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권- 동남아의 불씨 (110/304)

동남아의 불씨

대현의 목줄

IMF START

협상은 머리부터

크리스마스

입에서 입으로

Oval Office

관상

린다

목적

눈높이

아버지의 마음

아직은 당선인

후계자의 사정

쥐약

후보들

강수진

금 모으기 운동

폭탄을 심다

동남아의 불씨

쓰리 트랙의 구성은 다음과 같았다.

“예. 첫 번째는 강운 그룹에 강운 홀딩스가 맡을 것이고, 두 번째는 더블 스타 홀딩스가 맡습니다. 마지막은 제가 오늘 데려온 저들이 맡아야 합니다.”

앞으로 인수할 기업이 많은데, 한 곳에서 전부 처리할 수는 없었다. 강운 그룹에 필요한 기업은 강운 홀딩스에서 인수 과정을 진행하고, 더블 스타에서 진행하는 인수는 더블 스타에서 직접 진행한다. 그리고 마지막 트랙은 펜타그램에 입사한 직원들을 활용할 생각이다.

“떨어질 콩고물이 장난이 아닌가 보네.”

“예. 장난이 아니죠.”

하루에도 수십 개 회사가 부도 처리된다. 주워 담을 회사가 너무 많다.

“내가 BE에 대해서 따로 알아봤는데…. 장난이 아니더라? 언제 그런 회사를 만들었어?”

아는 선을 통해 BE 인베스트먼트를 파악한 염동철이다. 엄청나다는 말로는 부족한 투자 회사였다.

어린 수안이 언제 그렇게 큰 회사를 일으켰는지 알면 알수록 불가사의했다.

“BE는 잊고 있으세요. 나중에나 소식이 들려올 테니까요.”

지금은 국내에 BE를 드러낼 때가 아니었다.

“쩝. 요즘 BE 산하 제약사에서 좋은 약 나왔다며…. 국내엔 언제 출시하는데?”

염동철의 주요 목적이 바로 이거였다.

일본에 있는 지인들을 통해 BE의 정보를 수집하다 미국에서 발매한 신약 정보를 인수한 염동철이다.

“요즘 안 서요? 삼촌 고개 숙인 가장이셨어?”

“허허. 왜 이렇게 노골적이야? 민망하게스리….”

“담배 먼저 끊으세요. 그래야 약발도 받는 겁니다.”

“이게 쉽게 끊어지나. 그래서 구해 못 구해?”

“출시까지 했는데 설마 못 구하겠습니까? 생각난 김에 사장단에도 한 통씩 돌려야겠네요. 배 사장님!”

수안의 외침에 배영성이 들어왔다.

“예. 회장님. 부르셨습니까.”

“어라? 왜 회장님이야? 부회장님 아니셨어…. 요?”

염동철의 말에 배영성이 딱딱하게 답했다.

“이번 주총과 이사회의 승인으로 더블 스타에선 회장님입니다. 전 더블 스타 사람이니 회장님이 맞습니다.”

“말투가 어디서 많이 들어 본 것 같네. 최학주 실장의 먼 친척인가?”

“…아닙니다. 염 상무님.”

벌써 두 번째 비슷한 소릴 듣는다.

“염 상무님이 원하시는 약 받으려면 저분에게 잘 보여야 할걸요?”

“아! 그럼 이분이 바로!”

“네. 배 사장님이 BE를 총괄하는 사람입니다. 지금은 더블 스타 대표도 겸하고 있고요. 배 사장님. 미국에 시알리스 한 박스 보내라고 하세요. 여기 맛보여 줄 사람이 많았는데, 내가 생각도 못 했어요.”

“BE에 알리겠습니다. 도착에 시간은 좀 걸릴 겁니다. 국내에 허가된 약이 아니라 작업이 필요합니다.”

미국에선 이미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파이자 제약의 비아그라와 더불어 시알리스의 판매고는 그래프를 뚫고 수직으로 상승하고 있었다. 곧 해외에 판매되기 시작하면 그 매출은 상상 이상일 터였다.

“아차. 그런 문제도 있구나. 어쩔 수 없지. 늦어도 좋으니 문제없이 보내 달라고 해 줘요.”

“예.”

“염 상무님. 인계하실 자료는 어디 두셨을까요?”

“저쪽에….”

집무실 한편에 검정 바인더가 잔뜩 쌓여 있었다. 강운 홀딩스 업무를 넘기기 위해 미리 준비한 자료였다.

“하아. 요즘 누가 이런 식으로 업무 인계를 해요?”

회사 직원들이 컴퓨터로 일하기 시작한 지 오래였다. 구식으로 진행되는 업무 인수인계는 사양이다.

“저거 다 컴퓨터로 재작업해서 소프트 파일로 만들어 주세요.”

“…나도 저렇게 받았는데….”

“저 자료 중에 95%는 쓸모없는 자료라는 것에 내 왼쪽 발목을 걸겠습니다.”

육상 선수 출신인 수안이 발목을 걸었다는 의미는 모든 걸 걸겠다는 의미다.

“전 99%에 남은 오른쪽 발목을 걸죠.”

옆에서 배영성이 거들었지만, 수안의 눈총을 받아야 했다.

“배 사장 걸 걸어야지 왜 내 발목을 걸어?”

“전 소중하니까요.”

놀림감이 되고 있는 염동철이다.

“끄응….”

“다 치우고 핵심만 남기세요. 어차피 회사에서 보관할 자료라면 밑에서 다 가지고 있습니다. 사장은 보고받고 결정하는 사람이지 자료 모으는 사람이 아니잖습니까.”

“회장님이 자기 아들 똑 부러진다고 그렇게 자랑하더니…. 내가 당하고 있네. 에효.”

“제가 데려온 직원이나 잘 교육하라고 밑에 얘기해 두세요. 여기 자료 분리와 컴퓨터 작업은 비서 시켜 두시고요.”

“가려고…. 요?”

“그럼 당장 인수인계도 안 되는데 여기서 뭐 하고 있습니까? 저 바쁩니다. 더블 스타 가서도 할 일 많아요.”

“취임식은 따로 안 하시고?”

“조용히 지나갑시다. 어린 회장 아들이 하루아침에 사장 됐는데, 외부에 자랑할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수안은 폭풍처럼 몰아치고 집무실에서 나왔다.

바로 돌아갈 것처럼 얘기했지만, 수안은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각 부서를 돌았다.

사장으로 시작한 강운 홀딩스지만, 여기선 자신이 신입이었다. 동생들에게 강조하던 말을 스스로가 무시할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지금 이 행동이 취임식을 대신하는 일이었다. 높은 자리에서 내려다보며 인사하는 것보다 이렇게 얼굴 마주 보고 악수하는 편이 직원들에 더 친밀하게 다가갈 수 있었다.

“반갑습니다. 사장으로 부임한 강수안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어휴. 여기까지 사장님이 직접 내려오시고…. 재무팀 윤정우 부장입니다. 너무 뵙고 싶었습니다. 사인 부탁드려도 될까요?”

“윤 부장님은 특별히 해 드리죠. 하하하.”

이후로 다른 직원들도 다 특별히 사인해 줘야 했다.

수안은 목에 걸린 사원증으로 이름을 확인하며 마주치는 직원들과도 안면을 익혔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고상희 과장님? 반갑습니다. 인사팀이군요? 오늘 제가 직원들 좀 많이 보냈어요. 인사팀에서 잘 좀 챙겨 주세요.”

“예! 제가 확실하게 챙겨 주겠습니다.”

전 부서를 돌며 직원들과 인사를 마쳤더니 한참 시간이 흘렀다.

“더블 스타로 가시면서 점심 드셔야겠는데요?”

“벌써?”

손목에 시계를 보니 배영성 말대로다. 확실히 소속된 회사가 많아지니 시간이 부족하다.

수안은 간단하게 빵을 먹으면서 차 안에서 근래 부도난 회사의 자료를 훑어봤다.

그리고 국내 회사들 전체 현황 자료를 구해 비교하며 검토했다.

이왕이면 좋은 회사를 바구니에 담아야 했기에 검토를 빼먹지 않는 것이다.

“부품사는 아직 없어?”

“일전에 삼미 그룹이 부도 처리되면서 나온 자동차 부품사 삼미 금속이 있습니다. 삼미 그룹 자료는 마지막에 들어가 있습니다. 조만간 더 나올 것 같습니다. 자금 경색에 가장 힘든 회사는 밑바닥이니까요.”

가장 꼭대기에 있었던 외채가 빠져나갔지만, 그 영향력을 직격당하는 것은 밑바닥 중소기업이다. 그리고 그곳에 속해 있던 직원들, 한 집안의 가장들이 길거리로 나앉게 되는 것이다. 지금은 대기업도 나자빠지고 있으니 작은 기업은 바람 앞의 등불이다.

수안이 바쁘게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곡소리를 줄일 수 있었다.

모든 기업을 살릴 수 없지만,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 봐야 했다.

“자동차 부품사와 외주 업체는 특히 꼼꼼하게 챙겨야 해. 기술력 좋은 회사들이 많아.”

과거 금용으로 살면서 일했던 자동차 부품사도 상당한 기술력을 갖고 있었다.

특히 주변에 외주 인원을 전문으로 하는 작은 회사들이 있었는데, 이들 또한 자동차에 빠삭한 지식을 갖고 있다. 정직원과 외주 직원 간의 차이는 오직 급여와 소속뿐이었다. 수안은 이들을 끌어들일 생각이다.

“예. 알겠습니다.”

자동차 부품사의 경우 훗날 인수할 완성차 회사의 벤더 회사로서 챙기는 것이다.

완성차 시장을 먹는 것은 세밀한 사전 준비가 필요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부도 기업의 숫자는 늘어가고 있었다.

강운 홀딩스에선 실제 부도 기업의 인수를 추진하기 시작했고, 펜타그램 직원들은 그들을 따라다니며 실제 사례를 통해 기업 인수를 배우고 있었다.

더블 스타도 부쩍 늘어난 직원들을 밖으로 돌려 부도 위기의 기업들을 평가하고 점수를 매기고 있었다. 그중에 실제 부도를 맞을 기업 중 일부가 더블 스타로 편입될 예정이다.

* * *

97년 4월 소로스의 펀드는 BE에 합작을 요구해 왔다.

태국의 고정 환율제에서 맹점을 본 것이다.

하지만 이방효 사장은 각본대로 이번 공격이 실패할 이유까지 곁들여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

“당신은 태국 정부와 주변국을 너무 만만하게 생각하고 있소. 고작 그 자금으로 태국을 공격하겠다고?”

“규모는 얼마든지 불려 나갈 수 있소.”

“한계가 있을 겁니다. 당신은 땅을 치고 후회하겠죠.”

“후회는 당신이 하게 될 겁니다. 미스터 리.”

“쇼로시. BE 인베스트먼트는 불패의 전설을 이어 가게 될 거요. 이번 공격이 끝나면 다시 봅시다.”

“그때는 내가 만나 주지 않을 거요. 난 벌써 성공했을 테니까.”

그간 함께한 시간이 있기에 소로스가 태어난 헝가리 발음인 쇼로시라고 부르는 이방효 사장이다.

어지간히 친밀한 관계가 아니면 허락하지 않을 호칭이었다.

“아니. 내 친우는 다시 날 찾아올 거요.”

“흥.”

이방효는 수안의 지시에 따른 것뿐이지만, 실제 5월부터 시작한 환투기 세력의 태국 공략은 크나큰 실패로 끝맺음한다.

바트화 가치를 떨어트리려 했지만, 오히려 바트화 가치를 10%나 올리며 큰 손해를 봐야 했다.

이방효는 다시 소로스를 맞이했다.

“쇼로시.”

“…친구 말이 맞았어. 태국과 주변국의 대응은 비정상적이야.”

바트화 하락을 막기 위해 태국과 필리핀, 말레이시아가 합심하여 소로스가 공매도한 바트화를 달러로 사들여 환율 방어에 나섰다. 1차 환율 전쟁은 태국의 승리였다.

“고작 한 번 실패했다고 포기할 생각이요?”

“…함께하겠소?”

“내가 친구의 복수에 동참하지. 월스트리트의 힘을 보여 줍시다.”

“하하. 불패의 BE가 함께하니 이번엔 실패하지 않을 거야!”

이번엔 전혀 다른 물량이다. 수백억 달러를 운용하는 BE와 함께하는 이번 공격은 종전과 규모 면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아무리 주변국이 합심해도 막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7월 2일 태국의 고정 환율제(페그제) 포기 선언은 예정된 일이었다.

“주변 동남아시아를 다 쓸어 버립시다!”

광기가 동남아 금융 시장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헤지 펀드는 엄청난 수익을 맛보고 다음 먹잇감을 골라 두고 있었다.

달콤한 과실을 맛본 헤지 펀드 자금은 일본을 향하고 있었고, 여기서 다시 이방효의 만류가 이어졌다.

“일본은 무리입니다. 저력이 달라요. 쇼로시.”

“해 봐야 알지! 이미 우리의 자본금도 상당히 올라왔소. 미스터 리. 지금까지의 도움으로 충분하니 빠져도 좋소.”

“어디까지 노리려고 생각합니까?”

“…….”

“미국과 일본의 BE 인베스트먼트는 한 몸이요.”

“그래서 우리의 일본 공격을 막습니까?”

“아닙니다. 미국과 일본 BE의 주인이 바로 한국인입니다. 그분의 명령이 내려지면 우린 전 자산을 투여해 위기를 막아야 합니다.”

“……!!”

이 지시도 수안이 내린 것이다. 한국까지 소로스가 도달하진 않을 테지만, 그 전에 뿌리를 뽑아야 했다.

“BE의 자금력을 소로스 펀드와 헤지 펀드 몇으로 막을 수 있겠소?”

“그, 그건….”

“BE에서 요청하면 전통의 석유 자본까지 우릴 돕게 될 거요.”

“포기…. 포기하지.”

BE까지는 대항해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조력까지 더해진다면 자금력이 향상된 헤지 펀드가 대항해도 필패였다.

“일본 공략에 성공하길 빌겠소. 아! 그리고 일본 BE는 일본 금융 시장에 도움을 주지 않겠소. 친우를 위해 내가 이 정도는 할 수 있지.”

“이번엔 먹을 게 많겠군. 가장 큰 물주가 떨어져 나갔으니 말이야.”

수안은 피 튀기는 전쟁을 예상한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일본이 몰락할 일은 없다고 했었다.

일본계 금융 회사가 여럿 무너지는 결과를 가져오지만, 동남아만큼의 위기는 오지 않는다.

오히려 한국이 문제였다.

“쇼로시. 일본에 너무 많이 발을 담그진 마시오. BE 인베스트먼트는 실패할 투자를 시작하지 않기에 불패의 투자 회사로 불리고 있답니다.”

아찔한 발언이었다. 꼭 이번 투자도 1차 태국 공격처럼 실패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때도 비슷한 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

“굿 럭. 마이 프렌드.”

그렇게 BE 인베스트먼트와 소로스의 거래가 끝났다.

동남아에 붙은 불씨는 주변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