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등한 대우
“난 언제 들어오라고 하려고 안 불러요? 수안이 나가는 거 보고 들어왔네.”
염동철은 심각한 표정의 강운모 회장을 보고 일이 단단히 틀어졌다 생각했다.
“수안이가 싫다고 합니까? 저 혼자 다 갖겠다고 해요?”
“조용히 하세요. 염 사장님.”
사적인 만남이 아니라 공적인 자리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최학주 실장이다.
“예. 최 전무님.”
염동철도 분위기를 파악하고 자세를 바로했다.
조용한 가운데 생각을 마친 강운모 회장이 최 실장을 찾았다.
“최 실장.”
“예. 회장님.”
“미국 지사에 연락해서 BE 인베스트먼트에 대해 알려진 정보를 다 알아봐.”
“예. 확실한 정보를 수집해 보겠습니다.”
“BE 인베스트먼트?”
염동철의 의문에 강운모 회장이 답했다.
“수안이가 해외에 투자 회사를 차렸다는데, 오늘에야 들었어. 자식 놈 회사 현황도 모르고 있어서 쓰나. 그렇다고 아들에게 묻기 민망하잖아.”
“아.”
“염 사장은 일본에 아직 라인 남아 있나?”
“연락하는 몇 명은 있습니다.”
“일본에도 BE 인베스트먼트가 있다고 하니 일본 정보는 염 사장이 알아봐.”
“……!”
강운 홀딩스 외에 일을 맡겨 주지 않던 강운모 회장이 오랜만에 외부 업무를 맡긴 것이다.
“감사합니다!”
허리를 접은 염동철은 아직 BE 인베스트먼트의 실체를 알지 못했다.
* * *
별장에서 나온 수안은 아직도 집에 가지 않고 옆자리에 남은 배영성에게 말했다.
“배 이사는 집에 좀 늦어도 되나?”
“술이 부족하셨습니까?”
“아버지가 계시는데 무슨 술이야. 입에만 대고 말았지.”
“가시죠. 별장만 안전한 건 아닙니다.”
배영성이 예약한 곳은 상당한 보안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출입구부터 VIP룸과 분리되어 있어서 수안이 들어가는 동안 다른 사람은 마주칠 수도 없는 구조다.
“용케 이런 곳을 찾아뒀어?”
“요즘 사람들이 극성스러워서 미리 알아봤습니다.”
룸으로 적당한 술과 안주가 들어왔고, 배영성과 편하게 술을 들이켰다.
“배 이사.”
“예. 부사장님.”
“김현성 사장 건은 배 이사 선택에 맡기려고 해.”
“제가요?”
“나보다 배 이사가 사람 보는 눈은 좋지 않나 싶어서 말이야.”
“그럼…. 저는 두고 보겠습니다.”
“아직 갱생의 여지는 있다?”
“예. 능력도 출중하고 신의도 있는 사람입니다. 충성심이 과해서 이렇게 됐지만, 이번에 선을 알았으니 앞으론 지킬 수 있을 겁니다.”
아버지에게 염동철 사장의 얘기를 듣지도 못한 배영성은 최학주 실장이 했다던 말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푸훗. 배 이사는 보면 볼수록 최학주 실장 스타일이야.”
“칭찬인지 욕인지 모호합니다. 하하.”
수안은 별장에서 있었던 일을 알렸다.
“아까 별장에 들어가서 아버지에게 전부 말했어.”
“네?”
“BE 인베스트먼트. 내가 세웠다고 말하고 지금 얼마나 큰 자산을 운용하는 중인지 설명했다고.”
“…잠깐 사이에 큰일 치르고 나오셨습니다.”
배영성은 수안이 이 부분을 많이 걱정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놀라긴 하셨지만, 별말씀은 안 하시더라. 건드리지 않을 테니 알아서 잘하라고….”
“외부에 우환이 온다 했으니 생길지 모를 내홍은 미리 해결해 둬야 했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수안은 오늘로 찜찜한 기분을 날려 버리고 금융 위기에만 집중할 생각이다.
“오늘 아버지께 알렸으니 배 이사는 정식으로 펜타그램 대표 이사 달아. 이게 첫 번째 지시야.”
“…예. 감사합니다.”
“둘째. 지분도 내 앞으로 이전해 놓고 언제든 유상 증자나 지분 교환이 가능하도록 준비해. BE에서 지분 투자를 받는 형식으로 외화를 수급할 테니까.”
“예.”
내일부터는 당당하게 펜타그램으로 갈 수 있었다.
“셋째. 사람부터 뽑아. 전국 영업을 시작해야 하니까 말이야.”
앞으로 무너질 회사 중에 살려야 할 회사들이 있다. 물적 자산은 녹슬고 노후화되면 고치거나 다시 살 수 있다. 하지만 인적 자산은 한번 녹슬면 쉬이 전성기로 돌아오지 않는다. 수안은 짧은 위기를 넘어 그 이후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전국에 파견될 직원들이 필요했다. 문제가 생기기 전에 직접 발로 뛰며 확인한 정보라면 그 신뢰성이 일반적인 정보와 같을 수 없었다. 수안은 옥석을 가려내는 작업을 미리 시작하려는 것이다.
“업무 지시는 여기까지만. 내가 또 술맛 떨어지게 했어.”
“아닙니다.”
“그간 김 사장 일로 혼자 속 썩였지?”
“하하….”
“그 기분은 이제 털어 버리자. 김 사장은 배 이사 말대로 다시 기회를 줘 볼게.”
“예. 털어내겠습니다. 앞으론 일이 생기기 전에 파악하겠습니다.”
“늦게 알아서 더 속상했지?”
“…그렇죠. 제가 하는 일이 그건데, 너무 늦게 파악했습니다.”
두런두런 둘의 대화와 함께 술병의 술은 줄어갔다. 마음속에 있던 먹구름도 술과 함께 사라지고 있었다.
* * *
해가 바뀌고 97년. 한보 그룹 문제가 여지없이 뉴스를 장식했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1월 23일 MBS 뉴스데스크입니다. 극심한 자금난에 시달리던 한보 철강이 오늘 끝내 부도로 쓰러졌습니다. 한보 철강이 그동안 얻어 쓴 빚은 4조가 넘습니다. 사회적인 그리고 경제적인 여파가 엄청날 것으로 우려되고 있습니다. 이 소식은 엄경호 기자가 전하겠습니다.
-한보 철강은 오늘 보람 은행 삼성동 지점에 돌아온 15억짜리 어음을 결제하지 못해서 결국 부도를 냈습니다. 이를 신호로 제일, 동남, 동화 은행 등. 전국 19개 채권 은행들이 그동안 부도 처리를 보류하고 있던 수백억 원의 어음도 동시에 부도 처리됐습니다. 재계 자산 순위 14위, 4조 2천억 원의 부채를 안고 있던 사상 최대 규모의 부실기업이 허무하게 무너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오늘 오전까지만 해도 한보에 대한 처리는 은행 관리를 거친 뒤 제3자 인수로 모아 갔습니다. 그러나 정태준 총회장이 끝내 경영권을 고집하면서 극단적인 부도 처리로 방침이 급선회하고 말았습니다. 한보의 부도는 당초 2조 7천억 원으로 계획했던 당진 공장 건설비가 5조 7천억 원으로 두 배 이상 늘어나면서 비롯됐습니다. 이 과정에서 제일 은행 등, 4개 은행이 사업 계획에 정밀한 조사도 없이 3조 5천억 원이나 되는 자금을 선뜻 지원한 배경이 무엇인지에 대해 강한 의혹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자기 돈도 없이 은행 빚만으로 더구나 전문적인 기술 축적도 없는 기업에 돈을 들이붓다시피 한 결과가 결국 우리 경제 전체에 주름살만 지우게 됐습니다. MBS 뉴스 엄경호입니다.
수안은 당시에 알 수 없었던 한보 철강 부도의 이면을 아버지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
“정택주 회장이 노리고 터트린 거야.”
“예?”
“뉴스에서 하는 소리 들었어? 사업 계획도 없이 은행이 돈을 내줬고 이에 의문을 제기하는 언론이 있네? 의문이 향하는 곳이 정부란 말이야. 이게 가능한 소리야? 언론이 의혹만으로 정부가 의심된다고 보도할 놈들인가?”
“아!”
누군가의 지시로 작성된 기사라는 뜻이다.
“수조 원이 투입된 당진 신공장과 기존 철강 공장. 은행 관리가 끝나면 3자 인수가 시작될 거야. 그럼 누가 먹을까?”
“그야. 대현이 먹겠죠.”
“정택주 회장은 당진 제철소 부정 대출 뒤에 숨어 있는 김일삼 대통령을 노리면서 회사의 이득까지 생각한 거야.”
“음….”
기업인의 보복이다. 지금까지 당한 것을 갚으려고 기어코 일을 벌인 것이다.
“그렇다고 한보 그룹 사태를 촉발한 것 같지는 않구나. 언론에 기름을 부은 정도야.”
“대현은 부정 대출의 배후가 김일삼의 차남인 걸 어떻게 알았죠?”
“그럼 넌 어찌 알고?”
“…….”
본인이야 미래에서 다 보고 왔으니 알고 있다.
“거래 은행을 통해서 알아봤어? 국내 기업이면 얼마든지 은행장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일이지. 물론 우리 같은 대기업에게 해당하는 말이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김일삼이 창구로 차남을 사용했어?”
“…한신당 핵심이 바로 그 사람이잖습니까. 척하면 척이죠.”
다행히 알아보는 일이 어렵지 않은 모양이다. 앞으로 말을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계속 아버지와 한보 사태에 관해서 대화를 이어 갔다.
“그래도 이제 시류가 바뀌는 게 느껴지시죠?”
“…심각해. 특히 해외가 걱정인데, 이건 네가 더 잘 알겠구나.”
일전에 동남아 위기에 편승하고 있다고 말한 아들이다.
“예. 소로스도 가능성이 크다는 걸 알고 공격을 준비하고 있지요. 실제 공격은 몇 개월 더 있어야 할 겁니다. 외부에 유출되는 정보를 강력하게 제한하고 있습니다. 사냥감이 먼저 알아채면 큰일이니까요.”
미국 월가를 주름잡는 헤지 펀드들과 외환 딜러 조직들이 있었다.
국제 금융 시장에서는 조지 소로스 군단의 사령관 격인 스탠리 드러큰밀러, 줄리안 로버트슨, 레온 쿠퍼맨 등의 유명 헤지 펀드 매니저들이 선두에 섰고, JP 모건, 씨티 은행, 골드만삭스 등 월가 금융 기관의 외환 딜러 조직이 가세했다.
외환 딜러들은 연초부터 태국 통화가 평가절하될 때가 됐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판단의 근거는 심플하다. 태국 경제가 둔중하게 움직였고,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고 있었다. 은행이 과도한 부동산 담보로 위험한 상태였으며, 해외 경상 수지 적자 폭이 증가 추세를 타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월가 증권 회사인 골드만삭스가 태국을 개발도상국 25개 중 맨 마지막 순위로 평가 절하했다. 경제 전망이 나쁘다는 이유였다.
이미 작년 말부터 선진국 은행들 사이에서 태국이 해외 부채를 갚을 능력이 있는지 걱정하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었다.
“…소로스의 첫 공격은 실패합니다.”
“실패?”
“예. 태국이 강경하게 투기 자본과의 싸움에 임할 테니까요. 하지만 두 번째 공격은 막아낼 수 없습니다.”
5월의 첫 공격은 실패로 끝나지만, 7월 2일 타일랜드 은행은 고정 환율제를 포기하고 월가의 투기 자본에 무릎을 꿇는다.
고정 환율제를 해제하고 변동 환율제를 도입하기로 한 것은 중앙 은행이 달러를 풀어 시장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환율 상승, 즉 바트화 폭락을 의미했다.
지금 BE와 소로스 퀀텀 펀드가 발을 맞추고 있지만, 첫 공격에 의견 충돌이 예정되어 있었다.
소로스는 공격을 강행하자는 태도일 것이고, 수안의 지시를 받은 이방효 사장은 BE의 이름에 실패를 덧입힐 수 없다며 발을 빼게 될 것이다.
이후 상황은 역사와 같이 흘러갈 것이다. 소로스는 타이거 펀드와 함께 태국에서 손해를 입어야 할 것이고 이후 이방효가 내민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시나리오까지 모두 세워 둔 수안에게 손해는 어림도 없었다.
“아들 회사라고 해서 나도 좀 알아봤다. 해외에 돈 되는 곳엔 모두 손을 뻗쳐 뒀더구나.”
유전이 끝이 아니었다. 가스전에 철광이나 희토류 광산 등에 투자하고 있었고, 특히 미국에서는 시가 총액 상위 기업의 지분 일부를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BE 인베스트먼트는 국내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 해외에서는 불패의 투자자로 이름 높았다.
“부끄럽습니다. 제가 알려 준 것도 있지만, 지사장들 능력이 좋았습니다. 지사장들이 뽑은 전문가들도 하나같이 인재들입니다. 제가 인복이 있는 모양입니다.”
“일전에 네가 말한 사장처럼 머리 위로 올라가려는 놈은 없고?”
거대한 자금을 움직이는 실체는 바로 그 사장들이기 때문에 BE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걱정이 앞섰다.
“자주 한국으로 들어오라고 합니다. 얼굴 보면서 보고를 듣고 있습니다.”
“…BE 인베스트먼트의 두 사장을?”
미국 BE 이방효 CEO와 일본 BE 차진호 CEO.
수안에겐 편한 사람들이지만, 외부에선 함부로 만날 수도 없는 사람이다.
“두 사장도 그렇고, 가끔 다른 직원도 하나씩 데려오라고 합니다. 진짜 회사의 오너가 누군지 알게 해 줘야죠.”
“그렇지! 아주 잘한 일이다. 나도 사장들만 볼 일이 아니었어. 가끔 임원이 아닌 직원들도 만나야겠구나.”
“그리고 펜타그램이라는 이름의 회사 하나를 만들어 뒀습니다. 더블 스타와 미국과 일본 BE의 자금을 연결할 법인입니다.”
“하여튼 네 녀석 준비성은….”
“아버지를 닮지 않았겠습니까. 모든 것은 완벽하게 준비되어야 합니다. 그래도 성공을 가늠할 수 없는 법입니다.”
“맞아. 완벽하게 준비해야 운에 기댈 수도 있는 법이다. 아무 준비도 없이 운을 기다리면 절대로 그 기회를 잡을 수 없지. 아주 훌륭해.”
수안은 아버지의 대화 방식이 많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었다.
예전엔 한참 어린아이를 보듯이 가르치는 태도를 보였지만, 이젠 서로 같은 눈높이를 가진 상대로 대우하고 계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