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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리에 서다 (109/304)

제자리에 서다

수안은 아버지가 앉아 있던 자리로 걸어가 의자 머리 받침대 위에 손을 얹고 자연스럽게 좌중을 둘러봤다.

사장단은 이제야 제자리를 찾은 회장의 아들을 뿌듯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 봐도 몇 년은 함께 일한 사람들처럼 친근하다.

예전과 다른 것은 음지에서 만나지 않아도 된다는 것과 이렇게 많은 사장단을 한꺼번에 모아 놓고 지시를 내릴 수 있다는 점이다.

수안은 사장단 앞에서 서서 편안하게 입을 열었다.

“올해부터 내년까지 강운 그룹의 사업 방향은 단 두 가지만 기억하시면 됩니다.”

수안은 검지를 높이 들었다.

“하나. 다가올 미증유의 금융 위기에 대비한다.”

여기까지는 아버지가 이미 사장단에 알렸음을 알고 있다.

이어서 수안의 중지가 펼쳐진다.

“둘. 금융 위기에 노출된 동종 회사를 흡수해 위기 속 확장을 꾀한다.”

이 부분은 수안이 사장단에 직접 제안하는 사업 방향이다. 수안의 제안에 사장단의 호응이 돌아왔다.

“맞습니다. 위기와 기회는 함께 찾아오는 법이죠.”

“재도약의 기회로군요!”

“강운 그룹이 크게 성장하겠습니다.”

위기를 대비하고 있는 강운 그룹은 위기에 안전하다고 할 수 있다. 강운 이외의 모든 기업이 위험에 노출된 상황이니 얼마든지 위기에 빠진 동종 기업을 인수할 수 있을 터였다.

“맞습니다. 위기는 기회의 다른 말이죠. 지금까지 우리는 위기 속에서 강운 그룹을 키워왔습니다. 과거 우린 다른 회사가 헤매는 동안에도 전진했습니다. 그런 우리 강운 그룹이 동종 회사만 흡수할 것인가를 생각한다면 약간 의문점이 생길 겁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사업은 회장님과 제가 시작하겠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동종 회사에만 집중해 주세요. 인수 자금이 필요하면 그때그때 말씀하십시오. 앞으로 계열사에 자금 수혈이 수시로 발생할 겁니다.”

사장단의 눈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다. 수안은 본론을 시작했다.

“각 계열사 대비 상황부터 확인하겠습니다. 강운 증권부터 시작합니다. 국내 투자 상황 보고하세요. 제가 주식 시장은 올해 8월까지만 상승 기류가 예상된다고 말씀드렸죠?”

“예. 강운 증권은 상승 기류에 편승해 이미 목표 수익을 달성했습니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른 회의가 진행됐다. 이미 강운 그룹 계열사의 사업 방향을 모두 파악하고 있는 수안이다. 거기다 이번 위기에 대한 대비도 수안의 머리에서 시작했기에 사장이 앞뒤를 잘라먹고 핵심만 보고해도 다 알아듣는다. 각 계열사 사장도 보고가 수월하니 너무 편하다.

덕분에 사장단 회의는 짧은 시간 내에 마무리되었다.

“이래서 젊은 피가 필요한 모양입니다. 저희까지 젊어지는 기분입니다.”

“회의 속도가 꼭 부회장님 세계 신기록만큼이나 빠릅니다. 하하하.”

“세상의 변화에 따라가려면 우린 더 부지런히 움직여야죠. 회사가 걷기 시작하면 그건 제자리걸음일 뿐입니다. 세상도 저만치 걸어가 버렸으니까요. 우린 달립시다. 누구보다 더 빠르게 달립시다. 그래서 경쟁자를 다 뒤로 보내고 가장 앞서 나가서 세상을 선도합시다.”

수안의 패기 어린 연설에 사장들이 저마다 일어나서 박수를 보내 줬다.

짝짝짝짝. 짝짝짝.

수안은 화답하며 다시 허리를 숙였다.

“잘 부탁합니다. 저는 여러분만 믿겠습니다.”

이에 화답하듯 사장단도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도 부회장님을 믿습니다!!””

완벽한 회의라고 해도 좋았다. 경영진의 생각이 모두 한마음 한뜻이다.

수안은 허리를 펴고 사장들과 악수하기 시작했다.

“김 사장님. 이제 아드님이 취직할 때 안 됐습니까? 제가 직속으로 키워 드린다고 약속했는데 말입니다.”

“하하. 이거 제가 죄송한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녀석이 의사 되겠다고 난리라 회사로 데려오는 것은 어렵겠습니다. 부회장님 밑이면 제대로 클 텐데 저도 아쉽습니다.”

수안은 고개를 돌려 다른 사장을 찾았다.

“저런. 박 사장님 따님도 나이 차지 않았습니까? 곧 졸업일 텐데요.”

“하하. 자식이 마음대로 안 되더군요. 녀석이 검사하겠다고 사법 고시를 봐서 붙었지 뭡니까.”

“이야. 축하드립니다. 박 사장님은 판검사 자식을 두시겠네요?”

“하하하. 감사합니다.”

이후로도 평소 알고 지내던 사장들과 편히 인사하며 시간을 보내고 회의를 마쳤다.

시종일관 편안한 자리였다. 아버지는 어렵고 힘든 자리를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회의 시간은 앞으로 영원히 오지 않는다.

* * *

사장단이 회의실에서 빠져나갔지만, 남은 사장이 두 명 있었다. 수안의 지시로 회의실에 남은 것이다.

“박 사장님. 그리고 정 사장님.”

““예. 부회장님.””

김현성과 앙금을 털어냈으니 이제 이 두 사람이 남았다.

강운 패션의 박민후 사장과 뉴월드 호텔의 정진환 사장이다.

둘은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이었다. 다른 사장들과 웃으며 인사하는 중에도 둘은 어색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렇게 기다렸던 수안이 회사로 당당히 입성했지만, 마냥 즐거워할 수가 없었다.

“시간 없으니 간단하게 끝냅시다. 품에서 손은 빼세요. 제가 사직서 받자고 남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수안의 입이 떨어지기도 전에 사직서부터 꺼낼 생각을 하던 두 사장이다.

“배 사장을 통해 들었겠지만,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

“…….”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다.

“어째서 날 속인단 말입니까! 내가 지금까지 두 분 사장님을 포함해 사장단에 해악을 끼친 적이라도 있습니까?”

“어, 없습니다. 살려 주십시오. 부회장님.”

“죄송합니다. 부회장님. 어떤 벌을 내리셔도 달게 받겠습니다.”

박 사장과 정 사장의 태도는 극명하게 다르다.

“박 사장님.”

“예! 부회장님.”

“앞으로 강수진 실장 잘 모셔요. 앞으로 수진이가 회사생활 하는 데 문제없게 해 준다면, 일전의 일을 더는 문제 삼지 않겠습니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부회장님.”

“정 사장님은 얘기 들어 보니 수현이와 나름 잘 지내는 모양입니다.”

여긴 잘하라고 말할 필요도 없었다.

집에서 수현이가 뉴월드 호텔에서 라인을 정리한 얘기를 듣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던 수안이다.

“예. 강수현 실장님이 호텔에 가진 열정을 보고 저도 돕기로 했습니다.”

이미 정진환 사장이 수현이를 따르기로 했기 때문이다.

수현이는 자신의 라인에 정 사장을 넣으며 모든 라인을 통합해 라인의 의미가 없도록 만들었다. 수안은 라인을 해체할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수현은 라인의 최상단을 공략해 성공한 것이다.

‘정 사장이 잔머리 하나는 기가 막힌 사람이지. 내겐 죄를 지어 눈 밖에 났다고 생각하고 차선으로 수현이를 선택한 거야.’

수현이가 머리가 좋긴 하지만, 라인 정리는 정진환 사장의 재빠른 상황판단으로 가능했다고 생각한 수안이다.

“어차피 수진이나 수현이가 사장으로 취임할 때는 두 분 사장님이 퇴임한 다음일 겁니다. 그러니 거리낌 없이 받아들여도 됩니다. 그 어린 애들이 뭐가 겁나서….”

동생들과 자신은 몇 살 차이 나지도 않는다.

하던 말을 삼키고 나머지 궁금한 점을 물었다.

“됐고. 당시 내게 보고한 두 사람은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남 차장과 정 부장 말입니다.”

수안이 인재라고 거듭 칭찬했던 둘이다. 하지만 지금은 사업 계획 사기가 백일하에 드러났다.

현재 그들의 위치는 위태위태했다.

“…아직 처분 전입니다. 빨리 정리하겠습니다.”

“정리라니! 내가 두 분 사장님 사직서도 안 받았는데, 그 직원들 사직서를 받을 참입니까?”

박 사장은 정리한다고 했다가 호통 소리에 거북이처럼 목을 집어넣었다.

“…….”

“부하 직원이 뭘 잘 못 했습니까? 사장이 시키는 대로 한 죄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 둘 자르려면 품에 있는 사직서부터 꺼내 놓으세요!”

정리라는 말에 다시 격분한 수안이다. 면전에서 거짓을 늘어놓은 직원들이지만, 사장의 지시에 따른 것이 죄였다. 어쩔 수 없이 따른 것뿐이다. 사업 계획을 보고 나름의 창조적인 개선이 가능할 정도의 직원이라면 인재라고 봐야 했다.

“퓨후. 기본 능력은 있는 사람들입니다. 맡은 일은 잘하는 것 같으니 두고 보겠습니다. 나도 그 일을 잊을 테니 두 분 사장님도 잊으세요.”

“감사합니다. 앞으론 실망하게 해 드리지 않겠습니다.”

“제가 드린 사업 계획대로라면 뉴월드 호텔을 크게 성장시킬 수 있습니다. 정 사장님. 뉴월드 호텔은 골프 선수부터 지원을 빨리 시작해요.”

“예! 부회장님!”

“강운 패션은 위기 상황에 오히려 매출이 늘어날 SPA 브랜드를 완벽하게 런칭해야 합니다. 박 사장님. 아시겠습니까?”

“제 목숨을 바쳐서….”

“나는 그 목숨 필요 없으니 도로 넣어 두시고…. 잡음 생기지 않도록 잘합시다. 오케이?”

“…예. 부회장님.”

* * *

마지막 대화까지 마친 수안은 넥타이를 슬쩍 잡아당겨 헐겁게 만들고 아버지에게 향했다.

“회장님 안에 계십니까?”

“예. 부회장님. 회장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수안은 비서의 안내를 받아 집무실로 들어갔다.

“회장님. 회의 마치고 왔습니다.”

“강운 그룹 첫 사장단 회의는 재미있었느냐?”

“무척 힘들었습니다. 확실히 더블 스타 사장단 회의와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대단한 능력을 갖춘 분들입니다.”

수안은 아버지가 기대하던 대로 답했다. 이런 것도 나름의 효도라고 생각하는 수안이다.

“당연히 다르지. 강운 그룹은 국내 최고의 기업이다. 강운 그룹에 능력 없는 사람이 경영하는 계열사는 없어.”

뿌듯한 얼굴의 아버지를 보며 수안은 자신의 결정이 옳았음을 알 수 있었다.

“저도 기대에 부응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오늘 사장단 회의는 이미 회장님께서 지시하신 위기 대비와 그 안에서 어떤 이득을 꾀할 것인가를 두고 깊이 있는 논의를 이어 갔습니다. 관련 보고는 내일 회의 결과 보고서로 올리겠습니다.”

“바로 가려고?”

강운 홀딩스로 간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회사에 왔으니 같이 밥이라도 먹고 갈 줄 알았다.

“예. 강운 홀딩스에서 할 일이 많습니다. 식사는 나중에 따로 시간을 내겠습니다.”

“거긴 기업 인수 전문가가 상당하지. 앞으로 쓸모가 많을 거야. 염 상무가 먼저 출발했어.”

“강운 홀딩스에서 업무를 보고 바로 더블 스타로 가겠습니다.”

“그렇다고 몸 상할 정도로는 하지 마라. 건강이 우선이야.”

아들은 시키지 않아도 열심히 할 사람이다.

그래서 아비로서의 속마음을 보이는 것에 거리낌 없다.

“저 국가 대표 출신입니다. 체력은 누구보다 자신 있습니다.”

“하하. 그래. 괜한 걱정이었구나.”

수안은 강운 빌딩 사옥을 나서며 배영성에게 전화했다.

“배 사장. 펜타그램 직원들은 모아 놨어?”

-예. 관광버스 두 대 빌려서 태워 놨습니다.

“나 지금 강운 홀딩스로 간다. 바로 출발해.”

-예. 회장님.

수안은 강운 홀딩스 사옥 아래 도착해 관광버스가 도착하길 기다렸다.

그런 수안의 뒤로 왜 사장님이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지 의아해하는 직원들의 얼굴이 보였다.

강운 홀딩스 부사장을 비롯한 임원들이다.

수안은 버스가 보이자 손을 흔들었다.

강운 홀딩스 사옥 앞에서 버스가 정차하고 우르르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뭐, 뭐야? 저 사람들 뭔데?”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로비에 가득 내려서고 있었다.

“배 사장. 여기 직원들이 전부인가?”

“예. 모두 62명. 펜타그램에 입사한 직원들입니다.”

“다들 데리고 따라와.”

“예.”

“어, 어.”

강운 홀딩스 임원들은 우르르 밀고 들어오는 사람들을 막을 수 없었다.

강수안 부회장이 무리의 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김태형 부사장님! 이쪽으로 오세요.”

“아! 예!”

수안의 부름에 후다닥 달려와 옆에 섰다.

“여기 직원들 홀딩스에서 1대1 과외 부탁합니다. 앞으로 기업 인수 절차를 배워야 할 직원들입니다. 강운 홀딩스에서 한 명씩 맡아서 전문가로 만드세요. 기업 가치 평가와 사람 대하는 법, 기업 실사에 필요한 노하우까지 다 배워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아! 예! 이해했습니다.”

오자마자 장부를 뒤집으려고 하는 줄로 알았다. 내부 감사가 아니라 천만다행이다.

“김 부사장님은 이사들에게 이 인원들 빨리 배정하라고 하세요.”

“예! 송 이사! 박 부장! 이리로!”

사장 업무만 인계받으려고 강운 홀딩스에 온 것이 아니다. 앞으로 펜타그램에서 쓸 직원들을 교육하기 위해 이렇게 불쑥 직원들을 데려왔다.

수안은 꼭대기 층에 도착해 사장실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갔다.

“깜짝이야. 노크도 안 하십니까?”

“염동철 사장님.”

“이제 상무이사로 강등됐지요. 강 부회장님.”

“편하게 하세요. 괜찮습니다.”

“여기 회삽니다. 그러다 한직으로 또 밀려납니다.”

“아이고. 우리 염 상무님이 이제 나이를 먹으셨네.”

“크흠.”

수안이 살살 긁으니 얼굴이 금방 붉게 변한다.

“배 사장님은 잠시 나가 있지요?”

“예. 알겠습니다.”

“이제 아무도 없어요. 괜찮아요.”

“수안이 넌 뭘 저렇게 잔뜩 사람을 끌고 와? 여기 장부 확인이라도 하려고? 나 하나도 안 빼먹었는데?”

수안이 배영성을 내보내자 금방 말투를 바꾸는 염동철이다.

아버지 호출 후로 염동철 사장과 따로 만나서 친분을 쌓아뒀다. 아버지의 최측근이면서도 최학주 실장과 달리 말이 잘 통하는 상대였다.

“인수 합병 전문가로 키울 직원들입니다. 감사는 무슨 감사를 합니까? 제가 삼촌 못 믿겠어요?”

아버지와 호형호제한다고 했으니 삼촌으로 칭하는 것이 맞는다며 수안이 우긴 결과였다.

“인수 합병 전문가라니? 여기 있는 전문가들 쓰면 되잖아.”

강운 홀딩스에 인수 합병 전문가들이 가득했다.

“제가 쓰리 트랙으로 갈 거라서 그렇습니다.”

“투 트랙이 아니라 쓰리 트랙?”

<『재벌가에 끼어들었다』 6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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