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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인

“며칠 햇빛을 못 보게 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미개한 아시안이 감히 아메리카 대륙에 씨앗을 뿌리다니….”

둘은 똑같이 BE 인베스트먼트를 눈 아래로 보고 아시안을 무시하고 있었다.

백인으로서의 선민의식이 머리에 가득한 두 사람이다.

“잽스(일본인)도 아니고 한국에서 진출할 줄 상상이나 했겠나? 게다가 그 주인이 고작 육상 스프린터일 줄은 더더욱 몰랐고 말이야.”

“녀석의 정체는 상관없어. 앞으로 어찌하면 좋겠나. 고작 롱텀 보험 상품 정도로는 BE에 흠집도 나질 않아.”

러시아의 도끼가 발등을 찍으러 올 줄을 예상하지 못하는 것은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이 고용한 최고 경영자들은 수안의 경고로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애쓰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상부에 보고하지 않고 있었다.

BE 인베스트먼트의 규모와 자금을 생각하던 잭은 BE의 최근 행보를 기억해 냈다.

“근래 BE의 자금이 상당히 빠져나갔다는 걸 알고 있나?”

“어디로?”

“어디겠나. 바로 녀석의 고향이지.”

“동남아시아 금융 위기 때문이로군.”

“맞네. 이미 BE는 소로스와 해 먹었잖나. 그 돈에 더해서 고향에 추가 투자를 집행하는 모양이야.”

“자네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가?”

“위기 속엔 항상 기회가 있지 않았나? 눈에 거슬리긴 해도 BE 인베스트먼트의 안목은 믿을 수 있으니까. 우리도 들어가서 수익을 만들어 보는 건 어떻겠나? BE는 이미 상당한 이득을 거뒀다고 들었네. 자동차 기업까지 하나 먹었다고 하더군.”

“…잭. 자네도 한국에 지사를 내려고?”

골드만삭스는 이미 지사를 만들어 놨기에 모건 스탠리가 들어오면 협력을 기대할 수 있을 터였다.

“한번 포탄이 떨어진 자리엔 다시 포탄이 떨어지지 않는 법일세. 프랭크.”

“하여튼 잭의 머리는 알아줘야겠어. 돈 냄새는 기가 막히게 맡는군. 맞아. 한국의 위기는 이미 극점을 지났지. 그 나라 사람들은 피 말리는 하루하루를 보내겠지만, 우린 불어나는 돈을 바라볼 수 있겠어.”

“한 나라의 금융을 휘어잡으면….”

“모든 것이 우리 손에 들어오지.”

“덤으로 BE의 회장이라는 어린 녀석의 콧대도 눌러 줄 수 있겠지. 아주 좋군.”

월스트리트 4대 금융사를 떠올릴 때 가장 앞선 이름이 골드만삭스였고, 두 번째로 떠올리는 이름이 바로 모건 스탠리였다. 작년 거대한 은행 하나와 합병하고 덩치까지 키워낸 모건 스탠리는 골드만삭스와 함께 세계 2대 은행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 * *

-회장님. 방금 애플에서 이사회 결정을 알려왔습니다. 신주 발행 규모는 10억 달러입니다.

애플 이사회에서 욕심을 부려 많은 투자금을 요구하고 있지만, 수안에겐 오히려 반길 만한 소식이다.

“굿. 기존에 우리가 확보한 주식에 더하면 몇 퍼센트나 되는데?”

-10%를 약간 넘습니다.

이번에 투자할 돈까지 더하면 약 55억 달러를 애플의 주식에 쏟아부었다. 당장 2년만 지나도 애플의 지분 가치가 천정부지로 치솟게 되니 상당히 좋은 투자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예전과 같지는 않다. 강운 그룹에는 강운 전자가 있고 더블 스타에는 팬탁이 있다. 컴퓨터, 반도체, 스마트폰을 비롯한 새로운 IT 제품들이 수안의 머리를 통해 세상에 선보일 것이다. 그래도 애플은 선전할 것이다. 미국인들의 선호도가 애플로 향할 것이기 때문이다. 애플이 그렇게 좋은 제품을 출시했어도 성능이 떨어지는 자국의 스마트폰을 쓰겠다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그리고 모건 스탠리에서 한국에 지사를 낸다고 들었습니다. 이미 한국에 들어와 있는 골드만삭스도 한국에 대규모 투자를 집행한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상당히 위험한데?”

-예. 지금까지 해외 금융 기관은 한국 금융 시장을 완전히 믿지 못했는데 두 거대 금융사가 들어오면 너도나도 한국에 들어올 겁니다.

‘달러 가치가 더 떨어지겠어.’

달러는 내림세에 접어들어 하루가 다르게 가치가 내려가고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어차피 우리가 막을 방법은 없어.”

자유 시장 경제 아래에서 다 같이 피 튀기는 경쟁을 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시장에 많은 자금이 풀리면 저희가 먹을 것만 많아지겠죠.

“푸흐. 하여튼 이 사장도 이제 싸움꾼이 다 됐어. 벌서 저들의 돈을 빼먹을 생각이야? 걔들은 돈 벌어봐야 우리에게 보험으로 다 뱉어내야 할걸?”

-보험은 아직 시간이 있으니 그사이에 잽을 날려 줘야죠. 하하하.

“하여튼 못 말린다니까.”

-BE 한국 지사에 인원을 충원하고 대비하겠습니다. 한국 금융 시장은 대세 상승의 시기. 지뢰만 밟지 않으면 무조건 따낼 수 있습니다.

“그 지뢰는 내가 검토해서 알려 줄 테고 말이야.”

둘이 말하는 지뢰는 IMF 금융 위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나자빠지는 기업을 일컫는다. 수안은 기업의 이름만 들어도 그 기업이 망하는 기업인지 아닌지 파악할 수 있었다.

-회장님이 검토해 주신다면 신뢰도는 따질 필요도 없죠.

“아! 이 사장 국내에 들여온 돈은 좋은 데 투자해 놨어?”

일전에 이방효 사장이 국내에 달러를 입금해 환차익을 노린다고 했다. 5억 달러를 입금한다고 했었는데 문제는 세금이다. 본래 정부에서 입금 시 출처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겠다고 했던 달러가 50만 달러였지만, 5억 달러의 외화는 이를 한참이나 넘어선 금액이다.

여기서 딜레마가 발생한다. 한국은 어찌 됐건 달러를 들여와야 하는 IMF 체제하에 있었다. 5억 달러를 입금하기 전에 협의만 된다면 얼마든지 50만 달러와 같은 수준의 혜택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수안이 미리 손을 써 뒀다.

-회장님 덕분에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무슨 문제가 있었다고 그래?”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달러를 입금했지만, 문제는 없었다. 이방효 사장이 입금한 은행에서 정부 기관의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번에 입금된 해당 외화는 국세청에 신고할 필요 없소. 그대로 처리하시오.

“…….”

은행은 이 사실을 이방효에게 알렸다. 당연히 수안이 한 일임을 알 수 있었다.

-제가 세금은 생각도 안 하고 보냈지 뭡니까. 회장님이 아니셨으면….

“그러니까. 일어나지도 않은 일 가지고 뭘 자꾸 얘기해. 됐어.”

일전에 이현창에겐 가장 생색을 낼 수 있는 시점에 나서야 한다고 했지만, 스스로는 문제가 생기기도 전에 나서서 해결하고 있었다. 이번만이 아니다. 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렇다.

수안은 문제가 생기기 전에 먼저 나서서 해결할 것이다.

-회장님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성내실 분이 아니라는 건 압니다. 하지만 저도 고마움을 아는 인간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럴 때마다 이 사장이 얼마나 나이가 들었는지 새삼 느껴. 여기서 논어(論語)가 왜 나오나?”

논어(論語) 학이(學而)편에 나오는 구절이다.

[배우고 때때로 그것을 익히면 기쁘지 않은가?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않은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는다면 또한 군자답지 않은가?]

이방효는 마지막 구절인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는다면 또한 군자답지 않은가?]를 말하고 있었다. 수안이 군자라고 추켜세운 것이다.

-어휴. 단번에 맞추셨네요. 저야 그렇다 치는데 회장님도 논어를 아십니까?

“세상은 사람과 사람이 함께 살잖아. 인(仁)을 모르고 어떻게 살아. 군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사람이 되려는 거야.”

-저도 다시 읽어 봐야겠습니다.

“매번 읽어도 새롭긴 하지.”

이방효는 자신의 상사가 왜 그렇게 인덕이 넘쳤는지 알 수 있었다.

논어를 읽고 체화할 정도라면 회장님의 태도가 이해되고도 남음이다.

-입금한 외화는 전액 환전해서 7천 5백억가량입니다. 주식은 BE가 진행할 예정이라 저는 부동산에 투자하고 있습니다.

“그 돈이면 국내 부동산 시장이 꿈틀하겠는데? 혹시 신도시?”

-어이쿠. 거기까지 짐작하셨습니까?

“잘했어. 묵혀 두면 목돈 만지겠다.”

-하하하. 회장님이 장담하시니 일말의 불안감도 날아가 버리는군요.

수안은 이방효와 조금 더 환담하고서야 전화를 내려놨다.

“애플은 2000년 IT 버블 전까지만 처분하면 되겠어.”

닷컴 버블로 내려앉을 주식 가치를 생각하면 무식하게 계속 보유할 필요 없었다. 중간에 한 번 털어 주고 다시 매집하면 오히려 지분율을 높이고 수익률을 극대화할 수 있음이다.

수안은 신문을 들어 기사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이미 SBS를 포함한 대부분 언론에서 기화 자동차 노조를 질타해 왔다. 며칠 전 기화 자동차 경영진은 구조 조정을 발표했고 대중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대대적인 구조 조정에 환영이라니….”

언론 덕분이다. 남들은 일이 없어서 손가락이나 빨고 있는데 기화 자동차 노조는 그 많은 월급을 받으면서도 자신들의 혜택을 더 늘리고자 했다. 이러한 노조의 민낯이 언론에 의해서 낱낱이 까발려진 것이다.

“조만간 발표하라고 해야겠네.”

BE 인베스트먼트는 융통성 있는 경영과 국내 기업 환경에 필요하다는 이유로 강운 그룹 부회장을 기화 자동차 경영자로 선임할 것이다.

* * *

“왜 갑자기 보자고 한 거야? 나 바쁜데.”

“넌 나와 놓고 처음 내뱉는 말이 그게 뭐야? 누나가 부르면 “잠시 쉬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야지.”

수진은 회사에서 일하던 남동생 수용을 불러내 마주하고 있었다.

“용건을 얘기하라니깐. 나 들어가서 일해야 해.”

“너 정신 차렸다더니 일에 너무 열심이다? 학교는 잘 다니고 있니? 이번에 졸업 아냐?”

수진은 동생 수현에게 막냇동생의 개과천선을 전해 들었다.

“…별로 중요한 일 아니면 가 봐도 될까? 저녁에 중요한 미팅이 있어서 준비해야 한단 말이야.”

부동산 포털 홈페이지 제작을 위한 미팅이 예정되어 있었다. 다움과 네이보에서 관련 전문가들이 달라붙었다. 형이 자신에게 주는 또 다른 지원이다. 김현성 사장의 말대로 아무것도 모르는 척 지원을 받고 있지만, 형의 도움이 이어질 때마다 감회가 남다르다.

‘형에 비하면 누나들은….’

누나들을 신뢰하지 못하는 수용이다. 본인도 예전엔 마찬가지였다. 요즘도 자다가 당시의 일을 떠올리면 이불을 차곤 한다.

‘내가 어쩌자고 누나들하고 한편을 먹어서는….’

“가지 말고 앉아서 기다려봐. 한 사람 더 오기로 했어.”

“누구 불렀어? 친구?”

“친구라고 하긴 좀 그렇고….”

아직 소식이 어두워 누나의 새로운 소식을 듣지 못한 수용이다.

수진은 차마 자기 입으로 얘기하기 민망해서 뒷얘기를 하지 못했고 마침 커피숍 문을 열고 들어오는 상준을 볼 수 있었다.

“상준 씨. 여기!”

“아. 또 늦었네. 오래 기다렸어?”

“아냐. 방금 왔어. 괜찮앙.”

수용은 수진의 마지막 “앙.” 발음을 듣고 얼굴을 찌푸림과 동시에 둘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건 무슨 상황인데?”

자신의 누이가 남자를 소개할 거라곤 생각도 못 한 수용이다.

“아. 수진 씨 동생인 수용 씨 되시죠? 저는 박상준입니다. 반갑습니다.”

“…예. 강수용입니다.”

수용은 간단하게 상준과 대면하고 수진에게 말했다.

“상황 설명이 필요한데?”

“여긴 내 애인. 만난 지 이제 두 달 조금 넘었어.”

“애~ 인? 연애할 때 그 애인? 미쳤음? 돌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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