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된 가신
수애는 남편에게 받은 휴대 전화 번호를 눌러놨지만, 통화버튼을 누를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다.
“부회장님 사모님한테 내가 어떻게 전활 하냐고….”
그렇다고 잘 알지도 못하는 파티 드레스를 아무렇게나 고를 순 없었다. 미국에서 열리는 파티라고 했는데, 사장으로 올라선 남편의 얼굴을 생각해서라도 제대로 갖춰 입어줘야 했다. 지금까지 친구들 사이에서 남편이 자신의 자랑거리가 되었던 것처럼 이번엔 남편 곁에서 자신의 빛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은 마음이다.
휴대 전화만 노려보던 수애가 눈을 질끈 감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꾸욱.
“누, 눌렀다.”
통화 연결음이 들리길 잠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아, 안녕하세요. 저, 저는 김수애라고 합니다.”
말을 뱉고서야 배영성 사장의 아내라고 소개했어야 함을 깨달았지만, 이미 늦었다.
-아. 말씀 들었어요. 배 사장님 아내분 되시죠?
“네, 네. 기억해 주셔서 감사해요.”
-마침 오늘 가볼까 했는데 어디 사세요? 제가 모시러 갈게요.
“저, 저를요? 아닙니다. 장소만 말씀해 주시면 제가 가겠습니다.”
-저 너무 어려워하지 마세요. 남편들이 어떻게 지내건 우린 편하게 지내요.
“사모님이 수고스러워서….”
-어차피 차로 같이 움직이는 편이 더 편해요. 예전에 배 사장님은 압구정 방향에 사신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럼 염치없지만 부탁드릴게요. 압구정 대현 아파트에 살아요.”
예전 수안이 선물한 아파트에 여전히 거주하고 있는 배영성이다.
-제가 그리로 갈게요. 저는 아들을 데려갈 생각인데 아드님 데려오실 거죠?
“네. 저도 말썽쟁이 아들을 데려가려고요.”
아들이 입을 수 있는 귀여운 턱시도를 맞춰야 했다.
-호호. 아이가 몇 살이죠?
“95년에 태어나서 올해 4살이에요.”
93년에 배영성과 결혼해 95년 아들 주원이를 낳았다. 98년 현재 4살. 남자아이는 말썽을 부리기 시작할 나이다.
-정원이는 이제 세 살이지만, 아기나 다름없어요. 비행 시간이 길 텐데 걱정되네요.
“저희 애도 어려서 미국까지 어떻게 데려가나 싶어요.”
-둘째가 아직 태어나지 않아 다행이죠. 배 속의 둘째까지 태어났으면 엄두도 안 났을 텐데….
“어머. 둘째 가지셨어요? 저도 둘째를 가졌거든요.”
-호호. 저랑 비슷하네요. 저는 둘째가 딸이었으면 싶은데….
곧 만나자던 사람들의 통화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둘은 한참 대화하다가 시간이 훌쩍 지났음을 깨달았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데리러 간다고 하고선 넋 놓고 통화만 했네요.
“아휴. 저도 그랬어요. 얼른 준비할게요.”
.
.
.
수안과 배영성의 아내가 만나려고 통화를 끝내고 있을 때 수안은 약속된 장소에서 정영수 회장을 마주하고 있었다.
“대현 자동차는 요즘 나쁘지 않죠?”
“나쁘지 않기는….”
금융 위기로 지갑이 닫힌 상황이지만, 필요한 차량은 사야 했다. 그리고 국내에서 고를 수 있는 자동차 회사가 한정된 상황이다. 자동차 회사들이 흔들리고 있으니 훗날 A/S를 생각해서 건실한 자동차 메이커를 고르게 되는 것이다.
“기화 자동차는 매물로 나왔고 대운 자동차도 휘청거리고 있고 쌍륭도 오락가락하지 않습니까. 국내 완성차 기업 중에 대현만 남았으니 앞으론 독주나 다름없지요.”
“강운 자동차와 삼디 자동차는 외국 기업이었나?”
정영수 회장의 말대로 강운 자동차와 삼디 자동차는 여전히 굳건하다.
“에이. 점유율 5% 달성도 힘든 신생 업체를 신경 쓰고 계세요?”
“곧 기화를 먹을 기업이니 신경을 써야지.”
“흐흐. 기화 먹고 그때부터 제대로 붙어 봅시다. 내년이나 돼야 기화 자동차가 제대로 돌아갈 것 같으니까요.”
‘기화 자동차는 얘기만 들어도 속이 쓰리네.’
기화에는 감히 손도 댈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대운 자동차에도 손을 뻗을 수 없었다. 정영수 회장은 허튼소리로 시간을 낭비하기 싫다는 듯이 본론을 꺼내 들었다.
“…그건 그렇고 아버지가 돌아오셨어.”
정택주 회장이 대현 건설 대표 이사 직위를 다시 얻었다.
“저도 들었습니다. 왕 회장님이 건설을 살리려고 뛰어드실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이러면 일전에 얘기했던 건설을 돕고 형제들을 보살피는 아들이 되기 어렵지 않나.”
“방법이 그것뿐이겠습니까.”
“…그럼.”
“맨입으로요?”
얄미운 수안의 말에 정영수 회장이 버럭 했다.
“이봐. 강 부회장. 내가 기화, 대운에 손도 안 대고 도와만 준다니까. 엔진 기술 다 넘기고 부품업체까지 공유한다고 했는데 자꾸 뭘 더 달래?”
“푸흐흐. 이거 한두 번 해 보니까 자꾸 하고 싶더라고요. 농담입니다.”
“강 부회장이 상황을 너무 가볍게 보는 것 같은데 이대로 가다간 진짜 큰일 나게 생겼어.”
대현 그룹에서 자신의 위치가 자꾸만 좁아진다고 했다. 건설 회장인 자신의 동생 곁에 명예 회장인 자신의 아버지가 함께하고 있으니 맏아들인 자신이 뭔가를 해야 한다고 들었다. 그렇다고 명쾌한 답을 내리진 못하고 있었다. 임원진 누구도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회장님. 먼저 하나 묻겠습니다.”
“뭐든 물어봐.”
“누가 큰일 난다고 합니까?”
“무슨 소리야?”
“회장님 심중에 자꾸 분란을 심어 주는 못된 가신이 누구냐고 묻고 있습니다.”
“…못된 가신이라니?”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가마니가 된다고 정 회장님을 부채질한 그놈. 그놈을 먼저 쳐 내세요.”
“……!”
“임원이랍시고 자기 몫을 찾으려고 그러는 겁니다. 회사에 오래 있었으니 자신들이 더 많이 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왕 회장님 휘하에서 커왔으니 발언권도 있을 것이고 신뢰도 상당하겠죠. 그 인물들이 지금 어쩌고 있습니까? 정 회장님을 비롯해 회장님 형제들에게 각자 달라붙어서 자신의 영달을 바라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이 형제를 갈라놓고 있는 겁니다.”
“그건….”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보지 못했던 정영수 회장이다.
“왕 회장님의 가신들이 농간을 부리고 있어요. 밖에선 훤히 보이는데 안에선 보이지 않죠. 왜냐. 정 회장님이 임원들을 너무 믿어서 눈이 가려진 상태니까요. 지금 정 회장님만 해도 그럴 일은 없다고 먼저 생각하지 않으셨습니까?”
“……!”
그랬다. 지금도 자신을 따르는 아버지의 오랜 가신들이 농간을 부리고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왕 회장님 대신 옥살이까지 하신 정 회장님입니다. 지금도 정 회장님은 현대 건설 회장 자리를 이은 동생이 못마땅하시겠죠. 그렇지 않습니까?”
“당연하지! 내가 바로 아버지의 적장자야! 녀석이 아니라 내가 건설 회장을 맡아야 했어!”
“이렇게 저만 같아도 얼마든지 정 회장님의 속을 꺼내서 형제들을 반목시킬 수 있어요.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억울함을 쿡쿡 찌르면 형제들이 알아서 반목하고 싸움을 이어 갈 겁니다. 가신들은 지금 자신이 내세운 대리인을 앞세우고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허! 허허….”
수안은 허탈한 웃음소리를 듣고 정 회장이 이제야 조금씩 깨달아 감을 알 수 있었다.
“가신들의 꼬임에 더는 넘어가지 마십시오. 형제는 적이 아닙니다. 건설과 전자, 증권을 다 내준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대현 자동차는 국내를 넘어 세계로 뻗어나가며 글로벌한 대기업으로 성장할 겁니다. 우직하게 한길을 가십시오. 어차피 왕 회장님의 적장자는 바로 정영수 회장님입니다.”
“…….”
정영수 회장은 팔짱을 낀 채 입을 굳게 다물고 말이 없었다. 부정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수안의 말이 효과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간단하고 중요도 떨어지는 주제는 넘어가고 본론으로 가볼까요?”
“…뭐?”
지금까지 말한 내용이 간단하고 중요하지 않다면 도대체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고작 가신들에 휘둘린 일을 중요하게 여기실 겁니까? 가볍게 생각하고 넘어가십시오.”
“허!”
이번 일을 생각하는 자신의 의중까지도 꿰뚫어 보는 수안이다.
정 회장이 상념을 떨쳐 내기도 전에 수안의 말이 이어진다.
“자아. 이제 왕 회장님의 향후 행보를 생각하셔야죠. 이 부분이 중요합니다.”
“아버지의 행보?”
“왕 회장님은 이번에 김대준 대통령과 긴밀히 연결되셨고 둘의 뜻이 한 곳으로 통하고 있습니다.”
수안은 그 결과가 어디로 향할지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이북에 미련이 많아.”
“오. 알고 있으셨군요?”
“아들인 내가 모르면 누가 알겠나?”
“이러면 일이 수월하죠.”
“아버지는 김대준 대통령과 북에 지원을 진행하실 것 같아.”
“정확합니다. 북한 주민들은 모르겠지만, 한국이 훨씬 더 잘 삽니다. 그래서 굶어 죽어가는 북한 주민들에게 식량을 지원하자는 거죠. 이미 김일삼 대통령부터 시작한 대북 지원 사업입니다. 왕 회장님은 선두에 서서 북으로 가시겠죠.”
정 회장은 간단하게 생각했다. 아버지가 그토록 원해 왔던 이북. 가시는 길에 불편함이 없도록 자식들이 길을 닦아 줘야 했다.
“내가 동조하란 얘기로군.”
“동조는 하시되 관련된 사업은 동생분에게 넘기십시오. 별로 실효성은 없을 것 같으니까요.”
“시작하지도 않은 사업인데 수익성 평가까지 끝났나?”
“한참 전에 끝났습니다. 남과 북이 경제 협력을 한다 해도 마찬가지 결과를 낼 겁니다. 물론 포장하기야 좋겠죠. 금강산을 관광지로 개발해서 우리나라 국민에게 보여 준다고 생각해 보세요. 환상적이죠? 그리고 북한 지역에 생산 공장을 지어서 값싼 노동력을 활용하면요? 엄청날 것 같지요? 건설업도 흥할 것 같지 않습니까? 거기 전기가 부족하다고 하니 화력 발전소도 지을 수 있을지 몰라요. 하지만!! 북한과 사업을 하면 쪽박 그 이상은 없습니다. 왜냐? 거긴 법이 없잖습니까. 변태 진상 하나가 자기 마음대로 운영하는 곳입니다. 그런 나라에서 무슨 영속적인 신뢰를 기대하겠습니까?”
수안이 한 말 중에 쪽박이라는 단어에서 웃음을 터트리는 정 회장이다.
“큭. 자넨 가끔 웃기는 소릴 해. 말을 해도 쪽박이 뭔가?”
“쪽박은 사실이니까요. 그래도 정 회장님이 돋보일 기회는 될 겁니다. 다른 자식들이 왕 회장님에게 반대해도 정 회장님은 굳게 믿어 주시면 됩니다.”
“가신들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형제를 믿어라. 그리고 나 자신을 믿어라. 이젠 아버지를 믿으라고? 온통 믿으라는 말이군.”
가신들의 농간을 벗어나 형제와 반복하지 말라 했고 대현 자동차의 미래를 확신하고 형제의 것을 탐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이젠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대북 사업도 밀어주라고 한다.
“믿는 자에게 복이 오죠.”
“큭. 이봐. 강 부회장. 웃긴 소리는 그만해. 충분히 알아들었어.”
믿으라는 말이 듣기 싫지 않았다. 앞으로 간신들의 농간에 휘둘려 동생들과 거리를 뒀던 과거를 회복해 볼 생각이다.
“정택주 회장님은 조만간 국내에서 소를 사 오라고 하실 겁니다.”
“응?”
갑자기 뜬금없이 소 얘기가 나온다.
“소?”
“38선을 넘어 북으로 가실 때 뭘 들고 가야 좋겠습니까?”
“38선을 넘어? 아버지가?”
“왕 회장님이 보통 분이십니까? 고작 쌀이나 옷감 정도로 만족하실 분이 아닙니다. 고향에 가시는데 소 팔아서 가출한 과거를 회상하지 않으실 것 같으세요?”
“큼. 그건 또 어찌 알았어?”
과거 아버지가 소 판 돈을 들고 가출한 경험이 있는 왕 회장이다. 이로 인해 소 천 마리를 데리고 38선을 넘는다.
“다 아는 수가 있습니다. 제가 예전부터 왕 회장님께 예쁨을 받았잖습니까.”
“그렇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 얘기까지 하셨어?”
“어쨌든. 일개 기업가가 자기 돈으로 소를 사서 끌고 간다는데 어떻게 막겠습니까. 북한에서도 환영할 일이죠. 미국에서도 차마 뭐라고 하지 못할 겁니다.”
“그럼 나는 미리 소를 준비해야겠구만.”
“그렇습니다. 하지만 간단하진 않습니다.”
“소만 사면 됐지 뭘 또 복잡하게 계산하려고?”
“왕 회장님이 예전 UN묘지 잔디 입히는 발주를 어떻게 해결하셨는지 기억하시죠?”
당연히 알고 있다. 당시 아버지의 사업적인 면모는 쉽게 따라 하기도 어려운 독특한 부분이 있었다.
“겨울에 잔디 구하는 것이 불가능했지만 보리 싹을 심어서 파란 풀밭을 만드셨지. 대단한 발상의 전환이었어.”
겨울에 파란 잔디를 어디서 구할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발주는 분명 묘지를 푸르게 물들이라고 지시되어 있었고, 정 회장은 푸르기만 하면 된다는 확답을 받았다. 이에 잔디만큼 자란 보리를 묘지에 깔아 행사를 무사히 마치고 잔디로 다시 깔아버렸다.
“바로 그 발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소를 사는데 발상의 전환이 왜 필요해? 암소를 사서 보내면 될 것 아냐? 수소도 적절히 섞으면 되겠군.”
암소와 수소를 데려가서 새끼를 칠 수 있게 만들어 주면 되지 않겠나 싶었다.
“그건 아무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왕 회장님이 정 회장님의 말을 듣자마자 무릎을 “탁”치게 만드셔야죠. 더 고민해 보십시오.”
“…자네도 문제만 내주고 답은 없는 것 아닌가?”
“설마요. 이런 문제는 스스로 해결해야 더 짜릿하니 제가 참고 있는 겁니다. 소를 말씀드린 것도 많이 양보한 겁니다.”
“끄응.”
표정을 보아하니 정말로 답을 알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그 이상의 해결책이 보이지 않았다.
“이러다가 시간 다 보내겠어. 그냥 말해 주게.”
“직접 떠올리셨다면 좋았을 텐데요.”
수안은 탁자 옆에 유리컵을 하나 들어 앞에 내려놓고 반쯤 물을 부었다.
“자. 이 유리컵이 몇 개로 보이십니까?”
“…….”
정 회장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다.
수안은 정 회장의 눈치를 보다가 그냥 말했다.
“물론 하나죠. 방금 보셨겠지만요.”
아직 수안의 수수께끼는 끝이 아니다.
정영수 회장 얼굴이 찌푸려지건 말건 수안의 말은 계속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