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늘진 어둠 (148/304)

그늘진 어둠

-아. 예. 부회장님. 보도 본부에서 꼼꼼하게 살피고….

“됐고요.”

-예. 말씀하십시오.

“낮에는 사람들이 많이 안 보잖습니까. 저녁 뉴스에 내보내고 다른 방송사에도 기사 전달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저희가 단독으로 취재한 내용이지만, 얼마든지 받아쓸 수 있지요. 보도국에 지침을 내리겠습니다.

“그럼 부탁 좀 합시다. 노조가 너무 말썽이라 이번에 확 정리하게요.”

-그런데 기화 차 노조를 정리하는 것이 강운과 어떤 관련이 있습니까?

아직 기화 차가 수안의 것이라는 사실은 많은 이들이 모르고 있었다.

“BE 인베스트먼트가 발표했었죠. 구조 조정을 끝내고 기화 차 경영을 맡기로 한 기업. 바로 강운 그룹입니다.”

-헛!

방송국 사장은 기화 차 노조에 적대적인 이유를 단숨에 이해할 수 있었다.

“발표 나오기 전까지는 대외비로 다루셔야 합니다. 최 사장님도 입 다물고 계십시오.”

-예, 예. 이해했습니다.

“그럼 최 사장님이 해야 할 일도 알고 있겠죠?”

-노조 탄압에 반대하는 의견이 나오지 않도록 노조 이미지를 똥통에 처박아 보겠습니다.

‘그렇게까지 할 건 아니지. 이 사람아.’

언론이라면 최소한의 정도는 지켜야 할 것이 아닌가.

‘하긴…. SBS가 언제부터 정도를 지켰다고.’

“적당히 합시다. 내가 원하는 것은 사실의 명확한 전달입니다. 있는 그대로만 보도하세요.”

-예…. 부회장님.

“앞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치든 경제든 편향적인 뉴스가 나오면 사장과 보도 국장부터 자를 생각이니 알아서 하세요.”

-끕! 부, 부회장님!

“끊습니다.”

수안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강운으로 가 봐야 했다.

* * *

“크흐흐. 노조는 그렇게 다루는 거지. 잘했어.”

“…….”

예상할 수 없었던 아버지의 칭찬이다.

“노조는 그렇게 초장부터 잡아야 하는 거야. 쓴맛을 보고 나면 고분고분해질 거야. 기화 차 노조가 협상장에 앉아서 군소리 하나 못 하고 사인하는 꼴을 직접 봐야 하는데 말이야.”

수안은 기화 차 생산직 근로자들이 고분고분해지길 바라고 하는 일이 아니었기에 아버지의 말을 정정했다.

“회장님. 저는 고분고분한 노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전부 자를 겁니다. 협상은 필요 없습니다. 그들이 사인할 서류는 권고사직 동의서밖에 없습니다.”

“……!”

‘이 녀석은 가끔 보면 나보다 더하다니까.’

“…그럼 차는 누가 만들어? 그렇게 막 나가다간 애써 인수한 기화 차를 말아먹는 수가 있어.”

“안 말아 먹습니다. 앞으로 기화 차에서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러니까!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 많은 생산직 직원들을 자르냔 말이야. 네가 가서 볼트 조이고 자동차 조립할 거야?”

“원래 하던 사람들 시켜야죠.”

수안의 대답은 지금까지 한 말과 정반대였다.

“뭐? 방금 네 입으로 다 자른다고 해 놓고? 그럼 노조는 퇴직시키고 임시직으로 다시 들일 생각인가? 그것도 나쁘지 않긴 한데….”

본래 기화 차가 대현에 인수되었던 당시엔 아버지의 말대로 흘러갔었다. 하지만 BE가 인수한 지금은 아니다.

“…오늘 뉴스에서 보신 것처럼 정규직 직원들은 생색낼 수 있는 일이나 쉬운 일만 합니다. 어렵고 힘든 일은 전부 외주 노동자들이 하고 있고요. 이미 외주 업체 전부를 섭외해 놨습니다. 앞으로 기화 차 생산은 이들이 맡아 줄 겁니다.”

“허! 그런 식으로 할 수 있었어. 괜찮은 생각이야! 직원을 외주로 돌려 버리면 원가부터 훅 줄어들지. 오호라….”

수안은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뻔히 보였다.

“그렇다고 강운 자동차에 적용할 생각은 하지 마시고요. 제대로 된 노조도 없는 우리 직원들 불쌍합니다.”

“…우린 노조 없이도 직원들을 충분히 대우해 주잖아.”

“사장들이 지금까지 잘 틀어막아서 그렇게 보일 뿐이죠. 직원들은 속으로 끙끙 앓습니다.”

수안이 기화 차 노조를 정리할 생각이기는 해도 노조의 필요성은 알고 있었다.

근로자가 회사와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바로 노조였다. 기화 차나 대현, 일부 강성 노조가 과도한 노동자의 권리를 내세워 문제를 일으키고 있을 뿐이다. 대부분의 노조는 이기적이고 권위 의식에 빠진 경영진과 힘겨운 투쟁을 이어 간다. 이런 투쟁의 역사가 있었기에 근로자의 권익이 아주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수안은 강운 그룹도 합리적인 노조를 수용해 더 근로자 친화적인 기업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넌 노조에 찬성하겠다 이거야?”

“기업과 근로자의 화합이 가능할 기업은 우리 강운 그룹뿐이고, 올바른 노조의 탄생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강운 그룹에서 노조가 생기면 전국 노조의 중심이 강운 노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로써 얻는 이익이 적지 않을 겁니다. 강운의 고고한 이미지와 잘 어울리지 않습니까.”

“너도 기화 자동차 봐서 알잖아. 그리고 대현 자동차가 노조 때문에 얼마나 고생이냐. 내가 그 꼴을 봐야겠어?”

“회장님. 우리 강운 그룹을 대현 그룹 정도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우린 국내 최고 기업이고 나중엔 세계 최고 기업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기업에 노동 조합 하나 없으면 세계인들이 우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

아들을 말로 이기긴 쉽지 않다. 대화하다 보면 어느새 말려들기 일쑤였다.

“강운 그룹은 근로자에게 좋은 근무 환경과 더 나은 보상을 선제적으로 제공할 여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보상을 조금만 미루고 노사 협상이 있을 때마다 터트려주면 근로자에게 양보하는 기업으로 보일 수 있지요. 회사는 아무것도 손해 보지 않아요. 오히려 보상을 늦췄으니 그만큼 이익이라고 생각하셔도 됩니다.”

“오!”

“노조원들은 노조원들 나름대로 희열을 느낄 겁니다. 자신들이 요구한 보상을 기업이 들어줬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회사는 근로자에게 최대의 복지를 선사하는 최고 기업이라는 타이틀을 가져가고 강운 노조는 대현 자동차 노조와 비교되는 합리적인 노동 조합으로 비춰질 겁니다. 이렇게 미래의 강운은 기업도 근로자도 최고가 됩니다.”

수안의 단정적인 주장에 이미 홀딱 넘어가 버린 강 회장이다.

“아주 훌륭한 비전이야.”

“노조가 없으면 이룰 수 없는 일입니다. 훌륭한 기업은 경영자로만 만들 수 없습니다. 애사심을 가진 근로자들이 많아야 가능합니다. 직원들은 마음에서 우러나 회사를 보호하고 회사의 생산품을 홍보합니다. 직원들의 사랑을 받는 회사는 망할 수 없습니다.”

“그 애사심을 노조 설립과 협상 그리고 보상으로 만들어 줄 수 있겠어.”

“그렇습니다. 물론 선택은 회장님의 몫입니다. 만약 노조를 허가하지 않겠다고 결정하시면 기존과 같이 근로자들이 생각지 못한 복지 정책을 생각해 두면 됩니다. 물론 직원들은 회사의 복지를 당연하게 생각하겠지만요.”

먼저 챙겨 주면 처음 몇 번이나 고마울 뿐이다. 반복되면 어느샌가 당연한 권리로 생각하게 된다.

누군가 빈민가에서 이와 비슷한 실험을 했었다. 빈민가 거주민에게 매일 은화를 하나씩 몰래 가져다줬다. 초반 빈민가 사람들은 누군가 집에 던져 주는 돈에 고마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일주일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다음에도 계속 은화가 하나씩 주어졌고 빈민가 사람들은 무뎌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날 은화를 주던 사람이 그냥 집을 지나치자 사람들은 화를 내기 시작했다.

“당신! 왜 은화를 주지 않는 거요?”

“내 은화는 어디 있소!”

빈민가 사람들은 자신들이 받던 은화를 당연한 권리로 생각한 것이다.

물론 회사의 근로자들과 빈민가 사람들이 같은 상황이라고 할 수는 없다. 직원들은 정당한 근로를 제공하고 회사 보상을 받는 셈이니까. 하지만 호의까지도 자신들의 근로 제공으로 인한 보상이라 생각하게 되는 것은 분명했다.

수안이 설명하지 않아도 강운모 회장은 그 이상을 생각해 낼 수 있었다.

“거기다 힘들이지 않고 얻는 것과 싸워서 쟁취하는 것. 같은 물건이라도 느껴지는 가치가 전혀 다르지.”

“동감입니다.”

사람들은 필요하지 않은 물건이라도 싸워서 쟁취하면 소중하게 여긴다. 가치 있는 물건이라도 공짜로 주어진다면 왠지 모르게 소중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좋아. 최 전무를 통해서 진행해 봐야겠어.”

“최 전무와 염 상무가 함께하면 올해 내에 강운 그룹 통합노조의 출범을 볼 수 있겠군요. 제가 미리 전달해 두겠습니다. 강운 홀딩스로 가 봐야 해서 먼저 나가 보겠습니다.”

“…….”

아들과 말을 하다 보니 벌써 여기까지 진척되어 버렸다.

“…내가 지금까지 무슨 소릴 한 거야?”

얼마 후 노동 조합에 절대 불가를 강요하던 강운 그룹 게시판에 특별한 내용의 공지가 걸렸다.

[강운 그룹 노동 조합 출범!]

[강운에 적을 둔 근로자라면 누구나 가입할 수 있습니다. 조합비는 최소로 책정될 것이며 강운 그룹 계열사 전부가 가입할 수 있습니다. 노동 조합 가입으로 인한 회사 내 불이익은 없으며….]

“이거… 여기 붙여도 되나?”

“그러게. 저러다 누구 잘리지, 싶은데?”

이들은 게시판의 마지막에 누구의 인장이 찍혀 있는지 확인하지 못해 하는 말이다.

“억!”

“왜?”

“회, 회장님이 이거 승인하셨어! 여기 봐!”

공지에 붙은 종이 마지막에 찍힌 승인자의 이름과 도장은 강운 그룹 강운모 회장의 것이었다. 그 옆에 강수안 부회장의 승인까지 있었다.

“커흡! 회장님과 부회장님이 승인했다는 뜻은….”

“진짜로 가입해도 된다는 말이야!”

“당장 가입하자.”

“당연하지! 하라는데 안 하면 오히려 불이익이 있을지도 모르지.”

강운 그룹 사내에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 * *

“스티븐이라는 녀석이 촉이 좋은가 봐.”

백발 중년인의 말에 앞에 앉은 또 다른 중년인이 답했다.

“해외 보안 업체는 매번 이용하는 업체를 찾기 마련인데….”

“그러니 촉이 좋다는 말이네. 우리가 준비한 걸 어찌 알고 그랬겠나. 잭.”

수안이 애용하던 클락슨의 사설 경호 업체에 잠입한 용병이 하나 있었다.

용병의 임무는 수안의 모든 동선과 경호 상황을 파악하고 외부에 정보를 전달하는 일. 하지만 애초부터 수안이 클락슨의 사설 경호 업체를 선택하지 않으며 일이 틀어져 버렸고, 자메이카에 들렀다 미국에 온 것도 예상외의 상황이었다. 파티엔 너무 많은 유명인사가 모여들어 작전이 쉽지 않았으며, 파티가 끝난 다음에는 바쁘게 비행기로 미국을 횡단했다. 덕분에 모든 계획이 틀어져 버렸다.

“고용한 경영자들이 나름 재미있는 짓을 했더군. 그걸로 위안 삼아야지 어쩌겠어. 프랭크 자네도 알지?”

“롱텀 보험 상품 말인가? 그거야 저들이 잘한 일이 아니라 BE 인베스트먼트가 헛발질한 것뿐이야. 이번에 스티븐 회장을 데려다가 제대로 겁을 줬어야 하는데 말이야.”

이들이 바로 골드만삭스와 모건 스탠리의 진정한 주인이었다. 금융회사 사장들이 BE 인베스트먼트를 눈엣가시로 봤던 것처럼 이들도 BE 인베스트먼트를 혐오하고 있었다.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며칠 가둬 두고 햇빛을 보여 주지 않을 생각까지는 했다. 살해 협박과 손가락 몇 개 자르는 것은 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미국의 진정한 권력자가 가진 힘을 조금만(?) 보여 주려 했을 뿐이다.

잔인한 일이지만, 이들에겐 그 어떤 위험도 없었다. 모든 일은 테러 분자의 소행으로 처리할 수 있었다. 그 정도 돈과 권력을 가진 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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