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협상은 머리부터 (113/304)

협상은 머리부터

때는 대통령 선거 직후였다.

실권을 잃은 대통령이지만 김일삼은 아직 청와대에 자리하고 있었고, 다음 대통령인 김대준 그리고 이현창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자리는 수안이 차지하고 있었다.

묘한 조합의 4인이다.

“저는 강운 그룹 회장님을 대신해서 이 자리에 온 것이 아님을 먼저 밝힙니다.”

“흠…. 강운 그룹 대표로 온 것이 아니라면 오늘 우리의 귀한 시간을 왜 낭비하게 했는가? 짐작하기 힘들군.”

김일삼은 강운 그룹에서 해외에 챙겨 놓은 외화라도 있는 줄 착각하고 있었다.

오늘 현 대통령인 자신과 다음 대통령 그리고 곧 야당이 될 통합신당의 총재까지 모아 놓고 무슨 얘길 할지 기대하고 있었는데, 수안의 첫 마디부터 어그러졌다.

그나마 수안이 올림픽에 나가 자신의 면을 세워줬기에 적당한 선에서 화를 내는 것이다.

“제 요구 조건을 들어주시면 IMF에서 지원받는 금액을 줄일 수 있게 해 드리겠습니다. 당연히 IMF의 요구 조건도 조금이나마 조정할 수 있겠지요.”

“……!”

“이보게 강 부회장. 방금 자네는 강운 그룹을 대표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나. 그리고 지원 금액을 줄이다니! 지금 대한민국은 그 돈이 있어야 외채를 갚을 수 있단 말이네! 지금 나라에 남은 외화가 얼만 줄이나 알아? 고작 56억 달러밖에 없어!”

이번엔 김대준 당선자의 말이다.

이현창은 말없이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만큼 수안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수안은 셋을 지나는 시선을 훑다가 이현창에게 눈을 찡긋하고 말을 이어 갔다.

“제 요구 조건은 간단합니다. 제가 들여올 달러에 관해 묻지도 따지지도 말 것. 간단하죠?”

지금 대한민국은 달러를 가진 사람이 왕이다. 달러를 들여오는 대신 그 어떤 세금도 내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이에 더해서 해외에 보유한 기업의 문제까지 한꺼번에 해결할 생각이다.

“…….”

김일삼은 말없이 김대준을 보고 있었다. 이 부분은 다음 대통령인 김대준이 확답해야 할 문제였다.

“자네가 들여올 달러의 규모를 먼저 알고 싶군.”

“얼마가 필요하십니까?”

“허! 자네는 지금 달러를 찍어낼 수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어.”

“우선 말씀을 해 주십시오. 얼마가 있으면 IMF 캉드쉬 총재와 재협상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

대통령 선거에서 강운 그룹에 받은 것이 너무 과했다. 수안은 김대준의 유세에서 잠시 얼굴을 비춰 주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 함부로 수안을 대하지 못하는 것이다.

“최소….”

“최소가 아니라 최대를 말씀해 주십시오. 당선자님.”

“흠. 최대 150억 달러가 필요하네. 그래야 바로 돌아오는 외채를 막고 IMF와 협의를 이어 갈 수 있어.”

“그럼 200억 달러를 입금하겠습니다.”

“……!!”

“……!!”

“……!!!!!”

마지막 놀람은 이현창이다.

‘후배에게 이 정도 재력이 있었단 말인가!’

IMF에 지원받기로 했던 금액이 총 550억 달러였다. 200억 달러는 IMF 지원금의 40%에 육박하는 돈이었다.

“아직 제 물음엔 답하지 않으셨습니다. 200억 달러의 돈은 당선인의 답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거액을 입금할지 말지는 이번 협상에 달렸다는 의미였다.

“…정말 그 많은 달러를 들여올 수 있나? 강운 그룹과 전혀 관련 없이?”

“예. 이 달러는 강운 그룹이 해외 금융 기관 차입으로 만든 돈이 아닙니다.”

“차입도 아닌 자산이 200억 달러나 있었다고? 어떻게!”

“쉽게 이해하기 힘든 돈이긴 하죠. 제 설명을 들으시면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라는 말은 오로지 세금에 대한 것이다. 돈의 출처를 밝히지 않을 생각은 아니었다. 해외 기업의 문제까지 해결하려면 BE에 대한 설명은 필수였다.

수안은 태국 금융 위기부터 설명하기 시작했다.

“소로스 펀드는 태국을 공격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제가 해외에 소유한 투자 회사의 도움을 요청했었지요.”

“소로스라면 이번 동남아시아 금융 위기의 주범 말인가?”

“소로스는 도움을 요청했지만 제 투자 회사는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이로 인해 발생할 여파를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여파로 한국은 IMF를 맞이했죠.”

“음.”

“하지만 두 번째 공격을 감행할 때는 함께했습니다. 함께하지 않는다고 위기를 막을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소로스와 제 회사는 동남아 금융공격을 감행했고 많은 이익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이미 지나 버린 일이다. 잘잘못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자네 투자 회사의 이름이 뭔가. 200억 달러의 자금을 융통할 거대 투자 회사는 많지 않아.”

가감 없는 진실이 수안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미국 월스트리트의 BE 인베스트먼트가 바로 제 회사입니다.”

“…….”

“…….”

“…….”

세 사람은 충격적인 소식에 몸이 굳어 버렸다.

지금은 놀라는 것도 사치였다.

“그리고 저는 소로스와 헤지 펀드의 공격이 한국을 향하는 것을 사전에 제지할 수 있었죠. 소로스 펀드를 필두로 여러 헤지 펀드가 한국에 상륙했다면 지금까지 가치가 올라간 달러는 우습게 느껴지셨을 겁니다.”

미국에 자주 다녀온 김대준 당선자는 조금 더 자세히 알고 있었다.

“BE 인베스트먼트라면… 미국 정부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투자 회사가 아닌가.”

투자 회사의 이름부터가 미국을 상징하는 새 BE(Bald Eagle: 흰머리 수리)가 아닌가.

게다가 그 규모는 미국의 3대 투자 회사를 4대 투자 회사로 만들 정도였다.

당연히 미국 법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미국의 공화당과 민주당을 동시에 지원하고 있긴 합니다. 그리고 미국 지사 말고도 일본 지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일본에도 정치권에 연결되어 있죠. 제가 미국 BE와 일본 BE의 모든 지분을 소유한 회사의 최대 주주입니다. 바로 저 강수안이 BE 인베스트먼트의 수장이죠.”

“허어!”

김대준은 얼른 추가로 달러를 요청했다.

“미국 BE만 해도 550억 달러를 전부 유통할 수 있지 않나! BE가 있으면 우린 IMF가 필요 없어!”

이미 일부를 받았지만, 나머지를 받지 않을 수도 있었다.

“당선인께서는 이번 위기의 본질을 잘 모르시는 모양입니다.”

이번 위기는 소로스가 벌인 공매도 공격으로만 발생한 것이 아니다.

“미국은 먹음직스럽게 자라난 아시아를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겁니다. 미국에 물건을 팔아 흑자를 내는 아시아 국가들의 상황을 언제까지 두고 보리라 생각하셨습니까? 10년도 더 전에 일본이 이미 철퇴를 맞았고….”

85년 9월 미국과 영국, 프랑스, 서독, 일본의 재무장관과 중앙은행장들이 미국 뉴욕에 있는 플라자 호텔에 모여 달러화 약세를 유도하기로 한 합의가 있었다. 이것이 바로 플라자 합의였다. 달러 강세로 무역 수지 적자에 허덕이던 미국이 일본을 압박하여 내놓은 합의로 이후 일본은 거품 경제를 지나 침체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이 덕분에 한국이 호황을 맞이했지만, 지금은 이 모양 이 꼴이 났다.

“이번엔 동남아와 우리 한국 차례였을 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과 일본 BE에서 자금을 빼 한국을 지원한다? 어불성설이죠. 미국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번 위기도 미국의 용인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캉드쉬가 왜 그렇게 한국에 가혹한 조건을 걸었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회사는 개인의 것이 아닌가! 미국의 허락이 왜 필요하단 말인가.”

“제가 미국에 BE의 수장임을 밝히며 약속한 것이 있습니다. 미국 BE의 자금을 미국 정부 허락 없이 외부로 유출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었죠. 이를 지키지 않으면 BE는 공중분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럼 200억 달러는 무슨 소리야?”

수안의 말대로라면 200억 달러의 지원도 미지수였다.

“말씀드린 것처럼 이번에 BE는 동남아 금융 공격에 동참했습니다. 이는 외부에서 얻은 이익. 즉 미국 정부의 동의를 받지 않아도 상관없는 돈입니다. 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동남아 금융 공격에 동참했습니다. 한국을 지원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허.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이현창의 혼잣말은 김일삼과 김대준도 동감하고 있었다.

“전 아직도 당선자님의 답을 듣지 못했군요. 제 설명은 충분하지 않았습니까?”

“…….”

“200억 달러는 외채를 갚는 데 필수적인 자금이겠죠. 저는 이 돈을 원화로 환전해 국내 부도 기업의 회생에 재투자할 겁니다. 정부와 재계의 아름다운 합작 아니겠습니까? 공적 자금이야 당연히 투입해야겠지만, 국내에서 이렇게 맞장구를 쳐 주면 경제 위기 회복은 속도를 낼 수 있습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200억 달러를 수용해 달라는 부탁이다.

솔직히 더 어려운 요구 조건을 걸지 않은 것이 어딘가. IMF가 내건 조건들을 생각하면 허락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그 돈을 부도 기업 회생에 쓴다고 하니 침체한 경기에도 다시 숨을 불어넣을 수 있었다.

“…좋네. 자네가 들여온다는 200억 달러는 그 어떤 제재도 받지 않도록 하겠네. 국세청에서 BE에 문제 삼을 일도 없을 것이야.”

지금 당장 200억 달러가 필요했다. 세금 좀 떼지 않으면 어떻단 말인가. 어차피 국내로 자금이 들어오면 국내 법인으로 귀속되고 경기를 부양하게 될 것이다.

“당선인께는 허락을 받았고, 통합신당 총재님은 어떠십니까? 당에서 이를 문제 삼지 않으시겠습니까?”

이현창은 자신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수안의 실체가 거대하게 모습을 드러내니 오히려 뿌듯한 마음이다.

‘후배에게 불가능은 없겠어.’

“국가 위기를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되는 일. 이견이 있을 수 없네. 통합신당 의원 누구도 이를 공론화하지 않겠네.”

이현창의 동의를 당연하다는 듯이 넘어간 수안은 김일삼에 고개를 돌려 물었다.

“각하께서도 허락하시겠습니까?”

김일삼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힘없는 대통령이다.

외환 보유고를 탕진하고 IMF까지 선언한 대통령에게 무슨 힘이 남아 있겠는가.

‘달러를 가져온다면 대한민국에 숨통이 트일 거야.’

“…그리하게.”

“조만간 홍콩 씨티 은행에서 200억 달러를 분할 송금하겠습니다. 명목상 BE 인베스트먼트가 제 회사에 지분 투자를 하는 형식으로 들어올 겁니다. 정부는 IMF와 합리적인 재협상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노력해 보겠네. 강 부회장. 그리고 국민을 대신해 감사 인사를 전하는 바일세. 참으로 고맙네.”

문제가 생기기도 전에 해결했다면 이런 호의적인 태도는 기대하기 어렵다. 하지만 IMF의 엄청난 요구 조건을 목도한 다음이라면 이렇게 감사한 마음이 먼저 드는 것이다.

이래야 다음 요구 조건도 편하게 얘기할 수 있다.

수안의 첫 마디는 요구 조건이라기보다 일방적 호의처럼 들렸다.

“해외에 국내 부실 대기업을 매각하실 때가 오면 우선 절 찾아주십시오. 달러를 반출하지 못할 뿐이지 기업을 매입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니까요.”

“아!”

“국내 유수의 대기업이 국외로 넘어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오히려 내가 부탁해야 할 일이야. 앞으로 잘 부탁하네. 강 부회장.”

해외에 매각한다면 까다로운 상대의 입맛에 맞춰 줘야 팔아먹을 수 있겠으나, 수안이 매입해 준다면 수월할 터였다.

“물론 채권은 은행에서 많이 조정해 주셔야 하겠죠. 제가 그 정도 호의는 기대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요구 조건인 이유였다. 기업의 채권자인 은행도 문을 닫고 있는 판국이다. 은행이 문을 닫지 않으려면 기업에 일부 채권이라도 받고 빚을 탕감해 줘야 했다. 수안은 이를 당당하게 요구하고 있었다.

“저라고 부채만 가득 남은 부실기업을 인수할 순 없지 않겠습니까. 저 한국에서 거대한 사업체를 경영하는 사람이고 해외에선 투자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국내 기업을 인수한다면 경영자로서 배임이 되겠죠.”

“…….”

아직 200억 달러는 들어오지 않았다. 200억 달러를 들여오는 요구 조건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수안은 김대준 당선인의 대답이 없어도 허락은 기정사실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법정 관리에 들어간 기화 그룹부터 잘 챙겨 주십시오. 입찰이 시작되면 가지러 가겠습니다. 강운 그룹에서도 입찰에 참여할 테지만, 말 그대로 들러리일 뿐입니다.”

“아, 알았네. 입찰을 서둘러 진행해야겠군.”

“제 호의를 이렇게 전격적으로 수용해 주시니 감사할 뿐이죠. 아! 그리고….”

수안의 입에서 또 무슨 조건이 튀어나올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대운 그룹이 쌍륭 자동차 인수를 시작했지요?”

“그랬지. 인수 계약 체결은 다음 달로 예정되어 있다고 들었네.”

쌍륭 그룹은 고급 대형차 개발에 들어간 개발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고 쌍륭 자동차를 대운 그룹에 매각한다. 매각한 쌍륭 자동차의 부채를 대운과 절반씩 부담하기로 했지만, 그 부채도 감당하지 못해 부도를 맞이하는 비운의 그룹사였다. 왜 비운인가 하면 쌍륭 자동차를 제외한 다른 모든 계열회사는 모두 흑자를 기록하는 건실한 기업들이기 때문이다. 쌍륭 자동차만 아니었어도 쌍륭 그룹이 무너질 일은 없었다.

“요즘 같은 위기에 쌍륭 자동차를 인수하는 기업이라…. 저처럼 돈이 많은 것도 아닌데 어디서 돈이 났을까요?”

“음?”

수안은 대운이 스스로 무너질 때까지 기다리지 않을 생각이다.

“대운 그룹은 분식 회계가 일상이라고 들었습니다. 손쓰기 어려울 만큼 부실 규모가 커지기 전에 빨리 정리하는 것도 최고의 방법일 수 있습니다. 정부는 외채를 줄이려고 애를 쓰는데, 대운은 오히려 외채를 끌어다 쓰고 있죠.”

“안 그래도….”

김대준의 눈이 이현창에게 슬쩍 향했다 돌아왔다.

“본보기가 필요했지.”

대운 그룹은 김대준이 아니라 이현창이 총재로 있는 통합신당 대선 후보를 미친 듯이 지원했다.

김대준을 깡그리 무시하고 상대방 정당에만 지원했기에 제대로 미운털이 박힌 것이다.

달러 유통으로 IMF와 요구 조건을 협상하더라도 일부는 조정이 불가피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중 기업의 회계 투명성 요구와 구조 조정 요구는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이를 위해 본보기라는 도마 위에 대운 그룹을 올릴 생각이다.

이현창은 딱히 대운 그룹을 보호해 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대운의 정치자금은 대선에서 낙선한 고순 후보에게 들어갔다. 통합신당과 대운 그룹에 선을 그어도 문제 소지는 없다.

“대운 그룹이 그런 짓을 하고 있다면 빠른 조치가 필요할 것 같군요. 이번 정부에서 미리 손을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중에 문제가 생겨 물고 늘어질 수도 있는 일이다. 과오는 김일삼이 뒤집어쓰게 해야 했다.

“그 부분은… 검찰과 국세청에 얘기해 두겠네.”

수안은 김일삼의 답에 후련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자아. 중요한 대화는 이제 끝입니다. 이제 저는 BE 인베스트먼트의 수장이 아니라 강운 그룹 부회장으로 돌아가겠습니다.”

“…….”

“…….”

“…….”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여기 앉은 누가 수안을 강운 그룹 첫째 아들로 볼 수 있을까.

수안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지만, BE 인베스트먼트의 거대한 운용 자산과 미국 정부와의 긴밀한 관계를 알고 있는 이들이다. 나이가 어린 것은 아무런 문제도 아니었다.

“김대준 당선인께서는 이번 선거에서 근소하게 이기셨더군요. 만약 통합신당에서 이 후보가 떨어져 나가지 않았으면 위험했어요.”

통합신당 전당 대회에선 전 통합당의 총재 고순 의원이 대선 후보로 선택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전 한신당 유력 국회의원 박찬수가 탈당하고 신당을 일으켜 대선에 출마했다. 호남에 충분한 지지 기반을 가진 의원이라 대선에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쪼개진 여당 덕분에 김대준은 수월하게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

그런 수안의 말을 듣던 이현창은 속으로만 뇌까렸다.

‘네가 그렇게 만들었잖아.’

모든 것은 수안의 계획대로였다. 통합신당에 흡수된 고순 총재를 대선으로 밀어 넣는 것이나 이에 불만을 가진 박찬수 의원이 탈당하고 신당을 결성해 대선에 출마한 것이나 모두 수안의 예상 범위 내에 있었다. 고순 총재의 경우 서울시장을 한 경력이 있었지만, 전 국민에게 대통령으로 선택될 만큼 인지도가 높지 않았다. 박찬수 의원은 전당 대회에 불만을 품고 나갔으니 통합신당 지지자들의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인기는 있었던 터라 통합신당으로 향해야 할 많은 표를 갈아먹었다.

결국 김대준이 당선될 수 있었던 이유는 수안의 계략 때문이었다.

‘나도 그렇게 만들어 주겠지.’

혼란스러운 지금 대통령이 되어봤자 고생만 잔뜩 해야 한다. 자신은 평화롭고 발전된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이 되고 싶었다. 자신이 품에 간직한 정책은 이런 위기 상황에서 활용할 수 없었다.

‘그것도 두 번이나 해 먹을 수 있는 합법적인 연임 대통령.’

이현창의 상념이 이어지는 사이 김대준이 수안의 말에 답했다.

“당선되고 나서야 외환 보유고가 60억 달러도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네. 참담한 심정이었지.”

3당 합당 이후 김일삼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김대준은 김일삼 대통령이 앉은 자리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자네가 일부라도 해결해 준다니 그나마 마음이 놓여.”

“대한민국에 도움이 된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

대한민국에 도움이 되는 걸로 족하다는 사람이 왜 요구 조건을 툭툭 내뱉었나 싶은 얼굴이지만, 이 자리에서 꼬집을 일은 아니라 묵묵히 들었다.

“강 부회장이 이런 사람입니다. 올림픽으로 그렇게 국위 선양을 하더니 국가 위기가 도래하니 자신의 돈까지 척척 내놓지 않겠습니까. 이런 사람이 또 어디 있겠어요?”

이현창도 김일삼을 쳐다보지 않았다. 오직 김대준과 대화하는 것이다.

이유는 총풍 사건 때문이다. 이번 대선 직전에 청와대 행정관 셋이 찾아와 북에 무력시위를 요청하겠다는 제안을 해 왔다. 대선에서 통합신당이 이길 수 있도록 조치하겠다는 의미였다. 이조차도 수안의 예상 범위 내에 있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이현창은 버럭 화를 내며 세 명의 행정관을 쫓아냈다. 수안이 하는 말은 이제 예언이나 다름없이 들렸다. 이 일로 청와대 김일삼 대통령과 완전히 돌아선 이현창이다.

“…….”

김일삼 대통령은 자신이 힘을 잃었다는 것을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삐걱거리기 시작하던 레임덕 대통령의 마지막은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다. 야당에 정권을 내줘야 했고, 친정이라고 할 수 있는 한신당 총재는 냉랭하게 자신을 대하고 있다. 8년 전 3당 합당으로 정치적 동반자였던 김대준을 잃었는데, 이젠 그가 다음 대통령이었다.

“내년 초에 금 모으기 운동이 시작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김일삼은 자신이 아는 얘기가 나와 얼른 말했다.

“비상경제 대책 추진위원회 회의에서 추진하고 있다고 들었제. 이 일로 국민이 단합할 수 있어. 국민이 위기 해결에 동참한다면 국가 신인도 상승에 도움이 될 게야.”

“나중에 금 모으기 운동이 끝나면 그 금을 팔아 외화를 수급하겠죠.”

“그야….”

금을 어쩌려고 얘길 꺼냈나 싶다. 금 모으기 운동은 아직 시작도 전이다.

“국제 금값은 유동적입니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금을 판다는 소식이 들리면 해외 금 시세가 뚝 떨어질지도 모르죠.”

내년 이후에나 결과가 나올 일이라 대통령 자리에 오를 김대준 후보가 말을 받았다.

“그럴 수도 있겠어. 하지만 그 정도 예상이야 누구든 할 수 있지 않겠나. 기업이 그렇게 멍청하게 일을 처리할 리가….”

“국내 기업들은 자신들이 금을 금괴로 만들어 팔아 주겠다며 달려들 겁니다. 그렇게 승냥이 떼가 출몰하면 그 이득은 별로 남지 않습니다. 기업이 그렇게 선량하게 일을 처리할 것 같으십니까?”

수안은 멍청하지 않다는 것에서 더 나아가 선량하지 않은 기업인을 꼬집고 있었다.

“그야… 그렇지.”

“저도 기업가 중 한 사람이지만, 전 외부에 다른 힘을 가진 기업인이 아닙니까.”

수안은 예전 금 모으기 운동으로 모인 금이 결국 대기업을 지원하는 데 쓰였음을 알고 있고, 부가 가치세 장난질로 많은 세금 손실이 있었음을 기억하고 있다.

“…따로 계획이 있는가?”

묻고 싶지 않지만, 들어는 봐야 했다.

“우리나라 국민이 십시일반으로 모은 금은 BE 인베스트먼트에서 전량 매입하겠습니다. 매입한 금은 금괴로 변형하지도 않고 외국으로 반출하지도 않습니다.”

“반출하지 않으면?”

“그대로 한국에 두겠습니다. 훗날 대한민국이 경제 위기를 회복하면 다시 국가에서 재매입할 수 있도록 하지요.”

“오!”

이번 제안은 대한민국에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말과 정확하게 부합했다.

“이렇게 하면 수고스럽게 금괴로 바꾸며 손실이 생길 일도 없고 양심 없는 기업가의 욕심도 원천 봉쇄할 수 있죠. 그리고 국가가 국민을 외면하지 않고 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 금을 그냥 국가가 꿀꺽하진 않을 것 아닙니까. 국민에게 돌려줘야죠.”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거래였다.

“대단한 계획이군. 국민은 금을 모으고… 나라는 위기를 이겨내고 고스란히 다시 돌려준다. 금값이 크게 변동하지 않는다면 손해도 크지 않겠어.”

“금 시세가 얼마나 변화할지는 모르지만, 올라 봐야 얼마나 오르겠습니까. 지금 올라간 달러보다 내려갈 달러 가치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고 보니 훗날 외채를 갚을 때 달러 가치 하락에 대한 효과를 생각해 보셔야겠네요. 이것만 해도 상당한 차이가 있답니다.”

훗날 IMF 대출을 조기 상환하겠다고 하는 날이 온다. 하지만 달러 가치하락을 생각하면 나갈 이자보다 가치 하락이 더 컸기에 상환을 늦추는 것이 최선의 수였다. 이를 위해 미리 달러 가치를 언급한 수안이다.

그리고 금값은 생각보다 많이 오른다. 1997년 현재 온스당 280달러인 금 시세는 10년 뒤 850달러에 근접하고 2020년엔 1,800달러를 돌파한다.

언제 정부가 다시 금을 매입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BE도 최소한의 수익을 기대할 수 있었다.

“강 부회장이 운동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이렇게 머리가 좋았어?”

김일삼은 새삼스러운 얼굴로 수안을 보고 있었다.

“저 한국대 수석 입학했습니다. 하하하.”

“맞다. 그랬제. 하하하.”

정치인 두 사람과는 껄끄러워도 수안과는 껄끄러울 일이 없었다.

“밥 묵고 가야제. 200억 달러 갖고 온다는 사람한테 밥 한 끼 못 먹이면 안 되지.”

“주시면 잘 먹겠습니다.”

일전과 다른 느낌을 주는 청와대 오찬이다. 예전엔 밥이 입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 모르고 먹었지만, 지금은 긴장감 하나 없이 편안하게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청와대 주방장이 알아준다더니 정말 맛있는데요?”

“그라제? 한 그릇 더 무라.”

* * *

수안이 들여온다던 200억 달러는 12월 23일까지 모두 국내로 입금되었다. 이미 IMF와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기에 협상 자체를 무를 순 없지만, 재협상을 통해 약간의 호의적 조건을 기대할 수 있게 만드는 자금이었다.

달러 가치가 최고점을 찍은 12월 24일 외화는 모두 원화로 환전되었다. 나라의 외환 보유고가 순식간에 차올랐다. 환전된 원화 자금은 총 38조 원. 부도 기업을 주워 담을 총알을 장전했다.

더블 스타에 20조가 들어왔고, 펜타그램에 18조가 들어왔다. 이 자금의 일부는 강운 그룹으로도 흘러갈 예정이다.

IMF와 협상을 이어 가던 경제부총리는 200억 달러가 입금되었다는 말에 어깨를 펴고 협상에 임했다.

“IMF의 요구 조건이 과한 것 같습니다. 지원 금액을 줄여서라도 조건을 조정하고 싶습니다.”

“…550억 달러는 이미 협의가 끝나지 않았습니까? 지금 와서 금액을 줄이겠다면 우리의 지원금도 확답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외환 보유고는 230억 달러를 상회하고 있습니다. 방금 거액이 들어왔지요. 돌아오는 단기 외채도 무리 없이 갚을 수 있겠습니다.”

“……!”

“특히 한국은 IMF 지원금에 포함된 일본계 자금을 거부하겠습니다. 이번 위기를 촉발한 외국계 자본의 한국 탈출은 바로 일본계 자금이 방아쇠가 되었습니다. 이런 일본 자금이 IMF 자금과 섞여 들어오는 것을 허용할 수 없습니다.”

“잠깐! 이건 너무 갑작스러운 조건입니다.”

“저희는 협상을 조금 미뤄도 괜찮습니다만….”

오랜만에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경제부총리였다.

“…우리도 진위를 파악해 보겠소.”

IMF 협상단은 실제로 한국에 200억 달러가 들어왔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누, 누가 이런 짓을.”

“소로스와 함께 일을 진행한 BE 인베스트먼트라고 합니다. 이번에 태국부터 시작한….”

“동남아 외환 공격?”

“맞습니다.”

“미국에서 송금한 것은 아니군….”

“그랬다면 우리가 모를 리 없잖습니까.”

“BE 인베스트먼트와 전화 연결해.”

“예.”

IMF 협상단이 BE 인베스트먼트 이방효 사장과 연락한다고 뾰족한 수는 없었다.

이미 달러는 원화 환전을 마쳤고, 한국의 외환 보유고는 빵빵하게 차올랐다.

.

.

.

이번 달러 송금에 대한 문제는 수안이 미국 고위 관계자와 논의하고 있었다.

수안이 한국으로 송금한 달러는 이미 미국 재무부에서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로버트 재무부 장관님. 스티븐 강입니다.”

-우리가 제대로 한 방 먹었어. 스티븐.

“곤란하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더는 날 곤란하게 만들진 않겠지?

IMF(International Monetary Fund: 국제 통화 기금) 뒤에는 미국이 있다.

미국은 그 어떤 안건도 거부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의결권을 갖고 있었다. 한국의 시장을 강제로 개방하는 주체는 바로 이 IMF라고 할 수 있었고, 미국의 입김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지금 한국은 부동산이고 기업이고 모두 저렴하게 세일하고 있습니다. 참 좋은 기회지요. 정부는 해외 자금이 들어올 수 있도록 시장 진입 장벽을 낮출 것입니다. 저는 한발 일찍 들어온 셈이니 누구보다 많은 이득을 얻을 겁니다. 이후로는 다른 외국계 회사와 마찬가지로 일을 진행하려 합니다. 이번과 같은 대규모 투자는 집행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다만, 이번 입금액의 10%가량이 홍콩에 남았지요. 이 부분도 장관님 허락을 받아야 할까요?”

-허락이라니. 미국 정부는 공산주의를 혐오한다네. 10%라면 별것 아니군. 이번과 같은 대규모 투자만 없으면 됐네.

미국 정부의 허락은 사실 필요 없었다. 김일삼 대통령과 김대준 당선자에게 말한 것은 거짓에 가까웠다. 미국에 스스로 약속한 것을 과장을 살짝(?) 첨가해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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