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하늘을 날아
수안은 배영성과 함께 오바마를 만났다.
“하하. 당신을 직접 볼 수 있다니 오늘 정말 운이 좋군요.”
“반갑습니다. 의원님.”
서로 악수를 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오바마는 급한 볼일이 있는 모양이다.
“나도 미스터 강을 만나서 반갑지만, 오늘 중요한 손님과 약속이 있어요. 이걸 어쩌죠?”
“What?”
‘오늘 약속은 나와 잡혀 있을 텐데….’
이방효 사장은 분명 오바마 의원과 약속을 잡아 뒀다고 말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여길 들어올 때 상황을 떠올리면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들어올 때 왜 아무도 묻질 않았지?’
수안은 방금 자신을 안내해 준 오바마의 보좌관을 돌아보며 말했다.
“내가 금메달리스트라서 그냥 들여보내 줬나요?”
그는 자신의 이름도 묻지 않고 그냥 의원실로 안내한 것이다.
“당연하죠. 의원님은 당신의 빅팬입니다. 저도 그렇고요.”
수안은 왜 오바마가 자신의 방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지 깨달았다.
“하아. 다시 소개하죠. 육상 선수가 아니라 BE 인베스트먼트의 회장으로 이 자리에 온 스티븐 강입니다. 오바마 의원님.”
“…당신이 BE 인베스트먼트의….”
“이 정도 실수는 아무것도 아니죠. 앞으로도 당신을 지지하겠습니다. 안타깝게도 표를 던져 줄 수 없겠군요. 제가 미국인이 아니라 아쉽습니다.”
“하. 하하하.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선수가 날 지지하고 있었다니 오늘 너무 기분이 좋습니다.”
수안이 BE 인베스트먼트 회장이라는 것보다 자신을 지지한다는 말에 의미를 두고 있었다.
‘뭔가 달라도 다른 사람이야.’
“거기다 넉넉한 후원까지 줄 수 있는 사람이죠. 앞으로 종종 만나러 오겠습니다.”
“언제든 환영입니다. 그보다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부탁이요? 들어드릴 수 있는 일이라면 제가 도와드려야죠.”
오바마는 기대감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저와 같이 달려 주시겠습니까?”
뜬금없는 달리기 요청이다. 농담 삼아 중요 거래처에 달리기로 접대하겠다고 배영성에게 말한 적은 있지만 실행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달리기 말입니까? 정말이요?”
“당신 곁에서 함께 달려 보는 것이 내 소원이었어요.”
수안은 오바마의 태도가 진정한 팬의 자세라고 생각했다.
“좋습니다. 오늘 내 최고 속도를 보여 드리죠.”
수안은 비서들이 급하게 산 운동화와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공원을 달리기 시작했다. 곁에는 오바마가 함께하고 있었다.
“하아. 하아.”
오바마에게 대화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급하게 뛰는 심장 소리가 더는 뛸 수 없다고 유혹하고 있었고 가빠오는 숨은 자꾸만 다리를 멈추라고 한다.
“농구를 좋아하셔서 그런지 체력이 상당하시네요. 그래도 잠시 쉬었다 갈까요?”
수안은 옆에서 뛰면서도 흐트러짐 없이 대화를 할 수 있었다.
“하아. 하아… 괜찮….”
“천천히 오십시오. 저는 오랜만이라 속도를 내고 싶군요.”
수안의 허벅지에 힘이 들어갔다. 그 힘은 무릎을 통해 종아리로 전달되고 발바닥을 통해 터져 나왔다. 수안의 몸은 달리는 와중에도 튕기듯 앞으로 치고 나간다.
타다닥.
순식간에 오바마와 거리가 멀어진다.
수안은 멀리까지 전속력으로 달리다가 반환점을 돌고 다시 오바마 옆으로 다가와 같이 뛰기 시작했다.
“후아. 역시 좋네요. 이렇게 뛰기 좋은 공원이라니.”
‘…정말 빨라. 미치도록 빠르다!’
눈앞에서 세계 최고의 육상 선수 속도를 본 소감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수안은 오늘 리미트를 해제하고 달리고 있었다. 누가 기록을 체크 하지도 않으니 상관없었다.
“또 갑시다! Go Go!”
속도를 줄였던 둘이 다시 속도를 올렸다. 계속 이런 방식으로 간격을 두면서 제대로 운동하는 둘이다. 배영성은 일찌감치 낙오되어 벤치에 앉아 있었다. 손에는 핫도그까지 들고 먹고 있다.
“회장님하고 달리기라니…. 미쳤지.”
예전부터 함께 달리긴 했지만, 일정 코스 이상은 함께할 수 없었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보다 더 큰 차이가 국가 대표와 일반인의 차이다.
“이러다가 오늘 미래의 미국 대통령이 쓰러지는 건 아닌지….”
배영성의 걱정과 달리 오바마는 훌륭하게 수안과 운동을 마쳤다.
“하악. 하악.”
“원래 이렇게 숨이 멎을 것처럼 힘들 때까지 해야 운동이 됩니다. 폐가 터질 것 같은 이 기분. 정말 좋지 않습니까?”
“하아. 하하. 하악. 하하하하.”
땀이 줄줄 흐르고 숨이 턱까지 차올랐는데 웃음이 나왔다.
“정말. 하아. 대단해.”
잠시 벤치에 앉아서 숨을 가다듬은 오바마가 말했다.
“오늘 난 내 리스트에서 한 줄을 지울 수 있겠어요.”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들을 적은 리스트인가 보죠?”
“정답입니다. 세계 최고 선수와 함께 달릴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미스터 강.”
“나도 영광이었어요. 오바마. 당신과 다시 달릴 날을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또 와주겠습니까?”
“미국에 오면 무조건 당신이 있는 곳을 찾아오겠습니다. 얼마나 자주 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그래도 후원금은 끝없이 당신에게 향할 겁니다.”
“오우. 덕분에 아무런 걱정도 없이 정치를 할 수 있겠군요.”
“물론이죠. 정치에만 전념하시라고 드리는 작은 선물일 뿐이죠.”
선물이라는 말에 오바마의 표정이 살풋 굳어진다.
“훗날 BE에게 무슨 보답을 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난 그저 초선 상원의원일 뿐입니다. 과한 호의는 제가 감당하기 어려워요.”
“거기까진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세상에 BE 인베스트먼트를 걱정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미국 월스트리트 4대 금융기관으로 손꼽히는 BE 인베스트먼트를 뭐 하러 걱정한단 말인가.
“하하하.”
웃는 오바마에게 수안은 마저 말했다.
“BE 인베스트먼트는 민주당 의원들 뿐 아니라 공화당에도 후원하고 있습니다. 그중에 당신은 내가 특별하게 선택한 사람이죠. 후원금 때문에 염려할 일은 하나도 없어요. BE는 다른 기업들처럼 무언가를 바라고 후원하지 않습니다. 그저 주변 기업들과 평등하게만 대해 주면 됩니다. 절 보면 알지 않습니까. 전 미국인이 아닌 외국인, 그것도 아시안입니다.”
“…….”
흑인과 동양인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 벽을 느낄 수 있는 미국이다.
“이해했습니다. 미스터 강. 나도 차별을 공감하고 있어요. 미스터 강이 왜 날 선택했는지도 알 것 같군요.”
오바마는 자신이 흑인이라서 수안의 선택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우린 미국 사회에서 여전히 변두리에 존재하는 인종이죠. 난 당신이 크게 성공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당신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자랑거리가 될 정도로요.”
수안은 미래를 말했고,
“지금 내가 당신과 달렸다는 것만으로 자랑거리가 되듯이 말이죠.”
오바마는 현재를 말했다.
“하하하. 앞으로도 함께 달릴 사이죠. 사진도 남겨야겠습니다! 배 사장!!”
* * *
오바마와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수안은 다시 공항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번엔 쿠퍼티노로 가신다고요? 캘리포니아라면 먼저 들렀다 와도 되지 않았습니까?”
“오바마가 더 중요하니까.”
“그럼 이번엔 두 번째로 중요한 사람이겠네요?”
“정답.”
“누구와 또 약속을 잡으신 겁니까? 엄지 다음이면 검지라고 할 수 있겠죠?”
미국에서 활동하지 않았던 사람이라곤 생각하기 힘든 일정이다.
“애플의 스티브.”
“스티브요?”
살아 있었다면 미국 대통령 다음의 권력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사람이다. 2020년 애플의 시가 총액 규모는 국내 코스피와 코스닥 모든 시총을 제외해도 400억 달러가 남는다. 국가 규모로 따지면 세계 8위 규모. 단일 기업의 경제 규모가 선진국을 넘어선다는 뜻이었다.
“마침 애플이 힘들다고 하더라고.”
애플의 스티브가 마이크로소프트에 구원의 손길을 내밀기 직전이었고 수안은 이를 중간에 인터셉트했다. BE 인베스트먼트에서 먼저 투자 의향을 밝혔고, 이방효 사장은 애플에 BE 인베스트먼트의 회장이 직접 애플 본사에 방문한다고 알려놨다.
* * *
불안한 듯 서성거리던 남자가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물었다.
“아직 도착 전인가?”
“스티브. 앉아서 기다리지, 그래?”
“존재도 몰랐던 BE의 회장이 온다고 하잖아. 어떻게 앉아서 기다리냐고?”
“우리가 원하는 지원을 거절할 수도 있잖아. 너무 기대하지 말자.”
“아냐. 난 무조건 투자를 성공시킬 수 있어!”
그 시각 수안은 건물로 들어서고 있었다.
“하암….”
수안은 피곤한 얼굴로 하품까지 했다. 오랜만에 속도를 낸 것이 원인이다.
“피곤하실만합니다. 어제오늘 비행만 몇 시간째인데요.”
“괜찮아. 이제 나아졌어.”
조금 피곤한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오늘 일은 상당히 중요했다.
수안이 비서진과 함께 들어서자 배영성이 먼저 나서서 신원을 밝혔다.
오바마 의원실에서 있었던 일을 다시 겪지 않기 위함이다.
수안은 덕분에 편안하게 스티브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젊네.’
수안이 스티브 잡스에게 느낀 첫인상이다.
예전엔 머리카락도 하얗게 세고 숱도 부족했지만, 지금은 머리도 무성하고 색도 진하다.
‘진짜 고집스럽게도 생겼다.’
“스티븐 강? 강수안 선수가 스티븐 강입니까?”
“스티브. 당신과 내 이름이 비슷하게 들리니 난 스테판이라고 불러 주면 좋겠네요.”
“당신이 BE 인베스트먼트의 소유주였다니….”
“내 말 듣고 있습니까? 투자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오늘 얘긴 상당히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피곤해서 그런지 수안의 반응이 조금 날카로웠다. 스티브는 수안의 말에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사과했다.
“오우. 쏘리.”
“농담입니다. 재미없게 그러진 말고요. 그러고 보니 우리 악수도 안 했네요.”
수안이 손을 내밀자 그제야 얼른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스테판 회장님.”
“반가워요. 스티브. 무척 보고 싶었어요.”
“나를 말입니까?”
“난 당신이 앞으로 개발할 모든 제품에 관심이 많습니다.”
“하하. 드디어 날 알아주는 투자자가 나타났군요.”
수안은 스티브가 설명하는 애플의 비전에 관해서 듣다가 마지막 투자 얘기로 들어가기 직전에 손을 들어 발표를 막았다. 발표를 시작하고 10분쯤 지났을 때였다.
“아….”
스티브는 더 들을 필요 없다는 제스처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젠장! 이번 투자를 받아야 하는데….’
“발표를 막아서 진심으로 미안합니다. 스티브.”
“우리의 비전이 미덥지 못합니까? 내 발표가 부족합니까? 아니면 뭐가 문제였습니까?”
“아뇨. 당신 발표는 인상적이었지만, 내 컨디션이 좀 나빴습니다. 시카고에서 방금 날아왔거든요.”
“아.”
‘고작 이런 이유로 투자가 날아가다니….’
“간단하게 애플에서 원하는 금액만 말씀해 주세요. 회의를 짧게 끝내고 싶어요.”
“……!”
“정말입니까?”
“내게 확인하는 질문을 던지기 전에 애플이 원하는 금액을 얼른 말해요. 아니면 여기서 잠들어 버릴지도 모릅니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스티브가 누군가와 논의하는 것을 보며 수안은 잠시 눈을 감고 휴식을 즐길 수 있었다.
“…회…. …회장님.”
“어? 내가 잠들었나?”
잠시 눈만 감고 있으려고 했는데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배영성이 수안을 흔들어 깨운 참이다.
“결정했다고 합니다.”
“스티브. 얼마를 원하십니까?”
“1억 6천만 달러를 투자받고 싶습니다.”
“…….”
금액을 확인한 수안은 눈을 살짝 찡그리고 스티브를 보고 있었다.
배영성은 수안이 금액을 듣지 못했나 싶어 조용히 요청 금액을 다시 말해 줬다.
“회장님. 방금 1억 6천만 달러라고 했습니다.”
“내가 못 들어서 가만있는 게 아니야.”
수안의 표정을 보고 스티브는 너무 많은 금액을 불렀나 싶었다.
“혹시 우리가 너무 많은 금액을 요구했습니까? 하지만 회사의 유동성을 확보하고 앞으로 개발할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1억 6천만 달러가 필요합니다.”
“난 너무 많다는 말이 아닙니다. 고작 1억 6천만 달러로 대체 뭘 할 수 있겠습니까?”
“……!!”
요즘 올라간 환율로 따져도 3천억이 약간 넘는 금액이다. 수안은 고작 이 정도 규모의 투자를 바라지 않았다.
‘애플의 지분은 금덩어리보다 귀해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