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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높이 (120/304)

눈높이

‘BE 인베스트먼트는 미국 정부와 긴밀한 관계라고 했었어. BE의 진짜 힘은 해외에 잔존하는 광범위한 인적 네트워크. 씨티 그룹 대출 사건만으로도 알 수 있었던 일이거늘….’

자신의 아비는 이미 당시에 모든 것을 파악했을 것이다.

“이제 대현의 요구 조건을 들어 볼까요? 제가 기화 자동차를 가지는 데 도움을 주고 뭘 얻고 싶으세요?”

“…….”

돈만 많은 해외 금융사라고 생각할 수도 없고, 권력자와 연결점만 가지고 있는 로비스트라고 볼 수도 없다. 상대는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의 가교역할을 하고 국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거대 기업의 수장이었다.

‘마치 아버지를 앞에 둔 것 같군.’

이전보다 더 거대한 존재감이 느껴진다. 괜히 미국 방문 목적을 물었다 싶었다.

“…회사에서는 대운에 위기가 오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수안은 애초에 정 회장의 욕심을 잘라낼 생각이다.

“아! 그랬죠.”

“당연히 강운 그룹에서도 대운 그룹의 문제를 파악했겠….”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일전에 제가 김대준 당선인과 김일삼 대통령에게 따로 얘기해 뒀습니다. 대운을 갖고 싶으니 알아서 처리해 달라고요. 아직 김 회장이 해외로 출국하진 않았겠죠? 출국 금지부터 빨리 걸어야 할 텐데 말입니다.”

“……!!”

‘대운의 위기를 이 녀석이?’

대운 그룹에 닥친 위기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런 비밀스러운 정보를 자신에게 실토하고 있었다.

“기화는 어려울 것 같아서 대운 자동차를 가지고 싶었습니까? 대현에 돈이 남았습니까? 씨티 은행 대출 상환 여력이 있으신가 보네요? 니콜라 회장이 그렇게 셈이 어설펐나요? 수수료 장사도 못 할 사람이었네요. 빨리 손절해야 하나?”

“아, 아니. 대현에 무슨 돈이 있어? 돌아오는 대출을 상환하기에도 빠듯해.”

거짓은 아니지만, 욕심이 생겼던 것도 사실. 국내 은행이 어렵다고들 하지만, 은행마다 차입을 모으면 대운 그룹에서 떨어져 나온 대운 자동차 정도는 삼킬 수 있을 거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 대현에서 무슨 지원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말씀해 주시죠. 무척 궁금하네요.”

“…….”

꼼짝없이 지원만 해 줘야 할 것 같았다. 이미 대운을 노리고 들어온 무자비한 상대에게 양보를 기대하긴 어려웠다. 여차하면 다시 씨티 은행과 대현에 손을 쓸 것 같았다.

“대현 자동차에서 독자 개발한 국내 차량용 엔진….”

“아! 대현 자동차에서 엔진 제조 기술을 이전해 주면 정말 좋겠습니다. 그럼 해외 기술에 사용료까지 지급하면서 생산할 필요가 없죠. 감사히 받겠습니다.”

자동차의 핵심 기술인 엔진 제조 기술을 날름 삼키는 수안이다.

“핵심 부품 협력사 공유와 전국 곳곳에 세운 차량 A/S 공업사 공유도 생각하고 있었….”

“굿 아이디어! 좋네요. 협력사와 센터를 공유하면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죠. 물론 제 회사가 될 기화도 대현과 공유해야겠지만, 서로에게 나쁠 것은 없겠습니다. 상생과 협력. 훌륭한 경영 방식이죠.”

자동차를 구성하는 여러 부품도 각자의 특허를 갖고 있기에 협력사를 공유하면 더 좋은 기술이 적용된 부품을 사용할 수 있었다. 이번에도 수안은 아무런 보상을 제안하지 않고 꿀꺽했다.

“강 부회장…. 우리가 뭘 더해야 부스러기를 남겨 줄 텐가.”

대현은 이제 수안에게 자비를 구걸해야 했다.

“흠….”

대현에서 이렇게 성의를 보이는데 아무것도 남겨 주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상황은 파악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했다. 대운을 욕심내고 있는 걸 보니, 기화도 여차하면 먹고자 할 것 같다.

“작년 기화 자동차에서 발생한 손실이 얼만지 아십니까?”

“4천억에 못 미친다고 알고 있네.”

“앞에 숫자를 하나 빼먹으셨네요. 기화 자동차의 작년 한 해 순손실이 3조 4천입니다. 지난 7년간 누적 순손실은 무려 4조 5천억이고요.”

회계 처리의 조작이 드러난 기화 그룹이다. 기화 자동차와 아세아 자동차에서 발생한 손실이 무려 4조 5천억. 대마불사라는 미신에 사로잡혀 문어발식으로 사세를 확장했지만, 은행권은 저마다 돈을 빌려주지 못해 안달했었다. 회계 처리를 조작해 허상으로 실제를 가렸기 때문이다.

“4조 5천억? 미쳤군! 드러난 부채가 다가 아니란 말인가?”

“기화 사태로 모인 채권단 숫자만 무려 150이 넘습니다. 실질 부채는 12조 원에 육박하죠. 대현이 기화를 삼키면 같이 쓰러집니다. 대현 자동차 자금력으론 무너지는 자동차 산업에 부도 기업 하나만 더하게 될 겁니다.”

“…….”

기화 자동차는 대현이 가질 수 없는 수준의 부실기업이었다.

물론 헐값에 사들여 채권단과 협상을 이어 가면 좋은 결과를 얻을지도 모르지만, 당장은 거대한 부채가 부담스럽다.

“솔직히 저야 대현이 기화 먹다가 체해서 쓰러지는 시나리오가 더 좋긴 합니다. 완벽한 독점 시장을 먹을 수 있으니까요. 아무리 막고 싶어도 어쩌겠습니까. 완성차 산업을 국내 단 한 회사만 영위한다면 독점이라도 눈 뜨고 당해야 하죠.”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대현 자동차는 무너지지 않아. 내가 그렇게 만들지 않는다.”

아찔한 기분이다. 12조 원의 부실 채권을 떠안으면 대현이라고 해서 쓰러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지금까지 일궈온 대현 자동차를 이렇게 빼앗길 순 없다.

“다행이군요. 저도 경쟁자도 없는 시장은 부담스럽거든요. 너무 쉽잖습니까. 기업은 경쟁이 재미있는데요. 흐흐흐.”

수안의 눈은 정영수 회장을 먹잇감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녀석은 눈높이가 달라도 너무 달라.’

“끄응.”

정 회장이 시선을 피하자 수안은 대화의 주도권을 다시 가져왔다.

“이번에 대운이 삐걱거리는 바람에 하나 남은 물건이 있긴 합니다. 생각 있으십니까?”

“뭐가…. 헛!”

정영수 회장은 서로 사인만 남겨두고 있었던 대운 그룹의 쌍륭 자동차 인수 협상을 떠올릴 수 있었다.

‘쌍륭 자동차 부실도 기화에 못지않아.’

“쌍륭이 마음에 안 드시면…. 삼디 자동차도 있군요.”

일찍부터 기화 자동차를 노렸던 삼디는 헛물만 켜고 있었다. BE 인베스트먼트가 나서면 삼디의 노력은 물거품으로 사라져 버릴 게 뻔했다.

“그건 좀 낫군. 하지만 삼디 그룹은 여력이 충분해서….”

“이미 IMF 체제가 시작되었습니다. 국내 완성차 업계는 포화 상태이고 일정 이상의 점유율을 가진 세 개의 회사만 살아남을 겁니다.”

기화를 놓친 삼디는 결국 자동차 산업을 포기하게 된다. 자동차 산업 구조조정 대상에 포함되어 처리되는 것이다. 아직 이에 관한 내용을 알 수 없는 정 회장은 삼디 자동차의 인수에 회의적이었다.

“IMF에서 너무 많은 요구 조건을 걸고 있어. 걱정스럽군.”

“한국이 갚아야 할 외채가 2천억 달러입니다. 요구 조건이 과하다고 할 수 없죠. 앞으로도 한국은 IMF의 요구 조건을 들어줄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제때 일정 부분 달러를 들여왔기에 숨통을 틔웠고, 미국 대통령과 재무부 장관을 통해 재협상의 발판을 마련한 것이 요구 조건 조정에 도움이 될 겁니다. 요구 조건의 조정은 앞으로 지켜볼 일입니다. 조정 협상이 쉽지도 않을 테고요.”

정영수 회장은 IMF 체제에 들어간 한국에서 살아남으려면 강운 그룹 옆에 있어야 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한국의 숨통을 틔운 달러를 들여온 것도 수안이었고, 재협상의 발판을 마련한 것도 수안이다.

“…….”

“현재 IMF 구제 금융 협정은 한국 경제를 외국 자본에 팔아먹는 수준이죠. 일부 공기업도 민영화할 것이고 재계 상위 그룹을 포함해 모든 기업에 전반적으로 구조 조정이 시작되겠죠. 우리나라가 세상에 활짝 열릴 겁니다. 하지만 우린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아요.”

“강운 그룹은 준비됐잖아?”

“…….”

수안은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으로 살짝 놀랐다.

“BE를 손에 쥐고 있으니 준비고 뭐고 필요 없었겠지만….”

국가 채무가 2천억 달러라고 하지만, 해외에 가진 기업 자산이 그 절반을 넘어선다.

자신에게 그런 수준의 달러가 있었다면, 위기가 위기로 느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정신 바짝 차리세요. 정 회장님. 우리 기업인은 남들보다 위기를 더 민감하게 느껴야 합니다.”

“음….”

수안은 BE 인베스트먼트에만 신경 쓰는 정영수 회장에게 씁쓸한 감정을 느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당신 어깨에 달린 직원들을 생각해야지 이 사람아.’

현재 재벌들 대부분이 정 회장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터였다.

기업의 존속과 성장만을 생각하는 정영수 회장이었고, 그에 반해 수안은 위기를 이겨내고 많은 사람을 절망에서 구해낼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안위만 생각했다면 얼마든지 더 편하게 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서는 행복을 느낄 수 없다.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야 자신도 행복해질 수 있는 법이다. 전생에서부터 기억해 온 미카엘라 수녀님의 가르침을 지금도 지키려 하고 있었다.

‘그게 진실이니까.’

“어쨌든 강운이 위기에 대비했을 거라는 추측은 정답입니다. 강운은 97년 초부터 위기를 예상했어요. 덕분에 작은 파고를 넘지 못한 작은 기업들을 계열사가 주워 담고 있죠. 회장님과 저는 대형을 노리고 있고요.”

정영수 회장은 강운 그룹의 미래 예측 능력에 아찔한 기분을 느끼며 물었다.

“해태 제과도 작은 기업인가?”

해태 제과 또한 법정 관리 이후 강운 그룹 계열사에서 인수를 위해 접촉하는 중이었다.

예전 할아버지께서 자신이 사 달라고 했던 과자 공장을 인수하며 늘린 계열사였다.

“동종 기업은 동종 계열사에서 진행할 뿐입니다. 기화처럼 거대한 먹이는 따로 노리는 거죠.”

제과업종에서 관련 계열사인 해태 제과를 인수하듯이 다른 계열사들도 저마다 동종 계열사를 흡수하고 있었다.

“대현 자동차는 갈 길이 까마득하군.”

강운 그룹의 벽이 높게 느껴진 탓이다.

“보통 위기엔 내실을 다져야 하는 법입니다. 외부에 눈을 돌리지 마시고 대현 건설이나 잘 챙기시죠.”

“거긴….”

정영수 회장의 동생이 맡은 회사였다. 건설에 관해서는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형제끼리 서로 다투지 마시고요.”

“다투긴 언제 다퉜다고 그래?”

“건설이 대현의 심장 아닙니까. 동생이 그룹을 이어받을까 걱정하시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이봐. 강 부회장. 우리 대현이 잠시 내려앉았다고 너무 내려다보는 거 아닌가? 거기까지 관여하는 건 곤란해.”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이 부분이 정영수 회장의 역린이었다.

한참 어린 동생에게 대현 건설 회장 자리를 빼앗겼다.

대현 건설이 바로 대현의 심장이었고, 대현 그룹 그 자체였다.

“대현 그룹은 결국 자동차를 위주로 개편될 것으로 생각해서 말씀드렸어요. 마음에 안 드시면 그만하죠.”

“아. 아. 그냥 계속해 봐.”

자신의 회사로 개편된다니 금방 말을 바꾼다.

“맨입으로 말입니까?”

“이미 줄 거 다 줬잖아.”

이제 아무것도 안 주고 입만 털어서 정 회장이 제안한 대가를 받으면 된다.

“건설의 부실이 상당합니다. IMF 체제에서 누가 건설에 수주를 맡기겠습니까. 외형이 클수록 위험한데 대현은 국내에서 가장 큰 건설사죠. 대현 건설은 지금 극도의 위기 상황입니다.”

“그렇지. 맞아.”

“하지만 자동차는 아니죠. 한국이 힘들면 해외로 눈을 돌릴 수 있습니다.”

“건설도….”

건설도 해외 수주를 받아 오면 좋을 것 같지만 국가 신용도가 떨어지고 기업의 신용도까지 동반 하락했다. 한국에 기반을 둔 대현 건설이 해외 수주를 받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문제는 이것뿐이 아니다.

“이번 동남아 위기에 대현이 상당히 물렸을 텐데요?”

태국과 말레이시아에 받은 건설 수주의 대금을 받지 못한 대현 건설이다.

“대현 건설은 한참 동안 해외에 눈도 못 돌리겠군.”

“정 회장님도 외부에 눈 돌리지 마시고 내실을 다진 다음 건설이 위기에 처하면 구원자를 자처하세요.”

“…내가 그 녀석 회사를 살려 주란 말이야?”

건설이 망하는 것은 참담하지만, 동생이 건설을 말아먹어야 자신에게 기회가 올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결국 모든 것은 왕 회장님 의중에 달렸습니다. 특별한 위기 관리 능력과 위기에 빠진 동생을 보듬는 형의 모습. 왕 회장님이 생각을 바꾸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건설이고 자동차고 간에 모두 한 사람에게 돌아갈 수도 있죠. 그것도 외부 요인이 아니라 왕 회장님 스스로 결정하게 됩니다.”

“허허….”

“저도 때가 되면 백기사로 나서지요.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회장님이 제시한 지원에 합당한 보답이 아닐까요?”

“이거…. 괜히 아버지가 물린 게 아니었구만.”

눈 뜨고 코 베이는 기분이다. 대현 자동차의 핵심인 엔진 기술과 협력사, 그리고 A/S 공업사까지 공유한다고 했는데 얻은 것은 훗날 협력한다는 약속이 끝이다.

‘그런데도 만족스럽다는 게 더 문제야.’

“제가 개라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일전에 제가 너무 부드럽게 넘어갔죠? 제대로 물어드릴까요?”

“헛. 흠. 미안함세.”

편하게 하라고 했지, 막말하라는 소리는 아니다. 가끔 한 번씩 정신이 번쩍 들도록 주의를 환기해 주며 적절한 선을 만들어 낸 것이다.

“앞으로 우리 잘해 봅시다. 정 회장님.”

“이거 대단한 우군을 만들었군.”

공룡을 손에 쥐고 있는 수안이다. 함께해 준다면 대현을 자기 손에 넣을 가능성이 컸다.

“살아남는 자가 승리자입니다. 끝까지 살아남으십시오.”

“당연하지. 난 살아남고 승리해서 꼭대기에 앉을 생각이네.”

수안은 대현의 훗날을 예상하기에 정영수 회장에게 손을 내민 것이다.

‘대현은 자동차와 제철소가 전부. 금강산 관광은 개나 던져 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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