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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기회 (108/304)

마지막 기회

동생들의 일이 정상적으로 정리되었고, 전환 사채 문제도 수긍했다. 강운 그룹의 후계자는 오로지 수안, 단 하나뿐이다.

수안은 이제 마지막 마무리를 위해 김현성을 불러들였다. 마음에 작게 남은 앙금도 털어내야 했다.

“김 사장.”

“예. 부사장님.”

“그간 동생들 계좌 맡아서 관리하느라 고생 많았어. 앞으론 관리하지 말고 동생들에게 돌려주면 끝이야.”

“아. 그렇게 됐습니까?”

“그리고 김 사장이 관리하던 내 자금 관리는 배 이사에게 맡기도록 해. 김 사장은….”

“저…. 끝입니까?”

“어?”

“조만간 이런 날이 오리라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배영성 이사가 자신의 잘못을 혼자서만 알고 있지 않으리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김현성은 자신이 언제쯤 내쳐질지만 가늠하고 있었다.

‘그날이 오늘이구나.’

김현성은 침울한 표정으로 이어 말했다.

“그간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앞서 나가서 심란하게 해 드렸습니다. 사죄할 길이 마땅치 않아….”

“어허. 또 앞서 나간다. 내 얘기나 다 들어 이 사람아.”

김현성은 이런 사람이었다.

“네?”

“앞으로 김 사장은 기업 인수에만 신경 쓰도록 하라고. 앞으로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내 비자금까지 어떻게 관리하나?”

김현성에게 맡긴 잡스러운 업무를 다 빼 버리고 핵심만 남길 생각이다.

“저 안 자르십니까?”

“…나도 사람인지라 상황 파악하고 화가 많이 났어.”

“…죄송합니다.”

“회장님이 그러시더라. 충심으로 한 일이면 기회를 줘도 좋지 않겠냐고 말이야.”

“끄읍….”

“동생들 지분 정리도 끝났어. 회장님 선에서 전부 결정 내리셨으니 이제 누가 터치할 수도 없는 일이야.”

수안은 고개 숙인 김현성에게 동생들 계좌 관리가 왜 끝났는지도 말했다.

“회장님이 동생들은 그만 챙기라고 하시더라. 계좌도 내 돈으로 시작했다는 사실을 아시고 어처구니없어하셨어. 내가 생각해도 좀 과하긴 했지. 그래도 난 후회 없어. 언제나 난 내 동생들을 믿었고 지금 내 동생들은 내가 강운 그룹을 물려받길 원하고 있어. 그룹 핵심 전환 사채도 모두 내가 받기로 했지. 김 사장 생각과 결과가 다르지?”

“…예. 아주 다릅니다. 제가 오판했습니다.”

다른 재벌들이 벌이는 이전투구를 예상했던 김현성이다. 하지만 수안에게 길든 동생들은 어설프게 뿔을 드러낸 것이 전부였다. 이후 수안의 손에서 경영자의 꿈을 기르는 상황에서 강운 그룹의 주인 자리에 욕심을 보일 수도 없었다. 자신이 모시는 상사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일을 끌고 나가고 있었다.

현실에서 김현성의 추측과 수안의 생각은 다르다. 수안은 어찌 됐건 가족이니 자신이 받을 것이라도 나눠서 함께 살아야 한다는 태도였다. 그 결과가 좋은 방향으로 흘러간 것이지 미리부터 동생들을 길들인 것은 아니었다.

“사람은 자신이 겪어 본 것만 믿게 되어 있어. 나도 그렇고 김 사장도 그렇겠지.”

“제 시야가 너무 좁았습니다.”

“나도 시야 넓지 않아. 그래도 이건 알아. 김 사장이 앞으로는 이번과 같은 결정을 내리지 않을 거라는 거야. 그렇게 해 줄 수 있겠어?”

“…저 같은 놈에게도 다시 기회를 주십니까?”

“기회는 내가 주는 게 아니라 배영성 이사가 주는 거야. 배 이사에게 결정하라고 했더니 그러더라. “능력도 출중하고 신의도 있는 사람이다. 이번엔 충성심이 과했다. 앞으론 선을 넘지 않을 사람이다.”라고 말이야.”

“그 선 앞으론 확실하게 지키겠습니다. 제 판단을 과신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김 사장을 많이 아껴. 알지?”

“예. 제가 모르겠습니까.”

“내가 주는 신뢰. 앞으론 잃어버리지 마. 이번이 마지막이야.”

“…….”

단단하게 다문 입술은 북받치는 감정을 참아내고 있었다.

수안도 나이 든 남자의 눈물을 보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 많이 바쁠 테니 여유로울 때 술이나 한잔할까?”

“…예. 준비하겠습니다.”

“포장마차로 가서 오돌뼈에 소주나 한잔했으면 좋겠다. 잔치국수도 죽이는데 말이지. 생각만 해도 절로 침이 고이네.”

“그건….”

너무 어려운 주문이다. 수안을 알아보고 몰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안주 한 점도 입에 넣지 못할 것이다.

“어려워? 배 이사는 가능하게 만들 것 같은데?”

“…10분. 아니 20분만 기다려 주십시오.”

김현성 사장이 후다닥 밖으로 뛰어나간다.

일부러 적당히 어려운 일을 시켰다. 수안 나름의 벌이다.

김현성 사장은 25분 만에 직원들을 동원해 근처 포장마차 하나를 전세 냈고, 주변을 철통같이 방비시켰다.

“5분 늦었지만 봐준다. 가자.”

“예!”

“배 이사랑 최 실장도 불러와. 이런 자리 쉽지 않잖아. 비싼 자리야.”

“예. 부사장님.”

오랜만에 포장마차다. 이런 자리에 배 이사와 최 실장을 빼먹으면 서운해한다.

* * *

수안은 전격적으로 강운 그룹에 입사했다.

먼저 3월 말 주주 총회에서 수안을 부회장으로 삼는 안건이 올라왔고,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그렇게 강운 그룹 부회장이 되었다.

다음 날 더블 스타 주주 총회에서도 질 수 없다는 듯, 수안을 회장으로 올리는 안건을 가결했다. 그렇게 더블 스타 회장이자 강운 그룹 부회장이 된 수안이다.

더불어 배영성 이사는 더블 스타 공동 대표로 이름을 올렸다. 펜타그램과 더블 스타 사장을 겸하게 됐다.

스물여섯 어린 나이에 그룹 부회장이 되었지만, 이를 꼬집는 언론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괜히 국민 영웅을 건드렸다가 역풍을 맞으면 살아남기 힘들었다. 이미 이현창을 통해 간접적으로 된서리를 맞은 언론은 부회장으로 등극한 수안을 꼬집기보다 앞으로가 기대된다는 식의 호의적인 기사만 내보내고 있었다.

수안은 이런 언론의 행태를 보며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비평 기사 한 꼭지 정도는 있을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언론이 언론답지 않은 것은 예전부터였지.”

미래에 국민이 언론 개혁을 부르짖던 시대가 오는 것을 알고 있는 수안이다.

물론 그에 반대되는 견해도 있었고, 어느 쪽이 맞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수안만 해도 재력가 중에 최상위에 있으면서 언론을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었으니 언론이 혼탁해진 원인에 지분을 가진 사람이다.

“그래도 할 말은 하고 살아야 언론이지.”

그렇다 해도 언론이 언론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현 상태는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번 기회에 언론도 확보해야겠어.”

이미 네이보와 다움을 키워나가고 있지만, 포털이 아닌 진정한 언론을 확보해야 했다.

수안은 신문을 내려놓고 출근 준비를 서둘렀다.

수안은 아내 아현이 챙겨 주는 지갑과 명함 케이스를 건네받았다.

수안의 새로운 명함은 아주 간단했다.

소속부서도 없고 연락처도 없다. 직급도 없으니 장난으로 만든 명함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저 강수안이라는 이름과 강운 그리고 더블 스타의 로고만 들어가 있었다.

“당신 명함은 받아도 연락은 못 하겠네요.”

수안의 명함을 본 아내 아현의 말이다.

“내 이름이 곧 명함이니까.”

수안의 이름이면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 없었다. 전 국민이 수안을 알고 있다.

아현도 수안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린다.

‘하긴. 수안 씨가 누군가에게 연락처를 줄 필요도 없지.’

“여보. 일찍 들어와요?”

“우리 정원이 보러 일찍 들어와야지.”

아들 정원이 곧 있으면 돌을 맞이한다. 엉금엉금 기어 다니는 아들을 보는 맛에 퇴근길이 즐겁다.

“이번 주엔 처가댁에 갈까? 요즘 다녀왔어?”

“수시로 다녀와요. 아버지 어머니께서 매일 정원이 보여 달라고 성화라.”

정원이는 평소 집에서 시아버지 시어머니 품에서 잠들기 일쑤였다. 그만큼 사랑을 받고 있다는 뜻이다. 본래 처가댁에선 자기 딸이 시댁에 미운털 박힌다고 전화도 잘 안 했었는데, 요즘은 하루가 멀다고 전화를 한다. 언제 정원이를 데려오느냐고 성화였다. 덕분에 아현은 친정집과 시댁을 오가는 날이 많았다.

“아휴. 내가 자주 갔어야 했는데….”

“당신 바쁜 거 모르지 않으세요. 얼른 출근해요.”

“응. 오늘은 강운 그룹에서 사장단 회의가 있어. 강운 사옥에서 회의 끝나면 바로 강운 홀딩스로 갔다가 더블 스타로 가게 될 거야.”

오늘 사장단 회의는 그룹 부회장으로 취임한 수안을 소개하는 자리였다.

“하루에 세 곳을 다 가시려고요? 우리 남편 길 위에서 시간 다 보내겠네.”

이런 걱정을 해 주는 사람은 아내밖에 없다.

수안은 작은 걱정도 보살핌도 아내에게 감사한 마음이다.

“흐흐. 앞으론 하루에 한 곳만 갈 생각이야. 당신도 집에만 있지 말고 밖에 돌아다녀.”

“이제 슬슬 움직여 봐야죠.”

이제 아들도 많이 컸으니 아주머니에게 아들을 맡겨 두고 밖에 나갈 수 있었다.

“다녀올게.”

“조심히 다녀와요. 아빠 빠빠이 하자.”

아현의 품에 안겨 있던 정원이 고사리손을 흔들었다. 물론 아현이 붙잡고 흔들고 있었다.

수안이 나가고 나서 아현은 아들을 안고 안방으로 향했다.

“어머님. 수안 씨 갔어요.”

“우리도 얼른 옷 갈아입고 나가자.”

“예.”

수안이 나가라고 하지 않아도 이미 시어머니와 외부 일정이 잡혀 있었던 아현이다.

“내가 아들 눈치까지 보면서 쇼핑을 해야 한다니까.”

“호호. 수안 씨가 쇼핑한다고 뭐라고 안 해요. 괜찮아요.”

아내의 쇼핑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 수안이다. 얼마를 쓰건 절대 터치하지 않았다.

동생들에게 하던 행동과 전혀 달랐지만, 여기엔 합당한 이유가 있다.

자신이 그만큼 벌고 있으니 얼마든지 써도 좋다는 이유였다.

부부는 일심동체이니 자신이 번 것을 아내가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수안이다.

“괜찮기는…. 너 수안이랑 쇼핑가면 뭐 사는지 알아?”

“…한참 전에 같이 쇼핑하긴 했는데, 그땐 운동복하고 운동화 정도 사던데요?”

“걔가 그런다니까. 난 수안이가 제대로 쇼핑하는 꼴을 못 봤어.”

“호호. 버는 것 치고 너무 안 쓰긴 하죠.”

집에서 입고 쓰는 물품은 집을 관리하는 분들이 알아서 준비한다.

수안은 불만이 많지 않아서 딱히 뭔가 필요하다고 느낀 일도 거의 없었다.

아현은 수안과 쇼핑하며 예전에 여자를 만나지 않았다는 말도 믿게 됐다.

여자가 뭘 좋아하는지, 무슨 선물을 좋아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이다.

“내가 너라도 있어서 숨 쉬고 산다.”

요즘 딸들도 일이 바쁘다며 엄마와 쇼핑할 시간을 내주지 않는다. 아들 녀석은 대학 생활에 바쁘고 대학이 아니어도 엄마와 쇼핑할 아들이 아니다. 남은 것은 며느리밖에 없었다. 덕분에 아현은 고부갈등이라는 단어도 생소할 지경이다.

“얼른 옷 갈아입고 나와. 애는 아주머니한테 맡기고. 오랜만에 제대로 질러 보자.”

“예. 어머님.”

어려서부터 여기저기 손을 옮겨 다녀서 아주머니들이 맡아 줘도 방글방글 웃기만 하는 정원이 덕분에 편히 나갈 생각을 할 수 있었다.

* * *

수안은 사장단이 모인 회의실에 불쑥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저 왔습니다. 하하하.”

아직 강운모 회장이 도착하기 전이다. 수안이 웃는 얼굴로 인사하자 사장단이 후다닥 일어나 근처로 모이기 시작했다.

“이야! 드디어 오셨습니다.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실 겁니다.”

“그래도 예상보다 빨리 오셨어요. 하하하.”

“축하드립니다. 강 부회장님.”

“부회장님! 오늘 회식해야지요! 이런 날 그냥 지나가는 거 아닙니다.”

저마다 축하 인사를 던지는 사장들이다. 수안은 일일이 웃으면서 사장단의 축하를 받았다.

“예. 생각보다 일찍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환영 감사합니다. 회식은 좀 미뤄 주십시오. 오늘 일정이 많습니다. 하하하.”

“회장님 오십니다!”

강운모 회장의 등장 소식에 사장단이 후다닥 자리로 돌아갔다.

“훗.”

꼭 담임 선생님이 들어온다는 소릴 들은 학교 학생들 같았다.

강운모 회장은 들어오자마자 굳은 얼굴로 사장단을 훑어보고 수안에게 말했다.

“강수안 부회장. 일어나서 사장단에 인사하도록.”

“예. 회장님.”

수안은 강운모 회장 곁에 서서 허리를 숙였다.

“부족한 제가 강운 그룹 부회장과 강운 홀딩스 사장을 맡았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사장들은 표정을 관리하면서 박수로 화답했다.

짝짝짝짝.

강 회장은 그런 사장단을 보며 말했다.

“불만 있는 사람은 지금 얘기해. 품에 있는 사직서 놓고 나가면 붙잡지 않겠다.”

불만이 있을 수가 없다. 방금까지 수안 옆에서 알랑방귀를 뀌던 사장단이다.

조용한 사장단에 만족한 강 회장이 말했다.

“앞으로 사장단 회의는 부회장 주체로 진행하고 보고하도록. 지금부터 실행해.”

“회장님.”

수안이 말리듯이 불렀지만, 강 회장은 단호하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갔다.

최학주 전무와 염동철 상무도 강 회장과 함께 자리를 피해 버렸다.

이미 얘기가 된 듯하다.

수안은 사장단과 미리 친분을 만들지 않았으면 어쩌려고 이러는지 싶었다.

‘경영자 수업의 일환이라고 생각하시나?’

“나 참.”

강 회장이 회의실을 나가고 잠시 조용한 분위기를 즐겼다.

멀어지는 아버지의 구두 굽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가 되자 수안의 입이 떨어졌다.

“김 사장님. 가서 회의실 문 잠그고 오세요. 회장님 다시 들어오실라.”

““하하하.””

화기애애한 웃음소리와 함께 사장단 회의가 시작되었다.

예전부터 강운 그룹은 수안의 손에 있었다.

계열사 사장단은 어려운 사람들이 아니라 무척 친근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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