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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주인공 (140/304)

인생의 주인공

“하지만 우리까지 돌아올 기회는 없을 테니까 욕심은 접어 둬.”

“왜? 회장님은 살 수 있다며?”

수애는 회장이 살 수 있는 걸 왜 자신들은 못산단 말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아까 그 보험을 사서 들고 있다는 회사가 바로 회장님 회사야.”

“아….”

그 회사를 본인이 관리하기도 하지만 함부로 꺼낼 말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벌써 다 사셨고 이번엔 개인적으로 자금을 융통하시려고 생각하신 거니까 욕심은 버리자.”

“쳇! 아쉽다.”

“아쉽긴. 회장님은 이미 세계 순위에서 손에 꼽을 만한 부호야. 많은 사람이 모르고 있을 뿐이지. 우리가 다가갈 수 있는 세상이 아니야.”

“회장님은 그 세상으로 당신을 데려가려고 하시는 것 같은데?”

아내의 말은 배영성이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시선이다.

“뭐?”

“이번 미국 파티에 당신과 함께 가자고 한 것만 봐도 그렇잖아. 파티뿐이겠어? 지금까지 당신과 함께 지낸 시간이 있잖아. 회장님은 분명 당신을 더 높이 이끌어 주고 싶은 거라고. 아까도 안 팔겠다는 말씀이 아니셨다니까? ‘위험하지만, 위험을 감수한다면 같이 하겠다.’ 이런 뉘앙스로 말씀하셨어. 하물며 당신도 아닌 나한테 말이야.”

“…….”

배영성은 아내의 말에 곰곰이 생각하게 됐다.

‘운전기사로 시작한 나를 그룹 사장까지 올려주셨지.’

운전기사에서 더블 스타 이사를 거쳐 더블 스타 사장까지 초고속 승진의 연속이었다.

“혹시 모르니까 한번 얘기해 봐. 마누라가 그 보험 꼭 사고 싶어 한다고 말이야. 당신이 극구 말렸는데도 조금이라도 사고 싶어 해서 어쩔 수 없이 말씀드린다고 하면 되잖아.”

“에효. 사면 얼마나 사려고?”

“음…. 한 2억?”

“뭐? 지금까지 모은 돈을 다 쓰겠다고?”

“설마 우리 자산이 이게 전부겠어? 당신이 매월 받아 온 월급만 해도 얼만데?”

매달 2천이 넘는 월급을 집에 가져다 준 배영성이다. 적당히 쓰고 살았다고 가정하고 2억을 모았다고 판단했는데, 알뜰한 아내의 씀씀이를 생각하면 2억은 고작이라고 생각해도 될 것 같았다.

“…지금까지 얼마나 모았는데?”

몇 년간 월급을 가져다주고 있었지만, 수애는 얼마나 저축했는지를 알려주지 않았다.

“쉿. 비밀이야.”

“…….”

‘이래서 딴 주머니가 필요하지.’

월급이 얼마나 모였는지도 모르고 아내에게 용돈을 받아 쓰는 현실이다.

예전 수안이 준 금괴가 아니었다면 밖에 나가서 고개 숙이고 다닐 뻔했다.

“내일 비행기에서 따로 말씀드려 볼게.”

“좋았어! 아! 당신은 이번 보험 상품 승률을 몇 퍼센트로 예상해?”

“…100%.”

자신의 상사는 승률이 무의미한 사람이다.

‘회장님께 승률은 의미 없는 퍼센트일 뿐.’

“당신까지 100%라면 볼 것도 없잖아?!”

배영성은 방방 뜨는 아내에게 찬물을 끼얹을 수 없어 그냥 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

‘내일 안 된다고 하면 어쩌려고….’

* * *

“네?”

“안 그래도 같이 샀으면 싶더라니까.”

배영성은 아내 핑계를 대지 않고 자신도 같은 상품에 투자하고 싶다고 직접 말한 참이다. 질끈 눈을 감고 말했는데, 수안은 오히려 반기는 표정이었다.

배영성은 잠시 일어나 주변을 돌아봤다. 아내의 좌석은 멀리 떨어져 있었고 사모님도 도련님과 아내 곁으로 가 있었다.

“그럼 제가 보험에 들어가도….”

“물론이야. 배 사장이 말하길 잘했어. 내가 얘기하긴 좀 그랬거든.”

“아.”

“그리고 어제 배 사장 와이프 덕분에 중요한 생각이 떠올랐지 뭐야.”

러시아 모라토리엄에 이은 롱텀 캐피털 사태로 인해 추후 연방 준비 제도가 나선다. 만약 관련 보험을 상업 은행들이 팔아먹어 큰 손실을 봤다고 하면 보험을 들고 있는 BE를 협상 자리에 앉힐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보험을 전부 발효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보험을 사들인 BE가 외부에 관련 보험을 판매해 회수 불가능한 상태가 된다면? 그때는 BE를 통한 협상이 불가능했다. 은행은 연방 준비 제도의 부탁으로 LTCM을 연명하게 만드는 지원을 하면서도 자신들의 오판으로 생긴 손해까지 지출해야 한다.

어제 수애의 말로 여기까지 단번에 떠올릴 수 있었던 수안이다.

배영성은 수안의 설명을 듣고 곰곰이 따져봤다.

‘맞아. 연방 준비 제도가 나서면 죽도 밥도 안 될 수 있겠어.’

“무슨 말씀인지 이해했습니다. 일이 그렇게 진행될 가능성이 상당합니다. 하지만 너무 많은 상품을 재매각하게 되면 BE의 수익률이 떨어질 텐데요.”

“하하. 당연히 페이퍼 컴퍼니로 빙빙 돌려야지. 뭐 하러 외부에 팔아먹나?”

BE는 보험의 최종 소유자가 본인이 아님을 증명하면 끝이다. 나머지는 보험을 들고 있는 유령 회사들이 알아서 해 줄 것이다.

“그래서 얼마나 사고 싶은데? 몇백이나 몇천은 솔직히 좀 힘들고 최소한 억 단위는 되어야 할 것 같아.”

“와이프가 지금까지 모은 돈으로 2억, 제가 따로 2억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하. 아내에겐 2억만 투자했다고 할 참입니다.”

이번에야말로 노후까지 사용할 배영성의 딴 주머니가 완성된다. 수안은 입술에 손가락을 올리며 당연히 비밀을 지켜 주겠다 약속했다.

“그래도 4억은 힘들고…. 내가 10억 정도 넣고 아내 통장에서 6억 빼서 넣으면 딱 20억 맞춰서 거래할 수 있겠어. 20억이면 BE에서 따로 떼서 팔기도 좋지.”

“관련 서류는 BE에 준비하라고 지시하겠습니다. 페이퍼 컴퍼니로 분산할 보험 금액 중에 일부를 한국으로 돌리면 되겠습니다. BE 한국지사에서 판매하면 됩니다.”

“굿. 이래야 미국 거대 은행들의 부실에 대한 책임 소재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 완벽하게 작업해야 할 거야.”

수안의 말이 끝나자 배영성은 머뭇거리다가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허락 감사합니다. 회장님.”

배영성의 감사 인사에 수안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악수하자는 의미였다.

배영성이 조심스럽게 내민 손을 수안이 먼저 다가와 잡으며 말했다.

“누구나 자신의 인생의 주인공은 자신이라고 생각하지.”

“그렇죠.”

누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인생의 주인공은 자신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대부분 자신의 인생임에도 한발 뒤에서 관객으로서 살아가. 남들이 열심히 살아 높이 올라가는 것을 부러워하기만 하지. 저들은 뭔가 특별한 것이 있어서 성공했다고 자위하면서 말이야.”

“…….”

배영성은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해 왔음을 알 수 있었다.

“주인공이 되려면 최소한 무대에 오를 용기를 가져야 하는 거야. 배 사장은 그 용기를 가진 사람이지. 이제 시작일 뿐이야. 배 사장 아래 있는 이방효보다 덜 벌어서 쓰겠어? 나중에 이방효 사장은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만들어 줄게.”

쉽게 오지 않을 기회. 아내가 아니었다면 알면서도 무시했을지 모른다.

게다가 이번 기회는 다른 기회들과 다르게 언제까지고 자신을 기다려 주고 손을 내밀어 주는 기회다.

배영성에게 수안이라는 기회가 찾아왔다.

“아.”

멀리서 본 아내가 더 확실하게 본 모양이다. 자신의 상사는 높은 곳에서 손을 내밀고 있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회장님.”

“나도 잘 부탁합니다. 배 사장님. 흐흐.”

* * *

파티 당일.

수안은 아내가 드레스로 갈아입고 나온 것을 보며 입을 벌리고 있었다.

“와아….”

“어때요? 괜찮아요?”

금빛으로 수놓아진 이브닝 드레스는 화려했고 화려한 아현의 얼굴과도 너무나 잘 어울렸다.

“허….”

“말을 해 봐요.”

“오늘 파티에 가면 당신이 가장 아름다운 레이디가 될 것 같아.”

“훗. 이제 내려가요.”

파티가 열리는 곳이 수안이 머무는 이곳 호텔이다. 멀리 차를 타고 갈 필요가 없었다.

“레이디. 에스코트할 영광을 제게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수안은 아내가 당연히 손을 내밀어 주리라 생각했다.

“미안하지만 당신은 정원이 데리고 와줄래요?”

“아….”

아들 정원이가 귀여운 턱시도를 입고 입술을 내밀고 있었다.

“아들. 아빠랑 같이 가자.”

“흥!”

엄마와 아빠만 얘기하고 자신을 끼워 주지 않아 토라진 것이다.

“가면 주원이 형도 와 있을걸? 안 가면 맛있는 과자도 못 먹지. 주원이 형이 다 먹을지도 몰라.”

“갈래!”

수안과 아현 그리고 정원이 스위트룸 문을 나서자 밖에서 기다리던 비서진이 따라붙었다.

수안은 1층에 도착해 바로 파티룸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겨우겨우 길을 찾아 지나가고 있었다.

파바박.

갑자기 카메라 플래시가 은하수처럼 터져 나왔다.

“어?”

수안과 아현이 가는 길에 포토 라인이 있었다. 포토 라인으로 향하는 길이라 사람들이 들어오지 않은 것이다.

“죄, 죄송합니다. 회장님.”

“…자연스럽게 넘어갑시다. 포토 라인 너머에서 기다려요.”

“예. 회장님.”

수안은 아들을 안아 들고 아현과 자연스럽게 포토 라인에 잠시 서서 포즈를 잡고 카메라 마사지를 즐겼다. 아현도 배우 출신. 큰 인기를 얻기 전에 결혼해서 영화제나 방송국 연말 시상식에 자주 참석하지 못했지만, 몇 번은 참석한 경험이 있었고 덕분에 자연스럽게 포토 라인에 설 수 있었다.

가장 신난 사람은 바로 정원이다.

“아우! 하으아!”

카메라 불빛이 번쩍이자 재미있었는지 목소리 데시벨이 부쩍 올라갔다.

수안이 아현 곁에 다가가서 조용히 말했다.

“이제 가자 여보.”

“알았어요.”

수안과 아현이 나오자 그 뒤로 다른 셀럽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관심을 즐기고 있었다.

아현은 뭔가 아쉬운 얼굴로 말했다.

“둘째 낳으면 진짜로 복귀할까 봐요.”

기자들의 시선이 쏟아지는 상황이 너무나 그리웠다.

“아직 젊잖아. 당신이 맡을 수 있는 배역이 상당히 많을 거야. 그리고…. 곧 서울 방송이 강운 그룹 산하로 들어와. 당신이 원하는 배역이 있으면 뭐든지 말만 해.”

“……!!!!”

서울방송 인수는 아현이 처음 듣는 소식이다.

“앞으로 서울 방송은 화제를 부를 만한 드라마를 많이 찍을 거야. 그저 그런 작가와 감독으로 찍는 드라마는 앞으로 퇴출할 생각이거든.”

“정말이에요? 서울 방송을 강운 그룹이 샀어요?”

“응. 아버지가 저렴하게 사 오셨어.”

“와아.”

아내가 크게 반기는 것 같아 수안은 미국의 상황까지 설명했다.

“미국 진출도 어렵지 않아. BE 인베스트먼트가 미국 방송사 지분을 상당히 보유하고 있거든. 아예 할리우드로 진출하는 건 어때? 제임스 감독에게 부탁하면 작은 배역 하나 정도는 주지 않을까?”

수안의 말은 전혀 엉뚱하게 실현되려고 했다. 수안과 아현이 미국식 이브닝파티에 조금씩 익숙해지기 시작하고 사람들과 어울리기 시작했을 때였다.

“와우.”

익숙한 얼굴의 남자가 아현 곁으로 다가왔다.

“새로운 얼굴이군요. 당신은 배우인가요?”

“눈이 좋군요. 맞습니다. 한국에서 배우로 활동했어요. 임아현입니다.”

“저는 제임스 감독입니다. 우리 조금 더 대화를 진전시켰으면 좋겠군요. 물론 오디션은 통과해야겠지만 말입니다.”

제임스 감독의 오디션 제안은 아현에게 신선한 자극이었다.

수안도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아현 옆에 섰다.

“…수안 강?”

“반갑습니다. 미스터 제임스. 영화는 재미있게 봤습니다.”

“여기서 강 선수를 볼 수 있을 줄이야. 반갑습니다.”

“난 당연히 당신을 볼 것으로 예상했는데 말이죠.”

“하하하. 타이타닉의 성공을 축하하는 자리에 내가 오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파티 호스트가 파티에 오는 것도 너무 당연한 일이니까요.”

“…호스트? 셀럽으로 초대된 것이 아닙니까?”

시의적절하게 곁에 있던 이방효가 끼어들었다.

“제임스 감독. 이쪽은 BE 인베스트먼트의 체어맨이자 오늘 파티의 호스트입니다.”

“오우. 내가 실수했습니다. 내 영화의 투자자를 몰라보다니. 덕분에 원하는 대로 다 찍을 수 있었습니다.”

수안은 제임스가 내민 손을 잡아 흔들며 말했다.

“서로가 좋은 결과를 얻었으니 만족합니다. 그리고 제임스가 아내에게 제안한 오디션은 조금 더 고민해 보도록 하죠. 한국에서도 그녀를 찾는 곳이 많거든요.”

“당신의 아내라고요? 오 마이…. 그녀가 결혼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수안은 제임스와 영화에 관한 얘기를 했고 아현도 감독과 배우로서 그들만의 세계에 관한 대화를 즐겼다. 그런 모습에 영화의 주인공도 다가왔다. 자신과 함께해야 할 감독이 다른 누군가와 열심히 대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아현은 보고 싶었던 영화 속 두 주인공을 만나 인사할 수 있었다.

수안은 슬며시 빠져서 아현과 할리우드 배우들을 한눈에 담았다.

‘보기 좋네. 당신은 역시 배우로 복귀해야겠어.’

누가 뭐래도 수안에겐 아현이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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