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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단 회의 (102/304)

사장단 회의

강운 그룹 사장단 회의가 소집되었다.

강운모 회장의 전격적인 지시로 소집된 사장단 회의였다.

“건설 발표해.”

강운 건설 사장이 일어나 동아시아 금융 위기에 대비한 사업 방침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강운 건설은 해외, 특히 태국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를 포함한 동아시아 건설 현장에서 발을 빼고 있습니다. 동아시아에 금융 위기가 도래해 자금이 경색되어도 영향력은 미비합니다. 중동지역에 시작한 사업들은 여전히 원활하게 진행 중이며, 대금 지불에도 문제가 없을 것으로 판단합니다. 다만 국내 건설 수주에 있어서 위험성이 남아 있으나 신규 사업 규모를 줄이고 위험을 분산하고 있으며….”

“흠.”

이미 수안에게 지시받은 강운 건설 대표는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 차근차근 준비해 두었다. 강운모 회장의 지시에 당당하게 발표할 수 있는 이유였다. 강운 건설만 준비된 것은 아니다. 다음 발표를 진행하는 전자도 마찬가지였다.

“강운 전자는 단기 차입금을 장기 차입으로 변경하고 고정 금리를 적용받았습니다. 이에 97년까지 돌아오는 단기 차입 상환 위험은 없으며, 해외에서 유입되는 달러를 환전하지 않고 보유 중입니다. 향후 달러 가치 상승 시에 거액의 환차익이 예상됩니다. 또한 달러 부족 사태 발생 시 환차익 이상의 효과도 기대할 수 있습니다.”

“허.”

“강운 증권은 국내 주식 시장에 많은 지분을 보유하고 있으나 해외에 투자한 지분과 비교하여 미비한 수준으로 국내 주식의 경우 위기 발생 전에 순차적으로 줄여나갈 수 있습니다. 특히 해외 옵션 거래를 통해 동아시아 위기 상황 발생 시 많은 이득이 예상됩니다. 또한 위기 발생으로 주가가 하락세로 전환하면 저가에 주요 기업의 지분율을 증가시킬 계획을 추진하고 있으며….”

“…….”

강운모 회장은 하나같이 철저하게 대비하고 들어온 사장단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람들이 정말…. 내가 왜 사장단 회의를 소집했는지 모르겠어. 하하.”

회의 석상에서 오랜만에 미소를 보이는 강운모 회장이다.

사장단은 입이 근질거렸지만, 차마 강수안이라는 이름을 꺼낼 수 없었다.

“내년 말까지 지금처럼 안정을 최우선으로 하는 경영을 유지해. 상황 변화에 따라 수시로 사장단 회의가 소집될 테니 그렇게 알도록.”

““예. 회장님!””

강 회장은 사장단을 해산하며 말했다.

“홀딩스와 생명 보험, 전자와 무역은 남아.”

핵심 순환출자 고리인 네 개 회사를 남긴 강운모 회장이다.

“금융 위기가 도래하면 전환 사채 발행에 유리한가?”

“회사에 불리합니다. 너무 낮은 가액에 발행해야 할 테니까요. 위기 상황이라면 대주주 지분과 순환 출자 구조까지 위험할 수 있습니다. 전환 사채는 발행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강운 무역 사장의 단호한 답이었다.

“수안이가 전환 사채를 인수한다고 가정하면 어떻겠냐 이 말이야.”

“……!”

강운 전자 김 사장이 얼른 답했다.

“만약 금융 위기가 도래하고 기업과 국가의 자금 경색이 현실화한다면 주가는 바닥을 모르고 내려갑니다. 전환 사채를 발행할 적기입니다! 시세보다 더 낮은 가액으로 발행해도 최소한의 세금만 납부할 수 있고 전환 사채 지분은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습니다. 역시 회장님의 혜안은 저희가 따를 수가 없습니다.”

적절한 아부까지 섞인 긍정의 답이다.

“그렇단 말이지….”

강운 생명 보험 사장도 말을 보탰다.

“저희는 관련 작업을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신호만 주시면 저희 네 개 회사가 전부 전환 사채를 발행하겠습니다. 자금 경색을 벗어나기 위한 회사의 고육책으로 포장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 삼디 전자에서 한 헛짓거리보다 100배는 나은 시나리오입니다.”

“이 회장이 이번에 헛발질을 제대로 했어.”

아들이 말리지 않았으면 자신도 같은 꼴을 보일 뻔했다.

강운 무역 사장도 얼른 자신의 의견을 뒤집었다.

“도련님이 받으신다면 확실히 좋은 조건으로 가능합니다. 이제 때만 기다리시면 될 것 같습니다. 여기저기 회사들이 조금씩 어려워지는 것 같습니다. 낌새가 이상합니다.”

“이상해? 벌써?”

“한보 그룹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한보 정태준 회장이 구속됐다고 했잖나.”

“2세 경영 때문에 생긴 잡음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 과합니다. 아무래도 다시 일어서기 힘들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번 정부의 과도한 달러 반출로 원화 가치가 너무 높아졌습니다. 수출에 지장이 많습니다. 강운 무역도 부담스러울 정도입니다.”

강운모 회장은 솜털이 곤두서고 있었다.

‘위기! 확실한 위기 신호야.’

“내년 1월부터 눈에 보일 거라고 하더니.”

“연구소에서 리포트를 받으셨습니까?”

강운 그룹 경제 연구소에서 금융 위기가 도래할 가능성을 희박한 확률로 예상했었다. 아들이 내놓은 답이 정답이었다.

“됐고. 다들 돌아가. 그리고 관련 작업은 언제든 처리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어. 때가 되면 전환 사채 발행을 지시하지. 그전까지 입 다물고 있고.”

““예. 회장님.””

다 돌아가고 강운 홀딩스 염 사장이 회의실에 남았다.

“회장님. 수안이만 챙기십니까?”

“그럼?”

“그래도 같은 자식 아닙니까. 수안이 마음이 편치 않을 겁니다. 일부라도 챙기십시오.”

순환 출자의 고리인 네 개 회사는 강 회장의 최측근이 맡고 있었다. 그중에 강운 홀딩스가 가장 영향력 있는 회사였고, 강운 홀딩스 염동철 사장은 강 회장에게 직언까지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수안이 강운 계열사 사장단과 만날 때에도 염동철 사장만큼은 감히 만날 수 없었다. 최학주에 버금가는 아버지의 최측근이었기 때문이다.

“걔들은 나중에 따로 챙기면 돼.”

“이러다가 형제가 반목합니다. 적당한 수준이면 수안이가 달랠 수 있지만, 아예 없으면 맏이가 어떤 말을 해도 소용없습니다.”

“음….”

“고민하지 마시고 다만 1%라도 배정해 주십시오. 자식들에겐 수안이가 너희 안 주면 안 받는다고 해서 이거라도 챙겨 줬다 하시고요. 미움은 아버지가 받고 자식들은 서로 잘 지내게 해 주시면 됩니다. 그다음은 수안이가 알아서 챙길 겁니다. 수안이가 그 정도 깜냥은 있는 아이 아닙니까.”

“…안 주면 큰일 날까?”

“벌써 잊으셨습니까? 한송 그룹 강 회장님이 전 회장님에게 버림받고 어떻게 반응하셨는지?”

“그래. 그랬지.”

“아직도 앙금이 남아계실 줄로 압니다. 자식들 일부러 갈라놓지는 마십시오. 몇 프로 떼어 준다고 강운 그룹이 쪼개지는 거 아닙니다.”

“귀에 딱지 앉겠어. 그만해, 알아들었으니까. 네가 그런 소릴 하니까 더 이상한 거 알지?”

“…죄송합니다. 회장님.”

“됐고. 오랜만에 술이나 한잔하자. 시간 있지?”

오늘 화도 내지 않고 부드럽게 사장단 회의가 끝났다. 사장단은 자신의 지시를 완벽하게 수행하고 있었고, 전환 사채를 미룬 것도 신의 한 수가 되었다. 기분 좋아서 한잔하고 싶은 마음이다.

“시간 없습니다. 혼자 드십시오.”

“에이. 집에 가 봤자 마누라 궁둥이는 구경도 못 할 거면서.”

“피차일반 아닙니까? 요즘 서긴 하세요?”

지켜야 할 선을 훌쩍 뛰어넘는 발언이지만, 강 회장은 웃는 얼굴로 넘겼다.

“어허. 헛소리 적당히 하고. 가자. 동철아.”

“아이참. 딱 한 잔만 빨고 가겠습니다.”

“한 잔은 개뿔. 그러고서 또 혼자 다 먹으려고.”

“자꾸 제가 먹을 술을 다 드시니까 그러죠.”

둘은 티격태격하며 회의실을 벗어났다. 염동철은 최학주와 더불어 강 회장이 마음을 열고 있는 사람이었다. 사석에선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였다.

염동철은 강 회장이 재킷을 가지러 간 사이 최학주 곁에 남았다.

“학주야, 너도 오늘 같이 가자.”

“…회사에선 제발 직함으로 부르시란 말입니다. 염 사장님.”

“아차. 쏘리. 최 전무님. 오늘 회장님이 오랜만에 소집하셨으니 빼지 말고 가시죠.”

“선택지 없습니까?”

“당연히 있지요. 지금 간다. 조금 이따 간다. 둘 중 하나만 고르세요.”

“…지금 갑니다. 제가 안 가면 술자리 준비는 누가 해 주겠습니까?”

“크크. 최 전무가 화끈할 때는 화끈하지요.”

“장소는 아시죠?”

“회장님 모시고 갈 곳이 거기밖에 더 있습니까.”

강 회장이 술을 마시러 갈 곳은 한정되어 있었다.

먼저 비밀이 보장되어야 했고, 외부인의 출입이 없어야 했다.

그리고 술과 음식이 필요했다.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하려면 별도의 장소가 필요했다.

강운모 회장과 염동철 사장이 탄 검은색 세단이 도로를 미끄러져 달리고 있었다.

가는 곳은 서울 근방에 마련된 비밀 별장이 있었다.

사실 대단하다고 할 수는 없는 곳이다. 대기업 대부분이 이런 장소를 마련해 놓고 있었다.

외부 접대에 사용되기도 했고, 임원진이 단합하는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곳은 접대가 아니라 강 회장이 가끔 편하게 술을 마시기 위해 마련된 외딴 별장이었다.

강운모 회장과 염동철 사장이 도착한 별장엔 이미 최 실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최 실장. 오늘 메뉴는 뭐야?”

강 회장의 질문에 최학주는 요리와 술을 주르륵 읊었다.

“안주는 참치로 준비했습니다. 술은 쥬온다이 사케로 마련해 놨습니다.”

안에는 거대한 참치 한 마리가 누워 있었고, 뉴월드 호텔 일식 코스 주방장이 곁에서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있다. 여기다 최고급 사케까지 준비한 걸 보면 잠깐 사이에 최학주가 얼마나 바쁘게 움직였는지 알 수 있었다.

“최 전무는 참치가 먹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하하하.”

“우리 애들도 참치를 좋아하지.”

염동철 사장의 말에 살짝 눈치를 준 최학주가 말했다.

“따로 포장해 두겠습니다.”

“오늘은 계급장 떼고 편히 먹자고.”

강 회장이 계급장을 떼자고 하자마자 최학주가 염동철을 향해 삿대질했다.

“야. 염동철이 너!”

최학주와 염동철은 동갑이었다. 직급에서 최학주가 낮은 것처럼 보이지만, 본사 핵심인 전략기획팀 전무이사는 전 사장단을 통제할 수 있는 막강한 위치다. 계열사 사장보다 한 끗발 위에 있다는 뜻이다.

“흐흐흐.”

염동철은 웃기만 했고, 최학주는 강 회장을 향해 상상하지도 못할 호칭을 했다.

“형님. 저거 또 기어올라요.”

“푸흐. 동철이 매력이잖아. 아무리 밟아도 다시 일어서는 잡초의 표상이지.”

형님이라는 호칭에도 개의치 않는 걸 보면 평소에도 자주 불러왔음을 알 수 있었다.

“주방장. 여기 제대로 내와 봐.”

“예.”

주방장의 칼질에 참치가 분해되기 시작했다. 거대한 칼은 점점 작은 칼로 바뀌었고 나중엔 정갈하게 줄을 맞춘 부위별 참치회를 접시에 올려 선보였다.

“형님 한잔 받으시고.”

염동철이 강운모 회장의 잔을 채우고 나서 최학주를 쳐다봤다.

“동생도 한잔해야지?”

“이틀 차이라니까. 무슨 동생이야?”

“어허. 이틀이면 밥이 몇 그릇인데.”

“내가 너보다 밥도 많이 먹어!”

“이놈들은 맨날 이 얘기로 시끄러워. 학주야 잔이나 받아라.”

“예.”

최학주는 염동철에게 잔을 받고 얼른 병을 들어 염동철의 잔을 채워줬다. 말을 티격태격해도 사회에서 몇 안 되는 친구였다.

셋의 잔이 채워지고 위로 들렸다.

“첫 잔만 먹고 나머진 알아서들 먹자. 강운을 위하여!”

““위하여!””

강운모 회장의 직장 생활도 낭만이 있었다.

* * *

수안은 연말 시상식과 TV 프로그램, 인터뷰까지 참석하며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회사에 돌아왔다. 회사에 돌아와 집무실 소파에 앉으니 그제야 쉬는 기분이었다. 집에 가면 아들 정원이를 볼 수 있어서 좋았지만 그만큼 피곤했다. 오히려 배영성과 함께 있는 이곳이 잠시 쉬기에 좋았다.

“푸하.”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생보단, 시간을 낭비한 기분이야. BEST 건으로 신경 쓸 일이 많은데 말이지. 앞으론 김 사장도 BEST 업무를 분담해야겠어.”

배영성은 이제 말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김현성이 너무 깊이 관여하게 둘 수는 없었다.

“부사장님.”

“왜 목소리 깔아? 평소대로 하지.”

배영성은 품에서 사직서를 꺼냈다.

“워워! 나 안 받는다. 도로 집어넣어. 나 아무것도 못 봤어.”

수안이 손사래를 치며 거부하자 배영성이 얼른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 것이 아닙니다. 김현성 사장에게 받았습니다.”

“…뭐?”

수안이 손을 내리고 정색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일전에 약간 문제가 있었습니다. 제가 김 사장을 감찰하다가 비위를 발견했습니다. 보고가 많이 늦었습니다. 도련님 태어나기 전이기도 했고, 그 이후엔 올림픽만 끝나고 말씀드린다는 걸….”

“정원이가 태어나기 전이면….”

수안은 당시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다 당시의 사건을 기억해 냈다.

김현성 사장과 관련된 비위라면 그 일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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