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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상 (97/304)

의인상

“수안아.”

“여. 우리의 영웅 봉준 형님.”

이봉준은 피나는 훈련으로 케냐 선수를 몇 초 차이로 따돌리고 금메달을 차지했다.

직전 올림픽 황형조 선수에 금메달에 이은 이봉준의 마라톤 금메달이다.

영웅이라 불러도 부족하지 않다.

“덕분에 해냈다.”

“에이. 형님이 열심히 하셨으니까 이룬 성과죠. 정말 대단했어요.”

조금이라도 훈련이 부족했으면 몇 초 차이로 놓쳤을 금메달이다.

수안은 이를 알고 있었기에 단거리 훈련을 하면서도 이봉준의 훈련 상황을 수시로 확인하며 이봉준의 실력 향상에 도움을 줬다.

이봉준은 임경남 감독이 아니라 수안이 오히려 더 오래 자신을 채찍질했음을 알고 있다.

이봉준은 이를 말함이었지만, 수안의 말에 피식 웃으며 어깨를 두드렸다.

“한국에 가면 인터뷰에서 꼭 네 얘길 할 거야.”

“어차피 전 이제 은퇴합니다. 금메달의 영광은 형이 혼자서 다 가져요. 안 그래도 시끄러울 텐데 형님까지 보태지 마시고요.”

수안은 손을 흔들고 내려갔다.

숙소 아래에는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한국 선수단을 향한 관심과 수안을 향한 관심이다.

수안이 등장하자 카메라 플래시가 은하수처럼 빛난다.

퍼버벙. 펑. 펑. 펑.

‘이런 장관을 또 볼 수 있을까.’

수안은 이미 할 말을 다 했지만, 기다린 기자들의 노고를 생각해 몇 가지 질문을 더 받았다.

“정말 은퇴가 확실합니까?”

“번복은 없습니다. 이번 올림픽이 제 선수 생활의 종지부입니다.”

“결혼으로 인한 결정입니까?”

“결혼은 은퇴와 관련 없습니다. 선수 생활은 충분히 했고, 영광스러운 자리에 올랐습니다. 박수를 받으며 은퇴하고 싶습니다. 지금이 가장 좋은 때인 것 같습니다.”

“이번 올림픽에서 육상 4개 종목 제패라는 대기록을 세웠습니다. 강 선수에 이를 육상 스프린터가 나올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

수안은 볼트를 떠올렸다.

100m 결승 경기를 끝내고 볼트와 따로 만나 얘기를 나눴다.

본격적으로 육상을 시작했다고 한다.

볼트도 자신처럼 올림픽에 나가고 싶단다.

“저를 넘어설 선수가 이미 육상을 시작했습니다.”

수안의 말에 기자들의 셔터 소리가 빨라졌다.

“한국인입니까?”

“나이는 몇 살입니까?”

“한국인이 아닙니다. 잠시 만난 사이지만, 그 선수의 잠재력은 대단했습니다. 저는 그 선수가 올림픽에 오를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기까지만 하죠. 그 선수에 대한 정보는 더 유출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그 선수가 아니라도 누구든 날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아직 시도하지 않았을 뿐이죠.”

기자들의 질문이 이어졌지만, 수안은 더는 입을 열지 않고 빠져나갔다.

* * *

같은 일로 세 번째 청와대 방문이다.

선수단 중에 처음인 사람들은 바짝 긴장하기도 했지만, 수안은 세 번째 방문인 만큼 여유로운 모습이다.

여기서 수안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 있다.

“훈장 수여가 있겠습니다. 수상자는 단상으로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이미 몇 차례 세계 선수권 대회를 우승했고, 여기에 88년 서울 올림픽에서 두 개의 금메달 획득으로 서훈 요건을 충족하고 체육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 훈장인 청룡장을 받은 수안이다.

같은 훈장을 중복으로 수여할 수는 없으니 자신과는 무관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도 올라가야 했다.

수안은 김일삼 대통령이 직접 패용해 주는 국민 훈장 무궁화장을 가슴에 달았다.

국민 훈장 무궁화장은 타 훈장의 1등급 훈격보다 관례상 높은 영예로 취급한다.

“강 선수는 국가의 기대를 완벽히 충족시켜 줬어. 내 이럴 줄 알았제.”

김일삼 대통령이 훈장을 달아 준 뒤 가까이 와서 어깨를 토닥이며 한 말이다.

“감사합니다. 각하.”

“2개를 따라고 보냈더마 4개를 따왔으니 뭐라도 챙겨 줘야지 싶었제.”

훈장이고 뭐고 앞으론 권력에 휘둘리는 일이 없었으면 싶다.

수안은 대통령 곁에 앉아 오찬을 들어야 했다.

“다음 올림픽은 힘들겠어. 강 선수가 없으니 말이야.”

“실력 있는 체육인이 많습니다. 앞으로 유망한 선수들을 발굴하고 성장시키는 데 일조하겠습니다.”

“그래야제.”

“선수단이 미국에 간 사이 국내엔 비가 많이 왔다고 들었습니다. 마음고생이 심하시겠습니다.”

“억수로 내렸제.”

수안이 없는 사이 한국에는 비가 왔다. 폭우였다.

중부지역 집중 호우로 많은 사망자와 이재민이 발생했고, 수해 복구를 위해 투입되었던 곳에서 산사태가 일어나 육/공군 장병이 순직하고 실종되는 일도 있었다. 이번 집중 호우로 인해 사망자만 61명이 발생했고, 집을 잃은 이재민도 2만 8천여 명에 달했다.

“우리 장병들이 덧없이 갔어. 재물이야 시간이 지나면 다시 복구할 수 있다지만…. 자식 잃은 부모의 마음은 어찌하겠나.”

김일삼 대통령도 이에 대해서 깊이 마음을 쓰고 있었는지 눈가가 촉촉해졌다.

수안도 안타깝기는 마찬가지였다.

* * *

수안은 회사에 돌아와서 김 사장에게 수해로 순직한 사람들에 보상금을 지급하자고 제안했다.

“순직한 군인들에게 직접 도움을 주고 싶어. 적절하게 보상금을 주고 싶은데 방법이 없을까?”

“직접 주시는 것보단 회사 내부적으로 의사자 포상을 신설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어?”

수안이 되물은 것은 알아듣지 못해서가 아니다.

미래에 실제로 존재하는 상이었기 때문이다.

작년 사명을 변경한 GL에서 위험한 상황에 노출된 사람들을 본인이 직접 도와주거나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했을 때 의인상을 수여했다. 학생인 경우엔 장학금을 같이 수여하기도 했고, 남을 돕다가 목숨을 잃었다면 유족들에게 상을 포함해 위로금을 주는 경우가 있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김 사장이 가타부타 설명할 필요 없었다.

“더블 스타 의인상 당장 시작하자. 의인을 찾아 보상해. 그리고 기자는 부르지 마. 사회에서 돈을 번 기업이 다시 사회에 공헌한다는데 외부로 알릴 필요 없잖아. 당연한 일이니 말이야.”

“말씀대로 진행하겠습니다. 그럼 이번 첫 보상 금액은 얼마로 책정할까요?”

“사망한 장병 유족에게 각 5천만 원. 돈으로 위로가 될 수는 없지만, 생활엔 보탬이 될 거야.”

“예. 더블 스타 복지 재단을 만들어 어려운 가정을 돕는 일이나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일을 찾겠습니다. 겸사겸사 임직원 자녀의 장학금까지 한 번에 묶어 보겠습니다.”

하나를 지시하면 둘을 알아듣고 풀어나가는 김현성 사장이다.

“내가 이래서 김 사장을 좋아해. 그런데 요즘 보고가 뜸해? 무슨 일 있어?”

“아닙니다…. 별일 없습니다.”

배영성의 경고 이후 지극히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김현성이다.

함부로 앞서 나가지 않으려 노력하고 시키는 일에만 집중하려 애쓰고 있다.

그리고 스스로 판단할 수 없는 일이 생기면 우선 배 이사를 거치고 있었다.

“나 없을 때 의논할 일이 있으면 배 이사를 찾아.”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예. 부사장님.”

수안이 없는 사이 대형 건설 업체 건영이 부도났다.

앞으로 하나씩 하나씩 수면으로 올라온다.

이젠 국내 경제에 촉각을 세워야 했다.

“한보 그룹 상황은 어때?”

“정태준 회장이 구속되고 2세 체제로 전환했지만, 상당히 삐걱거리는 모양입니다.”

6공화국 최대 비리라고 불리는 수서지구 택지 특혜 분양 사건이 있었다.

특별 분양이 불가하다는 건설부와 서울시의 입장이 있었음에도 불구, 한보 그룹은 청와대와 국회 건설위원, 건설부 등 다방면에 뇌물을 건네고 입장을 바꾸게 했다.

당시 대통령은 특별 감사로 덮으려 했지만, 이틀 뒤 곧장 검찰 수사가 시작되었고 한보 건설이 연루되어 있음을 밝혀냈다. 서울특별시장과 건설부 장관, 청와대 경제수석을 비롯한 공무원과 국회의원, 한보 그룹 관계자까지 소환시켰고, 여기에 한보 그룹 회장도 함께 구속되었다.

근래에서야 이 수서지구 택지 특혜 분양 사건의 진실이 밝혀졌다.

5, 6공화국의 수장이 재판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한보 그룹 정 회장이 특별 분양을 받기 위해 4차례에 걸쳐 159억 원을 당시 대통령인 노태환에게 건넸다는 것이다. 노태환은 이 비자금을 받는 대가로 서울시에 압력을 넣어 지정된 조합에 특별 분양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특별 분양을 거부하던 서울시장이 경질되고 후임 서울시장이 부임하기도 했다.

정치권에서 사과 상자는 보통 뇌물의 의미가 있다.

바로 정 회장이 사과 상자로 뇌물을 건네줬던 당사자였다. 이때부터 사과 상자가 뇌물의 상징으로 알려졌으니 사과 상자에 돈을 넣어 줄 생각을 했던 정태준 회장이야말로 뇌물계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청문회에서 “주인인 내가 알지, 머슴(계열사 사장)이 뭘 압니까?”라는 발언으로 계열사 사장도 머슴으로 생각하는 재벌 사회의 단면을 보여 준 사람이기도 하다.

한보 그룹은 다시 정권의 비호 아래 다시 성장을 시작했지만, 오래가지 못할 성장이었다.

최근 대법원은 수서 사건을 포함해 노태환 전 대통령의 비자금 조성에 대한 재판에서 정 회장에게 징역을 선고했다. 이로 인해 공석이 된 회장 자리를 2세가 물려받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한보 그룹은 97년 1월 23일 한보 철강 부도를 맞는다. 그 일주일 뒤인 30일엔 한보 건설과 한보 그룹도 부도가 난다.

한국의 대외 국가 신용도 하락을 가속화하는 데 큰 영향을 주어 국가 부도의 시발점이 되는 한보 사태였다.

여기엔 이번 정권의 비리까지 숨겨져 있다. 김일삼 대통령의 차남, 정계 유력인사까지 모두 연루되어 있었다.

추악한 경제 범죄 사건이었고 이로 인한 불법 대출액이 무려 5조 7천억이다.

5조 7천억! 작은 나라가 흔들리기 충분한 돈이다.

“엄청난 대출이 있어 버티고 있지만, 한보 철강의 미래는 불투명하지 않을지….”

대출을 받음과 동시에 문어발식으로 인수 합병 및 세력 확장을 빠르게 진행해 자금이 들어와도 메꿀 수 없는 처지였다.

“한보 철강과 관련된 170여 개 회사가 모두 부도 처리될 거야. 한보 철강은 물론이고.”

“저도 비슷한 결론입니다. 특히 은행이 걱정입니다.”

한보 철강에 돈이 묶인 은행들은 극심한 자금 악화에 놓인다.

훗날 은행장들도 한보 사태에 같이 묶여 구속되지만, 지금 그들까지 신경 써줄 수 없다.

“계속 지켜보다가 특이 사항 생기면 다시 얘기하기로 하고. 난 펜타그램으로 가서 일 보고 집으로 갈게.”

“예.”

김현성 사장을 뒤로하고 배영성과 펜타그램 사무실로 향했다.

배영성은 차 안에서 계열사 특이 사항을 보고했다.

“각 계열사의 위기 대비는 진행 중입니다. 하지만 회장님이 허락하는 선에서 이뤄지는 대비인지라 약간 부족해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괜찮아. 급하게 만기가 돌아오는 채권만 없어도 충분해.”

최소한의 대비만 진행해도 다른 회사들이 겪는 자금 경색을 피해갈 수 있다.

“그리고 강운 패션과 뉴월드 호텔에서 박 사장과 정 사장의 미팅 요청이 있습니다.”

“응? 박 사장하고 정 사장?”

수진과 수현이 일하는 곳이다.

“뭔데?”

“두 사장은 두 분 아가씨 일로 난감하다고 합니다.”

배영성의 경고로 몸을 사리는 두 사장이다.

“사장이 시킨 부서에서 일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또 무슨 문제야?”

“회사 내에 라인을 만드신 것 같습니다.”

“……!”

“현재 두 회사엔 사장 라인과 회장님 라인이 존재하고 있답니다. 회장님 라인을 정정하자면 회장님 2세 라인이라고 해야 맞겠죠.”

“하! 내가 동료로서 인정받으랬지. 언제 그따위 사내 정치나 하고 있으랬어?”

두 여동생이 자신의 말을 듣고 성실하게 출퇴근하고 있어 사회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다 생각했었다. 그래서 훗날 어떤 식으로 지분을 넘겨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일부는 스톡옵션을 지급하고 일부는 전환 사채와 신주인수권부사채로 지분을 증가시키면 향후 지분 증여나 인수를 통해 20%까지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상세한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는데, 여동생들은 또 엇나가고 있었다.

‘내가 착각했어.’

“강운 패션으로 차 돌려.”

“예.”

수안이 탄 차는 유턴해서 강운 패션 사옥으로 향했고, 배영성은 조용히 휴대폰으로 문자를 날렸다.

[강수안 부사장님과 강운 패션 사옥으로 가는 중. 박민후 사장님 미팅 요청 건.]

잠시 후 답장이 들어왔다.

[연락 감사합니다. 배 이사님. 로비에서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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