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탄생 (95/304)

탄생

라운딩을 마치고 배영성과 돌아가는 차 안이다.

“실력이 대단들 하시네요.”

배영성은 꼴찌를 면하지 못했다.

그나마 100타 이하로 들어오긴 했지만, 오랜 골프로 단련된 두 사장을 넘어서긴 역부족이었다.

“골프 실력보다 사업 감각이 대단한 사람들이야.”

수안은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다.

“강운 그룹은 이제 놔두셔도 될 것 같습니다. 저런 사장들이 즐비하지 않습니까.”

말은 이렇게 했지만 배영성의 눈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뭔가 이상해… 부사장님의 사업 계획과 너무 유사하고. 또….’

나머지는 사실을 확인하고 보고해야 했다.

“그래. 인재가 많으니 놔둬도 잘 굴러가겠지.”

“그리고 총선 결과 나왔습니다. 이현창 전 총리가 국회로 입성했습니다.”

“아. 그래? 화환이라도 하나 보내야겠네.”

투표에서 상대를 여유 있게 따돌리고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이현창이다.

“벌써 보냈지요. 예쁜 난을 하나 보냈습니다.”

“혹시나 보자고 하거든 바로 얘기해 줘.”

“연락 오면 일정 비우겠습니다.”

“아니. 얘기만 하라고. 올림픽 끝나고 볼 생각이거든.”

그간 아예 연락을 끊고 산 것은 아니다. 시시때때로 이현창에게 연락이 왔었고, 수안은 귀찮은 기색 없이 전화를 받아 조언할 부분을 일러줬었다. 하지만 오란다고 쪼르르 달려갈 생각은 없었다.

올림픽이 끝나고 이현창 의원과의 만남을 요긴하게 사용할 시기가 있었다.

“아. 예. 올림픽 준비가 핑계가 되겠습니다.”

사실 이번에도 여러 의원에게 요청이 들어왔었다. 총선 선거 운동에 잠시 얼굴이라도 비춰 달라고 난리였다. 수안이 후보 옆에서 얼굴만 비춰 줘도 많은 유권자가 움직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안은 올림픽을 준비해야 한다고 핑계를 대며 이를 모두 거절했다. 아직 정치권과 엮일 때가 아니었다.

“그나저나 수진이랑 수현이 힘들어서 어쩌나 싶다.”

“맞습니다. 두 분 사장님은 일부러 더 어려운 일을 맡기는 것 같은데, 아가씨들은 당장 힘든 일이라 싫다고 하시니….”

“내가 잘 설득해 봐야지. 녀석들도 자신을 위한 선택이라고 하면 이해 못 하진 않을 거야.”

“말 몇 마디로 이해할 분들 같으면 진작에 이해하셨겠죠.”

“…….”

맞는 말이라 수안도 할 말이 없었다.

* * *

배영성의 예상대로 둘은 이해하지 못하고 분개했다.

“하! 오빠 말도 우습게 듣는다 이거야?”

“어디 아빠 말도 무시하는지 보자.”

둘은 아버지에게 고자질하려 일어났지만, 수안의 말에 도로 자리에 앉았다.

“지금 아버지께 가서 말하면 너흰 이대로 끝이야. 너희가 걱정하던 그대로 시집가서 남편에게 빌붙어 살아야 할걸?”

“……!”

“……!”

“아버지가 좀 깐깐한 분이야? 아무리 확신에 차서 보고해도 최소한 10번 이상 검토하시는 분이야. 내가 제안해도 마찬가지인데, 너희를 왜 그 부서로 보냈는지 사장들이 보고하면 아버지는 오히려 사장들 생각에 동조하시지 않겠어? 그리고 아버진 너희를 계속 어린아이로만 보시겠지. 어린아이에게 경영을 맡겨? 영원히 안녕이야.”

“히잉. 그럼 어쩌라고.”

“나 계속 영업해야 해? 점주들 징징거리는 소리 듣고, 물건 떼다가 나르고?”

“나도 얘기해 봤지만, 너희에게 나쁜 일은 아닌 것 같아. 회사에서 일하는 직원들과 단단히 친분을 다져. 모든 직원이 너희를 진짜 동료로 느낄 정도로.”

“동료? 경영자나 오너가 아니라?”

“맞아. 우린 태생이 다르다고.”

수진의 마지막 말이 수안의 화를 건드렸다.

“태생? 어설픈 선민 사상이 아직도 너희에게 남아 있었어? 네가 뭐라고 태생을 입에 담아!”

“아, 아니. 내 말은….”

이런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지우기 위해 수안이 그토록 동생들을 괴롭혀 온 것이다.

“아버지를 잘 둬서 우리가 잘 먹고 잘살지만, 회사에서만큼은 능력으로 인정받으라고 했잖아! 그따위 생각을 하고 있으면서 무슨 경영이야? 더럽고 힘든 일은 손끝 하나 대고 싶지 않고, 쉽고 편한 일만 하면서 능력은 인정받고 싶어? 그럴 생각이면 그냥 내가 주는 돈이나 받아먹고 살아.”

“오빠….”

“오빠. 언니가 잠깐 화가 나서 실수로 나온 말이야.”

수안은 잠시 숨을 가다듬으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그리고 조용히 다시 설득을 이어 갔다.

“휴우. 그럼 바꿔 생각해 봐. 나쁘지 않은 기회잖아? 회사에 핵심 아닌 부서가 있을 것 같아?”

회사는 단 하나의 부서로만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부족해 보이는 부서라도 회사의 필요성에 의해 존재한다. 누구라도 자신이 맡은 업무가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회사의 중추 업무라고 생각하기 마련이었다. 총무는 자신이 회사의 모든 사무 기기를 책임지는 가장 중요한 보직이라고 여기고, 회계는 회계대로 숫자를 다루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영업은 자신의 업무에 의해서 회사가 돈을 벌어들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미래를 기획하고 회사를 홍보하는 부서도 마찬가지고, 연구 개발을 하는 연구소 직원들도 마찬가지다. 생산은 말해 무엇할까.

어느 부서나 중요한 것은 다 마찬가지건만 동생들은 여전히 무엇이 핵심인지 모르고 있었다.

“모든 부서를 경험할 수 있는 건 너희라서 가능한 일이란 말이야.”

평범한 직장인이라면 회사의 부속품처럼 정해진 업무만을 맡아서 하다가 다른 일엔 멍텅구리가 돼 버린다. 수십 년 직장에 있다가 퇴직 후 사업을 시작하면 말아먹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모든 직무를 경험하면 전천후가 될 수도 있었다. 반대로 이것도 저것도 못 하는 천덕꾸러기가 될 수도 있는 위험성은 존재했다.

“너희가 원하는 회사의 밑바닥부터 맨 꼭대기까지 다 알고 있으면 아버지가 너흴 무시할 수 있을 것 같아?”

“아버지?”

“우선 사업 계획을 통해서 능력 있는 사람으로 포장하는 건 끝났어. 하지만 기회가 다 사라진 건 아니야.”

수안은 방법을 다시 일러줬다.

“아까도 말했지만, 너희가 지나간 모든 부서의 직원들. 그 직원들이 너희를 보는 시선이 달라지게 만들어. 그러려면 너희는 그 부서에 뼈를 갈아 넣는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해야겠지. 그래야 직원들이 너희를 회장님 딸이 아니라 동료로 보게 될 거야.”

“한참 돌아가는 길이네.”

수현은 수안이 무슨 말을 하는지 대번에 알아듣는다.

“돌아가는 길이지만, 확실한 길이기도 해. 고모처럼 계열 분리 쟁취하려면 너희는 강운 패션과 뉴월드 호텔에 가장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해.”

수안은 차근차근 회사에서 자리 잡는 방법을 설명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시간도 오래 필요했다. 하지만 그 고생을 아버지가 알게 되면 무시하진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수안의 말이 끝났지만 굳은 동생들 표정은 풀리지 않는다. 그래도 반발하지 않는 것을 보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

“…….”

“그래. 너무 오래 걸리긴 해.”

기약이 없는 일이다. 수진과 수현이 아직은 어리지만, 5년만 지나도 서른에 가까워진다. 여기저기서 혼담이 올 것이니 결혼과 출산도 생각해야 했다.

“하지만 고모님을 봐. 고모님은 자식을 결혼시킬 때가 돼서야 계열 분리에 성공했어. 너희도 당장에 회사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잖아.”

수안의 말에 그제야 굳은 얼굴이 살짝 풀렸다.

“그래. 그랬지.”

“맞아. 우리가 조급했어. 오빠 사업 계획을 보고 당장이라도 뭔가 될 줄 기대하고 있었나 봐.”

아버지 여동생인 고모도 불과 얼마 전에 성공한 계열 분리다. 수진과 수현도 결혼 전에 계열사를 분리해 나갈 거로 생각하진 않았었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사업 계획이 가슴에 불을 지르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후우. 첫 계획은 틀어졌지만, 성공할 때까지 시도한다면 실패는 실패가 아니라 성공을 위한 과정이 된다. 너희는 일하다 힘들어도 성공의 과정 안에 있다고 생각하면 돼. 거기다 이 오빠가 있잖아. 그러니 고작 이런 일로 실망하지 마. 포기하지도 말고. 알았지?”

여기에 수용이까지 끼어 있었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그나마 말이 통하는 두 여동생을 달래가며 일을 시키는 것도 이렇게 힘들다.

“오빠가 아니었으면 당장이라도 그만뒀을지 몰라.”

“나도.”

여동생 둘은 말귀를 알아듣지만, 수용이는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했다.

지금은 녀석이 놀기로 한 것이 다행이다 싶었다.

“이제 가 봐. 임산부 잠들었으니까 조용히 나가라.”

이번에도 동생들이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면, 그때는 방법이 없었다.

‘그땐 정말 나도 포기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동생들을 바른길로 인도하려 애써 왔고,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동생들을 경영자의 자리에 올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만약 녀석들이 속한 회사에서 사회생활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면 회사와 떨어트려 놓는 편이 회사를 위해서도 동생들을 위해서도 좋을 것 같았다.

“혼자 시끄럽게 굴어 놓곤.”

“그러게. 오빠 목소리 때문에 언니도 자다 깼을 거야.”

동생들을 얼른 보내고 방으로 들어가 보니 아현은 아직 잠들어 있었다.

“다행….”

아니다. 아현의 눈동자가 눈꺼풀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자신 때문에 자다 깬 것이다. 남편이 혹시나 미안해할까 봐 잠든 척하고 있는 아내의 속마음이 훤히 읽힌다.

“잘 자요. 내 사랑.”

그런 아내의 마음을 배신할 수 없었다.

수안은 조용히 이불 속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 * *

사장단과 만난 날 배영성은 회사로 돌아와 최장호를 불러들였다.

“예. 배 이사님.”

“최 실장이 조사할 사람이 있어.”

“부사장님 지시입니까?”

“아니. 우선 내 선에서 파악하고 상황 봐가면서 보고 드리려고.”

“누구를 조사하면 됩니까.”

“김현성 사장.”

“……!!”

“아무래도 이상해.”

배영성은 일전에 회사 임원들과 골프를 친 날을 기억했다.

박 사장이 수안에게 선물한 골프 웨어는 수안이 다시 넘겨줘 자신이 입었고, 같은 골프 웨어를 김현성 사장도 입고 있었다. 이것만 가지고는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의심할 이유가 하나가 더 생겼다. 바로 오늘 일이다.

당시 김현성이 갖고 있던 골프클럽과 자신에게 선물한 골프클럽은 국내에서 구할 수 없다는 해외 브랜드였다. 오늘 같은 브랜드의 골프클럽을 봤다. 바로 박 사장과 정 사장이 그 골프클럽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부사장님이 동생들에게 건네준 사업 계획은 나와 김현성만 알고 있지.’

수안의 모든 것을 공유하는 사람은 바로 배영성이다. 김현성 사장에게만 사업 계획을 보여 준 것이 아니다. 배영성은 아예 처음부터 수안의 사업 계획을 함께한 사람이다.

그 사업 계획과 유사한 내용의 사업 계획을 오늘 둘에게서 확인할 수 있었다.

계획이 어디서 유출되었는가를 생각하면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지극히 합리적이고 합당한 의심이다.

사업 계획 자체에만 신경 쓰던 수안은 주변의 자잘한 일들까지 확인할 수 없었다.

배영성이라서 알 수 있었던 일이다.

“김 사장을 조사합니까?”

“아무래도 김 사장이 강 부사장님 몰래 강운 그룹 사장단과 접촉하는 것 같아.”

“배 이사님을 건너뛰고 직접 접촉했다는 말씀입니까?”

“그래. 날 통하지 않고 직접.”

“확인해 보겠습니다.”

최장호가 가장 믿는 사람은 강수안 다음으로 배영성이 있었다. 배영성의 판단이면 옳든 그르든 따를 수 있었다.

“김현성 사장이 모르게 조심해.”

“예. 이사님.”

.

.

.

며칠 지나지 않아 굳은 표정을 한 최장호가 배영성의 집무실을 찾았다.

“결과 나왔습니다.”

“무슨 결과…. 김 사장 건이야?”

“예.”

“표정을 보니 말 안 해도 알겠네.”

“휴우. 예. 짐작하신 대로 사장단과 접촉하고 있었습니다. 박 사장과 정 사장을 포함해 몇몇 사장단 인원들과 저녁을 함께하는 모습을 확인했습니다.”

의심이 사실로 확인되자 배영성은 착잡한 심정이다.

“우선 부사장님께 보고는 하지 마. 심란하기만 하실 거야.”

“예. 이사님.”

배영성은 먼저 강운 패션 박민후 사장과 통화했다. 사실 확인을 위함이었다.

“누가 이런 식으로 일 처리 하라고 했습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도련님을 기만하고도 그 자리에 계속 앉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까?”

-……!!

“고작 몇 가지 사업 계획 추가하고 자기 거라고 우기면 내가 모를 줄 알았냔 말입니다! 김 사장만 사업 계획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일을 저지르려면 완벽하게 하시든가! 조금만 조사해도 다 나오는데 감춘다고 감춰질 줄 알았어요?”

-배, 배 이사님.

“이번 일 잊지 않겠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도련님께 백배사죄하겠습니다.

이젠 100% 확신이다.

“도련님께 아직 보고 전입니다. 이걸 어떻게 수습할지는 김 사장을 만나고 결정하겠습니다.”

두 사장과 통화하고 바로 김현성 사장의 집무실로 향했다.

“김 비서는 잠시 자리를 피해 주겠어? 중요한 얘기가 있을 거라.”

“예. 이사님.”

일부러 비서까지 멀리 보냈다.

똑똑.

“들어오세요.”

“접니다.”

철컥.

배영성은 김현성의 집무실에 들어오며 문을 닫아걸었다.

“배 이사님. 어서 오세요. 차는….”

“차는 필요 없습니다. 비서도 자리를 피하라고 했고요.”

“중요한 말씀인가 보군요.”

“예. 무척 중요하죠.”

배영성은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궁금합니다. 항상 배 이사님은 중요한 일거리를 가져오시는 소식통이시니까요.”

“오늘은 별로 좋은 얘기가 아닐 겁니다. 계급장 떼고 얘길 해야 하거든요.”

“……!”

얼굴을 바꾼 배영성은 곧장 반말로 시작했다.

“내가 당신 데려올 때 분명히 얘기했어.”

“배, 배 이사님.”

“조용히 들어.”

“…….”

“사내 정치에서 밀려나 퇴직한 당신을 내가 도련님께 연결해서 지금 당신이 사장 자리에 앉아 있는 거야. 그리고 그때 말했지. 이번엔 라인이고 뭐고 필요 없으니까 도련님 밑에서 시키는 일만 똑바로 하면 그걸로 끝이라고.”

“…그랬죠.”

“그럼 그랬어야지. 왜 머리 꼭대기에 올라가려고 하지?”

“지금 무슨 말씀을 하는지….”

“내가 지금 박 사장, 정 사장과 통화하고 오는 길이야. 그리고 당신이 사장단과 접촉한 걸 알고 있어. 더 필요해?”

“……!!!”

“수안 도련님 하시는 일에 감히 똥물을 끼얹어? 밑에서 시키는 일이나 해야 할 월급 사장이?”

“그, 그건.”

“이유가 있나? 어디 변명해 봐. 들어는 주지.”

“도련님이 온전한 강운 그룹을 갖게 하려면….”

“그걸 왜 당신이 판단하는데!!!”

“…….”

“시키는 일만 하란 말이야! 감히 뒤에서 도련님을 조정하려 들어? 도련님이 믿고 맡긴 사업 계획까지 유출하면서? 이래놓고 발뺌을 했단 말이야?”

“…….”

김현성은 떨리는 손으로 항상 품에 가지고 있던 사직서를 꺼냈다.

그리고 배영성은 그 사직서를 받아 품에 넣었다.

“도련님이 믿음이 과했어. 그래서 당신이 그런 마음을 먹은 거야.”

“죄송합니다.”

“…앞으론 죽었다 생각하고 시키는 일만 해.”

김현성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사, 살았다.’

“사직서는 언제든 필요할 때 사용하지. 지금부터 당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거야. 다시 이와 같은 일이 생기면 그땐 나도 봐줄 수 없어.”

“감사합니다. 배 이사님.”

“내가 아니라 도련님께 감사해. 너 같은 놈에게도 믿음을 주는 분이야. 그 믿음을 다시 저버리면 그땐 사표로 끝나지 않을 거야.”

“따르겠습니다.”

배영성은 김현성을 당장 내보낼 수 없었다. BE 인베스트먼트의 일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BE 인베스트먼트가 수면 위로 드러나고 나서라면 모를까 지금은 아니지.’

“추가로 하나 더.”

“예.”

“수진, 수현 아가씨와 수용 도련님 주식 계좌 가지고 장난치지 마.”

배영성도 주식 계좌 현황을 체크했었다.

지금까지 그냥 보고 넘겼지만, 이번 일로 이것도 수작이 들어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현의 계좌 수익률과 극명하게 달랐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간섭하고 싶지 않았어. 당신이 자초한 일이니 받아들여.”

“예….”

“계급장 다시 붙이고…. 김 사장님?”

“예.”

“앞으로 조심합시다.”

“…예.”

배영성의 미소가 두렵게 보일 수 있음을 알게 된 날이다.

* * *

수안은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한 장소에 머물고 있었다.

수안은 밤을 새운 곳은 태어났던 강운 병원 VIP 분만실이다.

25년 전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지만, 지금의 분만실은 그때와 많이 바뀌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어머니의 자궁에서 태어난 것처럼 오늘 자신의 아이가 여기서 태어난다고 한다. 출산 예정일이었던 6월 11일을 하루 넘긴 1996년 6월 12일이었다.

“조금 더! 기운을 내세요!”

“끄윽.”

“숨 쉬시고요. 알려 드린 호흡법대로.”

“후읍. 후읍.”

“한 번 더! 더 세게!”

“끄으읍. 끄으!”

“머리 보입니다. 한 번 더!”

오랜 진통 끝에서야 아기의 머리가 보인다.

수안은 의사와 간호사들처럼 수술복과 수술모, 라텍스 장갑까지 착용하고 분만실에 들어와 있었다. 곁에서 아내의 손을 꼭 붙들고 아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수안이 도움이 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조용히 아내의 손을 붙잡고 있는 것이 수안이 할 일이었다.

“끄아압!”

“나온… 나왔습니다!”

.

.

.

“허어어….”

마지막까지 기운을 쥐어짠 아현의 몸이 축 늘어졌다.

그리고 갓 태어난 아기의 울음소리가 분만실을 울리고 있었다.

아기가 태어났지만 수안은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방금 아기를 낳고 실신 직전의 아내가 눈앞에 있었다.

“여보, 여보.”

“우리 아기… 아기는.”

“잘 나왔어. 기운 내. 여기 산모 좀 봐줘요!”

“아기를.”

의사들이 아현의 상태를 확인하는 동안 수안은 뒤로 빠져 있었다.

그리고 아기도 거쳐야 할 절차가 많았다.

자궁 안의 아기는 입, 코, 기도 및 폐가 모두 액체로 차 있다가 출산 시 산도로 내려오는 동안 토해낸다. 하지만 태내에서 빨아들인 양수가 입속에 남아 있기 때문에 의료기기를 이용해 분비물을 제거해야 한다.

울 때의 모습과 발버둥 치는 행동을 살피고 호흡과 심장 박동, 피부 색깔, 근육의 상태, 신체 반사까지 확인해야 했다. 그리고 몸무게와 키, 머리 둘레, 가슴 둘레도 측정해야 했다. 이런 과정을 다 거치고 나서 엄마에게 갈 수 있었다.

강운 병원 산부인과 의사들이 총출동했기에 많은 과정이 빠르게 끝났고, 아기는 드디어 피를 수혈받는 엄마에게 안길 수 있다.

“아가. 흑. 내 아가.”

아기를 안고 흘리는 엄마의 눈물은 아빠에게도 전염되었다.

“고생했어. 여보. 정말 고생 많았어. 흑. 우리 아기 건강하게 잘 태어났어. 손가락 발가락 열 개씩 다 있고. 3.1kg으로 건강하게 태어났어. 이제 당신만 기운 차리면 돼.”

“사모님께서도 괜찮아지실 겁니다. 출혈도 잡혔어요. 걱정 놓으세요. 부사장님.”

“그래요? 다행입니다.”

의사의 말에 그제야 미소를 보이는 수안이다.

“여보.”

“응. 뭐든 말만 해.”

“아버님하고 어머님이 기다리시겠어.”

“아.”

“얼른 나가서 연락해요. 난 괜찮으니까.”

아기는 아현의 품에서 첫 모유를 먹고 있다.

수안의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아내의 걱정을 놓고 나니 이젠 아기가 발목을 잡는다.

수안은 엄마 젖을 먹고 있는 아기의 뒤통수를 본 다음 작은 등을 살짝 어루만지고 밖으로 나가 휴대폰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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