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력사
다음 날 수안은 전날 오려던 장소에 도착했다. 수안은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물었다.
“배 사장. 직원들은 요즘 뭐 해?”
“평소와 다르지 않습니다. 회장님이 내주신 숙제를 해결하느라 바쁘죠.”
“숙제는 무슨….”
수안이 지시한 자동차 편의 장치를 개발하는 것이 이들의 임무였다. 아직 국내 차량에 적용되지 않은 미래의 편의 장치들. 수안의 기억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직원 하나가 수안을 알아보고 인사하자 저마다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수고 많습니다. 하던 일 하세요. 나 금방 갈 테니 긴장할 필요 없습니다.”
직원들은 수안이 작은 집무실로 몸을 감추자마자 주변을 돌아보며 묻기 시작했다. 숙제를 내준 사람이 왔으니 진행률을 파악하기 위함이다.
“숙제 끝난 사람 있어?”
“넌? 사이드미러 경고등 아직도 붙들고 있어?”
“그게 뚝딱 해결될 일이냐? 신형 레이더 측후방 경보기랑 같이 들어가야 하는데 네가 먼저 개발을 끝내야 내가 실험을 할 거 아냐?”
“…쏘리.”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직원은 스마트키 개발을 담당하던 직원을 찾아냈다.
“거긴 어때?”
“움화화화. 완전 방수는 50%. 원격 충전은 2% 완료.”
스마트키 개발 직원은 개발품을 물에 넣으면 딱 50%만 물이 찬다고 말했다. 물었던 직원의 얼굴이 썩어간다.
“뭐야. 하나도 안 됐잖아?”
“시작이 반이야.”
“썩을….”
고개를 돌린 직원은 어라운드뷰를 개발하는 직원의 눈 아래에 드리운 검은 그늘을 볼 수 있었다.
“쟤는 며칠째 집에 못 간 거야?”
“쟤만 못 갔냐? 헤드업 디스플레이 개발하는 애도 마찬가지야.”
“안 보이는데?”
“샤워하러 갔어. 어제 밤새고 아까 숙소에서 두 시간 자고 왔다고 하더라.”
“팀장님은 아예 집에 안 가시잖아.”
가장 골머리를 앓고 있는 사람이 이들의 팀장이다.
“디자인이랑 같이 묶여 들어가니까 그렇지.”
팀장이 맡은 분야는 엠비언트라이트. 실내 도어와 센터 콘솔에 은은한 조명으로 사람들을 환장하도록 만들 개발품이다. 문제라면 아직 기화 차 입찰도 끝나지 않았고, 실내 디자인 분야와 함께 협업해서 완성을 봐야 했기에 앞으로도 오랜 시달림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 * *
개인 집무실로 들어온 수안의 표정은 문을 닫고 나서부터 굳어져 있었다.
“…배 사장.”
“예.”
“애들 꼬라지가 왜 저래?”
“…죄송합니다.”
방금 직원들을 보면서 별다른 말을 하진 않았지만, 직원들이 곧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이었다.
면도는 언제 했는지 얼굴엔 수염이 듬성듬성 나 있었다. 또한 꿉꿉한 노총각 냄새가 사무실에 가득했다.
“저러다 애들 다 죽어. 내가 언제 집에도 보내지 말고 일을 시키랬어? 아무리 급해도 쉬면서 해야 할 거 아냐?”
“…집에 가라고 했는데도 재미있다고 안 간답니다.”
“재미?”
“대운이나 대현이랑은 전혀 다르다고 합니다. 개발하는 재미도 있고 사람들도 좋고…. 저들 말로는 일이 좋아서 한다고 하는데….”
“그래서 말리기 힘들다?”
“예. 게다가 남직원이 100%라서 서로 거리낄 것도 없죠. 가끔 술도 같이 먹고 사우나도 다녀오고 합니다.”
“나 참.”
“씻지 않는 부분은 해결이 어렵습니다. 개발팀이 워낙에 자유분방한 분위기이기도 하고요.”
번뜩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있었다.
“크흐흐. 그거라면 한 방에 해결할 수 있지.”
“…방법이 있으십니까?”
“어차피 필요했는데 잘됐다. 직원들이 만들어 낸 제품을 재탄생시킬 산업디자인 담당 여직원 둘만 투입해. 더블 스타 내에서 찾아도 되고 새로 뽑아도 되고.”
“산업디자이너가 필요하긴 하지만, 여기 여직원을 넣으시려고요? 보안도 그렇고….”
‘남직원들만 있는 이곳에 여직원이 오면 남직원들이 얼마나 불편할지….’
“그야 배 사장이 믿음직한 여직원으로 뽑으면 되잖아. 기준은 첫째가 신뢰.”
“예. 그야 당연히….”
“둘째는 아름다운 외모.”
“네?”
“셋째는 털털한 성격.”
“……?”
처음 조건 이외에는 전부 이해하기 어렵다.
“쟤들하고 어울려야 하잖아. 얼굴 예쁘고 성격 좋은 여직원들이 함께 있으면 단숨에 말끔해질걸?”
“흐흐흐.”
이제야 배영성도 이해할 수 있었다.
“두 사람만 투입하면 될까요?”
“아마 또 뽑아야 할걸?”
예전 다니던 회사 근처에서 있었던 일이다.
사내 직원 식당을 담당하는 영양사가 예쁘면 몇 번씩 대시가 들어오고 결국은 직원 중 하나와 열애 그리고 결혼식까지 순식간이었다. 그다음 영양사가 와도 같은 루트를 타고 결혼으로 골인. 영양사는 계속 바뀌고 회사의 노총각 숫자는 점점 줄어갔다. 이거야말로 직원들을 위한 천상의 복지가 아니겠는가.
“여직원이 그만두면 또 뽑아야 할 수도 있죠. 이런 환경에서 버틸 수나 있을지….”
“두고 보면 알겠지.”
여직원들은 공주 대접을 받으며 찬란한 직장 생활을 경험할 것이다. 수컷들은 암컷의 관심을 받으려고 구애를 이어 가기 마련이다.
“오늘 몇 군데나 가 볼 수 있을까?”
“많아야 다섯 회사는 가 보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냥 생산 시설 좀 둘러보고 인사만 하고 나오면 되는데 말이지.”
“중소기업 사장들은 회장님이 조금이라도 더 오래 회사에 계셔야 대우받는다고 생각할 겁니다.”
‘원래 작은 중소기업은 나 같은 대기업 회장 아들이 거들떠보지도 않지.’
시간이 지나도 마찬가지다. 중소기업은 기술력을 빼먹고 이익을 갈취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대기업이 태반이다.
“그럼 천천히 돌자. 사장들 얼굴도 익힐 겸.”
“예.”
* * *
“아이구. 강운 그룹 부회장님이 여기까지 와주시고요.”
수안보다 나이가 한참이나 많은 협력사 사장은 머리가 땅에 닿도록 인사하고 있었다.
속으론 씁쓸한 기분이 들지만, 그렇다고 너무 상대를 위해 주기만 해서도 안 된다. 얕보였다간 한도 끝도 없이 바라는 일만 많아진다. 강성 노조만큼이나 위협적인 존재가 바로 협력사다.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카스콘과 협업할 일이 상당할 겁니다. 잘 부탁합니다.”
“…기화 차는 강운 그룹 품으로 들어오는 것이 확실한 모양입니다.”
아직 기화 차 3차 입찰이 끝나지 않은 상태였고 카스콘은 본래 기화 차 1차 협력사였다. 당연히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누가 인수하건 상관없습니다. 이미 카스콘과 우리는 신차 개발을 진행 중이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긴 한데….”
기화 차 입찰이 무위로 돌아가면 자신들이 개발하던 차량 제동 장치나 다른 개발품도 판로를 잃을 수 있었다.
“의심도 많으시네. 내가 여기까지 왔는데 날 못 믿으면 어쩐답니까.”
“죄송합니다.”
그래도 불안감을 없애 줄 필요는 있었다.
“강운이 인수하지 않아도 삼디는 인수 불가능이고, 대현이 있지만, 대현은 자기 앞가림하기에도 바빠요. 남은 것은 해외 기업인데 해외 기업이 인수하면 우리 강운과 신차 개발 업무 협약을 맺기로 확정되어 있어요. 강운이 인수하면 말할 필요도 없겠죠. 최 사장님이 걱정할 일은 벌어지지 않습니다.”
“아! 강운은 다 계획이 마련되어 있었군요! 역시 대기업.”
“계획도 없이 우리가 금형 선급금을 남발하겠습니까?”
K시리즈의 빠른 출시를 위해 관련 개발비를 이미 집행 중이다. 자동차 개발은 혼자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부품사의 협력도 필수다. 당연히 부품사에도 관련 개발비가 소요되고 있었다.
그중에서 카스콘은 제동 장치와 구동 장치, 현가 장치와 조향 장치를 OEM 형식으로 제조 판매하는 기업으로 상당한 규모의 중견기업이었다. 카스콘에서 생산하는 공장 자동화 장치까지 생각하면 놓칠 수 없는 협력사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카스콘에 걸음 한 것이다.
“그럼요. 그럼요.”
“이제 공장을 돌아봅시다. 공장 규모가 커서 그냥 들어왔다간 길을 잃겠습니다.”
“안내하겠습니다.”
수안은 공장을 둘러보며 사장의 설명을 듣고 이것저것 묻기도 하며 공장 투어를 마쳤다. 공장 규모가 상당했기에 시간도 오래 걸렸다.
“생산한 제품의 품질관 리만 확실하면 더할 나위 없겠군요.”
“불량률 제로에 도전하겠습니다.”
“검수 똑바로 하셔야 할 겁니다. 강운은 예전 기화 차와 질적으로 다를 겁니다. 구매부장에게 술이나 사 주고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일랑 일찌감치 접어 두세요. 담당자에게 접대가 있었음을 확인하면 해당 담당자는 해고, 관련 업체는 즉시 퇴출입니다. 이 부분을 계약서에도 명시할 생각이고요.”
“…….”
“벌써 겁먹은 건 아니죠? 못 하겠으면 지금 얘기하세요. 지금이라도 업체를 바꾸겠습니다.”
“정말로 접대 안 받습니까?”
표정을 보아하니 품질 걱정을 하는 얼굴이 아니라 접대를 받지 않는다는 말에 놀란 것 같다.
실제로 계약서에 관련 내용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납품하는 협력사는 관련 문구가 있어도 접대는 필수적인 요소로 생각했고, 실제로도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었다. 일부 구매부장은 협력사로부터 아파트를 받기도 하고 수억 원의 금품을 수수하기도 했다. 그만큼 협력사는 더 많은 돈을 받아가고 추가된 비용은 고스란히 소비자에게 전가된다. 판매되는 차량 가액이 그만큼 높아진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자동차를 판매하는 기업의 수익이 높아질 것도 아니다. 수안은 이를 애초에 제거해 가격 경쟁력을 더하고자 하고 있었다.
“최 사장님이 그간 얼마나 깔끔하게 회사를 운영했는지 잘 알고 있어요. 우수한 품질의 제품을 생산하면서도 항상 동종 계열 부품사보다 단가가 낮았죠.”
중소기업을 길들이는 대기업의 횡포가 만연한 동네에서 겨우 살아남은 기업이다.
“…예. 그랬습니다.”
“카스콘 기술력이 좋아서 빼먹으려고 수작을 부린 겁니다. 앞으론 그런 일 없습니다. 기술 개발에 투자하고 우수한 부품을 만드세요. 불합리한 일은 없을 겁니다. 구매 담당자에 대한 감사는 일상적으로 진행할 생각입니다. 경영진 친인척이 그 자리에 앉을 일도 없어요. 강운 그룹은 단 한 푼도 허투루 낭비하지 않습니다.”
‘기존 기화 그룹과는 전혀 달라. 대현과도 다르고 대운과도 다르다.’
“감사합니다. 부회장님.”
“당연한 일입니다.”
“오늘 힘드셨을 텐데 얼른 식사 장소로 옮기시지요.”
“그런 의미에서….”
수안은 마침 방금 한 말로 핑계를 댈 수 있었다.
“저부터 실천해야 할 것 같군요. 점심 식사는 고생한 직원들과 함께하십시오.”
“고작 식사일 뿐인데 말입니까?”
“예외를 두면 규칙이 무너집니다. 그룹 부회장도 쫄쫄 굶고 돌아가는데 감히 협력사 담당 직원이 얻어먹을 수 있겠습니까? 나중에도 밥 사 달라는 우리 회사 직원이 있거든 본사에 고발하세요. 협력사 납품에 불이익은 전혀 없습니다. 해당 직원만 잘라 버리겠습니다.”
“후아….”
“기화 차 입찰이 끝나면 또 볼일이 있겠지요. 나오지 마십시오. 다른 협력사에도 가 봐야 합니다.”
수안은 차로 돌아와 배영성에게 말했다.
“근처에 맛있는 집 있나?”
“기사식당이 제일 낫습니다.”
솔직히 배가 너무 고파서 식사 가자는 카스콘 사장의 말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뭐든 위에다 집어넣자. 뱃가죽이 등에 들러붙었어.”
“예. 회장님.”
* * *
그 뒤로 며칠간 수안과 배영성은 K시리즈 생산을 함께할 협력사에 방문했다. 이미 배영성이 1차로 거른 회사들이라 진상(?)이라고 할 만한 사장은 없었고 회사 직원들에게도 신망이 두터운 사장들이 대다수였다.
협력사 방문의 마지막 일정은 이현창의 아들들이 운영하는 공조기 회사였다.
수안은 예전에 한 번 가 봤던 길이라 조금은 익숙하다. 강변의 예쁜 숙소는 이미 완성되어 있었고, 봄의 기운이 사방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숲도 지날 수 있었다.
수안이 도착해 대한공조로 들어서자 한 사장과 이현창의 두 아들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민망한 표정으로 고개 숙인 둘은 수안의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이미 수안이 마련해 준 아름다운 별장에서 거주하고 있었고, 회사에서 법인차량까지 받아 운행하고 있다. 아직 사장이 아니지만, 직원들은 사장이나 다름없이 대해 줬다. 한중혁 사장도 이들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으니 직원들이 이사 직급의 둘을 대우할 수밖에 없었다.
“저희는 꿈에도 몰랐습니다. 회장님.”
“괜찮습니다. 과거에 얽매이지 마시고 완벽한 제품만 만들어 주십시오.”
“예. 최고 품질의 공조기를 만들어 보답하겠습니다.”
“특히 내부 버튼의 간접 조명에 신경 써야 합니다. 이미 관련 설계도는 받아 보셨죠?”
“예. 차량 내부에 들어가는 공조기 버튼은 설계된 대로….”
“그거면 됐습니다. 나머지는 실물이 나와야 판단할 일이죠.”
지금 이 자리에서 협력사의 제품 완성도까지 확인할 수는 없었다.
“다른 공조기 회사에 절대로 밀리지 않겠습니다.”
대한 공조만으로 기화 차 공조기를 납품받을 수는 없음이다. 모든 협력사의 부품은 최소 이원화를 기준으로 짜나가고 있었다. 공조기 관련 회사는 대한 공조 외에도 두 개의 협력사가 더 존재하고 있었고, 그 사이에서 얼마나 더 많은 납품 비중을 차지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그 각오를 끝까지 가져가 주십시오. 그러면 50% 이상의 비중을 차지할 수도 있을 겁니다.”
둘 다음에 만날 사람은 당연히 회사를 맡긴 한중혁 사장이다.
“회장님.”
“한 사장. 고생 많지?”
“아닙니다. 회장님. 기쁘게 일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봐. 기화 차 입찰 끝나고 자리 잡으면 부를게.”
“예. 회장님.”
기화 차 입찰이 끝나도 한중혁 사장은 조금 더 수고해 줘야 했다. 이현창의 두 아들이 제대로 사장 노릇을 하기까지 옆에서 경영자 수업을 맡아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 *
그리고 최종 방문지는 회사가 아니라 지방의 한 체육관이다.
“마지막은 외주 협력 업체입니다.”
“여기 다 모아놨다고?”
“예. 그냥 모아 두기만 하긴 민망해서 식사도 준비하고 선물도 챙겨놨습니다. 외주 업체 사장들은 따로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끝나고 보시면 됩니다.”
“굿. 가자.”
체육관으로 들어서자 많은 사람이 웅성거리며 떠들고 있었다. 수안은 배영성과 함께 가운데를 가로질러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수안의 걸음이 강당을 반쯤 오자 웅성거림이 점차 잦아들었고, 강당에서 단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를 때 강당의 모든 사람이 숨죽이고 있었다.
수안은 잠시 마련된 자리에 앉았고 배영성이 먼저 마이크를 잡았다.
“협력사 임직원 여러분. 급하게 요청했음에도 이렇게 자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배영성은 조용한 강당의 분위기를 보고 말을 이어 갔다.
“오늘 협력사 여러분을 모신 것은 앞으로 특별한 약속 하나를 드리기 위함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강운 그룹 강수안 부회장님을 모셔서 들어 보겠습니다. 박수로 맞아 주십시오.”
수안은 아직은 미심쩍은 듯이 설렁설렁 손뼉 치는 소리를 들으며 마이크 위치를 조정했다.
“아. 아. 잘 들립니까?”
“…….”
“반갑습니다. 자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 아무래도 신뢰를 드리려면 제가 직접 나와서 말씀드리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강운 그룹 부회장 강수안입니다.”
수안은 옆으로 나와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지금은 수안이 고개를 숙이지만, 끝날 때는 이들이 감사한 마음을 가질 것이다.
“지금까지 여러분은 기화 차 정직원들과 같은 일을 하면서도 대가는 절반도 받지 못했습니다. 보통은 55%를 받으셨고 일부는 50%에도 못 미쳤다고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속한 업체의 이득까지 제외한 수치이니 실제로 여러분이 받은 임금과 일치 할 겁니다.”
갑과 을로 대변되는 자동차사와 부품사와의 관계. 하지만 외주 인원은 을이라고 할 수도 없는 위치에 있었다. 정직원들이 쉬운 일을 하면서 알짜 연봉을 받아 가는 동안 외주 협력 직원들은 힘든 일에 치이고 저렴한 임금에 치이며 가장 밑바닥에서 박박 기는 현실이다.
“한데 이젠 기화 차가 법정 관리를 지나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가느니 마느니 하고 있지요. 요즘 일거리 있으십니까?”
“…….”
이젠 그 저렴한 일자리마저도 없었다.
기화 차는 이미 법정 관리를 넘어 해외로 팔려 버렸고, 쌍륭 자동차는 대운에게 넘기려다 아직도 표류하고 있으며 쌍륭을 먹으려던 대운까지 위태위태했다. 남은 것은 대현인데 이미 기존 협력사가 빵빵한 곳에서 뭐 하러 기화 자동차 외주 직원들을 쓰겠는가.
이미 몇몇 인원들이 다른 일거리를 찾아 떠났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마지막 희망을 걸고 이곳에 찾아온 것이다.
“국내 금융 위기로 고용 시장이 얼어붙었고 건설 일용직으로 나가자니 이미 배운 자동차 조립 기술은 쓸모가 없겠지요.”
배우지 못해도 할 수 있는 일이니 왜 못하겠는가. 하지만 요즘은 그마저도 힘들다. 건설 시장이라고 위기를 피해가진 못하기 때문이다. 일하려는 사람은 넘치는데 일거리는 너무 적었다.
“당장 내일 먹고살 걱정을 하시는 분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먼 걸음을 해 주셨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수안은 다시 짧게 고개를 숙이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강운 그룹의 기화 차 인수는 쉽지 않습니다.”
동요가 생기기 전에 얼른 말을 덧붙인다.
“하지만! 기화 차의 운영은 강운 그룹이 맡을 겁니다. 아니 내가 맡습니다. 이는 이미 확정된 사항이라고 생각하셔도 됩니다. 3차 입찰로 누구의 품에 기화 자동차가 들어가건 내가 기화 자동차를 운영합니다.”
““워어….””
소란이 커지기 전에 수안은 목소리를 높였다.
“물론 여기 계신 여러분은 이 비밀을 지켜 주셔야 합니다. 내일 3차 입찰이 있으니까요.”
내일 기화 자동차 3차 입찰이 시작되고 결정지어진다. 그사이 퍼져 나가도 큰일은 없을 것이다.
“저는 기화 차의 기존 생산직 인원을 끌고 가지 않으려 합니다. 모두 쳐 낼 겁니다.”
“……!!”
“그래서 기화 자동차 생산을 여러분께 맡기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다 알지 않습니까? 누가 진짜 기화 차를 만드는지! 누가 차를 생산하며 손에 기름때를 묻혔는지! 누가 가장 고생했는지!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
기이한 정적이 강당을 채우고 있다.
“나도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 여러분이 주인공이었습니다! 난 파업을 일삼고 불합리한 관행을 만들던 기존 인원들을 내치고 여기 있는 외주 인원으로 그 자리를 채우겠습니다. 지금까지 여러분들을 이끌고 온 사장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습니다. 오늘부로 외주 협력 업체는 통폐합의 길을 갑니다.”
“헛!”
이것이 외주 인원들을 한자리에 모은 이유이자 외주 협력 업체 사장들을 모아 둔 이유였다.
“기존 1차 협력사와 마찬가지로 외주 협력사는 기화 자동차의 가장 높은 협력사 위치에 있을 겁니다. 불합리한 보상은 이제 없습니다. 고생한 만큼 임금을 받아 가십시오. 앞으로 기화 차는 계속해서 여러분이 만들게 될 겁니다. 하지만!”
또 하지만이다.
“재차 당부합니다. 오늘부터는 비밀을 지켜 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노조를 몰아내고 그 자리를 당신들이 차지합니다.”
“아….”
“지금까지 말씀드린 사항에 동의하십니까?”
동의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기이했던 정적은 열기로 바뀌었고 사람들은 환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우아아아아!!!!”””
수안은 다시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협력 업체 사장들이 모여 있는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수안이 걸음을 옮기자 사람들이 저마다 자리에서 일어나 손뼉을 쳐준다.
아까완 다른 힘찬 박수 소리.
희망을 본 사람들의 박수였다.
짝짝짝짝.
“부회장님 파이팅!”
“강운이 최고다!”
수안은 손을 들어 화답하고 모습을 감췄고 나머지는 배영성이 맡았다.
“뷔페 차량이 곧 도착합니다. 기화 차 협력사 직원 여러분께서는 충분히 드시고 회사에서 준비한 선물도 받아 가십시오.”
벌써 기화 차 협력사로 부르는 배영성이다.
* * *
수안은 외주 협력사 사장들과 하나하나 악수하며 회의실 상석으로 올랐다.
먼저 내뱉은 말은 그간의 노고를 위로하는 말이다.
“그간 수고 많으셨습니다. 죽고 싶을 만큼 힘든 나날이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버텨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부회장님이 보살펴 주셔서 지금까지 저희도 직원들도 죽지 않고 살아 있습니다.”
“모두 부회장님 덕분입니다.”
배영성과 김현성에게 외주 업체를 챙기라고 지시할 때부터 계획된 일이다. 둘은 예전부터 외주 업체와 부품 협력사를 지원했기에 지금까지 돌아본 부품사 대부분도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 것이다.
당장 폐업할 판국에 나타난 구세주는 기화 차 외주 업체의 연명을 도왔고 그 지원이 지금까지 이어졌다. 주변엔 이 지원을 받지 못해 폐업한 업체가 상당했다.
남은 외주 업체들은 그 직원들까지 흡수하며 오히려 규모를 키워낼 수 있었다. 지금까지는 힘겹게 유지했지만, 기화 차가 다시 날개를 펴면 외주 업체도 다시 기지개를 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금 지원 조건은 훗날 통폐합에 찬성할 것. 아주 간단했다.
자신들이 가진 회사의 지분 가치는 이미 충분히 받았다. 남은 것은 새로운 법인이다.
“통폐합하는 외주 협력사는 여러분과 직원들이 자본금을 모아 새로 법인을 설립합니다. 직원이 곧 회사의 주인입니다. 퇴직하는 시점에는 무조건 회사로 반납해야 합니다. 그래야 외부의 참견을 막을 수 있을 겁니다. 아! 통폐합이라고 해서 단독 법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최소한 3개 이상의 법인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서로 경쟁을 통해서 발전합니다.”
외주 업체 통폐합을 위한 설득은 필요 없었다. 오늘은 직원들에게 발표하는 자리였을 뿐이다.
“앞으로 1차 협력사 뒤로 줄줄이 이어지는 외주 하청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시작이고 끝입니다. 직원 고용 계약은 유동적으로 진행하시고 시시때때로 수를 늘렸다 줄였다 하셔야 할 겁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대기업이 할 수 없는 일이라 여러분에게 맡깁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부회장님. 저희는 은혜도 모르는 금수가 아닙니다.”
쭉정이를 걸러내고 알맹이만 남겨서 추수했기에 이렇게 사람다운 사람만 남아 있다.
“사장님들 감사합니다.”
수안이 고개를 숙이자 사장들도 얼른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우리 잘해 봅시다.”
“예! 부회장님.”
“잘 부탁드립니다.”
“사랑합니다!”
수안은 협력 업체 사장들에게 먼저 나가서 직원들에게 결정된 사항을 전달하라고 보내고 조용히 빠져나왔다.
“타시죠. 직원들에게 붙잡히면 곤란하실 겁니다.”
“그래. 가자.”
외주 직원들 얼굴엔 오랜만에 미소가 걸렸다.
수안은 차를 타고 지나가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음식 부족하진 않겠지?”
강당 안에 있던 사람들의 숫자가 상당했다. 늦게 도착하는 사람들까지 있어 숫자는 자꾸 불어난다.
“넉넉하게 준비했습니다. 아무리 대식가라도 저건 다 못 먹습니다.”
“술은?”
“술에 빠져 죽을 만큼 가져다 놨습니다.”
“큭. 괜히 물어봤네.”
.
.
.
기화 차 3차 입찰 결과 발표가 있는 날이다.
기화 차 관계자들과 채권단은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화 차 3차 입찰에서 인수 회사는….”
<『재벌가에 끼어들었다』 8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