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 중 하나
수안은 강운 패션 로비에 도착해 박민후 사장과 임직원이 대기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수안은 곁에 선 배영성에게 조용히 경고했다.
“배 이사. 내가 앞으로 이런 꼴 못 보게 해. 직원들이 무슨 잘못이야?”
“죄송합니다. 박 사장이 로비로 내려온다고 했는데, 저렇게 다 끌고 올 줄은….”
배영성도 예상하지 못한 풍경이다.
평소 더블 스타에서도 이런 광경을 연출한 일이 없었다.
“어서 오십시오.”
“반갑습니다. 박 사장님.”
수안은 빙긋 웃으면서 박민후 사장의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불편함을 호소했다.
“이건 너무합니다. 제가 강운 그룹 회장도 아닌데요.”
“저도 이럴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한 여직원이 큼지막한 꽃다발을 들고 걸어왔다.
“이건….”
주는 꽃이라 받았지만, 이게 무슨 일인가 싶다.
“다른 사람들은 보고 싶어도 못 보지 않겠습니까. 이번 올림픽에서 육상 4개 종목을 제패하셨고, 게다가 3연속 올림픽 금메달입니다. 우리 직원 중에 부사장님 팬이 상당합니다. 저도 말릴 수가 있어야죠. 저 혼자만 강 부사장님을 독점할 거냐고 아우성이라….”
그때 모여든 직원들이 큰소리로 외쳤다.
““강수안 선수! 사랑합니다! 환영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하하.”
그제야 마음 놓고 웃을 수 있었다.
박 사장이 일부러 직원들을 데리고 나온 것이 아니었다. 모두 수안을 보기 위해 자발적으로 모여든 것이다.
수안은 배영성에게 사과부터 했다.
“배 이사. 미안.”
“…….”
배영성은 작은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수안은 환영해 주는 직원들에게 답례 인사를 전했다.
“환영 감사합니다. 앞으로 계열사에 자주 돌아다녀야겠습니다.”
모여든 직원들과 하나하나 악수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난다.
그리고 직원들 사이에 수진이 서 있었다.
“오빠.”
아직 수안이 뭘 알고 있는지 모르는 수진은 천진난만한 표정이다.
툭툭.
수안은 어색하게 웃으며 수진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조용히 귀에 대고 말했다.
“너 이따 집에서 보자….”
수진은 몸을 부르르 떨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입 모양으로만 ‘내가 뭘?’이라고 물었지만 수안은 냉정하게 몸을 돌렸다.
“박 사장님. 차 한잔합시다.”
“제 집무실로 가시죠.”
“전 커피로 주시죠. 설탕도 팍팍 넣고.”
이제 선수 생활은 끝이다. 마음껏 먹어도 상관없다.
“하하. 예. 달달하게 한 잔 내오라고 하겠습니다.”
수안은 비서가 내온 커피를 한 모금 먹고 내려놓은 다음 표정을 바꿨다.
“무슨 일입니까? 라인이라니.”
“그게….”
수안은 박민후 사장의 입을 통해 지난 1년간 강운 패션에서 있었던 일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초반 디자인실에서 영업부로 발령받은 수진은 영업맨과 잘 어울렸다고 한다. 서로 회식도 자주 하고 술도 마시며 친분을 다졌고, 영업부장이나 이사들과도 곧잘 만났다. 그리고 기류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장의 지시를 따라야 할 회사 핵심 인물 몇이 지시와 다른 일을 진행한 것이다.
“이 부장. 여기 매장은 일전에 마케팅 진행해서 살리기로 하지 않았나? 왜 갑자기 중단했지?”
“그게…. 강 실장님은 가능성이 없어 보이니 일찍 정리하자고….”
“강 실장? 강수진 실장?”
“예. 사장님.”
“이봐. 이 부장. 자네가 상급자야. 강 실장은 고작 과장급이잖아. 게다가 입사 1년도 안 된 직원의 의견을 믿을 수 있어?”
“너무 강하게 권하셔서…. 죄송합니다.”
그 일로 박 사장은 강 실장이 회사에서 진행한 일들을 찾아서 보고받기 시작했고, 이와 비슷한 일들이 자신 모르게 수면 아래에서 일어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향후 회사를 물려받는다고 말하는 회장의 딸 강수진. 자신의 앞날을 위해 수진을 선택한 것은 직원들에게 뭐라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를 이용해 자신의 영향력을 엉뚱하게 사용하고 불필요한 사내 정치로 변질되는 것은 막아야 했다.
하지만 배영성의 경고로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이상입니다.”
“수진이는 지금 어느 부서 소속입니까? 아까 보니 로비에 있던데요.”
“6개월 영업부 업무를 끝내고 지금은 CS 부서에 있습니다.”
“고객 상담?”
“예.”
“거기 있는데도 라인을 만들 수 있어요?”
“이미 디자인과 영업을 거쳤습니다. 한번 맺은 인연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
수안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그 고민은 수안의 커피가 바닥을 보이고서야 끝났다.
“부서 이동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런다고 이 문제가 해결될지….”
“이렇게 합시다….”
“…음. 거긴.”
“방법 있습니까? 지금은 이게 최선입니다.”
펜타그램으로 가는 일정은 내일로 미뤘다. 오늘은 수진의 일을 완벽하게 끝내야 했다.
이후 수안은 박민후 사장과 해결책을 논의하고 강운 패션 사옥을 나섰다.
* * *
수진은 집에 오자마자 오빠의 서재로 향했다.
“오빠.”
“앉아 봐.”
그사이 차분하게 감정을 가라앉힌 수안이다.
“어.”
“회사 일 힘들어?”
“아니. 이제 적응했어. 지금은 진짜 회사 생활 하는 것 같아.”
“…하나만 묻자.”
둘 다 의견을 들어 봐야 했다. 박 사장을 통해 내용을 확인했어도 이중 확인이 필요하다.
“사내에 네 라인 만들고 있어?”
“……!!”
놀라는 수진을 보니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내가 분명 동료로서 인정받으라고 했는데 말이야.”
“그, 그게….”
“말 더듬지 말고 얘기해. 우선은 들어 볼 테니까.”
속으로 화를 숨기는 오빠가 두렵지만, 수진은 차분히 라인에 관해서 설명했다.
“영업팀에서부터 시작이야. 처음 가는 부서에서 내가 뭘 알았겠어.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영업을 따라다녔어. 그리고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어떤 식으로 영업을 하는지 가장 먼저 배웠어. 실제 회사 일은 두 번째였고. 그렇게 회사 생활을 하다 보니….”
박 사장이 힘들고 어려운 일을 시킨다고 보냈던 영업이 문제였다.
영업은 평소 많은 사람을 만나 설득해야 하는 직업이다. 대리점에 가서는 회사의 어려움을 점주에게 납득 시키고, 회사에 와서는 점주가 죽게 생겼다고 뻥을 늘어놔야 한다. 둘 사이에 줄다리기가 일상인 영업은 평소에도 사람의 감정을 읽고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말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영업은 전 부서에 업무가 한 다리씩은 걸쳐 있다. 모든 부서와 긴밀하게 접촉하는 부서가 바로 영업이었다.
영업을 배우며 사내 정치를 익히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이미 영업부에는 영업이사 라인과 부장 라인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어느 줄을 고를지 선택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분기점이 발생했다. 라인 선택지를 지워 버릴 수진의 등장이 그것이다.
그룹 총수의 첫째 딸이 있는데, 라인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라인의 꼭대기에 있던 영업이사가 강수진에게 고개를 숙이고 들어왔고, 영업부장도 누구에게 잘 보여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영업부 라인이 모조리 수진에게 귀속된 것이다. 그리고 이미 지나쳐온 디자인실은 평소 쇼핑과 수다로 얼마든지 끌어들일 수 있었다. 이미 영업으로 단련된 수진이다. 어렵지 않았다.
이후 CS부서로 옮겼어도 수진에 줄을 대고 싶어 하는 직원들이 알아서 찾아오는 형국이었다.
“…….”
수안은 수진의 설명을 들으며 한심하다는 표정이었다.
“왜, 왜?”
“우리가 라인이 왜 필요하니?”
“그래야 회사에서 내 위치를 공고하게….”
“널 따르는 인물들이 일은 잘하든? 능력 있어? 남들 실적 빼앗아서 채우진 않고?”
“실적은 나쁘지 않아.”
‘어쩌다 그런 적도 있었지만….’
수안은 안 봐도 훤하게 그려졌다.
“회사 밖에 경쟁자와 싸워야 할 힘을 내부에서 쓰는 직원들이 잘도 열심히 하겠다.”
“그래도 회사 직원들이 날 따르잖아. 직원들 인정이 별거야? 나도 인정받고 있다고.”
지금 수진이 회사에서 인정받는 부분은 딱 하나다.
강운 그룹 회장의 딸 강수진.
수진이 회장의 딸임을 인정해 준 것이지 업무 능력을 인정해 준 것이 아니었다.
“너 쓰리 아웃이야.”
“뭐?”
“더는 못 봐주겠다.”
“오, 오빠.”
“부서 이동해. 내가 박 사장에게 말해 놨어.”
“히잉. 날 보고 또 어딜 가라고 그래.”
수안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수진에게 말했다.
“신 사업팀. 가서 잘해 봐.”
“……!!”
가고 싶었지만 갈 수 없었던 팀이다.
정영란 차장이 팀장으로 있었고, 같이 사업 계획을 구상한 핵심 인력이 팀원으로 존재했다.
“대신 앞으로 사내 정치는 완전히 손 떼고….”
“이잉. 오빠 너무 해. 나 완전 속았잖아.”
울다가 웃는 수진에게 상세한 사정을 설명했다.
“쓰리 아웃이라는 말은 거짓말이 아냐. 이제 강운 패션은 네가 마음대로 할 수 없어.”
“…어?”
“신사업에서 하나 분리하는 방향으로 가자. 처음부터 분리 법인으로 시작하고, 그 분야는 네가 맡는 걸로.”
“아.”
“신규 SPA 브랜드와 뷰티 편집샵 중에서 골라.”
박민후 사장과 협의를 거쳤다. 훗날 회장님께도 허락을 받아야 하지만 우선은 둘이서 협의를 진행했다. 향후 신규 사업 부문인 두 개의 사업을 별도 법인으로 신설하기로 했고, 이 중에 하나를 수진에게 맡기는 방향으로 하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다.
박민후 사장에게 나쁜 소식이 아니었다. 강운 패션 자체가 계열 분리로 떨어져 나가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었으니 신사업을 떼어 수진에게 안겨 주면 모두에게 좋은 일이다.
거기다 사업 계획 사건으로 자신의 목도 간당간당했는데, 이렇게 도움을 줘서 마음의 짐을 덜고 싶었다.
박 사장은 계속해서 강운 그룹에 적을 둘 수 있었고, 수진은 원하는 사업을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있었다. 박 사장은 쿨하게 오케이 했고 여기서 결정된 일을 지금 수진에게 들려 준 것이다.
“둘 다 선택하면 안 되겠지?”
“다 때려치워.”
수안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수진이 얼른 말했다.
“아, 알았다고. 둘 중에서 고를게.”
수진에겐 둘 다 너무 탐나는 사업이다. 신규 SPA 브랜드 사업은 자신이 디자인을 공부했으니 적성과 맞았고, 뷰티 편집샵은 향후 사업성이 좋았다. 두 사업이 지금 강운 패션보다 더 크게 성장할 것으로 자신하고 있었다.
“우우.”
수안은 고민에 빠진 수진에게 말했다.
“신 사업팀에 가기 전까지는 결정하고 박 사장님에게 알려 드려야 할 거야.”
“좀 더 고민해야겠어. 너무 어려워.”
“이번엔 아버지도 별말 없으실 거야. 기존 기업도 아니고 신사업으로 맨땅에서 시작한다는데 말릴 분은 아니잖아.”
정확하게 말하자면 맨땅은 아니다. 그룹에서 일부 자본금도 투여될 것이고 경력 직원들도 파견될 것이다. 하지만 기존 사업이 아니라는 건 맞았다. 아버지가 동생들에게 경영을 맡기지 않는다고 해도 이런 신사업까지 막을 분은 아니다. 수안 본인만 해도 대학교 1학년에 시작한다는 사업을 시원하게 허락하신 분이다.
“흣! 맞아. 그 사업에 성공하면 아빠도 내 능력을 알아보실 거야.”
아버지를 떠올리자 결정이 쉬워졌다.
‘성과. 성과가 중요해.’
“나 뷰티 편집샵으로 결정했어.”
“오오. 잘 골랐는데?”
거대한 규모로 성장하는 SPA 브랜드보단 적당하게 운영할 수 있는 뷰티 편집샵이 차라리 수진에게 어울린다는 뜻이었다.
훗날 대기업이 진출한 뷰티 편집샵이 한해 3천 6백억 매출을 기록하는 시기에 세계적으로 매장을 가진 SPA 브랜드는 한국에서 올리는 매출만 1조 3천억에 이른다.
전 세계 매출을 집계하면 3조 원이 넘고 영업 이익은 5천억이 넘는다. 뷰티 편집샵과 SPA 브랜드는 비교하기도 민망하다.
“결정했으면 나가서 수현이 들어왔나 보고 들어오라고 해.”
“…수현이도 뭐 잘못했어?”
“쓰읍.”
잔말 말고 나가라는 뜻이다.
“쳇. 오빠는 맨날 수현이만 예뻐해.”
“네가 더 예뻐. 예쁘니까 네가 실수해도 봐주잖아.”
“힛. 갈게 오빠. 오늘 고마워.”
수진이는 항상 예뻐해야 한다.
오빠가 아니면 누가 예쁘다고 할 것인가.
‘SPA를 고르라고 할 걸 그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