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수진 (126/304)

강수진

“짚신도 제짝이 있다고 했다. 수진이가 누굴 만나든 네가 그렇게 따질 일이 아니야.”

“아버지! 수진이 이렇게 신경 안 쓰실 거예요? 아버지 첫째 딸이라고요.”

아버지와 자식의 위치가 바뀐 느낌이다.

“이놈이….”

“절충하시죠. 1차 서류 통과한 사람들로 수진이가 만나 보겠지만, 저는 저대로 놈들에 대한 정보를 캐보겠습니다.”

“얼씨구.”

“안 보이는 곳에서 더러운 성질 드러낸 놈들이면 제가 뜯어말릴 겁니다. 아무리 프로필이 화려해도 진짜 성격은 다 감춰져 있어요. 돈도 많은 놈들이 세상에 무서운 게 뭐가 있었겠습니까?”

말린다고 들을 것 같지 않았다. 예전엔 동생들을 챙기는 데 민망한 기색이라도 보였지만, 지금은 대놓고 당당하게 말한다.

“…….”

“제가 수진이는 진짜 좋은 놈한테 시집보낼게요. 우리 수진이 아무한테나 보낼 수 없습니다.”

틀린 말이 아니기도 했고 제 동생이라 챙긴다는데 뭐라 할 수도 없다.

“네가 딸 낳으면 어떨지 걱정이야.”

여동생을 이렇게 챙기는 아들이 자신의 딸이라면 얼마나 더 챙기겠는가.

“험난한 세상에 시집은 왜 보냅니까? 아빠가 돈 많으니 다 누리면서 살라고 할 겁니다.”

손녀가 태어나면 시집가긴 글렀다.

“…….”

강 회장이 아들을 걱정스럽게 보고 있는 동안에도 수안은 서류를 검토했고 마지막 파일을 앞에 올려놨다. 나머지 산더미 같은 서류는 아들 선에서 떨어진 후보들의 프로필이다.

“서류 검토 끝입니다. 남은 놈은 다섯. 수진이 부르겠습니다.”

* * *

강수진. 올해 26살인 그녀는 강운 패션에서 일하는 즐거움을 깨닫고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회사 직원들은 회사 내 전 부서를 다 경험하고 돌아온 그녀를 친근하게 대해 줬고, 동료로서 그녀를 대해 준다. 평소엔 회장의 딸이라는 것도 잊고 지내고 있었다.

그녀도 밑바닥까지 훑고 위로 올라왔기에 직원들을 눈 아래로 보지 않는다. 상급자에겐 깍듯하게 존대했고, 아래 직급이라도 나이가 많은 직원이 대다수라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 친근감을 가진 직원도 많았다.

“강 과장. 잠깐 이리로.”

“네. 부장님.”

“대전에 준비 중인 매장 관련해서 말이야….”

부장의 자리에서 진행 중인 대리점을 주제로 논의하던 중에 휴대 전화 진동음이 들려왔다.

우우웅. 우우웅.

“강 실장 전화 아닌가?”

“아. 맞습니다. 잠시 전화 받겠습니다.”

“조금 이따 다시 얘기하지.”

“예. 부장님.”

수진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며 수화기를 귀로 가져갔다.

“어. 오빠.”

움찔.

부서 내 모든 인원의 몸이 들썩 움직였다.

“오빠라고 불렀으면…. 강 과장님 애인 있었어?”

“애인은 무슨. 강 실장님 오빠는 하나밖에 없잖아. 부회장님.”

“히익!”

직원들은 수진이 들리지 않는 곳에서 작은 목소리로 대화했다. 이럴 때나 되어야 수진이 회장님 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지금?”

-어. 지금. 강운 그룹 본사 회장님 집무실로 와.

“아빠가 나 불러?”

전 부서 직원들의 몸이 다시 움찔했다. 아빠라고 했으니 이번엔 회장님이다.

-응. 호출이야.

“나 일해야 한다고. 지금도 정 부장님하고 회의 중이었는데.”

정영란 부장의 얼굴은 사색이 됐다.

‘부회장님한테 내 이름 말하지 마!’

-중요한 일이니까 얼른 얘기하고 나와.

“요즘 우리 팀이 얼마나 바쁜데….”

-어허. 오빠가 오라면 오지? 누군 안 바빠?

“거기까지 내가 왜 가야 하나 싶어서 그랬지.”

-전화로 얘기하기 그러니까 와서 얘기하자.

“알았어.”

수진이 전화를 끊자 살금살금 주변으로 다가오던 직원들이 후다닥 제자리로 돌아갔다.

정 부장은 수진이 가까이 오기도 전에 먼저 말했다.

“지금 당장 가도 좋아요.”

“아닙니다. 아까 부장님께서 하시던 말씀은 마저 듣고-”

“Go Home! Right Now.”

“…….”

수진이 멀뚱히 서 있자 정 부장이 다시 말했다.

“얼른 좀 가. 회장님하고 부회장님이 기다리시겠다.”

“아. 예. 알겠습니다. 부장님. 오늘은 먼저 퇴근할게요.”

수진이 문을 닫고 나가자 몇몇 직원들이 포옥 한숨을 내쉬었다.

“난 강 과장님이 친근하고 괜찮은데 부회장님이랑 회장님 얘기만 나오면 잔뜩 긴장된다? 이상하지?”

“강 과장님은 얼굴부터 친근(?)하잖아. 하나도 안 이상해. 나도 그렇거든.”

“미 투.”

정 부장은 차마 직원들에게 말할 수 없어 속으로만 말했다.

‘미 쓰리다.’

강수안 부회장님 얘기만 나오면 저도 모르게 식은땀이 줄줄 흐른다. 머리는 어지럽고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은 기분이다. 예전 자신의 거짓말이 이미 들통났음을 들었기 때문이다.

강수안 부회장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아이디어인 양 사업 계획을 발표했는데, 결국은 거짓말이 탄로 났다고 한다. 이후 정신적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니었다.

‘너흰 긴장으로 끝이지. 난 그냥 죽을 것 같다고.’

사직서를 내기도 했지만, 박민후 사장 선에서 컷트 당했다.

본인이 회사를 나가면 박 사장도 잘린다고 했다.

‘기분 겁나게 꿀꿀하네.’

정영란 부장은 휴대 전화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옥상으로 올라가 전화를 걸자 누군가 금방 전화를 받았다.

“현우 씨?”

-여보세요. 정 사장님. 아. 예. 잠시만요.

누군가와 함께 있는지 서둘러 사무실 밖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이제 괜찮아. 갑자기 무슨 일?

“오늘 시간 돼?”

-나야 언제든 콜. 오늘은 무슨 일이셔? 사장한테 깨졌어?

정영란 부장과 통화하는 사람은 남현우 차장으로 지난 골프장 사업 보고 이후 서로 연락하며 지내고 있었다.

“사장님은 아니고 부회장님.”

-히익!! 거, 거기 계셔? 부, 부회장님이 오셨어? 도망쳐!

남현우 차장은 강수안 부회장의 “부”라는 말만 들어도 경기를 할 정도였다.

“진정해. 직접 마주한 건 아니야. 그냥 강수진 과장이 부회장님과 통화하는 모습만 봤어. 그런데도 기분이 축 늘어져.”

-으으으. 오늘 진탕 먹고 풀자. 영란이 얘기만 들었는데, 나도 죽겠다.

당시 사업 계획 보고 후 일찍 퇴근한 하릴없는 미혼 남녀 둘이 의기투합해 술자리를 가졌으니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둘은 서로 같은 일을 겪은 동병상련의 존재다.

지금은 회사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몰래 연인. 나름 재미있는 연애였다.

“나와. 나 오늘 회사 째고 쉴 거야.”

-기다려. 패션으로 모시러 갈게. 자기야.

전화를 끊은 정영란 부장은 생각했다.

‘이래서 사람들이 연애를 하나?’

기분이 우울해지니 기댈 곳부터 찾게 된다. 그녀의 애인은 회사 생활에서 흐트러진 감정을 바로잡아주는 아주 훌륭한 버팀목이 되어 줬다.

‘나이 39라도 그리 늦진 않았겠지?’

남현우 차장의 나이가 자신보다 두 살 어리긴 하지만 그리 큰 차이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근데 얜 왜 결혼하자 소리를 안 해?”

결혼 생각을 하니 청혼하지 않는 애인의 무심함이 못마땅했다.

남녀가 연애를 시작하고 깊은 밤을 같이 보냈으면 결혼을 하자고 해야 할 것이 아닌가.

* * *

수진은 오늘따라 거대한 강운 그룹 사옥이 자신을 위축시킨다고 생각했다.

‘본사는 왜 이렇게 큰 거야?’

강운 그룹 본사엔 생명 보험과 전자, 카드 등 주요 계열사 본부가 입주해 있어서 거대한 위용을 자랑했다.

그래도 수진은 회장의 첫째 딸. 로비에서부터 수진을 알아본다.

“오셨습니까. 위로 모시겠습니다.”

“예. 부탁드려요.”

수진은 엘리베이터로 최상층까지 이동했다.

회장실로 가는 복도에서도 비서들이 저마다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힌다.

“안녕하십니까.”

“아. 네. 수고 많으세요.”

예전엔 뭣도 모르고 자신을 향해 인사하는 직원들을 무시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저들이 얼마나 치열한 삶을 살았기에 저 위치에 있는지. 자신이 무시해도 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특히 아버지를 보필하는 비서실이라면 본사에서도 최상급에 이른 직원들만 올 수 있는 곳. 엄청난 업무 능력을 지닌 직원들이다.

“회장님. 수진 아가씨 오셨습니다.”

“얼른 들어오라고 해.”

“예.”

수진은 조심스럽게 집무실에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회장님.”

“어서 와라.”

“…어색하게 쟨 왜 회장님이래?”

“여기 회삽니다. 부회장님.”

수진의 딱딱한 대답에 수안은 아버지를 보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수진이도 이제 어엿한 직장인이네요. 다 컸어요.”

“…너는 가만있지?”

“예.”

수안이 입을 꾹 다물자 강운모 회장이 수진을 자리에 앉혔다.

“수진아. 편히 앉아. 회사 일로 부르지 않았으니 편히 불러도 좋다.”

“…예. 아버지.”

“회사 일은 재미있고?”

“천천히 알아갑니다. 회사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이제 조금 알 것 같아요.”

강운모 회장은 기대하지도 않았던 첫째 딸이 회사에 재미를 붙여 놀라는 중이다. 둘째 딸 수현이도 상당한 경영 능력과 리더십을 보여 주고 있었다.

“올해 네 나이가 스물여섯이잖아.”

“네.”

“평소에 결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어?”

“……!”

“할 생각은 있어?”

“언젠간 해야겠지만….”

수진의 눈이 오빠 수안에게 데구루루 굴러갔다가 돌아온다. 저도 모르게 오빠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이다.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한번 만나 볼 테냐? 후보는 몇 골라놨다. 너 싫다면 강요하진 않으마.”

아버지의 배려 넘치는 말에 수진은 긴장을 조금 내려놨다.

“다 만나 봐야 하나요?”

“여기서 네가 골라봐. 네 오빠가 신경 써서 고르더구나.”

“그래요?”

오빠가 골랐다는 말에 조금 더 관심이 생긴다.

“내가 다 만나서 확인해 보고 걸러내려고 했는데, 아버지가 말리신다.”

수안의 말에 답하는 수진의 대답이 가관이다.

“그럼, 여기 서류의 후보들은 미확인 상태야?”

“응. 뭐 하는 놈들인지 나도 몰라.”

결국 강운모 회장이 끼어들었다.

“모르긴 뭘 몰라? 다들 건실한 기업 아들인데!”

“…….”

오빠가 미확인이라면 미확인이 맞다. 수진은 서류의 남자들을 하나도 신뢰할 수 없었다.

강 회장은 딸의 시선이 제 오빠에게 향한 것을 확인하고 말했다.

“언제까지 네 오빠한테 챙겨 달라고 하려고? 남자 만나는 건 네가 스스로 해야지.”

“…제가 겁이 많아서 그래요. 나쁜 사람이면 어떻게 해요.”

어려서부터 외모로 상처를 받아 온 수진이다. 사실은 평범한 대한민국 여성이었다.

너무 잘나게 태어난 수안과 예쁘장한 여동생 수현 때문에 비교되어 그랬던 것뿐이지 어디 가서 못났다 소리를 들을 정도는 아니다.

“수진아. 그렇다고 네 오빠가 남편까지 고를 순 없잖니.”

“…그렇긴 하지만, 오빠가 한번 확인해 보면 나쁜 사람은 걸러낼 수 있지 않을까요?”

수안이 신랑감 고르는 것을 반대할 줄 알았던 수진이 오히려 원하고 있었다.

“저리 남자를 겁내서야…. 내가 죄인이다. 아비가 너를 너무 엄하게 키웠어.”

“아버지. 거기까지 생각하실 건 없고요.”

수안은 요즘 부쩍 자식들에 마음을 드러내는 아버지 편을 들었다.

“이제 수진이도 홀로서기를 할 때가 되긴 했어요. 이번엔 스스로 고르라고 할게요.”

“오빠.”

수안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버지 말대로 해. 여기 다섯. 하나씩 만나 보고 네가 결정 해. 다 퇴짜 놔도 괜찮아.”

“휴우. 알았어. 그래도 영업 몇 번 해 봤다고 하라면 하게 되네.”

“수진이가 진짜 직장인이 다 됐다니까요.”

강 회장도 굳은 얼굴을 풀고 말했다.

“그래. 우선은 만나 봐. 수안이 말대로 다 거절해도 좋다. 너 혼자 산다고 해도 뭐라고 안 할 거야.”

“우아. 아빠가 그런 말도 하세요?”

“…결혼 안 하고 우리와 평생 같이 살아도 좋다. 그러니 편히 만나 봐.”

“아빠….”

“큼.”

감동한 딸과 민망한 얼굴의 아버지. 재벌가 어디에서도 평생 보기 힘든 광경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전 아버지처럼 못할 것 같아요.’

아버지는 배울 것이 참 많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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