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권-탄압 (147/304)

탄압

그늘진 어둠

애인

아파트

강운모

차차차

궁금해도 참아

상대적인 가치

실적 보고

벤자민 VS 세종대왕

위기 대비

장준필

상환

처가살이

1차 대응

힘을 숨긴 사원

셋의 회동

다음 차례?

방어, 반격, 인수전

세 번째

로버트

D-DAY

디자이너

탄압

“기화 차 3차 입찰에서 인수 회사는…. BE 인베스트먼트로 결정되었습니다.”

“아….”

“끝장이다.”

“What the….”

수안은 너무 당연한 결과라 놀랍지 않았다. 하지만 옆에 있는 삼디 그룹 이정용은 세상이 무너진 표정이다.

“제, 젠장. 어째서 우리가….”

1차에 삼디가 낙찰받았고 2차는 입찰 자체가 무산됐다. 삼디는 3차에 큰 기대를 안고 있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형님도 얼른 돌아가서 보고하셔야겠네요.”

이런 공적인 자리에선 직급으로 불러 줘야 했지만, 나이는 자신보다 많은데 직급은 한참 낮았다. 게다가 평소 모르는 사이가 아니라 형님으로 예우해 준 것이다.

“수안아. 이거 어쩔 수 없었던 거지? BE 인베스트먼트가 미리 수를 썼겠지?”

이 와중에 면피를 먼저 생각한 모양이다. 이 회장에게 상당한 압박을 받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마음의 위안이야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지.’

“우리가 노력해서 따낼 수 있으면 좋겠지만, 우린 외화가 부족하잖습니까. BE 인베스트먼트와 우리는 경쟁 자체가 되질 않았어요. 형님 말대로 BE는 정부와 협상을 끝내고 결론을 받아 뒀을 겁니다.”

“그렇지?”

안심한 얼굴의 정용을 보면서 수안은 약간 양심에 찔렸다.

‘미안하오. 착한 형님. 이거 사실 내가 받았소. 협상도 내가 했고, 결론도 내가 내렸지.’

그나마 무시무시한 이희수 회장 덕에 빡빡한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이다. 재벌가 자제 중 착한 축에 속했다.

‘지금은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지만….’

수안은 이정용의 등을 툭툭 치며 간다는 표시를 했다.

돌아서 보니 빌리가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질문을 받고 있었다.

“결과를 예상하고 계셨습니까?”

“기화 차 부실 채권은 어떻게 정리하실 계획입니까?”

“구조 조정 규모는 어느 정도나 예상하십니까?”

“BE 인베스트먼트에선 앞으로 기화 차를 어떻게 경영할 계획입니까? 외국인 경영자가 파견될까요?”

빌리는 차가운 표정으로 기자들의 질문에 답했다.

“BE의 입장은 이후에 따로 발표하겠습니다. 그래도 한 가지만 답변을 드리자면….”

이어진 빌리의 말은 기자들과 입찰에 참여한 관계자들의 고개가 번쩍 들리도록 만들었다.

“혹독한 구조 조정을 끝내고 회사 정상화를 이룬 이후 기화 차 경영을 한국 기업에 맡길 생각입니다. 이는 사전에 협의한 사항으로 자세한 내용은 노 코멘트하겠습니다.”

“경영을 맡길 기업은 어디입니까?!!!”

“사전 협의를 했다는 뜻은 입찰 전에 이미 한국 회사와 합의했다는 말입니까?”

“구조 조정의 범위는 어디까지입니까?”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하지만 빌리는 기자들의 접근을 막아 주는 경호원들 사이로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고 빠져나갔다.

수안에게도 기자들이 붙어서 질문을 던졌지만, 묵묵히 자리를 옮겨 차에 탑승하고 빠져나갔다.

빌리가 다른 질문엔 답하지 않았지만, 구조 조정엔 확실한 답변을 했기에 발등에 불이 떨어진 사람들이 있었다.

“뭐야…. 다 자르겠다는 말이잖아?”

“설마. 우릴 자르면 차는 누가 만들 건데?”

“미국 놈이 기화 차 노조 맛을 제대로 못 봐서 그래. 한번 맛을 보여 줄 때 제대로 보여 주면 되겠지.”

* * *

이들의 바람은 부질없는 바람일 뿐이다.

어 두침침한 술집에 모여 있던 노조 위원들은 며칠 뒤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공장 입구에 진을 치고 있었다.

-노동자를 탄압하는 BE는 각성하라!

“각성하라!”

“각성하라!”

-노동자의 생존권을 보장하라!

“보장하라!”

“보장하라!”

이들이 길거리로 나온 이유는 구조 조정 때문이 아니었다.

새로운 기화 차 소유주가 공장에 새로운 규칙을 하달하면서 시작됐다.

-모든 차량 조립 근로자는 규정된 안전복과 안전모, 안전 고글을 착용한다.

-추가 근무와 특별 근무는 회사의 허락 없이 불가능하다. (부득이한 추가 근무는 회사에 의해 결정.)

-생산직 근로자의 보직은 회사가 결정하며 노조는 이에 간섭할 수 없다.

.

.

.

이 외에도 몇 가지 사항들이 죽 이어졌지만, 상위 세 개의 규칙들이 분노를 일으켰다. 이에 노조가 떨쳐 일어난 것이다.

-노동자의 생존권을 보장하라!

“보장하라!”

“보장하라!”

생존권을 보장받으려면 오히려 안전복, 안전모, 안전 고글을 착용하라는 지시를 환영해야 했다.

-노동자를 탄압하는 BE는 각성하라!

“각성하라!”

“각성하라!”

-외국인 사장은 퇴진하라!

“퇴진하라!”

“퇴진하라!”

추가 근무를 최소화하겠다는 결정이 어째서 노동자를 탄압한다는 것일까.

또한 회사가 근로자의 보직을 결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로 보인다.

이들이 왜 새로운 규칙에 떨쳐 일어났는지를 알려면 이전에 이들이 일하던 환경을 알아야 했다.

외주 업체는 규정된 근무복과 모자를 착용하고 조립 라인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정규직인 기화 차 근로자들은 자율에 맡긴다. 회사 점퍼와 모자가 있지만 아무도 입지 않는다.

추가 근무와 특별근무는 오로지 노조에 의해서 결정되며 이를 많이 하면 할수록 월급은 쭉쭉 올라간다. 노조위원장의 측근들이 이를 독점하고 있었고 퇴직을 앞둔 노조원이 있으면 무조건 이를 몰아 줘서 퇴직금 뻥튀기를 거리낌 없이 실행했다.

또한 생산 라인 내에서의 보직은 오직 노조 선택이 좌우했다. 회사에서만큼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던 노조원들이다. 노조원에게 가장 견딜 수 없는 규칙이 바로 세 번째 규칙이었다.

-노동자의 생존권을 보장하라!

“보장하라!”

“보장하라!”

수안은 그들의 행태를 보며 씁쓸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노동자로 있을 때는 나도 노조 편이었지.’

하지만 나중에 대현과 기화 노조의 실상을 알고 돌아섰다.

그들은 무늬만 노동자에 불과했다. 갑질과 집단 이기주의의 결정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았다.

“회장님 예상에서 한 치도 틀리지 않습니다.”

“…….”

수안은 공장 안에서 노조원들의 시위를 창문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빌리 사장.”

“예. 회장님.”

빌리는 임시로 기화 차 사장직을 맡고 있었다.

“제조 라인 패트롤 준비는 어떻게 됐지?”

“출격 대기 중입니다. 보내 주신 외주 업체 인원들의 업무교육을 마쳤고 체증을 위한 장비도 준비했습니다.”

사내 패트롤을 도입해 내부 문제를 해결하려고 계획한 수안이다. 노조원 절반이 밖에서 시위를 이어 가고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내부에서 태업으로 대응하고 있었다. 패트롤은 내부에서 태업으로 대응하는 인원들을 감시할 것이다. 패트롤에 관한 규칙도 하달되었지만, 그리 대단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경영진이 내보내기 전에 노조에서 막아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강성 노조를 잡으려면 언론을 잡아야 하는 거야. 패트롤을 통해서 저들의 패악질을 상세하게 기록해. 관련 기사가 나가면 저들도 버티지 못해. 그리고 모조리 잘라 버려. 이유야 얼마든지 있으니까.”

“…예. 회장님.”

BE 인베스트먼트의 대리인 빌리는 수안의 지시대로 패트롤을 보내 내부 시찰을 시작했고 많은 증거를 수집할 수 있었다.

기화 차 노동자들은 다시 일터로 돌아온 고마움을 느끼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오로지 노조를 위한 이기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그런 근로자의 태도에 빌리는 일말의 책임감도 느낄 필요가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리해서 자료 넘기세요. 최대한 상세하게 내보내 달라고 하세요.”

“예. 사장님.”

뉴스에서 기화 자동차 노동자의 실상이라는 보도가 나오며 관련 내용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3차 입찰까지 가는 국제경쟁 입찰로 기화 자동차를 인수한 BE 인베스트먼트. 하지만 최근 기화 차 공장에서는 회사가 회생했다는 기쁨이 아니라 확성기를 들고나온 노조원들로 북새통입니다. 정일훈 기자의 현장 영상을 보시겠습니다.

“저는 기화 자동차 공장 앞에 나와 있습니다. 현재 기화 자동차 노조원들은 회사 내부적으로 진행 중인 일들에 대한 불만으로 장외 투쟁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노동자를 탄압하는 BE는 각성하라!

-빌리 사장은 퇴진하라!

-노동자의 생존권을 보장하라!

“왜 이와 같은 일이 발생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BE 인베스트먼트에서 기화 차 공장에서 준수해야 할 것을 공지한 내용을 보시면 이와 같습니다.”

-모든 차량 조립 근로자는 규정된 안전복과 안전모, 안전 고글을 착용한다.

-추가 근무와 특별근무는 회사의 허락 없이 불가능하다. (부득이한 추가 근무는 회사에 의해 결정.)

-근로자의 보직은 회사가 결정하며 노조는 이에 간섭할 수 없다.

“아무리 살펴봐도 불합리한 내용은 찾아볼 수 없었고 오히려 근로자의 건강과 안전을 위한 사항과 과도한 추가 근무에서 근로자를 해방하는 내용으로 읽힙니다. 세 번째 사항도 다르지 않습니다. 직원의 업무 할당은 회사의 권한입니다. 노조에서 같은 근로자의 보직을 결정했다면 이야말로 불합리한 일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는 조항입니다. 이에 기화 차 경영진에 관련 정보를 요청했고 특별한 영상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재생되는 영상에는 졸고 있는 생산 라인 직원들이 여럿 송출되고 있었고, 정상적인 근무복을 입은 외주 업체 직원들 사이로 자유로운 복장으로 건들거리며 돌아다니는 직원들이 찍혀 있었다.

“보시는 영상에서 안전 복장을 착용하고 안전화를 신은 직원들은 기화 차의 정규직 직원들이 아닙니다. 협력 업체만 저렇게 안전복을 요구하고 본인들은 복장에 구애받지 않고 제조 라인에 들어섭니다. 기화 차의 새로운 경영진이 근로자의 안전을 위해 복장 준수를 요구한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어진 영상에서도 보통의 회사에서는 보기 힘든 근로자의 행태를 계속 보여 주고 있었다.

“휴게 시간으로 보이지만, 사실 근무 시간입니다. 쉬는 직원들 뒤로 여전히 생산에 매달린 외주 업체 인원들이 보이고 있습니다. 삼삼오오 모여 잡담을 하지만 누구도 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저들은 노조에 가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금연 구역으로 지정된 공장 내에서 담배를 태우는 정도는 예사로 벌어집니다. 생산 라인에서 차량을 조립하면서도 담배를 입에 물고 연기를 뿜어냅니다. 노조원들 사이에서 문제가 발생해도 사측은 끼어들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기화 차 노조는 기업 내에서 거대 권력으로 통하고 있었습니다. SBS 정일훈이었습니다.”

-상당히 충격적인 영상입니다. 취업난으로 허덕이는 요즘 국내 고용 시장을 생각하면 더더욱 충격입니다. BE 인베스트먼트는 이번 파업과 관련해서 단호한 대처를 진행하고 있음을 밝혀 왔습니다. 공장이 멈추는 한이 있어도 불량 근로자를 색출해 구조 조정 명단에 올리겠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수안은 이제 강운 그룹 계열로 편입한 SBS 낮 뉴스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수화기를 들었다.

-SBS 경영전략 비서실입니다. 말씀하십시오.

“강운 그룹 부회장 강수안입니다.”

-헙!

“최 사장 바꿔 주세요.”

-예, 예.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곧 연결하겠습니다.

통화 연결음이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사람으로 연결됐다.

-최정무입니다. 부회장님.

“오늘 기화 차 뉴스 봤어요. 인상적이었습니다.”

언론을 움직일 시간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