게 털어놓으니까 살 것 같아.”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모르는 거지?”
“미국 정치권이나 금융가에 퍼지고 있다고 들었어. 아직 한국에는 별로 아는 사람이 없을 거야. 그래도 곧 알려지겠지만.”
“그때까지는 비밀을 지켜야겠네.”
“난 그동안 뭐 했나 몰라.”
자신의 오빠는 동생들의 학업과 사생활까지 챙기면서 사업까지 훌륭하게 해냈다.
수진의 한탄 섞인 말에 상준도 비슷한 마음을 토로했다.
“이 오빠도 심히 찔리고 있어.”
상준도 수안과 동갑이다. 같은 나이임에도 상준은 이제 입사 5개월 차. 14살에 창업해서 국제적인 거물로 성장한 사람과 비교하기엔 너무 초라했다.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은 평범하게 살아야 하나 봐.”
“그러게. 쫓아가려면 가랑이가 찢어지는 정도가 아닐 것 같아.”
“우리 수용이 말대로 조금이라도 모아서 아파트 하나 사자. 앞으로 월급 알뜰하게 모으고 대출 다 끌어 모으면 몇 달 내로 살 수 있지 않을까?”
“좋아! 한번 해 보자. 그럼 위치부터 생각해 보자. 강운 패션에 가깝고 금강 건설에도 멀지 않은 곳.”
몇 달 동안 돈을 모아 아파트를 살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대화가 조용한 커피숍에서 이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