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크리스마스 (114/304)

크리스마스

로버트 장관의 허락 아닌 허락에 수안은 적당하게 화답했다.

“감사합니다. 장관님. 이번 자금을 유용하게 사용해 많은 이득을 거둘 수 있겠습니다.”

-미국엔 언제 올 텐가?

“조만간에 같이 골프라도 함께하시죠. 제가 미국으로 건너가서 연락드리겠습니다.”

-기대하지. 프레지던트도 무척 만나고 싶은 눈치야.

“아….”

원래는 의례적 인사로 던진 말이다.

한국에서 조만간 보자고 말로만 약속하는 것이 익숙해져서 자연스럽게 나온 말인데, 로버트 장관은 수안의 미국 방문을 기정사실로 여기고 있었다.

“프레지던트께서요?”

지금 백악관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은 1992년에 12년 공화당 집권을 저지하고 승리한 클린턴.

“문제는 경제야, 이 바보야!(It's the economy, stupid!)”라는 역사에 남을 선거 문구를 내세워 전 대통령의 재선을 막아내고 승리를 차지했다. 또한 작년 재선에서 압승을 거두며 연임에 성공했지만, 다음 달에 알려질 르윈스키 스캔들은 상당히 위협적일 것이다. 이로 인해서 탄핵까지 갔다가 겨우 살아나는 미국의 독특(?)한 대통령이다.

-BE는 우리 민주당의 가장 큰 후원자가 아닌가. 그리고 프레지던트가 특별히 신경 쓰는 일을 자네가 일을 망쳐 버렸으니 자네가 해명하는 그림도 나쁘지 않아.

“…제가 저지른 일이니 제가 해명하러 가야죠. 일정 잡고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미국 최고 권력자의 계획을 망쳐놨으니 그에 대한 문제를 대화로(?) 해결해야 했다.

‘민주당 후원금을 추가 요청할지도 모르겠어.’

한국과 마찬가지였다. 다만 한국은 불법이고 미국은 합법일 뿐. 결국 모든 것은 돈으로 움직인다.

-그럼 난 백악관 일정을 맞춰 보겠네.

“부탁드리겠습니다. 장관님.”

이번 한국 IMF 사태에서 미국식 구조 조정을 강요한 원흉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한국 금융 시장을 미국식 금융 자본에 종속시킬 원흉이라고 불러도 좋다.

전화를 끊은 수안은 언제 미국에 가야 할지 달력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바빠 죽겠는데 여기까지 신경을 써야 하네.”

한국 정부 수장인 대통령도 쉽게 만나기도 힘든 재무부 장관과 미국 대통령이지만, 지금은 귀찮은 상대일 뿐이다.

특히 로버트 장관은 지난번 비아그라 매각으로 막대한 로비 자금을 건넨 후로 걸핏하면 이방효 사장을 만났고, 이젠 수안과 안면을 트고자 하는 것이다. 민주당 계열의 로버트는 자신을 통해 로비가 이뤄지는 것에 상당한 자부심이 있었다. 이번 문제로 추가 로비가 있다면 이것도 로버트의 공로로 비춰질 것이다.

바쁠 때 놀아야 더 재미있는 법이지만, 항상 어려운 일을 맡겨 두는 두 사람이 마음에 걸린다.

“그나저나 배 사장, 김 사장에게 미안해서 어쩌지?”

할 일은 잔뜩 맡겨 놓고 혼자 미국으로 가야 할 일이 생겼다.

* * *

수안은 김현성과 배영성을 한 자리에 불렀다.

“급하게 출장을 다녀와야 할 것 같아.”

“…이 시국에 출장이라면 중요한 일정이겠죠. 어디로 가십니까?”

“워싱턴.”

“네? 미국으로요?”

김현성은 갑작스럽게 미국으로 간다는 말에 놀라워했지만, BE 인베스트먼트를 담당하는 배영성은 갑작스러운 출장 이유를 생각해 냈다.

“백악관에서 호출입니까?”

“배, 백악관이요?”

김현성은 백악관이라는 말에 깜짝 놀랐지만, 수안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로버트 장관이 이번에 조금 곤란했잖아. 이쪽에서 뭐라도 움직임을 보여 줘야지.”

“저는 한국 정부에 생색 좀 내겠습니다.”

한국에 달러를 수급했기 때문에 자신의 회장이 이렇게 고생하고 있다고 어필하겠다는 뜻이다.

“많이 생색내고 앞으로 벌어질 일에 미리 양보를 확답받아. 가만히 있으면 알아주지도 않아.”

겸손은 눈앞에서 잠깐만 보여 주면 된다. 매일 잘해 줘 봤자 항상 잘해 주지 않는다고 눈총이나 받을 뿐, 나쁜 남자가 괜히 인기 있는 것이 아니다. 어쩌다 잘해 줘야 더 고맙고 마음에 새겨진다. 이미 200억 달러를 들여오며 좋은 일은 충분히 했으니 앞으론 얻을 것을 다 얻어내야 했다.

“예. 회장님. 회장님이 백악관에 초청받아 미합중국 대통령을 만난다는 사실 만으로도 김대준 당선인은 기겁할 겁니다. 기화 자동차와 아세아 자동차 입찰에 계속 압력을 넣도록 하겠습니다.”

김대준은 미국을 상당히 친밀하게 여긴다. 클린턴도 마찬가지였다. 김대준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에 만나고 싶다는 메시지를 밝히기도 했다. 클린턴 본인이 학생 시절부터 진보 민주주의 인권 운동을 해 왔기 때문에 원조 사회 운동 활동가인 김대준에 대해 존경심을 갖고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 김대준을 아시아의 만델라 정도로 생각하는 미국 대통령이다.

하지만 국가 간의 일이라면 다르다. 만나고 싶다고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미국 대통령을 수안이 만나러 간다. 그것도 한국에 도움을 줬다가 생긴 문제로 인한 일이다.

사과를 받아 내기 위한 백악관의 호출이니 한국 정부에 충분히 받아 챙겨도 된다.

“괜히 나 출발하기 전에 말하지 말고 비행기 뜨면 얘기해. 만나기 전에 뭐라도 부탁하겠다고 또 부를지 몰라.”

“예. 회장님. 출발 전까진 입 다물고 있겠습니다. 그리고 항공편은 가장 빠른 표로 알아보겠습니다.”

“우리 정원이를 또 며칠이나 못 보겠네.”

스마트폰이 없어서 너무 아쉽다. 영상통화라도 된다면 미국에 가서도 아들의 얼굴을 볼 수 있을 텐데, IT 발전이 너무 더디게 느껴진다.

“다녀오시면 해가 지났겠습니다.”

오늘은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였다.

“다들 메리 크리스마스야. 오늘은 일찍들 들어가자. 나도 집에 가서 정원이 봐야겠어. 아! 희망 보육원엔 선물 보냈지?”

수안이 전생에 19년을 살았던 곳이고, 여전히 미카엘라 수녀님이 원장님으로 계신 곳이다.

“물론입니다. 항상 잊지 않고 챙기고 있습니다.”

“내일은 보육원에 가야겠다.”

“미국도 가셔야 하는데….”

미리 미국 대통령과 논의할 부분을 체크하고 준비해야 했지만, 수안은 따로 생각이 있었다.

“미국은 내일 이후로 잡고 로버트 장관에게 일정 알려 줘. 클린턴은 내가 알아서 요리할 테니.”

미국 대통령이나 재무부 장관보다 미카엘라 수녀님이 우선이다.

“예. 알겠습니다.”

* * *

“미카엘라 수녀님! 저 왔어요!”

수안은 그간 회사 일로 바빠서 자주 들르지 못하다 오랜만에 희망 보육원에 왔다.

“수안이 왔니? 애들이 얼마나 기다렸다고.”

“그래요? 얘들아! 형 왔다!!”

수안이 소리치자 아이들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우아아아아! 형아다!”

한 아이가 수안을 발견하고 소리치자 하나둘 아이들이 뛰어오기 시작했다.

“아저씨다!”

“예쁜 언니가 아니네. 귀여운 아기도 없어.”

어떤 아이는 다른 방문자를 기대한 모양이다.

수안이 살았던 희망 보육원은 예전과 전혀 다른 모습이다. 낡은 건물을 벗어난 지 오래였다.

수안이 새롭게 건물을 올리고 부지를 확장했다. 아이들을 학교까지 통학시킬 차량도 두 대나 있었고, 새로 고용한 보육 교사들도 있었다. 개인의 봉사에만 기대기엔 아이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교육의 질도 더 올라갔고 미카엘라 수녀님의 고된 하루도 아주 수월해졌다.

누군가에 물려받은 헌 옷을 입은 아이가 없다. 저마다 있는 집 자식들처럼 말끔하게 입고 깨끗하게 씻고 산다. 나이가 좀 있는 아이들은 용돈을 받으며 미카엘라 수녀님을 돕고 있었다. 덕분에 나이가 찬 고등학생 아이들은 고3이 지나고 홀로서기를 해야 할 때 빈손으로 시작하지 않을 수 있었다.

수안은 이 아이들에게 키다리 아저씨였다.

지금 그 아이들이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소강당에서 산타 분장을 하고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고 있었다.

“허허허. 착한 아이는 선물을 받아 가거라.”

“하진 오빠 목소리 다 티 난다. 아하하.”

“산타 할아버지라고 부르라니까? 형아는 아르바이트하는 중이라고.”

“풋.”

선물을 주는 아이도 받는 아이도 산타를 믿기엔 너무 나이가 많았다. 그리고 보육원 아이들은 산타를 믿지 않는 아이들이 많았다. 보육원은 동심을 계속 유지할 수 없는 곳이다. 항상 사랑이 부족하고 누군가의 관심과 애정에 고픈 아이들이다.

수안은 이 아이들에게 충분한 사랑을 주고 싶었다.

“수안이 넌 예나 지금이나 달라지질 않았네.”

“사람이 쉽게 바뀌면 되겠어요? 변하고 싶지 않아도 결국은 변하겠지만요. 흐흐.”

선물을 받던 아이들을 뒤로하고 수녀님과 따로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요즘 많이 바쁠 텐데…. 크리스마스에 와줘서 고마워. 항상 크리스마스에 조용하더라고.”

“여기가 제 마음의 안식처예요. 수녀님을 만나고 아이들을 보면 뭐든 다 잘될 것 같거든요.”

“그렇다고 이렇게 여기만 지원하지 마. 다른 곳에 더 힘든 아이들이 많아. 이제 우린 충분해. 아이들이 먹고 입는 것이 차고 넘쳐. 다른 곳 얘길 들어 보면 아직 많이 힘든 모양이야. 특히 요즘 경기가 안 좋아서 외부에서 들어오던 지원금이 많이 줄었다고 해.”

희망 보육원은 수안이 있기에 걱정 없지만, 다른 보육원 사정은 달랐다. 하루에도 수십 개씩 기업이 무너지는 와중이라 기업이 정기적으로 입금하던 후원금이 뚝 끊겨 버렸고, 불우 이웃을 위해 봉사하던 봉사자 숫자도 많이 줄어들었다. 가장 먼저 비용을 줄일 수 있는 부분이 바로 이런 후원금이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지원 범위를 넓혀가고 있어요. 알고 계신 보육원이나 양로원 있으면 다 알려 주세요. 다른 봉사 단체나 지원금이 필요한 곳도 다 알려 주시고요.”

“…상당할 텐데, 괜찮겠어?”

“하하. 괜찮아요. 이번에 돈이 좀 많이 들어왔거든요.”

38조 원이 들어왔다.

이 돈으로 국내 기업들을 주워 담겠지만, 일부는 국내 복지 사업에 투자할 생각이었다.

더블 스타 복지 재단에서 시작하는 국내 복지 사업에 매년 수천억 원 이상을 투입할 예정이었다.

“강운 그룹 아들이 많이 벌었다면 대체 얼마나 벌었을지 난 상상도 안 가.”

“대통령이 잘했다고 밥 차려 줄 정도는 벌었죠.”

김일삼이 밥 먹고 가라고 성화였던 이유가 바로 이 달러를 들여왔기 때문이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게 무슨 소리니?”

“그런 게 있어요. 아! 그리고 일전에 건강 검진은 왜 안 가셨어요?”

강운 병원에 미카엘라 수녀님의 건강 검진을 예약했는데, 오지 않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수안은 미카엘라 수녀님의 건강까지 미리 챙기고 있었다.

“내가 무슨 건강 검진이야? 보육원 일도 힘들지 않고…. 내 나이도 아직 그 정도까지는 아니야.”

“수녀님이 저처럼 국가 대표 운동선수 출신도 아닌데, 왜 이렇게 건강을 자신하실까?”

수녀님의 장례식에서야 알 수 있었던 병명은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암이라는 병이다.

거기다 일찍 발견하고 수술만 하면 나을 수 있고 수술 후 예후도 좋은 갑상샘암이다.

“설마 내가 내 몸을 모르겠어? 나 아무렇지도 않다니까?”

물론 지금은 아무런 예후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수녀님이 돌아가셨던 그 시간까지는 앞으로 22년이 흘러야 했다. 언제 발병할지 모르지만, 빨리 발견할수록 암으로 인한 위험은 더 적어질 것이다.

“그래도 건강 검진을 주기적으로 받으셔야 한다니까요. 이번엔 수원교구 수녀님들과 신부님들까지 전부 건강 검진 리스트에 포함할 테니까 그렇게 아세요. 대신 미카엘라 수녀님 안 오시면 다른 수녀님과 신부님도 무료로 안 해 줍니다. 아셨죠?”

수녀님은 이렇게 협박해야 오실 분이다.

“…네가 이럴 때마다 주님이 언제 십자가의 고난을 주시려나 싶어. 매번 네가 다 해결해 버리니….”

“그간 고생 많으셨잖아요.”

“내가 언제 고생했다고 그러니? 처음 자리 잡는 몇 년만 힘들었고, 너 온 다음부턴 고생이 뭔지도 모르고 살았잖니?”

수안이 희망 보육원을 찾은 다음부터 부족함 없이 보육원을 운영할 수 있었던 수녀님이다.

하지만 수안의 기억 속엔 손에 물이 마를 날이 없었던 수녀님의 고생만 떠오른다.

“앞으로도 고생이 뭔지 모르고 살아 주세요. 제 바람이 바로 그겁니다.”

“얘는….”

“다음에 제 아들이랑 같이 올게요. 미국으로 출장 가야 하는데 수녀님 얼굴 보고 가려고 들렀어요.”

“수안이 와이프가 가끔 와서 정원이 얼굴 보여 주고 갔어.”

“…아내가 그랬어요?”

아현이 다녀간 줄은 몰랐다. 아내는 희망 보육원에 다녀왔다고 얘기한 일이 없었다.

그래서 여자아이들 몇이 언니와 아기를 찾았던 모양이다.

“네가 바쁘니까 자기가 알아서 챙겨야 한다고…. 너희는 부부가 어쩜 그렇게 똑같아? 덕분에 이번에 보육원 애들이 선물을 두 배로 받았어.”

“흐흐. 그러니 결혼했죠.”

‘얘길 하지….’

희망 보육원은 천천히 얘기할 생각이었는데, 배영성이 아현에게 미리 얘기한 모양이다.

‘얼른 집에 가야겠다. 아내에게 할 얘기도 있고 말이야.’

아현을 위한 선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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