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보들
이후 수안은 평소와 같이 펜타그램, 더블 스타, 강운 홀딩스를 오가며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아버지의 말씀대로 아들과 추억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오늘은 아들과 함께 아이스 링크에 방문했다. 물론 아내 아현도 함께였다.
“우아. 여기 시설이 상당히 좋네요?”
“당연하지. 배영성 사장이 직접 만든 곳이야.”
“여기 더블 스타 소유였어요?”
“응.”
“퀸즈 아이스 링크. 설마 날 생각하고 만들었어요? 어머나.”
“아…. 그렇지.”
수안은 오해를 바로잡을 수 없었다. 한껏 감동한 아내에게 찬물을 끼얹을 수는 없다.
“당신 스케이트 잘 타?”
“조금 타요.”
“그래? 다행이다.”
수안은 얼른 스케이트를 갈아 신고 정원이를 받았다. 올해 세 살이 되었지만, 걸음마를 떼고 1년도 지나지 않았다. 무거운 스케이트를 신고 빙판을 달릴 수 없었기에 특별히 제작한 썰매에 태웠다.
“꺄아!”
수안의 손엔 썰매와 연결된 줄이 잡혀 있었다.
수안이 앞에서 얼음을 제치고 나가면 정원이 탄 썰매가 수안을 뒤따라온다.
줄은 팽팽하게 이어져 있었고, 정원은 썰매 위에서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정원아. 재미있어?”
“빠아! 우바바바!”
대충 해석하면 “아빠 재미있어.”라고 할 수 있다. 생후 만 1년이 훌쩍 넘은 아들은 몇 가지 단어를 말할 수 있었다.
“하하하.”
아현은 오랜만에 스케이트를 신고 얼음 위에 올랐다.
“우아. 빙판이 정말 관리가 잘됐네.”
사라락.
스케이트 날에 닿는 얼음이 너무 부드러워서 잠시 한눈을 팔면 미끄러질 것 같다.
슉.
아현 곁으로 수안이 아들을 태운 썰매와 빠르게 지나쳐 갔다.
“여보! 천천히 가요! 정원이 다칠라!”
“알았어~”
아무도 없는 아이스 링크는 오직 수안 가족만의 것이다.
수안은 한 바퀴 돌고 와서 아현과 썰매가 나란히 달리게 속도를 조절했다.
“음마! 음마!”
“정원이도 재미있어?”
“으응. 빠아! 빠아! 아빠아아!”
아들은 빙판에서 미끄러지는 속도를 즐기고 있었다.
“누구 아들 아니랄까 봐 빠른 걸 좋아하네요. 더 빨리 달려요!”
“정원아. 꽉 잡아.”
한참 재미있게 놀고 정리하려는데 어린 선수들이 아이스 링크로 들어섰다.
“어? 여보. 누가 들어와요.”
“누구. 아. 꿈나무 친구들이네.”
아내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저 사이에 진짜 퀸이 존재하고 있었다.
“꿈나무요?”
“나중에 피겨스케이팅 선수로 키울 아이들이야. 회사에서 지원하고 있어.”
“피겨도 지원하고 있었어요? 육상은 강운 그룹에서 하고 있고….”
“다른 스포츠도 지원할 거야. 계속 범위를 넓혀가면서 지원할 생각이야. 시작은 육상이었고 피겨도 시작했고 곧 축구도 지원할 생각이야. 유소년클럽부터 시작해서 해외 축구 유학까지 보낼 생각이거든.”
“그런 건 국가에서 해야 하지 않아요?”
“국가는 담당자도 자주 바뀌고 축구협회에서 하도 많이 해 먹어서 못 믿어. 학연, 지연, 혈연은 물론이고 돈까지 얽힌 곳이야. ”
“하긴. 차라리 직접 하는 편이 속 편하겠네요. 그럼 선수들은 지원만 받고 끝? 회사에도 도움이 되어야 하잖아요. 하다못해 광고라도 해 주든가.”
“당연히 광고 모델로 기용하고 평소에도 우리 회사 상품을 먼저 사용하게 해야지. 어려서부터 회사에서 지원해 줬는데 설마 경쟁사로 가서 광고 모델을 하겠어? 어림도 없지.”
“그런 선수가 있을까 봐 걱정이에요.”
“애초부터 그런 선수는 지원하지도 않아.”
엄마 아빠의 대화가 지겨웠는지 아들이 수안에게 다가와 다리에 붙었다.
수안은 다리를 붙들고 매달린 아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중에 또 오자. 정원아. 이제 집에 갈 시간이야.”
“부으아!”
표정만 봐도 아들이 뭘 원하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선수들 훈련을 위한 시간까지 빼앗으며 아이스 링크를 사용할 수는 없다.
“추운 데서 너무 오래 있으면 감기 걸려요.”
“부우.”
아들과 아빠의 줄다리기를 보던 엄마가 끼어들었다.
“그만 가자. 정원아.”
“…….”
엄마가 가자고 하면서 손을 내밀고 있으니 작은 손을 내밀어 잡는다.
집안에서 엄마가 훈육을 맡다 보니 엄마 말에 더 권위가 있었다.
“흐흐. 엄마 말은 잘 들어서 다행이네.”
“당신은 엄한 아빠가 되긴 힘들겠어요.”
“원래 아빠는 그래야 한다고 하더라.”
“맞아요. 아빠가 무섭게 훈육하면 자식들하고 거리감 생겨요. 차라리 이게 좋죠.”
“부!”
정원이 만세를 부르자 수안은 자동으로 앉아서 등을 내밀었다.
아빠의 등은 정원이의 전용석이다.
“우리 아들 더 많이 먹어야겠다.”
아들을 등에 업고 차로 향하는 수안이다.
차로 가는 잠깐 사이 아들은 잠들어 버렸다. 한껏 기분을 내고 즐겁게 놀았으니 피곤할 만하다. 아현이 차에서 아들을 받아 안았고 수안도 곁에 앉았다.
수안이 잠든 정원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띠고 있었는데 아현이 물었다.
“정원이는 이제야 엄마 아빠 떼고 있는데, 당신은 어려서 말 잘했다면서요?”
“그랬지.”
이 나이대의 아이들은 보통 한두 개의 단어를 통해 말할 수 있다. 여자아이들에 비해선 느릴지 몰라도 아들은 정상적인 발달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기억나요?”
“응. 전부 기억해. 난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거든.”
“…하. 하.”
“처음엔 할머니부터 찾았어. 그리고 엄마가 부르는 소리에 엄마, 아빠를 불렀어. 할아버지는 놀란 얼굴로 서 계셔서 “할부지 까까.”라고 말했지.”
“진짜 기억한다고요?”
“할아버지가 과자 공장을 사야겠다는 말도 했어. 그 뒤로 진짜 과자 공장을 사셔서 지금도 우리 회사 계열사에 제과 업종이 있는 거야. 다른 계열사 대부분이 강운이라는 사명을 쓰는데 제과만 강수 제과라고 하잖아. 내 이름을 붙여서 그래.”
“할아버님도 대단하셨네요. 강수안의 이름을 따서 강수 제과라니….”
“내가 제과에서 신제품도 많이 개발했어. 내 입맛에 안 맞는 과자는 전부 퇴출이었지.”
덕분에 제과 업종에서 강수 제과의 과자는 고급 과자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수안의 입으로 들어가는 과자를 만들었으니 그 품질이야 말할 것도 없다. 항상 좋은 재료와 맛있는 과자를 만들어 판매해 왔기에 점유율도 상당히 높은 편이다. 이번에 해태 제과를 인수했으니 경쟁사인 샤롯제과와 비등한 위치에 설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그 정도면 보통 아이들과 비슷하지 않아요?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 아빠에 까까라고 했으니 몇 단어 안 되네요. 그런데 어머님이 당신은 달랐다고 매번 얘기하셔서요.”
지금까지 남편이 말한 정도라면 지금 아들 정원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날 하루만 몇 단어였고 얼마 안 지나서 어른들과 대화할 수 있었어. 배우는 속도가 달랐던 거지.”
“…그냥 대화가 됐다고요?”
믿기지 않는 일이다. 아들 정원이가 유창하게 말한다고 생각해 봐도 전혀 상상되질 않는다.
“응. 그리고 얼마 안 지나고 아버지 서재에서 혼자 한글하고 영어도 뗐어.”
“에이. 그건 너무했다. 여보.”
아현은 전혀 믿을 수 없다는 투였다.
“진짜라니까. 그래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깜짝 놀라서 가족회의도 했어.”
“가족회의요? 당신이 이상해서?”
“누가 날 가르쳤는지 찾겠다고 하다가 못 찾아서 결국은 가족회의를 통해 과외를 시켜야 한다고 결론 났어.”
“기승전 과외라니…. 우리나라는 하여튼 과외가 문제예요.”
“난 좋았는데? 과외선생이 있으니 혼자 배우지 않아도 되잖아. 나 가르쳐 주신 과외 선생님이 바로 강운 병원 원장님이신 김일곤 박사님이셔.”
“어머! 그래요?”
“그래서 내가 평소엔 스승님이라고 불러. 진짜 내 스승님이니까.”
“우아. 대단한 과외 선생님을 초빙하셨네요.”
“그때만 해도 김 박사님이 강운 병원에 막 오셨을 때였고, 이후에 병원으로 복귀하셔서 병원장까지 되신 거야.”
“당신 키운 공로가 컸나 봐요.”
“솔직히 그 정도는 해 드려야지. 내가 누구 덕에 여기까지 컸는데.”
“…당신은 어려서부터 별종이었네요.”
“큭. 별종이긴 했지. 다행히 우리 정원이는 아주 평범하지만 말이야.”
“당신 얘기 들어 보니까 왜 어머님이 걱정했는지 알겠어요.”
아현은 손자 정원의 발달을 염려하던 시어머니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 같아도 그랬겠다.’
아들이 어려서 신동 소리를 들었는데 태어난 손자가 영 배움이 느리면 며느리 탓을 하게 되어 있다.
“어머니가 정원이 늦다고 걱정하셔?”
“당신처럼 자세하게 설명해 주진 않으시고 그냥 정원이 말이 조금 늦지 않느냐며 지나가는 말로 하셨어요. 당신처럼 머리가 좋을 줄 아셨나 봐요.”
그나마 직접적으로 얘기하지 않고 돌려서 말씀하셨지만, 지금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당신 말대로 난 별종이라 그런 거고….”
“별종 맞아요. 당신은 병원에도 한 번 안 갔다면서요?”
시어머니를 통해 남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가끔 듣는다.
“병원?”
정원이는 보통 아기들처럼 갑자기 열도 오르고 감기에도 걸리고 하며 병원에 자주 다녀왔다. 지금이야 조금 더 컸다고 덜 가지만, 불과 몇 개월 전 고열로 병원에서 수액을 맞은 일도 있다.
“난… 거의 간 일이 없지.”
수안은 어려서부터 강인한 체력과 힘을 타고났다. 병원은 정기적인 발달 검진이 아니면 갈 필요도 없었다. 병이라곤 모르고 살았고, 다치지도 않았다.
“건강도 머리도 당신을 타고나지 않았으면 정원이는 나만 닮은 걸까요?”
“나도 반절 닮고 당신도 반절 닮았지.”
알 수 없는 누군가의 가호를 듬뿍 받았을 뿐이다.
“둘째는 당신 닮았으면 좋겠다.”
“하하. 난 당신 닮은 딸이면 더 좋겠어.”
“왠지 당신 뜻대로 될 것 같아서 더 걱정이야. 딸이면 어쩌지?”
“여보. 아직 둘째는 생기지도 않았…….”
자꾸만 둘째를 입에 담는 아내가 의심스럽다.
수안이 눈을 크게 뜨며 다시 물었다.
“혹시 생겼어?”
아현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크흡. 으흐으으으아.”
잠든 아들을 깨울까 크게 소리치진 못했지만, 수안의 표정과 추켜올린 주먹이 기쁨을 표현하고 있었다.
“푸흐흐. 당신 얼굴 웃겨요.”
아현이 웃건 말건 수안은 둘째가 생겼다는 사실이 즐겁다.
“여보. 너무너무 사랑해.”
* * *
수안은 아버지와 회장실에서 마주하고 있었다.
둘 다 말이 없다. 강운모 회장은 팔짱을 끼고 눈을 감고 있었고 수안은 서류를 뒤적거리며 살피고 있었다. 그렇다고 삭막한 분위기는 아니다.
수안이 서류 폴더 하나를 들어 아버지 앞에 올려놨다. 이미 몇 개의 서류철이 쌓여 있었고 그 위에 하나 더 얹은 것이다.
“수안아.”
“예. 회장님.”
대답은 했지만 시선은 여전히 서류에 가 있었다.
“지금은 아버지로 불러.”
“예. 아버지.”
아버지라고 부른 지금도 마찬가지 수안은 서류에만 집중하고 있다.
“수진이 불러서 같이 보자.”
“…네?”
그제야 고개를 드는 수안이다.
지금 수안과 강운모 회장은 수진의 신랑감을 찾기 위해 후보를 선별하고 있었다.
그래서 회사 안이라도 아버지라고 부르라 한 것이다.
“수진이가 뭘 안다고 봐요?”
“너 잘사는 거 보니까 꼭 이러지 않아도 되겠다 싶어서 그래.”
정략결혼이 아니라도 자식들이 행복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아들은 연예인과 결혼하고도 가정생활에 잡음 하나 없이 잘살고 있다. 특히 사돈댁이 점잖은 사람들이라 마음에 들었다. 사돈과 사업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얽힐 일이 없으니 오히려 불편할 일도 없고 평온했다.
“…아버지.”
수안은 아버지의 말에 감동한 것이 아니다.
“괜히 결혼할 때 상대 집안을 살펴보겠습니까? 어떤 집에서 누굴 부모로 모시고 살았는지 보면 뭘 배우고 살아온 사람인지 알 수 있잖아요. 최소한의 재산은 있는 집에서 살았어야 수진이와 격이 맞죠.”
“…네가 할 소리는 아닌 것 같다만?”
“저야 제가 맞추고 살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 거고요. 수진이가 누구한테 맞춰가며 살 애가 아니잖아요. 서로 비슷한 정도는 맞춰 줘야 해요.”
아들은 고집을 꺾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좋아. 그럼 우리가 최소한 기준만 맞추고 나머지는 수진이 결정에 맡기자. 수진이 불러.”
“제가 직접 만나 보고 대면 평가도 해 봐야 하는데요? 수진이가 만나 보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수안은 서류 전형 이후 대면 면접을 진행할 생각이었고, 직원들을 동원해 평상시 모습까지 관찰(감시)할 생각이었다. 이후 남은 후보들만 수진이에게 보여 줄 생각이다.
“뭐 인마? 수진이 신랑감 후보를 왜 네가 먼저 만나?”
“사람 보는 눈은 제가 더 나으니까요. 그리고 남자는 남자가 봐야 더 잘 아는 법입니다. 수진이가 남자를 만나 봤어야 뭘 알죠!”
아들은 정말로 먼저 만나 볼 생각이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