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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보 아닌 양보 (106/304)

양보 아닌 양보

수안은 아버지에게 조언을 시작했다. 같은 수준의 상대로 봐주는 만큼 더 상세한 조언이었다.

“강운 그룹은 올해 국내에서 발생하는 일들을 살피면서 보석들을 골라내는 작업을 진행하셔야 합니다. 연말까지 바쁘실 겁니다. 그 이후엔 더 바쁠 겁니다.”

“위기는 마지막에나 오겠구나.”

수안의 말로 위기의 시점을 알 수 있었다.

“예. 정부와 언론에선 한국 경제에 위기가 도래하지 않았다고 떠들겠지만, 믿지 마십시오. 해외에서 한국 경제의 성장을 점치더라도 믿지 마십시오. 오직 저만 믿고 함께하시면 강운은 대한민국을 집어삼킬 수 있습니다.”

강운모 회장은 흐뭇한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아들. 이 애비가 불안하더냐?”

“아닙니다. 제게 아버지는 가장 믿음직한 우군입니다.”

“강운 그룹은 누구보다 널 전폭적으로 지지하게 될 게다. 우군이지만 더블 스타가 먹어야 할 회사를 강운이 빼앗아 먹을지도 모르지.”

“하하하.”

아쉽지 않다. 먹어야 할 회사는 차고 넘치는 상황이다.

“앞으로 2년간 쓰러지는 상장사가 100개 이상이 될 겁니다. 이걸 더블 스타가 다 먹을 순 없습니다.”

“…100개?”

분명 상장사라고 했다. 상장사 하나에 수백 개 비상장사의 목숨이 함께 걸려있다. 상장사가 100개 넘어가면 비상장사는 1만 개 이상이 쓰러진다는 말이었다.

수안은 가장 심한 달엔 3천이 넘는 회사가 부도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예측일 뿐입니다. 너무 깊이 생각하진 마십시오.”

“강운 경제 연구소에서 다시 예측 모델을 만들고 있다. 이미 한보가 쓰러졌어.”

수안은 경제 연구소에서 이번엔 제대로 된 자료를 만들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리고 수안의 상념이 자동차 산업으로 향했다.

몇 해 전 출범한 강운 자동차에서 곧 신차가 나온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었다.

“…아버지. 강운 자동차는 요즘 어떻습니까?”

“올해 첫차를 출시할 예정이다.”

본래 1998년 출시할 예정이었지만 부랴부랴 출시 일정을 앞당겼다.

위기가 되면 쉽게 지갑이 열리긴 힘들다. 고가인 차를 사는 일도 드물어진다. 그 상황이 오기 전에 첫차를 팔아야 했다.

“더 앞당기셔야 할 것 같네요.”

벌써 여기저기서 무너지는 회사들이 생겨나고 있다. 한보 그룹에 연결된 회사만 해도 수백 개가 넘는다.

“그래야지.”

“중소 협력 회사를 잘 챙겨 주십시오. 나중에 쓸모가 많을 겁니다. 기화 자동차도 매물로 올라올 테니까요.”

“이번 위기로 기화 그룹이 무너질까?”

삼디 그룹에서 지속해서 공작을 진행했지만 기화 그룹은 이를 너끈히 막아내고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가능성이지만 상당히 높습니다. 그리고 다른 완성차 업체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현과 강운 빼고 전부요!”

“…음. 그렇게만 된다면….”

“강운 자동차는 아버지가 계시니 무너지지 않겠죠. 남은 시장을 아버지와 대현 그리고 제가 나눠 먹을 겁니다. 그래서 자동차 협력사를 잘 챙겨 주셔야 합니다.”

“너까지? 너 자동차 시장에 진출할 생각이야?”

자동차에 거부 반응을 보이던 아들이 이젠 자동차에 진출한다는 말에 반색하는 강 회장이다.

“예. 저도 완성차 시장에 뛰어들겠습니다.”

“대현 정택주 회장이 호락호락하지 않아. 나도 강운 자동차 출범하면서 그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결국 일본계 자동차 회사와 기술 협력을 해야 했어.”

“…정 회장은 미리 손을 써 뒀습니다.”

“너!…. 으하하. 네가 그래서 일전에 정 회장을 만났구나!”

“예. 기화 자동차가 워크아웃에 들어가면 정 회장을 먼저 만나서 담판을 지을 겁니다.”

“신뢰가 있는 양반이지만, 이번에도 지킬지는 알 수 없겠구나.”

너무 먹이가 크다. 국내 자동차 시장을 완벽하게 장악할 기회였다. 그런 기회를 정택주 회장이 놓칠 리 없다고 생각했다.

“괜찮습니다. 정 회장에게 당하면 큰 가르침을 받았다고 여기겠습니다.”

아들이 가진 재산은 몇 푼 잃는다고 표나지 않는다.

“네가 당하면 내가 가만 안 놔둔다. 걱정하지 마.”

하지만 손해와 상관없다. 아들이 뭘 경험해 배우건 간에 정 회장에게 뒤통수를 맞는다면 참을 수 없었다.

수안은 아버지의 깊은 사랑에 가슴이 따뜻해졌다.

“정말 든든한 아군입니다. 하지만 저도 그냥 당하진 않겠습니다.”

강운 그룹 회장인 아버지가 있고, BE 인베스트먼트가 있고, 정권의 연줄도 탄탄하다.

질 수가 없는 게임이다.

“…강운 자동차에 뭐 해 줄 말은 없고?”

작은 조언이라도 있으면 바로 적용할 생각이다.

“만들어서 판다고 팔리던 시기는 갔습니다. 자동차는 숫자가 아닌 감성을 입어야 팔립니다. 자동차뿐 아니라 모든 제품이 마찬가지입니다.”

“디자인을 말하는 것이냐?”

“예. 디자인에 더 투자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미 나와 있는 모델과 경쟁하지 마세요.”

“그럼?”

“소나타와 그랜저가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대현 자동차에서 뭔가 준비하고 있구나!”

“예. 98년 하반기에 출시될 그랜저는 그냥 준대형이 아닙니다. 고급 준대형으로 나올 겁니다. 정 회장이 직접 밝힌 일이니, 착오는 없을 겁니다.”

정택주 회장은 그런 말을 해 준 적이 없다.

신뢰성 확보를 위해 정 회장을 들먹였을 뿐이다.

“고급 모델!”

“강운 자동차 모델은 나와 봐야 알겠지만, 내구성을 중심으로 안전하게 설계되었으리라 추측합니다.”

“강운 자동차에서 누가 보고했어?”

아들의 추측은 사실에 가까웠다. 수안은 질문을 무시하고 계속 얘기했다.

“내구성은 이미 산 사람이나 알 수 있습니다. 오래 타기 전엔 알 수 없죠. 이미 개발한 차량을 뒤집자는 말은 아닙니다. 강운 자동차에 남은 기회는 마케팅입니다. 감성적인 CF로 이목을 끌어보십시오. 특히 감성에 연비를 더해 중점적으로 광고하시면 위기 상황에 오히려 매출이 증가할 수도 있습니다.”

“연비! 그게 좋겠구나. 이번에 개발한 차량의 강점도 바로 그 부분이지.”

“그리고 건설교통부에 우리 사람을 만들어 놔야 합니다. 올해 말에 김대준이 당선되고 나면 인수위에 몇 명은 넣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확실하게 지원해서 건설교통부를 챙겨 놓겠다.”

국토와 사회 간접 자본의 관리를 맡고 계획, 개발, 주택, 도시, 건설, 교통에 관한 사무를 보는 건설교통부다. 타국에선 건설부와 교통부가 따로 있고, 내무부의 토목과 성격의 업무까지 모조리 이 건설교통부에서 진행한다. 담당 업무가 많고 다양해서 기업으로선 필수적으로 확보해야 할 부서였다.

“너도 이제 민국당 의원들을 만나 봐야지?”

“물론이죠. 미리 잔뜩 먹여 놔야 합니다.”

다음 대권이 누구에게 향할지 확실하다. 미리 약을 쳐 둬야 했다.

“으하하. 그 부분은 네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넌 얼굴마담이야.”

“네?”

“넌 네 존재만으로 충분히 영향력이 있어. 아직도 몰라?”

대한민국의 영웅, 육상의 황제 등. 수식어도 여럿이다.

육상에서 올림픽 3연패를 달성하고 마지막 올림픽에선 4관왕의 절대 왕좌를 차지한 강수안.

강수안과 함께하는 것만으로 최소 10% 이상의 표심이 움직일 수 있다는 조사 결과가 있었다. 이것도 최소한으로 예측한 부분이라 실제 영향력은 더 거대할 수도 있다는 평가다. 한 조사기관에서 연예인과 스포츠 스타, 정치인을 총망라해 조사한 호감도 순위에서 확고부동한 1위를 차지한 수안이다.

강운모 회장은 가용 비자금으로 선거 자금을 뒤에서 지원하고 수안은 앞에서 선거를 도우면 된다. 이현창과 있었던 사건으로 민국당에 큰 악재를 만들어줬지만, 다시 민국당과 함께하는 그림을 만들어 주면 이 또한 반전의 그림이다.

“그럼 저는 의원들과 안면만 익히면 되겠군요.”

“김대준 총재가 두 팔 벌려 환영할걸?”

수안이 노리는 사람은 따로 있었지만, 어찌 됐건 민국당 의원들과도 안면을 익혀 둬야 했다.

앞으로 거둬들일 기업과 금융 위기를 생각하면 미리 친분을 다져놓는 것이 좋다.

* * *

민국당 당사는 부산하게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기자들에게 사진 잘 찍어 달라고 해.”

“예. 의원님.”

“거기! 현수막 삐뚤어졌잖아! 왼쪽 더 올려!”

김대준 총재와 민국당 의원들은 오늘이 분기점이라고 생각했다.

“무너진 당 지지율을 회복하려면 오늘 기회를 잘 살려야 합니다.”

“저희도 잘 알고 있습니다.”

“강 선수는 왜 하필 이현창 의원과 친분을 다졌는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오늘 당에 방문한다는 걸 보면 지지하는 당은 우리가 아니겠습니까. 한신당 이현창 의원은 개인적 친분일 뿐입니다.”

밖에서 보좌관 한 명이 들어와 손님의 등장을 알렸다.

“강 선수 도착했습니다. 총재님.”

“어. 그래 나가지.”

수안은 마중 나온 김대준 총재와 악수했다.

파란만장한 정치 인생을 살았던 거인과의 만남이다.

95년 기존 정당에서 탈당하고 새롭게 민국당을 창당한 김대준이다. 이번 이현창의 북한 잠수함 사건으로 당 지지율이 주르륵 밀려났지만, 오늘 수안과의 만남을 기점으로 지지율은 다시 살아난다.

“내가 얼마나 강 선수를 보고 싶었는지 모를 겁니다.”

“저도 존경하는 총재님 뵐 날을 기다려 왔습니다.”

“하하하.”

둘은 악수한 채 웃으며 카메라를 응시했고,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가 펑펑 터졌다.

요식행위일 뿐이지만, 이 행위 자체가 주는 의미는 작지 않았다.

수안은 자리한 다른 의원들과도 악수하며 안면을 익혔다.

그리고 김대준 총재를 필두로 주요 의원들이 자리한 회의실에 수안도 앉아 있었다.

“강 선수는 정말 대단한 업적을 남겼지요. 우리 민국당도 강 선수를 본받아 대한민국에 큰 업적을 남기고 싶습니다.”

“총재님이시라면 당연히 가능한 일입니다.”

수안의 눈은 주변을 둘러보다 한 사람을 응시했다.

내년 종로 보궐 선거에 국회의원으로 당선될 김대준의 후계자였다. 김대준이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동안 장관까지 오를 사람이었다.

“이렇게 대단한 분들이 함께하고 계시니 불가능이 있겠습니까.”

“강 선수가 응원하니 더 힘을 내야겠군요.”

지금 민국당은 상황이 좋지 않았다. 정권의 실책으로 한보 사태가 촉발됐지만, 작년 OECD 가입과 국민소득 1만 불 달성, 경제 활황을 이유로 실책을 만회한 한신당의 상승세가 무서웠다.

“저도 힘닿는 데까지 민국당을 응원하겠습니다.”

“하하하.”

시종일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만남을 이어 갔다. 그리고 기자들과 의원들이 자리를 피하고 김대준 총재와 수안만이 남은 자리가 만들어졌다. 수안의 요청에 의한 자리였다.

“걱정이 많으시지요?”

“지금보다 더한 상황도 많이 겪었어. 이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지.”

둘의 나이 차가 상당하다. 수안이 하대해 달라고 했기에 김대준 총재도 편히 말하고 있었다.

“이번 대선 가능성은 크겠지요? 총재님이 아니면 누가 되겠습니까.”

“그야…. 자네가 이현창을 너무 띄워 놨어. 이 사람아. 하하하.”

웃으며 말하지만, 속으론 웃을 수 없었다. 정말 위험할 정도로 이현창의 인기가 뛰어올랐기 때문이다. 차기 대권에 성큼 다가간 이현창의 입지가 김대준을 위협할 수준이다.

“걱정 놓으셔도 됩니다.”

“표심은 알 수가 없는 법이야. 누구도 장담하지 못해.”

큰 회사를 경영하는 수안이지만, 아직 젊은 나이였다. 믿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하하. 저는 장담할 수 있으니 어쩐답니까.”

“응?”

김대준이 안심할 말을 꺼내야 할 때였다.

“이현창 의원과 제 친분은 이미 알고 계실 겁니다.”

“그야….”

“제가 이현창 의원에게 말해 두겠습니다. 이번 대선은 포기하라고 말입니다.”

“……!”

대선을 포기시킨다는 말에 눈을 크게 뜬 김대준 총재였지만, 수안은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 대선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허! 그게 무슨 소리야?”

무려 대통령을 뽑는 선거다. 대한민국 정치인 누구라도 잡고 싶은 권력이었다.

아무리 친분이 있다지만, 대선 포기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이현창 의원은 꽉 막힌 사람이 아닙니다. 국무총리를 지냈지만, 국회의원으로는 초선입니다. 초선의원이 대선까지 직행하는 것은 무리 아니겠습니까.”

“이봐. 강 선수. 자네가 정치인을 몰라서 하는 소리야.”

“이 의원에게 따로 연락드리라고 하겠습니다.”

“…….”

믿을 수 없는 소리였지만, 다음 날 김대준 총재는 정말 믿을 수 없는 전화를 받았다.

-김 총재님. 한신당 이현창입니다.

“아! 이 의원.”

-제 후배의 말을 믿지 않는다고 하셔서 이렇게 전화를 드립니다.

“후배? 강 선수 말인가?”

-언론에 알려진 제 후배가 또 있겠습니까?

“설마….”

-강 후배가 강권하여 이번 대선은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

말도 안 되는 일이 결국 벌어지고 말았다. 대선에 오르는 일이다. 한 사람이 반대한다고 해서 포기할 수 있는 권좌가 아니었다.

-강 후배가 이번 대선은 양보하라고 극구 말리더군요.

“허!”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일을 결국 현실로 만들고야 말았다.

-저는 국회의원의 한 사람으로서 정치 경험을 쌓겠습니다. 이만하면 만족하십니까?

수안과 얘기된 대로 김대준 총재에게 말하는 이현창이다.

이 일로 민국당에서 수안의 입지가 수직 상승한다고 했다. 어차피 대한민국에 위기가 도래하면 대선에 나가서도 쉽지 않을 선거였다. 미리 포기하면 얻을 것이 있었다.

수안에겐 훗날 연임을 위한 포석이라고 들었다.

“…강 선수를 그렇게 보낼 일이 아니었군.”

-제 후배를 쉽게 보지 마십시오. 운동만 잘하는 친구가 아닙니다.

“공부도 잘한다고 들었지. 머리가 비상한 친구였어.”

-머리도 좋지만, 심지가 굳은 사람입니다. 한신당을 지원해 달라고 했는데 어림도 없었습니다.

“후후. 덕분에 큰 걱정을 덜었어. 내가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군.”

-여야가 합치하면 못 할 일이 없습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우리가 뛰어야 합니다.

“내 이 의원을 꼭 기억해 두지.”

-감사합니다. 총재님.

전화를 마친 김대준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푸흡. 하하하하.”

여당의 잠룡이 스스로 등용을 포기했다.

하늘이 자신을 봉황의 자리로 안내하고 있었다.

“…하늘이 아니라 강 선수가 마련한 자리야.”

선거 자금이나 지지율을 끌어올려 준 지원보다 더 거대한 지원이었다.

어찌 보답해야 할지 난감할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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