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
미국을 떠나는 날이다. 수안은 지긋지긋한 이 땅을 벗어나고 싶었기에 후련한 마음이다.
그리고 비행기가 출발하기 전, 아쉬워하는 이방효와 커피를 마시며 입을 열었다.
“이 사장. 롱텀 캐피털(LTCM)이 파산한다는 가정하에 보험 옵션 상품을 만들어 달라고 해. 월스트리트에서 환영할 만한 상품일 거야.”
“…네?”
“그들의 이론은 아주 훌륭하지만, 아직 기계가 인간을 뛰어넘지 못하는 분야가 있기 마련이지. 채권거래에서 레버리지를 한계까지 일으킨 롱텀 캐피털(LTCM)은 파산을 맞을 가능성이 높아.”
초반엔 수안과 같은 주장을 펴는 사람이 많았지만, 지금 롱텀 캐피털(LTCM)은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는 앨버트로스와 같이 여겨지고 있었다. 거대 금융사 핵심 인재들도 롱텀 캐피털(LTCM)로 이직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수안은 그런 엘리트 헤지 펀드의 종말을 예언한 것이다.
“회장님은 가능성이 아니라 확신을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
이 사람 눈치도 점점 좋아진다.
‘내가 언제 이런 걸 신경 썼다고.’
그냥 질러 버렸다.
“롱텀 캐피털(LTCM)의 파산 가능성이 가장 클 때는 올 8월. 관련 금융 상품을 출시해 준 금융사의 모든 보험을 매입해. 운용 금액에 제한을 두지 않도록 하지. 롱텀 파산으로 파생되는 일도 이방효 사장이 알아서 진행해. 늘 해 왔던 것처럼 하면 될 거야.”
미국 금융 회사 전부가 절망적일 정도의 상황은 아니다. 아직 그 시간이 오려면 멀었다. 다만 그 위기를 미리 겪어 볼 경험은 될 수 있을 것이다.
“…무시무시할 정도로 거대한 거래가 될 겁니다.”
이방효는 리스크가 절대적으로 큰 보험이라고 생각했다.
보험을 파는 금융사가 유리한 것이 아니라 그 보험에 가입하는 BE가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수안의 말이 곧 진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상대 금융사는 위험도를 낮게 평가할 것이니 보험의 배수로 인한 보험금은 천문학적인 숫자가 나올 것이다.
“언제 우리 BE가 거래를 두려워했지? 우린 언제나 승리했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야. 이번 기회에 BE의 외형을 늘릴 수도 있겠지.”
“롱텀이 파산하고 미국에서 보험이 효력을 발휘한다면….”
미국 월스트리트의 지도를 바꿀 수도 있었다. 거대한 지각 변동이 있을 것이 확실했다.
수안은 왜 롱텀 캐피털이 파산에 이른다고 예상했는지 귓속말로 설명했다.
“러시아 신용도에 이상이 생길 거야.”
“러시아 신용도요?”
“지금 상황을 봐. 아시아 금융 위기가 도래했어. 국제 헤지 펀드들은 이번에 큰 충격을 받았지. 그렇다면 다가올 다른 위기가 어디서 또 발생할지 궁금해하지 않겠어? 이 사장만 같아도 다른 위기를 피하기 위해 주변을 살피고 있지 않아?”
“궁금하긴 하겠지만….”
“헤지 펀드들의 시선은 아시아 근처에 있는 러시아로 모여들 거야. 가장 위험한 국가가 바로 러시아라고 여기고 파고들면 신인도가 뚝뚝 떨어지지.”
“그렇다고 해서 롱텀 캐피털(LTCM)이 망하진 않을 것 같습니다.”
국가 신인도가 떨어지는 정도로 국채가 휴짓조각이 되진 않는다. 손해는 예상할 수 있겠으나 망하는 것은 결이 다르다. 이번 동남아 국가들의 상황을 봐도 알 수 있었다. 정크 본드 수준으로 채권을 평가 절하시켜도 아예 가치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러시아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해도 말인가?”
“……!!!”
“러시아는 무대뽀야. 동아시아 국가들처럼 알아서 설설 기지 않는단 말이지.”
“…모라토리엄이라면 불가능이 아니군요. 그렇게 된다면 충분히…. 회장님 예측을 이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실현 가능성이 상당합니다!”
그리고 소로스를 챙겨 줄 것도 함께 주문했다.
“겸사겸사 소로스 그 사람도 좀 살펴줘. 롱텀에 10억 달러 이상 묻었을걸?”
“아! 그래서 그 친구 얘길 하셨군요?”
“공격적인 투자는 우리나 하는 거야. 소로스 그 사람은 앞으로 오마하의 현인처럼 가치 투자나 하라고 해.”
“하하하. 버핏의 가치 투자를 하찮게 생각하는 분은 우리 회장님밖에 없을 겁니다.”
“내가 언제 하찮다고 했나? 사람마다 성향이 다르다는 거지.”
대략적인 지시만으로도 이방효 사장은 거대한 이익을 만들어 낼 줄 안다.
지난 과거에도 이방효는 이와 같은 일들을 훌륭하게 해냈다. 이번에도 믿고 맡길 수 있었다.
“그리고 미국만 발라먹지 말고 런던도 좀 신경 써 줘.”
“흐하하하. 맞는 말씀입니다. The City에서도 상당한 보험을 요청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차진호 사장에게 일본 금융권에도 관련 보험을 요청하겠습니다.”
역시 척하면 척이다. 금융이 월스트리트만 있겠는가. 더 씨티(The city)라고 불리는 City of LONDON. 런던 역사의 중심이고 금융의 중심이다. 여기에도 골드만삭스, 모건 스탠리, HSBC 등 금융 기관이 밀집되어 있다.
“저는 언제 한국으로 갈 수 있겠습니까?”
“…이제 거리낄 것도 없잖아. 아무 때나 와서 놀다 가. 애들도 미국에서 학교 다녀서 아예 들어오지도 못하잖아?”
이미 아버지와 한국 정부에 BE 인베스트먼트가 누구의 소유인지 알렸다.
앞으론 이방효 사장이 눈치를 보며 한국에 들어오지 않아도 된다. 그렇다고 아예 한국에 들어와 기러기 아빠가 되라고 할 수도 없었다.
이방효 사장의 아내와 자식들은 미국에서 아버지가 벌어다 준 엄청난 돈으로 누리며 살고 있다. 어느 재벌가도 부럽지 않을 수준이었다.
BE는 태국과 동아시아 환율 공격으로 225억 달러를 수금했다. 이 중에 5천만 달러가 이방효 사장의 인센티브로 지급되었다. 고공 행진을 거듭하는 국내 환율에 비춰 보면 1천억 원에 가깝다. 재벌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소득이다.
“예. 회장님. 조만간 달러 송금하고 한국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이방효가 가진 달러도 상당한 금액이다. 한국의 원가 가치가 떨어진 지금은 달러 자산을 크게 부풀릴 적기였다.
“…어차피 그 정도 달러는 미국 정부에서 신경도 안 쓸 거야. 달러 값 떨어지기 전에 얼른 들어와서 환전해 놔.”
“하하하. 예. 5억 달러 약간 넘는데 문제가 될 일은 없을 것 같더군요.”
“5억 달러?”
225억 달러 수익에 5천만 달러를 인센티브로 받은 이방효 사장이다. 자체 운용 자산만 1천억 달러가 넘어가는 BE였고, 그전에 받은 인센티브와 정기적으로 받은 사장 급여까지 생각하면 납득 못 할 규모가 아니다.
“왜 그거밖에 없어?”
많아서 놀란 것이 아니라 적어서 놀란 수안이다. 지금까지 이방효 사장이 받은 인센티브만으로 5억 달러의 두 배는 될 것으로 생각했었다.
“전 재산을 다 투자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노후 자금을 남겨두고 우리 회사 펀드에 투자해서 그나마 불린 돈입니다.”
자산 대부분을 남겨두고도 이방효 사장의 운용 자산이 5억 달러에 이른다는 뜻이다.
일반인에게 적극적으로 펀드 영업을 하진 않지만, 일부 거대 금융사의 자금을 수급한다. 여기에 이방효 사장의 자금도 들어가 있었다.
“크흐흐. 잘했네. 투자는 남는 돈으로 하는 것이 정석이지. 그리고 국내에 BE 지사 세워야지? 골드만삭스는 92년에 들어와서 고생 좀 했지만, 우린 이번에 편하게 들어가도 될 거야.”
“지사는 펜타그램 배 사장님과 상의하고 직원들 보내겠습니다. 지사는 배 사장님이 맡아 주셔야죠.”
“콜. 그리고 이 사장이 한국에 오면 내가 근사하게 회 한 접시 사 줄게. 소주도 한잔 곁들이고. 캬. 생각해도 죽이지 않아?”
“하하하.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이방효 사장도 자주 보고 싶은 사람이다. 그 오랜 시간을 함께하면서 단 한 번도 실망을 준 적이 없었다. 김현성 사장에게 한번 실망하고 보니 곁에 있어 준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되는 것이다.
“혼자 오지 말고 차진호 사장도 일본에서 불러. 이 사장만 먹는다고 하면 차 사장 혼자서 운다.”
“하하하. 예. 회장님. 꼭 데려가겠습니다.”
신뢰의 집중은 위험하다. 함께하는 가신들에 골고루 관심을 주고 신뢰를 얻어야 지난 과오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었다.
* * *
수안은 비행기에 오르기 전 클락슨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또 볼일이 있을 것 같군요.”
“그날을 기다리겠습니다. 미스터 강.”
“한 4년 후에 봅시다. 그때는 클락슨이 이끄는 경호 인원이 많아졌으면 좋겠네요.”
“그때까지 제가 은퇴하지 않았다면 다시 만나겠죠. 하하하.”
4년 후는 9‧11 테러가 발생하는 2001년이다. 본래는 어떻게든 직접 막아 보려 했지만, 미국의 일은 미국인이 막는 것이 옳다. 이제 자식까지 있는데 타국의 일에 목숨 걸 수는 없다.
사고 당일 미국에 도착하는 비행기에는 퇴역한 미국 경호원들이 잔뜩 탑승할 예정이다.
비행기마다 고작 대여섯 명이 전부인 테러 분자들은 이들을 막아낼 방법이 없다. 아무리 총을 들고 있는 이들이라도 세계 무역 센터 빌딩이나 펜타곤을 들이받는 비행기 정도는 막아낼 수 있을 터였다.
* * *
한국에 도착하면 바로 집으로 갈 줄 알았는데, 자신의 입국을 기다리던 인물이 있다고 한다. 배영성이 그가 누구인지 말해 줬다.
“대현 자동차 정영수 회장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 회장이?”
주변을 가득 채운 강운 그룹 직원들이 좌우로 갈라지자 정 회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라? 정 회장님이 여기까지 웬일로 오셨답니까?”
“강 부회장님.”
“편하게 하세요. 존댓말은 닭살 올라옵니다. 제 삼촌뻘 아니십니까.”
아버지 강운모 회장보다 고작 두 살 어린 정영수 회장이다.
“그래도….”
“제가 왕 회장님을 할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음.”
차마 입을 열지 못하는 정 회장에게 수안이 먼저 제안했다.
“회장님. 날도 추운데 서서 얘기하지 말고 잠깐 차라도 한잔할까요? 마침 시간이 있습니다.”
“그래 주면…. 좋고.”
말은 놨지만, 여전히 불편한 얼굴이다.
“보세요. 얼마나 편하고 좋습니까.”
수안은 말을 높이고 낮춤으로 서로의 위치가 정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안다.
말을 낮춰도 결국 정 회장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것은 자신이다.
“가시죠. 조용한 곳으로 찾아보겠습니다.”
수안의 눈짓에 강운 그룹 직원들이 적당한 장소를 수배해 안내했다.
* * *
급하게 자리를 만드느라 작은 커피숍을 골랐다.
일반인은 없었고, 커피숍 주인만 남아 있었다.
수안은 평소와 같이 이미지를 관리하며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놀라셨죠?”
“아, 아닙니다. 강 선수라면 충분히 이해합니다.”
“평소 일 매출액의 두 배로 결제하겠습니다. 잠시만 매장을 사용하죠.”
“얼마든지요!”
커피숍 주인은 커피 두 잔과 산더미처럼 쌓인 쿠키 접시를 테이블에 내려놨다.
“쿠키는 안 시켰는데….”
“제 마음입니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끝나고 사인 한 장만….”
“테이블에 올려놓고 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하하.”
이제 매장엔 정영수 회장과 수안만 남아 있었다.
수안은 커피 향을 맡고 쿠키도 하나 집어 들었다.
“음….”
친근한 사람과 만난 것처럼 아주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오물거리던 쿠키를 따스한 커피 한 모금과 삼킨 수안이 입을 열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정 회장님.”
“강 부회장.”
“예.”
“미국엔 무슨 일로 다녀왔는지 궁금하군.”
“인터뷰 못 보셨습니까?”
“…미국에서 했던 인터뷰에 그런 내용이 나왔나? 없었던 것 같은데.”
‘아. 편집 당했지.’
편집을 통해 해당 내용이 날아가 버렸음을 기억해 냈다.
“미국에도 제 소유의 회사가 있어 격려 차원에서 다녀오는 길입니다. 인터뷰에서 말했는데, 편집한 모양이네요.”
“아….”
‘BE 인베스트먼트에 다녀온 모양이군.’
“고작 제 미국 방문 목적이 궁금하진 않으셨을 것 같고, 하실 말씀이 있을 것 같네요.”
“자네가 인수하겠다던 기화 그룹의 일은… 대현에서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네. 이번엔 지난번처럼 컨소시엄을 구성한다느니 하는 일은 없네. 그저 물밑에서 줄 수 있는 도움을 주고 싶어서 한 말이야.”
“…….”
수안은 멀뚱히 정 회장을 보고 있었다. 더 말해 보라는 태도였다.
“대현은 강운 그룹이든 자네가 가진 회사든 간에….”
자네가 가진 회사라는 말에서 수안이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어디까지 파악하셨는지 먼저 들어 볼까요?”
말하는 모양새가 이전과 다르다. 뭔가를 알아낸 것 같았다.
“우린 BE 인베스트먼트가 강운 그룹이 일으킨 회사라는 걸 알 수 있었네. 그리고 BE 인베스트먼트의 실체도 파악했지.”
“대현 직원들 능력이 좋군요.”
이미 정부에도 알려진 일이라 순순히 인정하는 수안이다. 하지만 BE를 강운 그룹 회사로 알고 있다면 작은 오판이었다. 수안은 이를 바로잡지 않았다.
“그래도 비밀은 지켜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알겠네.”
부탁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다. 외부에 알리면 기업 총수라는 사람들이 다 달라붙을 것이다. 강운 그룹의 실체를 아는 것은 자신만으로 충분했다.
“BE를 파악하셨다니 이번 미국 방문 목적도 가감 없이 말씀드릴 수 있겠어요.”
“……?”
‘BE 인베스트먼트를 방문한 것이 아니란 말인가?’
“워싱턴에 들러서 클린턴 대통령과 로버트 재무부 장관을 만나고 오는 길입니다. 한국 정부에서 IMF 요구에 상당히 곤혹스럽다고 들었거든요. 잘 좀 봐달라고 부탁하고 오는 길입니다. 로버트 장관은 예전부터 말이 잘 통하는 인사라 다행이었죠.”
“아….”
BE 인베스트먼트만 생각해서 일어난 착오였다. 거대한 외형의 BE 인베스트먼트에 가려 그 이상을 보지 못한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