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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계자의 사정 (123/304)

후계자의 사정

수안은 회의를 마치고 이현창의 통합신당 당사 근처로 향했다.

예약된 식당은 한산했고, 이현창이 먼저 와서 수안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와. 후배.”

이현창과 웃으며 악수한 수안은 편안하게 인사를 건넸다.

수안은 기다리게 만들어 미안하다는 의례적인 사과도 건네지 않았다.

“선배님은 혼자 여유로우십니다. 시간이 남으세요? 당에서 총재는 일 안 시킵니까?”

오히려 시간이 남아도냐는 식으로 이현창을 꼬집고 있었다.

“총재가 일하는 사람인가? 시키는 사람이지. 그리고 자네가 바쁘니 내가 편하지 않겠나.”

“하하하. 제가 계속 바빠야겠네요. 그래야 우리 선배님이 편하게 지내시죠.”

수안은 적당한 선에서 물러날 줄도 알았다. 친분을 과시하는 것은 한 번으로 족하다.

“그럼 나야 고맙지. 미국 간 일은 잘됐고?”

“나름 재미있었습니다.”

“재미?”

김대준에겐 제대로 말할 수 없지만, 이현창에겐 조금이나마 말할 수 있다.

“사과하러 갔는데 사과하기가 싫더라고요. 고개 뻣뻣하게 들고 클린턴에게 부적절한 일이 발생해 유감이라고 했습니다.”

“뭐? 미국 대통령에게 유감? 흐하하하.”

그래도 르윈스키에 대한 부분은 얘기할 수 없었다. 이 부분은 앞으로도 알려져선 안 되는 일이다.

“200만 달러 정도 뜯기긴 했는데, IMF 협상 테이블에 앉는 캉드쉬 좀 관리해 달라고 한 기름칠이었습니다. 그걸로 이번 200억 달러에 대한 문제는 깔끔하게 해결입니다.”

“그 정도면 잘 막았군. 다행이야.”

수안은 이현창과 느긋하게 식사하며 앞으로 기화 자동차에 관해서나 대운 그룹 부도 처리에 대한 부분을 부드럽게 처리해 달라고 부탁했고, 이현창은 고민하지도 않고 오케이 했다.

“아드님들은 요즘 뭐 해요?”

이현창의 두 아들은 작년 가을에 제대했다. 멀쩡히 일하던 자식들을 갑자기 군대로 보냈으니 경력이 뚝 끊어졌을 것이다.

“제대하면 취직이 좀 쉬워질 줄 알았더니…. IMF가 터졌지 않은가.”

유학도 다녀오고 머리도 좋아서 금방 좋은 직장으로 갈 줄 알았는데, 아직도 쉬고 있다.

IMF로 국내 경기는 극도로 위축되었고, 실업자가 쭉쭉 늘어간다. 이 와중에 신규 고용 시장이 활성화될 수 없었다.

“선배님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저 때문에 군대까지 다녀오셨는데, 아드님들은 제가 책임져야죠.”

“어허. 내가 후배한테 아들 취직까지 맡길 수 있겠나. 됐어. 여태 공부시켜놨으니 알아서 잘하겠지.”

이현창의 거절에도 수안은 더 좋은 조건을 걸었다.

“강운에서 인수할 회사로 우선 취직시키고 아드님께 지분을 이전하겠습니다.”

“……!!”

아들에게 회사를 선물하겠다는 뜻이다. 미래의 대통령을 옭아매려면 이 정도는 해 줘야 했다.

“제가 쩨쩨하게 돈 몇 푼 가지고 벌벌 떠는 사람은 아니잖습니까. 그리 큰 회사도 아니고 적당한 규모의 중소기업일 뿐입니다.”

“내가 우리나라 제일 자산가를 무시했나 보군. 하하하.”

BE 하나만 놓고 봐도 국내 최고 자산가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

훗날 비리로 드러날 일이 걱정이다.

“문제없도록 서류는 완벽하게 준비해 둘 겁니다. 그보단 북한이 문제네요.”

“북한?”

이현창과 수안은 북한 잠수함을 통해 더욱 끈끈하게 이어졌다. 북한이라는 말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현창이다.

“북한이 또 뭐? 왜?”

“이번 김대준 당선자는 평화주의자 아닙니까. 북한과의 관계가 앞으로 온건하게 이어 갈 것인데….”

대북 화해 협력정책을 실시하는 김대준이다. 몇 년 뒤 남북 화해를 위한 정상회담까지 진행하는 정부였다. 금강산에도 관광길이 열리지만, 내국인이 금강산에서 총격 피살되며 끝맺음했다.

이후 천안함 피격 사건과 연평도 포격 사건까지 이어지며 남북 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된다.

‘햇볕 정책도 상대를 봐가면서 해야….’

평화를 주장하는 것이야 당연히 옳은 일이다. 하지만 상대가 평화를 바라지 않는다면 다시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북한은 말이 통하는 놈들이 아니야. 김대준 당선인이 오판할 가능성이 크지.”

“제 말이 그 말입니다.”

대북 화해 협력정책. 즉, 햇볕 정책이 시행되는 기간에도 북한의 무력도발과 핵, 미사일 개발은 지속됐다.

“김정일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놈은 아니야.”

수안은 김정일을 거론하는 이현창의 말에 문득 그의 아들이 떠올랐다. 언젠가는 수를 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선배님.”

“왜?”

“김정일의 아들이 지금 해외에 있다면 우리나라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뭐?”

“북한 김정일 위원장의 다음 후계자 말입니다. 지금 2대째 김씨가 왕위를 이어받았습니다. 김정일의 다음 후계자는 김정남 혹은 다른 아들들이 이어받을 테고요. 김정남의 위치는 알 수 없지만, 나머지 두 아들 중 하나가 지금 스위스에 있습니다. 그것도 유력한 후계자랍니다.”

“……!!”

“불륜으로 태어난 자식인 김정남을 후계자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는 평가가 있죠. 그리고 정실에게 낳은 첫째 아들이 있지만, 계집애 같아서 김정일이 후계자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고요. 둘째가 바로….”

“남은 후계자가 둘째인 그놈이군. 그래서 자네가 후계자로 유력하다고 했어.”

“그 아이는 권력욕과 지도력까지 갖췄다고 합니다. 어려서부터 야망에 가득 차 있습니다. 김정남은 여러모로 부족한 인물이니 지도자가 되어도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이놈은 아닙니다. 만약 제가 한국의 통수권자라면 이 녀석을 미연에 정리할 겁니다.”

나이가 어린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독하게 마음먹으면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올 수도 있는 일이다. 손에 피를 묻히는 거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니다. 게다가 이번엔 내 손에 묻히지 않을 수도 있다. 처리를 할지 회유를 할지는 모르지만, 떠넘기기만 해도 됐다.

‘다가올 미래를 감당하는 일은 당신이 해야겠지.’

“이봐! 후배. 대체 자네의 정보력이 어디까지 이어진 거야? 미국에서 듣고 왔어?”

“CIA에서 확인한 것은 아니니 안심하십시오.”

“그럼 국정원에서 이 소식을 들었나?”

“CIA도 모르는 일을 국정원에서 무슨 수로 파악하겠습니까. 전혀 모를 겁니다.”

“…그럼 후배는 어떻게 그걸 알았는데?”

“유럽에 보낸 저희 직원들을 통해서 은밀하게 전해진 정보입니다. 직원은 내국인이라고 생각해 친근하게 접근하려 했는데, 북한 말이 들리더랍니다. 직원은 모르는 척 돌아와서 보고했고, 그 보고가 제게도 전해졌습니다. 저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밀착 감시를 지시했어요.”

“그럼 그 사람들이….”

“예. 함께 있는 사람들은 모계 친척으로 확인됐고 그 아이가 북한 지도부의 자식이라는 것도 파악했습니다. 이름은 김정은. 김정일의 삼남입니다. 지금은 가명으로 박운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습니다. 스위스 공립학교에 입학을 앞두고 있지요.”

“젠장. 나 놀지 말라고 일 가져왔지? 국정원에 정보를 가져가면 되는 거야?”

“가져가셔도 상관은 없지만, 이번 일은 정부가 해결할 수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번 정부는 북한에 친화적인 제스처를 취할 겁니다. 처리를 하든지 회유를 하든지 선배님이 이번 정부 모르게 독단적으로 해야 합니다.”

수안은 이번 일을 이현창의 손으로 해결할 생각이다.

“내가 무슨 수로?”

“김대준 당선인에게 국정원장 자리를 달라고 하십시오.”

“……!”

“김대준이 원하는 남북 화해는 이 녀석이 없어야 나중에나 이뤄질 겁니다. 선배님은 아무도 모르게 그 첫 단추를 채우시는 거죠. 그리고 선배님이 대통령 자리에 오르면 진정한 남북 화해가 이뤄지는 겁니다. 국정원장은 보통 군 장성이나 검찰청 출신을 선호하지만, 대법관을 지낸 선배님도 나름 메리트가 있지 않겠습니까?”

“젠장!”

애써 관리하고 온 머리를 헝클어트리는 이현창에게 수안은 밉살스럽게 말했다.

“제가 선배님 많이 믿는 거 아시죠?”

“생각 좀 해 보고 인마!”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국정원장 자리는 한 번 거쳐 가면 좋을 자리니까요.”

“음….”

“그리고 북한은 선배님과 저를 위협하지 않았습니까.”

“넌 왜 자꾸 나와 북한을 척지게 만들어?”

“대한민국은 휴전 상태입니다. 북한과는 언제든 적이 될 수 있어요. 그리고 시간은 넉넉합니다.”

“퓨후. 올해 입학이면 3년은 다닌다는 말이지?”

확답이나 다름없는 질문이다.

“예. 기회는 3년이나 있습니다. 그 안에 녀석을 정리할 수 있다면 남북 평화도 헛된 망상이 아닙니다. 훗날 선배님이 봉황의 자리에 앉으면 얼마나 일이 수월하겠습니까. 회유를 하면 녀석이 후계자로 올라선 다음 북한과 평화롭게 지낼 수 있을 것이고, 처리를 한다면 무능력한 놈이 후계자가 될 겁니다. 선배님은 통일을 이룬 대통령이 될 수도 있겠죠. 역사에 남을 대통령이 될 겁니다.”

“……!!”

이현창은 잠시 눈을 감고 고민했다 그리고 결정했다.

“대통령이 되기도 전에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을 하게 생겼어.”

“이번에 국정원을 장악하세요. 크게 도움이 되는 곳입니다.”

“통합신당에서 얼마나 양보해야 그 자리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를 일이야.”

“어차피 이번 금융 위기를 이겨내려면 거대한 두 당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미리 양보하고 얻어내시면 더 큰 것을 얻으시게 되죠.”

햇볕 정책은 그대로 놔둬도 된다. 큰 변화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훗날 김정일이 죽고 이어질 후계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대한민국의 미래가 많이 달라질 것이다.

‘김정은 아니면 북한 군부에 남은 대안이 김정남밖에 없어.’

김정남은 드물게 개혁, 개방을 실행하겠다고 말했던 인물이지만, 김씨 일가의 피가 어디 가지 않는다. 김정남도 어려서부터 제멋대로 살던 인물이었다. 술과 여자에 빠져 방탕하게 생활하고 외국인 전용 클럽에서 시비가 붙어 천장에 총을 쏜 일도 있었다. 그 일로 김정일에게 허리띠로 맞았다는 소문까지 돌았을 정도다.

하지만 김정일의 해외 계좌를 살피는 인물로 낙점된 인물이었고 그만큼 신뢰도도 상당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아직은 내쳐지기 전이기 때문에 불륜으로 인한 소생이라도 얼마든지 북한 지도부의 가계도가 바뀔 여지가 있었다. 이번에 유력한 후계자가 불의의 사고로 제외된다면 대안은 김정남밖에 없다.

“우선 정보의 진위부터 파악해야겠군.”

“국정원 해외정보 처장에게 협조를 요구하시면 될 겁니다. 대신 미국 CIA가 알면….”

“그건 나도 알아. CIA가 아는 순간 우리는 손을 떼야 하니까.”

“음지에서 양지를 지향하시죠.”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한다.

국가재건 최고회의에서 제정하고 중앙정보부 및 국가안전기획부 시설부터 쓰인 국정원의 원훈이다.

“에라이. 밥 다 먹었으면 일어나. 네 덕분에 나도 바빠졌으니까.”

“우리가 움직인 흔적을 남기면 말짱 도루묵입니다. 아시죠?”

“요구 조건도 많네. 누가 모르겠어?”

“녀석이 스키를 참 좋아한다고 하네요. 해외에 나갔으니 따로 외국어를 가르칠 가정교사도 필요하겠죠. 접근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겁니다.”

“…….”

“알았어요. 잔소리는 그만할게요.”

아니꼬운 표정으로 이현창이 수안을 노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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