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러나는 실체
‘내가 뭘 놓치고 있었을까.’
강운모 회장이 궁금해하는 회사의 실체는 바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제가 해외에 투자 회사를 설립, 운영하고 있습니다.”
수안의 입에서 진실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그 시작은 제가 중학교에 입학하고부터입니다.”
“…지금까지 완벽하게 감췄구나.”
‘그래서 아들이 최 실장의 감시에 민감했어.’
도청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한 아들의 태도를 단숨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회사에서 따로 강운 그룹 지분을 사 모으고 있었습니다.”
“……!!”
“동생들에게 지분을 주셔도 제가 아쉽지 않은 이유입니다.”
“큭. …크하하하. 이 녀석이 잘도 의뭉을 떨었어!”
수안은 아버지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아 다행이라 여겼다.
“회사 규모가 얼마나 되느냐?”
하지만 여기서부터 문제다.
“강운 그룹 지분을 모을 정도라면 규모가 상당히 크겠어. 허허. 지분을 매입하느라 투자 회사 운용 자금을 다 털었겠구나.”
별로 쓰지 않았다. 말 그대로 새 발의 피만큼 소모된 운용 자금이다.
“많은 지분을 취득하진 않았습니다. 제가 위기를 입에 달고 살지 않았습니까. 조만간 낮은 가액으로 매집할 기회가 올 텐데 가격이 높은 지금은 대량으로 보유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대량? 하하하. 아무리 네가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해도 전자 시총만 무려 8조 원이다. 이 거대한 기업의 주가가 내려가 봐야 얼마나 내려가겠느냐. 꿈이 가상하구나.”
“…….”
아버지의 헛된 추측을 끝내야 할 때였다.
“제가 일본에 세운 투자 회사는….”
수안의 입이 열리고 감춰온 비밀의 문도 열린다.
“총 운용 자산 230억.”
“엔화일 테니 한화로 치면 2천억인가? 적당하구나.”
“…달러입니다.”
“응?”
순간 230억 달러라는 돈의 규모가 정확히 인지되지 않았다.
“230억 달러입니다. 800원대인 현재 환율로 계산하면 18조 4천억.”
드르륵! 쿵.
강운모 회장이 의자를 넘어트리며 벌떡 일어났다.
“……!”
“그리고 미국에 세운 투자 회사는….”
“뭐, 뭐? 또?”
이것만으로 놀라기 충분했는데 아들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770억 달러. 현재 환율로 61조 6천억입니다. 둘을 더하면 80조….”
텁.
강운모 회장은 몸을 휘청하며 탁자를 잡았다.
수안이 벌떡 일어나서 아버지를 부축했다.
“아버지!”
“…괜찮다. 괜찮아.”
어느 집 자식은 돈을 물 쓰듯 해서 목덜미를 잡게 한다는데, 자기 아들은 돈을 너무 많이 벌어 와서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80조. 대한민국 한해 국가 예산을 한참 뛰어넘는 금액이다.
의자가 넘어지는 소리에 최학주 실장이 뛰어 들어왔다.
“회장님!”
최학주가 넘어진 의자를 다시 일으키고 아버지를 자리에 앉혔다.
“무슨 일이십니까?”
“음….”
아버지의 입이 열리지 않자 최학주의 얼굴이 수안을 향해 돌아섰다.
“도련님.”
수안은 최학주가 아니라 아버지에게 재차 사과했다.
“숨겨서 죄송합니다. 아버지.”
“숨긴 이유는?”
“해외에서 얻어야 할 것이 많았습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을 투명하게 밝히면 제 뜻대로 운용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해 숨겨왔습니다.”
“허!”
오래전 수안의 교육을 맡았던 김일곤 병원장의 말이 뇌리에 떠올랐다.
[저는 앞으로 한국에서 세계적인 기업이 탄생한다 해도 놀라지 않을 겁니다.]
그의 말은 100% 진실이었다. 아들은 이미 강운 그룹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 훨훨 날아오르고 있었다.
“위기가 오면 주워 담을 기업과 자산이 넘쳐납니다.”
“너는 그때 사용하겠다는 말이구나. 다가오는 위기는 그대로 놔두고, 말이지.”
총 1천억 달러. 80조 원의 돈이면 금융 위기 따위는 바람 앞의 촛불처럼 날려 버릴 수 있었다.
그런데도 항상 위기를 강조해 온 아들이라면 이를 활용하겠다는 마음을 먹었다는 뜻이다.
“예. 위기가 오지 않으면 국내 기업의 체질이 개선되지 않습니다. 떨어져 나갈 기업은 떨어져 나가야죠. 그래야 세계 시장에서 한국이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우린 떨어진 보석만 주워 담아도 주머니가 가득할 겁니다.”
“내가 너를 한참 얕잡아 봤다. 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고등 교육을 마친 너라면 다르게 판단해야 했어.”
“아직 부족한 점이 너무 많습니다. 오늘도 아버지께 가르침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래. 게다가 넌 항상 배운다는 마음가짐을 가졌지.”
아들은 자신의 가르침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더 성장할 수 있었다.
강운모 회장은 아들의 미래를 염려할 필요가 없음을 오늘 제대로 깨달았다.
“그리고….”
“또 뭐?”
이제 저 입에서 나올 말이 심히 두려워진다.
“제 회사는 이미 위기에 베팅하고 있습니다. 동아시아에 닥칠 위기의 일부 지분은 제가 갖고 있다고 보셔도 됩니다. 동아시아국가의 위기를 공략할 헤지 펀드에 편승해 이익을 취하려 합니다.”
“…….”
‘주도적으로 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으니 위기가 온다는 확신이 있을 수밖에.’
“그리고 여기서 얻은 이익은 국내에서 금융 위기로 받을 충격을 완화하게 될 겁니다.”
“위기는 위기대로 겪게 놔두지만, 부작용을 최소화하겠다는 뜻이구나.”
“예. 아버지.”
“큭. 크하하하하.”
강운모 회장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아들은 경영자가 갖춰야 할 소양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그런 아들을 지금까지 평가해 온 자신이 너무 우스웠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묻자.”
“예.”
“넌 돈의 쓰임까지 모두 생각해 두었다고 했다. 내가 네 회사를 마음대로 하려 했으면 어쩌려고 오늘 실토했지? 그리고 넌 날 속인 것에 마음의 짐을 갖고 있었다. 왜? 난 그리 미안할 일도 아닌 것 같거든.”
무릎까지 꿇어가며 얘기할 일이 아니었다.
당당하게 가슴을 내밀고 얘기했어도 될 일이다.
과거 자신이 아들만큼 성공했으면 아버지 앞에서 고개를 빳빳하게 들 것 같았다.
“둘 다 같은 이유입니다. 아들을 낳고 자식에서 부모가 되었습니다. 예전엔 걱정이 앞서서 말하지 못했지만, 부모의 마음을 깨닫고 나서 말할 수 있었습니다. 제 자식이 원한다면 들어줄 것 같았습니다.”
커가는 정원이를 하루하루 지켜보며 자식을 향한 부모의 마음을 깨닫게 된 수안이다.
“그리고 아버지를 속였으니 당연히 무릎을 꿇어야지요. 저도 제 자식이 저를 속이지 않았으면 좋겠거든요. 아들이라면 아버지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도 너무나 죄송한 마음입니다.”
“…넌 너무 일찍 철이 들었어.”
“자식을 낳고서야 세상을 제대로 보기 시작했을 뿐입니다.”
“네 회사는 네 뜻대로 해라. 앞으로 손대지 않겠다.”
“어차피 그 회사도 나중엔 강운 그룹의 하나가 될 겁니다. 아주 조금 늦게 편입되겠지만요.”
“그래. 네가 강운 그룹 사람이니 그 회사도 강운 그룹이지. 하하하.”
“…….”
곁에 선 최학주 실장은 더블 스타에 관한 내용이 아님을 알 수 있었지만, 그 이상을 추측할 수 없었다.
“수진이랑 수현이는 어디까지 챙겨 주려고 했어?”
“…….”
차마 계열사를 떼어 주려 했다고 말하긴 민망하다. 강운 그룹의 총수는 여전히 눈앞의 아버지였다.
“괜찮아. 얘기해 봐.”
“…수진이는 신사업 분야 중에서 시작할 뷰티 편집샵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녀석이 원하기도 했고요.”
“신사업이니 내 허락도 받기 쉽다고 생각했겠구나.”
“…예. 이것까지 불허하시진 않을 거로 생각했습니다.”
“그럼 수현이는?”
“수현이는 처음에 백화점에 눈독을 들이다가 호텔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뉴월드 호텔이 어려우면 상황을 봐가면서 해외 호텔 그룹을 하나 인수해서 넘길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수현이에게 말하지 않고 혼자서 생각해 온 계획이다.
“아예 동생들 관짝도 짜 주지 그러냐?”
“…….”
관짝을 짜 주라는 말은 죽을 때까지 챙길 거냐는 의미였다.
결국 적당히 하라는 소리다.
“네가 그러지 않아도 아비인 내가 알아서 한다. 넌 이제 동생들에게 신경 쓰지 말고 너 할 일이나 해. 내 자식을 왜 네가 챙겨?”
“제가 주제넘게 나서긴 했습니다. 알겠습니다.”
“주제넘은 줄을 안다니 하나 더 말해 봐. 수용이는 아무것도 없어?”
“수용이는 성향을 종잡을 수 없어서 공부만 시키고 있습니다.”
“공부?”
“디스플레이와 배터리 쪽을 공부하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안 되면 나중에 통신사라도 하나 사 주려고 했습니다. 위기에 여러 기업이 매물로 나올 테니 그중에 고르라고 해도 되고요.”
아들은 막내에게 줄 기업까지 골라두고 있었다.
‘허! 혼자서 형제들까지 다 먹여 살릴 기세야.’
“누가 들으면 내가 아니라 네가 아버지라고 하겠구나. 집안 가장이 너였어?”
“……죄송합니다.”
“오지랖은 지금까지 네가 해 온 일로 충분해. 올해 자식까지 낳은 놈이 못난 동생들을 챙기느라 기운을 다 뺐어.”
25살 나이에 강운 그룹을 넘어서 버린 아들이다. 이 능력을 오롯이 기업에 쏟아부었다면 지금보다 더 큰 성공을 이룰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앞으로는 더 발목을 잡지 못하도록 해야 했다.
“다시 말하지만, 동생들은 아비인 내가 알아서 챙겨 주마. 그러니 넌 앞으로 신경 쓰지 마.”
“예.”
강운모 회장은 고분고분 대답하는 아들을 보며 생각했다.
‘매번 이렇게 갑작스럽게 부를 일이 아니야. 큰사람임을 알았으니 큰사람 대접을 해 줘야지.’
“동철이가 너 보고 싶다고 해서 불렀다만, 괜히 불렀다 싶구나.”
아버지의 축객령이라 생각한 수안이다.
“…예. 저는 일어나겠습니다. 편히 드십시오.”
“조만간에 회사에서 볼 일이 있을 거다. 미리 일정을 통보하고 상의하마. 아! 네가 해외에 세운 투자 회사 이름이 뭐랬지?”
“Bald Eagle(흰머리 수리). BE 인베스트먼트라고 합니다.”
“어억!”
최학주는 그제야 지금까지 거론된 회사의 실체를 알 수 있었다. 무수히 많이 들어 본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그 회사를 도련님이 세우셨다고요?! 도련님 소유란 말입니까?”
미국에는 금융 시장을 주도하는 투자 회사들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골드만삭스와 모건 스탠리, 메릴린치 그리고… Bald Eagle이라 불리는 BE 인베스트먼트가 있었다. BE 인베스트먼트는 신흥 투자 회사였지만, 공격적인 투자를 집행하면서도 단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아 투자의 귀재들이 세운 회사라는 평을 듣고 있었다. 일본 BE 인베스트먼트도 다르지 않았다. 올 초에 있었던 대지진에서 유일하게 막대한 수익을 낸 투자 회사였다.
“학주에겐 내가 설명하지. 가 봐라.”
“예. 나중에 자세히 보고 드리겠습니다.”
수안이 별장에서 나가자 최학주는 강운모 회장을 향해 궁금증 가득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얼른 실토하라는 뜻이다.
“녀석이 중학교 들어가고 해외에 투자 회사를 세웠다네.”
“중학교요?”
당시엔 감시고 뭐고 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나 참. 운동하느라 바쁜 줄로만 알았는데 엉뚱한 짓을 하고 있었어.”
“BE 인베스트먼트라면 규모가 상당히 큰 걸로 알고 있습니다.”
“미국과 일본을 합하면 운용 자산이 1천억 달러라고 하더군.”
“……!!!”
“허! 나도 모르게 정신이 아찔해졌어.”
최학주의 입에선 더 아찔한 소리가 나오고 있다.
“…투자 회사 운용 자산이 1천억이라는 뜻은 고정 자산을 제외했다는 뜻입니다.”
“뭐?”
수안이 일부러 숨긴 것은 아니다. 해외 유전 개발에 들어간 돈이나 희토류 광산에 투자한 돈은 운용할 수 없으니 제외한 것이다.
“BE 인베스트먼트가 유전 개발에 투자한 돈이 막대하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투자한 광구에선 항상 원유가 솟구친다고 합니다.”
“…원유까지 확보했어?”
“BE 산하의 탐사 회사는 원유 채굴권을 확보하고 탐사를 시작해 곧장 원유를 찾아냅니다. 그리고 이후 유전은 적당한 가격에 팔아 버립니다. 그래서 해외 메이저 석유 회사와 관계가 돈독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거기다 미국 정부와의 긴밀한 관계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한국 정부보다 미국 정부에 미치는 영향력이 클 겁니다. BE 인베스트먼트 자체가 거대한 공룡입니다.”
“…….”
아들의 영향력은 자산 규모보다 더 거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