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릉 (99/304)

강릉

수현이 오기 전에 오늘 돌아오는 길에 나눴던 정 사장과의 대화를 복기했다.

수안은 강운 패션 박 사장과 만나고 차 안에서 뉴월드 호텔 정 사장과 따로 통화했었다.

“호텔 내에서 기류가 그렇게 흐른다는 말씀이죠?”

-예. 딱히 강 실장님이 라인을 만들려고 하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주변에서 알아서 챙기다 보니 이런 기류가 생겨난 것 같습니다. 임원들이 강 실장을 관리팀으로 보내 달라고 의견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강 실장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런 것 같은데, 인사팀에서부터 이러고 있으니 솔직히 난감합니다.

정진환 사장도 배영성과 통화로 김현성 사장과의 수작질이 들통났음을 알고 있다. 아직 수안에게까지 알려진 것은 아니지만, 수현에게 더는 손댈 수 없었다. 덕분에 라인이 형성되고 있어도 손을 놓고 있었다.

이후 전화로 자세한 내용을 파악한 수안은 강운 호텔에 갈 필요가 없음을 깨닫고,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수현이 잘못했다고 할 수 없는 일이다. 수현이 아버지의 딸인 이상 필연적인 일이었다.

똑똑.

“들어와.”

“오빠?”

수현이 방긋 웃으며 서재로 들어왔다.

“요즘 바쁘지?”

“그래도 클리닝 벗어나니까 좀 살겠어.”

올 초에 옮긴 클리닝 부서에서 벗어나 이젠 식음 팀으로 가서 일하는 수현이다.

“넌 여전히 백화점이 좋지?”

본래 호텔과 백화점 둘 다 욕심을 냈던 수현이다. 수안이 사촌 지훈을 통해 뉴월드로 옮겨 달라고 해서 뉴월드 호텔에 잠시 머물고 있을 뿐이다. 야심 차게 준비한 사업 계획도 다 틀어져 버린 상태라 미련 남을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김현성 사장은 수현이 호텔에서 자리 잡아 호텔의 계열 분리를 원한다고 생각했지만 착각이다. 수현은 처음부터 호텔을 거쳐 가는 직장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수안도 마찬가지였다. 호텔은 수현의 업무 능력을 보여 주는 장소였을 뿐이다.

그래서 정진환 사장이 모든 호텔 업무를 시킨다고 했을 때 잠시 의문을 가졌었다.

뉴월드 유통과 계열 분리가 끝난 시점이라 이제는 지훈을 통하지 않고도 쉽게 옮길 수 있었다. 뉴월드 백화점으로 자리를 옮기면 자발적으로 수현을 따르던 직원들도 떨어져 나가리라 생각했다.

“아니. 이젠 호텔이 좋아.”

“…….”

사람의 일은 항상 변수가 생기기 마련이다.

백화점을 욕심내던 녀석이 호텔에 맛을 먼저 봐 버렸다.

“호텔이 백화점보다 매력적이야. 백화점을 운영하는 것도 나름 재미있겠지만, 호텔만큼은 아닐 것 같아. 바쁘지만, 바쁜 만큼 보람 있어.”

처음엔 뉴월드 호텔에서 잠시 회사 생활을 겪어 보고 본래 노리던 뉴월드 백화점으로 이동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호텔의 밑바닥을 경험하면서 점점 호텔의 매력에 빠져들어 버렸다. 이제 백화점은 머리에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호텔이다.

“진짜 호텔 일이 좋은가 봐?”

“밑바닥부터 하라는 정 사장님 말씀이 맞았어. 다른 모든 부서를 더 경험하고 싶어. 그래야 진짜 호텔리어가 될 수 있어. 아직 난 신입 사원이나 다름없으니까.”

‘확실히 수진이완 달라. 그릇이 큰 녀석이야.’

청춘 영화 주인공으로 어울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열망에 가득한 표정이다.

“하지만 호텔 내에서 생기는 알력 싸움은 어떻게 해결할 거야?”

“아…. 음.”

수현은 난감했다.

수안에게 들켜 난감한 것이 아니라 회사 내에서의 상황 자체가 난감했다.

“너도 알고 있었지?”

“내가 원하진 않았는데….”

수현이 지금 원하는 것은 전문 호텔리어로 성장하는 것이었다.

소속된 임원들의 생각은 달랐다. 언젠가 호텔 경영자의 자리에 오를 그녀라고 생각했다.

그룹 총수의 딸이 곁에 있으니 한 번이라도 더 얼굴을 비추지 못해 야단이었다. 정진환 사장이야 이미 전부터 수안을 만나고 있었으니 수현에게 아양을 떨지 않았지만, 수안과 사장의 관계를 모르는 다른 임원들은 수현이야말로 황금 동아줄로 보였다.

자신을 사장까지 올려줄 튼튼한 끈이 수현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중간에 내가 관여하면 해결할 수 있을 거야. 정 사장님과 깊이 면담하면 답이 나올 테니까.”

뉴월드 호텔 사장은 바로 정진환 사장이다. 사장이 힘을 발휘하기 시작하면 라인 자체가 덧없이 사라질 수도 있다.

“오.”

“하지만 이번엔 네가 스스로 해결하게 두고 싶어. 어때?”

첫째 여동생 수진의 경우 미덥지 못해 관여했지만, 수현은 스스로 잘 해낼 것 같았다.

그래서 일의 해결을 대신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내가 해결하라고?”

“이런 경험을 언제 해 보겠어? 호텔 업무만 경험일 것 같아? 사회생활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이 사내 정치야.”

“아, 알았어. 한번 해 볼게. 오빠.”

“잘 안 돼도 걱정하지 마. 회사 내에 문제가 커지면 내가 나서도 되고, 정 사장이 나서도 되니까. 그리고 아버지가 괜히 총수 자리에 있어? 아버지 나서면 게임 끝이다.”

“흐흐. 그렇지. 하지만 아버지가 뭐 하러 나서. 괜히 거기까지 불똥 안 튀게 조심할게.”

“나도 농담이야. 내가 너는 걱정이 별로 없어. 너라도 제대로라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언니 사고 쳤어?”

“아니.”

수현은 오빠의 말투와 표정만 보고도 무언가 일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수진 언니. 거기서 또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지금은 언니 일까지 신경 쓸 수 없다. 자기 앞가림도 바쁘다. 어떻게든 자신과 친해지겠다고 접근하는 임원들을 어떻게 떼어낼지 지금부터 고민해야 했다.

하지만 하루의 마무리는 제대로 해야 했다.

“나 조카 보고 올라가도 되지?”

퇴근하면 귀여운 조카 얼굴을 보는 것이 하루의 마무리였다.

“손 깨끗이 씻고 들어가.”

“알았음! 하루 이틀인가 뭐?”

수안이 아들 정원이를 예뻐하는 것만큼 수진이나 수현이도 하나뿐인 조카를 예뻐한다.

막내 수용이조차 정원이만 보면 예뻐서 어쩔 줄을 모른다.

올림픽에 다녀와 오래 못 본 만큼 아들과 더 오래 같이 있고 싶었지만, 집에 오면 정원이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데려가기 일쑤였다.

“쳇! 벌써 엄마가 선수 쳤어.”

방에서 허탈하게 나오는 수현이다. 수안이 서재에 들어간 사이 벌써 데려가 버린 것이다.

“안방으로 가서 보면 되지.”

“아빠가 나 들어가면 싫어해.”

“풋.”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손주 예뻐하는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아 하신다.

“뻔히 다 아는데 왜 그러시나 몰라.”

“품위 지킨다고 노력하시잖아.”

“이따 정원이 방으로 데려오면 문자 보내 줘. 바로 보러 내려올게. 하루 빼먹으면 귀여운 정원이 하루를 놓친다고.”

“알았다.”

* * *

아들 정원의 100일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수안은 강릉으로 향하고 있었다.

동해에서 외부 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 저녁에 일정을 잡은 부사장님도 대단하지만, 좋다고 오겠다는 이 의원도 대단합니다.”

배영성은 졸린 눈을 비비며 졸음을 쫓으려 애썼다.

“밤낚시 같이한 다음에 내일 일출 보기로 했다니까 그러네.”

“매일 해가 뜨는데 뭐 하러 거기까지 가서 일출을 봅니까?”

“밤엔 아무도 없잖아. 요즘 밖에 나가기 무서워.”

수안이 등장하기만 하면 사람들이 모여든다. 예전엔 그나마 점잖게 다가왔지만, 지금은 무섭게 쫓아온다. 경호원들로 감당이 힘들 지경이다. 좋다고 오는 사람들에게 심하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수안이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핑계도 알아서 생겨 주시니 나야 좋지.’

“그래서 적외선 망원경까지 챙겨가세요? 누가 다가오는지 보려고?”

“당연하지.”

오랜만에 운전을 맡은 장호가 도착지에 다 왔음을 알렸다.

“거의 다 왔습니다. 저기 차량 있네요.”

오늘은 9월 17일. 뉴스에 무장 공비 침투가 알려지기 하루 전이다.

북한 정찰조는 이미 국내에 침투해 군 비행장과 레이더 기지, 항만, 화력발전소를 정찰하고 촬영한 다음이다. 이들은 어제 접선하려다 실패하고 오늘 다시 잠수함으로 복귀하기 위해 해안가에 가까이 다가오다 좌초된다.

무장 공비 침투사건은 9월 18일로 알려졌지만, 실제 북한 잠수정이 출발한 것은 9월 14일이고 15일에 이미 도착해 정찰조를 투입했다. 16일 접선에 실패하고 17일 밤에 다시 시도한 것이다.

그리고 최초 신고자인 택시 기사에게 발견된 것은 다음 날인 18일 새벽이다.

택시 기사보다 군부대인 68사단에서 먼저 잠수함을 관측했지만, 보고해도 불신이 먼저였다. 덕분에 진위 확인에 많은 시간이 소모되었고, 초동조치가 늦어진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전직 국무총리이자 현 국회의원이 신고한다면 얘기가 다르지.’

수안은 이를 위해 부득불 인적이 드문 이곳에 밤낚시 핑계까지 대면서 온 것이다.

* * *

약속된 장소에서 내리자 이현창이 반갑게 수안을 맞이했다.

“하하. 어서 와.”

“제가 늦었나 봅니다.”

이현창은 악수한 손을 놓지 않고 수안에게 말했다.

“늦으면 어떤가. 우리 국민 영웅을 만날 수 있는데 말이야. 얼굴 보기 참 힘들어.”

“의원님.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1년도 더 지났어 이 사람아. 대선배를 이렇게 애태우기 있나?”

“죄송합니다. 선배님.”

수안과 만나지 못한 동안에도 신뢰는 쑥쑥 자라났다.

“하하하. 가세. 자네와 할 얘기가 태산이야.”

“지금까지 전화기 불나도록 통화한 건 다 어쩌시고요.”

“그건 그거고. 하하하.”

미리 봐둔 장소에 텐트를 치고 낚시 준비를 시작했다.

당연히 준비는 이현창의 보좌관과 배영성이 맡아서 한다.

그사이 수안과 이현창은 텐트 안에서 잠시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덕분에 미리 싹을 잘랐어.”

“아휴. 제가 말씀 안 드렸어도 선배님이 잘하셨을 겁니다.”

“아냐. 나 같으면 그놈들 영입하고 잘했다고 웃고 있었을걸?”

훗날 대권을 위협할 잠룡을 사전에 제거하라고 말한 수안이다.

실제로 이현창의 대권에 위협이 되는 인물들이었고, 덕분에 수안의 킹메이커 계획은 더욱 실제성을 띠게 되었다.

그리고 대신 단두대에 오를 후보도 물색하라고 했다. 이현창을 대신해 패배의 쓴잔을 들이켤 후보도 착착 준비되고 있었다.

“의원님. 준비 끝났습니다.”

보좌관의 말에 이현창이 고갯짓했다.

수안도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다.

인적없는 지방 바닷가는 고요했다. 이현창이 주변이 완전히 물린 참이고 수안도 배영성에게 각별하게 주의를 시켰다.

잠시 이현창과 떨어진 틈에 진실을 알린 수안이다.

.

.

.

“뭐, 뭐, 뭐라고요?!!”

“조용히 해. 간첩이 들을라.”

“흡!”

“외부에서 보이지 않게 보좌관이랑 잘 숨어 있어. 이현창 의원이 아니면 죽도 밥도 안 되는 일이니까 우리만 빠져나가자는 말은 하지도 말고. 이미 북한 잠수함이 근방에 와 있어.”

배영성은 손으로 입을 막고 고개만 끄덕였다.

“보좌관에게 담뱃불도 안 된다고 해. 차 안에서 조용히. 라디오도 틀지 마.”

고개만 끄덕이는 배영성에게 하나 더 말했다.

“트렁크에 보면 권총 한 자루 있어. 실탄은 6발 들었고.”

“……!!”

“유사시에 들고 싸워야 할 수도 있으니까 알고 있으라고.”

“이제 곧 아드님 100일입니다. 애 아빠가 무슨 배짱으로 여길 와요?”

“장병들이 또 죽게 놔둘 순 없잖아.”

죽을 생각으로 여기 오진 않았다. 산으로 숨어들어도 그 어떤 특수 부대원보다 빠르게 달려 도망칠 수 있는 수안이다.

“난 몰라요. 진짜 모른다고요!”

“뒤를 부탁해. 배 이사.”

“다음엔 제발 미리 얘기 좀 해요. 그래야 싸우기 전에 마음의 준비를 하죠.”

“총 들고 싸우려고? 총은 화장실 간 장호한테 가져다줘야지. 배 이사가 무슨 총이야.”

“그럼 전 뭐 들고 싸워요?”

“싸우긴. 잘 숨어 있어.”

* * *

수안은 낚싯대를 걸어 두고 의자에 앉았다. 곁엔 이현창이 의자에서 멀리 하늘을 보고 있었다.

“참 여유로워. 파도 소리도 좋고.”

“가끔 이렇게 쉬십시오. 의정 활동에 지쳐서 쉬고 싶으시면 이렇게 평온한 시간을 갖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게, 가끔 와 봐야겠어.”

수안은 가져온 적외선 망원경을 들어 잠수함이 좌초될 부분을 계속 살폈다.

이제 곧 북한 잠수정이 보일 시간이다.

수안은 몇 분 뒤에 어두운 바닷물에 어른거리는 형체를 볼 수 있었다. 그 형체는 점점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물에서 뜨는 바위가 없는 이상 정체는 확실했다.

“……!”

수안은 이현창을 휙 돌아봤다.

“의원님!”

“딱딱하게 의원님은 무슨. 선배라고 불러.”

“이것 좀 보십시오.”

“망원경?”

쌍안경이 아니라 단망경이지만, 적외선 망원경이다.

“제가 잘못 보지 않았다면, 잠수함이었습니다.”

“…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이현창은 수안이 주는 망원경을 받아 수안이 가리키는 방향을 살피기 시작했다.

“강 후배가 바위를 잘못 봤겠지…. 억!!!!”

“예전에 교육에서 봤던 기억이 납니다. 북한 상어급 잠수함입니다.”

잠수함은 아직 좌초된 상황이 아니었다. 이제 곧 좌초될 예정이다.

“어, 어.”

상황 판단이 느린 이현창에게 수안이 지시했다.

“전에 알고 계시던 사람 중에 군 장성은 없습니까? 직통으로 알리시면….”

“아! 기다려 봐.”

이현창은 품에서 전화를 꺼내 안테나가 터지는 것을 확인하고 바로 전화번호를 눌렀다.

“김도진 장관. 나 이현창이오.”

-다 늦은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내가 강릉에 낚시하러 왔다가 북한 잠수함을 봤어요. 지금 군의 해안 경계가 대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 그게 무슨 소립니까?

“내가 지금 북한 잠수함을 보고 있다니까 이 사람아! 어? 저거 정박? 아니면 좌초된 것 같은데? 좌초다! 좌초된 것 같아! 잠수함이 옆으로 가다 갑자기 멈췄어.”

계속 망원경에서 눈을 떼지 않던 이현창이 말했다.

“김 장관! 계속 그러고 있을 거요?”

-아, 아니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정신 안 차려? 국방부 장관이 지금 할 일이 뭔지를 생각해! 진돗개 하나 사태란 말이야 이 사람아!”

전직 국무총리를 역임했던 이현창은 국방부 장관과도 안면을 익히고 있었다.

이현창에 비하면 몇 살 아래였고, 국무총리직에 있으면서 가끔 마주칠 일이 있었다.

-위치! 위치를 말씀해 주십시오! 총리님.

여전히 이현창을 총리로 칭하는 국방부 장관이다.

“지금 강릉 안인진리 근방 해변에 북한 소형 잠수함이 좌초된 것으로 보인다. 아직 북한군은… 어라? 사람으로 보이는 셋이 해변에서 잠수함 방면을 보고 있다. 북한군으로 추정.”

적외선 망원경이 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실제 북한군을 발견했기에 이현창의 목소리도 절로 작아졌다.

“이미 일부 인원이 침투한 모양이다. 근방 군부대 즉각 출동 요망. 경찰이고 군이고 모조리 출동시켜.”

-육해공을 다 투입하겠습니다. 총리님은 그 자리에서 빠져나오십시오. 위험합니다.

“이 자리에 강수안 선수도 함께 있습니다. 조용히 빠져나갈 테니 김 장관님은 군부대와 경찰부터 빨리 출동시켜요.”

-강수안 선수와 함께 계셨습니까?

“지금 나랑 전화할 시간 있습니까? 빨리 안 움직입니까?”

뚝.

김도진 국방부 장관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전화를 끊은 것이다.

일반인이 경찰에 신고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위에서 밑으로 내려가는 명령이다.

밑에서 올라오는 보고체계를 거치지 않으니 우리 군도 대응 속도가 빨랐다.

이현창의 전화 후 15분이 흘렀을 때 가장 가까이 있던 68사단이 실탄으로 무장하고 도착했다. 그리고 근처 부대가 속속 도착했고, 동해상에는 함정이 최고 속도로 이동해 도착하고 있었다.

그 결과 북한 공작원과 승조원들은 잠수함에서 빠져나오지도 못하고 잡혔고, 외부 정찰조 3인도 완벽한 포위망에 막혀 2명이 사망하고 1명이 사로잡혔다.

예전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성과였다.

무엇보다 장병들이 아무도 죽지 않은 것이 칭찬할 일이다.

.

.

.

수안은 군부대에서 잠수함 좌초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정황을 설명하고 빠져나왔다.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을까 봐 멀리 가지 못하고 근처에서 대기했다.

사건 현장에서 벗어난 지금은 이현창과 함께 차로 이동하고 있었다.

얼떨떨한 얼굴의 이현창 의원에게 수안은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쏟아 냈다.

“의원님이 최초 신고자라는 것은 언론에 알리지 마세요. 군에도 따로 말씀해 두셔야 합니다. 제보자의 신변 보호가 필요했다고 하시면 되겠죠. 제가 있으니까요.”

나중엔 어차피 드러날 일이다. 이런 일은 남들의 입을 통해 알려지는 편이 효과가 좋다.

“이번 사건에 여당 국회의원인 이 의원님이 관계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 야당이나 국민이나 같은 생각을 하지 않겠습니까? 조작이라고 말입니다. 정부를 의심하는 사람이 하나둘 늘어갈 겁니다. 곧 언론에서도 관심을 두기 시작하겠죠.”

“…조작? 누가 감히 조작이라고 해? 북의 지령을 받은 간첩이 아닌 이상 가능한 생각이야?”

지금 두 눈으로 보고 온 사실이 있는데, 조작이라는 말은 가당치도 않았다.

“의원님이 입을 다물고, 정부에서 대응하지 않으면 야당의 공격은 수위를 더해 갈 겁니다. 언론까지 슬그머니 야당의 등에 올라타겠죠. 정부에게 진실을 밝히라고 떠들어 댈 겁니다.”

“일부러 판을 키우라는 말인가?”

가만히만 있어도 판은 알아서 커진다. 키우면 더 커질 수도 있었다.

“맞습니다. 그때 이 의원님이 표면으로 부상할 겁니다. 그럼 거창하게 기자 회견 한 번 하시면 됩니다.”

“처음엔 언론에 알리지 말라더니 기자 회견까지 하라고?”

“이게 정치의 계산법입니다. 앞으로 의원님께서도 익숙하게 사용하셔야 하고요.”

“…….”

자신이 정치인인데 외려 아들뻘인 수안에게 정치를 배우고 있었다.

“제 이름도 기자 회견에서 밝히십시오. 핵심은 이렇습니다.”

-국회의원과 친분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강수안 선수의 명예에 문제가 생길까 싶어 이번 강릉 잠수함 사건을 내가 신고했다는 사실을 언론에 알리지 않았다.

-평소 나는 강수안 선수를 무척 좋아하는 국민의 한 사람이었고, 연이 닿아 강 선수와 친밀하게 지낼 수 있었다.

-강 선수가 올림픽을 끝내고 돌아와 밤낚시를 제안했고, 아무도 없는 장소를 찾다가 강릉으로 약속 장소를 정했다.

-그곳에서 북한의 잠수함을 발견할 줄은 상상도 못 한 일이다.

-마침 내가 그 자리에 있었고, 잠시나마 국무총리를 역임하고 있었기에 국방부 장관과 연락할 수 있었다. 덕분에 늦지 않게 북한의 헛된 야욕을 분쇄할 수 있었다. 이것이 진실이다.

-야당과 언론의 어처구니없는 의심과 헛소리를 더는 참을 수 없어 이렇게 나섰다. 강수안 선수를 보호하기 위해 지금까지 입을 닫았지만, 강수안 선수가 제 어려움을 보고 자신의 이름을 알려도 좋다고 허락했다.

이번 북한 잠수함 사건으로 이현창은 군대에 다녀오지 않은 본인의 약점을 깨끗하게 지울 수 있었다.

“…전세 역전이로군.”

수안의 말에 상황이 선명하게 정리되었다.

“위기 상황에 만루 홈런을 칠 4번 타자의 등장이죠.”

한신당은 급부상할 것이고 야당과 언론은 앗 뜨거워 쪼그라들 것이다.

“자네는 방금 본 북한 잠수함 하나로 여기까지 계획한단 말인가?”

환갑을 넘은 본인은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기에 급급한데, 스물다섯 살 수안은 대단한 미래를 그려나가고 있었다.

“별거 아닙니다.”

북한 잠수함의 좌초는 예정된 미래였다. 오랜 시간 고민하고 나온 결론이다.

그리고 미래의 고차원 정치를 경험한 수안에게 요즘 정치는 오히려 낭만이 있었다.

“근처에 제 별장이 있으니 그리로 가겠습니다.”

동해 별장에 도착해서 물을 벌컥벌컥 마시며 남은 긴장을 푸는 이현창이다.

정신이 돌아오자 이렇게 도망치듯 벗어날 일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난 가 봐야 할 것 같아.”

“큰일 아닙니까. 이해합니다. 그리고 나눠야 할 대화는 다 나눴습니다. 괜히 여기까지 오셔서 의원님을 곤란하게 만든 것 같습니다.”

“덕분에 북한군의 침입을 막지 않았나.”

“그리 생각해 주시면 영광이고요.”

“그래도 하나는 꼭 물어보고 가야겠어.”

북한 잠수정의 등장으로 밤낚시를 하며 물어보려던 질문을 하지 못했다.

“예. 말씀하십시오. 의원님.”

“16대가 좋은가 17대가 좋은가.”

이 질문은 수안도 예상하고 있었다.

다른 의미론 이번 15대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확답이었다.

“16대에 출마하신다면 확률은 반반. 17대에 출마하신다면 확률은 100%입니다.”

“흐음….”

수안은 고민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고민하고 있었다.

‘사람 욕심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이때를 위해 준비한 말이 또 있다.

“저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배님. 5년이 좋으십니까? 아니면 10년이 좋으십니까?”

“…또 수수께끼 같은 질문이군.”

“선배님이 누리실 대통령 임기를 말씀드렸습니다.”

“뭐? 이봐 강 후배. 사법시험도 봤다는 사람이 대통령 임기도 모르나? 우리나라는 5년 단임제야.”

“16대 대통령의 임기는 5년입니다. 그리고 17대 대통령의 임기는 10년이 될 겁니다. 선배님의 임기 10년은 제가 만들어 드립니다.”

“……!!!!!”

헌법을 개정하겠다는 말이다.

“대한민국헌법 제10장 제128조 1항 헌법 개정은 국회 재적 의원 과반수 또는 대통령의 발의로 제안된다. 2항 대통령의 임기 연장 또는 중임 변경을 위한 헌법 개정은 그 헌법 개정 제안 당시의 대통령에 대하여는 효력이 없다. 16대에 바꾸면 적당하겠습니다.”

그것도 이현창이 대통령이 되기 전에.

“헌법 제70조 대통령의 임기는 5년으로 하며, 중임할 수 없다. 헌법을 개정하면 이렇게 바뀔 겁니다. 대통령의 임기는 5년으로 하며, 1회 한정으로 연임할 수 있다.”

“…누, 누가 해 주겠나?”

어떤 대통령이 다음 대통령을 위해 헌법을 개정할 것이며, 국회에서 허락은 어찌 받을 것인가. 거기다 마지막엔 국민 투표까지 필요한 헌법 개정이다.

“…그게 가능이나….”

“가능합니다. 저는 지금부터 김대준이 속한 당을 후원할 겁니다. 그리고 그 휘하의 정치인을 후원할 겁니다. 그사이에 헌법을 개정할 16대 대통령이 나옵니다. 선배님이 나가지 않으면 한신당이 아니라는 것이 확실하니까요. 한신당은 선배님 빼놓고 인물이 있어야 말이죠.”

잠룡은 모조리 제거될 것이다. 한신당은 이현창의 지배 아래 두고 감히 찍소리도 하지 못하게 만들어 놓으면 된다.

그리고 지금부터 수안은 대 놓고 김대준을 지원할 수 있었다. 이 지원은 훗날 헌법 개정을 위한 변명으로 삼을 수 있었다.

“…미치겠군.”

“선배님은 내년에 한신당을 휘어잡고 다른 정당을 흡수하십시오. 당의 규모를 키워 견고하게 이끌어 가시면 됩니다. 10년간 야당으로 살아야 하지만, 다음 10년은 선배님 세상이 옵니다. 헌법 개정 안에 반대표를 던질 의원이 있을까요?”

이현창은 10년이라는 말에 침이 꿀꺽 넘어갔다.

정권이 바뀌고 여당이 된 그들이 헌법 개정안을 발의하면 한신당은 못 이긴 척 받아 주면 된다는 뜻이다. 여당과 야당이 한마음이 되어 헌법을 개정하면 국민 투표까지 가도 가능성이 있었다.

“일전에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새 인물 영입과 국회의원 공천만 조심하시면 됩니다.”

“앞으로… 잘해 보세. 강 후배.”

수안은 이현창이 내민 손을 꽉 잡았다.

“예. 선배님. 감사합니다.”

“이제 진짜 가 봐야겠어.”

이현창은 손목의 시계를 보며 조급한 심정을 드러냈다. 당장 근처 부대로 가서 작전 상황을 확인해야 했다. 국방부 장관과도 다시 연락해서 자신이 이번 일의 중추로 들어가야 했다. 언론엔 나중에 알리더라도 실제로 뭔가를 했다는 흔적을 남겨야 했기 때문이다. 전화로 신고 한번 한 거로는 효과가 너무 약했다.

“제가 말이 너무 길었습니다.”

“이런 말이라면 얼마든지 길어도 된다네. 또 보세.”

“다음엔 아랫지방으로 잡아 보겠습니다.”

윗지방으로 왔더니 간첩선을 만나서 한 말이다.

“하하. 그렇게 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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