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 계획
수안은 최 실장과 전화를 끊고 바로 배영성을 호출했다.
그리고 두 사장과 직접 만날 일정을 잡아 보라고 했다.
“대 놓고요? 괜찮을까요?”
“최 실장에게 허락받았어. 골프장에서 편하게 보자고해.”
“골프. 좋죠.”
“이제 배 이사도 타수 좀 올라오지 않았나? 요즘 몇이나 쳐?”
그간 간간이 배 이사와 라운딩해 봤다. 배 이사도 최 프로에게 레슨을 받다가 지금은 스스로 실력을 늘려가고 있다. 가끔 김 사장이나 다른 이사들과 골프장에 가는 일이 있었다.
“일전엔 싱글까지 쳤습니다. 김 사장에겐 힘들지만, 2등까진 했네요. 하하하.”
“오오. 실력이 빨리 늘었네?”
“반짝 잘 친 날이죠. 뭐.”
“넷이서 하면 좋겠다. 그리고 두 사장에게 요즘 진행하는 핵심 사업에 관해서 설명할 직원도 데려오라고 해. 거기서 들어 봐야겠어.”
“예. 바로 연락해서 약속 잡고 골프장 예약해 두겠습니다.”
“최학주 실장에게 허락받았다는 얘기도 꼭 전해. 그 사람들도 은근히 신경 쓰거든.”
* * *
살짝 긴장한 얼굴의 박민후 사장과 정진환 사장이 일찍부터 골프장 주차장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 뒤로 남현수 차장과 정영란 부장도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둘은 자신들이 기획하지도 않은 사업 계획을 자신 것인 양 원주인 앞에서 발표해야 했다. 그것도 평소 발표하던 회의실이 아니라 골프장 필드 위에서 진행하는 발표다. 긴장이 좀처럼 풀리질 않는다.
박민후 사장이 수안이 탄 차가 들어오는 것을 확인했다.
“오신다.”
검은색 세단이 그들 앞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배영성이 얼른 내려서 뒷좌석 문을 열자 길쭉한 다리가 먼저 나오며 수안이 차에서 내렸다.
“어휴. 여기까지 나와서 기다리세요?”
내리자마자 넷이나 되는 사람이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어서 오십시오. 강 부사장님.”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하하하.”
“들어갑시다. 밖에서 이러면 나 부끄러워요.”
.
.
.
수안과 배영성, 박민후와 정진환이 티잉 그라운드로 들어서고 게임이 시작하기 직전에 수안이 멀뚱히 쫓아오는 둘을 보고 물었다.
“둘 중에 누가 호텔 계열 사업 계획을 기획했죠?”
“예. 제가 뉴월드 호텔 남현수 차장입니다.”
“지금부터 그 사업 계획의 중요한 부분에 관해 간략하게 설명해 주세요. 듣고 궁금한 부분이 있으면 질문하겠습니다. 잘 모른다고 해서 문제 삼을 생각 없습니다.”
제대로 하지 않으면 수안이 문제 삼지 않아도 자신이 모시는 정진환 사장이 문제 삼을 일이다.
여기 오기 전에도 신신당부했었다. 절대로 이 사업 계획이 도련님 머리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들키면 안 된다고 했다. 남현수는 마음을 단단하게 무장했다.
“제가 기획한 사업 계획입니다. 제가 모른다면 다른 사람도 모른다는 뜻이죠.”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죠.”
자신만만한 남현수 차장의 말에도 수안은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카앙!!
수안의 티샷이 시원한 포물선을 그리며 멀리 날아갔고,
“남 차장님 보고 시작하세요.”
그때부터 남현수 차장은 가져온 자료를 읽으며 수안을 따라다녔다.
‘허….’
전문가의 시선은 확실히 달랐다.
수안이 밖에서 대충 보고 기획했던 내용과는 전혀 다른 사업 계획이었다. 중심축은 비슷하게 따라가지만 디테일에선 지금 남현수 차장이 보고하는 계획이 더 우위에 있었다.
지금까지 수안이 사장들에게 전해 줬던 사업 방향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열심히 준비해도 실무자가 손을 보고 나야 진짜 써먹을 수 있는 수준의 계획으로 재탄생했다. 수안은 위에서 방향키를 잡은 선장이지 밑에서 노를 젓는 일꾼이 아니었다. 나중에 성공한 결과만 봤기에 중간에 어떤 가공과정을 거쳐야 했는지 알지 못했다.
“…이렇게 진행할 국내 호텔 예약 시스템과 골프장 예약 시스템 그리고 스키장과 눈썰매장까지 한꺼번에 묶은 다음, 액티비티와 숙박을 묶어서 연계 상품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지금은 각 지역에 액티비티라고 할 만한 사업이 많지 않지만, 시일이 지나면 관광객을 끌어모으기 위해 새로운 아이디어가 튀어나오고 신규 사업이 시작될 겁니다. 이것도 흡수해야 합니다. 지방의 액티비티는 홍보할 방법이 마땅치 않으니 무조건 우리와 함께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희가 발 빠르게 움직이면 전국의 모든 관광 사업이 저희와 연결되게 됩니다. 한국의 관광 산업을 우리가 먹는 셈입니다.”
한번 시작하니 이젠 떨지도 않고 편안하게 계획을 설명하고 있었다.
“다른 호텔이나 골프장을 연결해서 얻는 이익도 이익이지만, 전국의 액티비티와 펜션, 모텔까지 아우르게 되면 발생하는 수수료가 엄청날 것으로 기대합니다. 이 사업의 마지막 단계는 세계화에 있습니다. 제가 예측한 대로 국내 전산망이 연결되었다면, 세계와도 연결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세계 호텔을 전부 아우르는 글로벌 호텔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물론 전 세계 관광지와 익사이팅한 활동까지 모조리 그 안에 담을 수 있고요. 진정한 세계화의 주역이 되는 겁니다.”
‘허! 내가 수현이에게 얘기도 안 했던 글로벌 호텔이 벌써 나와? 그리고 지역 특색의 액티비티까지 생각해 냈단 말이야?’
수안은 남 차장의 보고가 끝나자, 그린 근처에 도착해 주변을 서성거리는 정진환 사장을 불렀다.
“정 사장님. 잠깐 봅시다.”
정진환 사장은 남 차장이 뭘 잘못 말했나 싶었지만, 감쪽같이 긴장한 얼굴을 감추고 수안 앞에 섰다.
“예.”
“이분이 남현수 차장님이라고 했죠?”
“그렇습니다. 제가 특별히 아끼는 능력 있는 직원입니다.”
“정 사장님이 아낄 만합니다. 어디서 이런 인재를 발굴했어요?”
‘……!’
“하하하. 신입 때부터 저희 호텔에서 근무했습니다. 밑에서부터 단단히 다지고 올라와서 어느 부서에 가도 제 몫을 하는 친구죠.”
“크게 쓰십시오. 정말 대단한 분입니다. 오늘 제가 새로운 세상을 봤어요.”
“감사합니다. 부사장님.”
“우선 퍼팅부터 하시죠. 묻고 싶은 얘긴 강운 패션 정 부장 보고를 듣고 하겠습니다. 정 부장님 시작하세요.”
강운 패션 정영란 부장의 보고도 남현수 차장의 보고와 마찬가지로 높은 수준을 자랑했다.
순조롭게 흘러가던 보고 중에 수안이 놓친 부분까지 있었다.
“…SPA 브랜드 구축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재고 관리에 있습니다.”
‘맞다! 재고 위험이 있었어.’
이제야 생각났다. 수진에게 준 서류에서도 따로 언급하지 못한 부분이다.
“로고는 가리는 방식으로 갑니다. 누구든 언제 어디서든 입을 수 있는 옷으로 생산해 모든 연령층이 소화할 수 있고, 매일 입어도 티 나지 않게 해 줍니다. 그렇게 되면 고객은 생필품을 사듯이 같은 디자인의 셔츠, 카디건, 니트 등을 색상별로 여러 벌씩 살 수 있죠. 이 부분이 바로 재고 관리 위험을 줄여 주고 개발비와 원가를 절감하는 소품종 대량 생산이 가능하게 만들어줍니다. 반응 생산이 아닌 전혀 다른 방식입니다. 기존의 의류처럼 팔리는 것만 추가 생산해서는 단가와 품질을 맞출 수 없습니다. 소품종을 대량으로 생산해서 원가를 낮춰야 합니다. 여기에 철저한 수요 예측이 더해져야 하고 매장에선 수시로 마케팅을 진행해 가지고 있는 재고를 완벽히 소진해야 합니다. 추가 생산은 없습니다. 완벽한 생산과 완벽한 판매. 바로 저희가 진행할 신규 의류 사업의 핵심이죠.”
“우아….”
속으로만 말하고 싶었지만, 저도 모르게 육성으로 나와 발표를 끊었다.
“…계속할까요?”
“미안합니다. 계속하세요.”
“다음은 뷰티 사업 진출입니다. 신규 뷰티 브랜드를 런칭하고 국내외 모든 뷰티 브랜드를 통합 판매하는 종합 뷰티 편집샵을 운영할 예정입니다. 그러나 매장에서 판매하는 물품은 뷰티에 국한하지 않고 일반에서 판매할 수 있는 제약이나 잡화를 함께 취급할 것입니다. 그리고 매장은 도심에 가장 붐비는 곳에 마련하여 접근성을 확보하고 현대적인 실내디자인과….”
“됐습니다. 여기까지만 들어도 확실히 알아듣겠습니다.”
2000년 초반에 막 일어서기 시작한 뷰티 종합 매장 사업 계획이 정영란 부장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더 들을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이런 전문가들이 함께라면 수진이 사업을 진두지휘하는 것보다 나을 터였다.
“박 사장님!”
막 페어웨이 샷을 마친 박 사장이 뛰어왔다.
“예. 부사장님.”
“정영란 부장. 중히 쓰셔야겠습니다. 어디서 데려가지 못하게 확실하게 보상하세요. 강운 패션의 보배입니다.”
“하하하. 물론이죠. 제가 확실히 붙잡아 두겠습니다.”
수안은 서 있는 두 사람을 보고 말했다.
“제가 아무것도 모르고 이렇게 대단한 분들을 오라 가라 했습니다. 오늘 정말 놀랐어요.”
정영란 부장과 남현수 차장은 괜히 얼굴이 뜨끈해졌다.
이 모든 계획의 시작은 지금 말하는 사람의 서류에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골프장까지 따라와서 보고하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얼른 퇴근하십시오.”
“예. 다음에 다시 뵙겠습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둘이 인사하고 골프장에서 떠나갔고, 수안에겐 남은 질문이 있었다.
게임 중간. 잠시 음료를 마시는 휴식 시간에 정진환 사장에게 먼저 물었다.
“정 사장님. 하나만 물읍시다.”
“예. 말씀하십시오.”
“수현이는 왜 클리닝으로 가야 했습니까?”
“아…. 그건….”
사업 계획에 대한 의심을 날려 버리며 큰 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했더니 다음 고비가 찾아온다.
정진환 사장은 잠시 머뭇거림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회장님의 자식이니 여러 분야를 경험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기획팀 책상에 앉아 미래를 설계한다고 해서 호텔을 배울 순 없습니다. 객실 팀에서 프런트 일도 해 보고 식음 팀에서 연회 준비도 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호텔리어로서 당연히 클리닝도 경험해 봐야죠. 전 수현 아가씨가 호텔의 모든 것을 경험했으면 좋겠습니다. 게다가 아직 대학도 졸업하지 않은 젊은 나이 아닙니까. 이럴 때나 고생해서 일을 배울 수 있습니다. 나이 먹으면 이것도 못 하죠.”
“…다 생각이 있으셨네요.”
수안도 공감할 만한 생각이다. 만능이 되라는 얘기는 아니지만, 한 회사를 이끄는 경영자라면 회사 전반의 흐름에 대해 알기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수현이는….’
수현이가 호텔을 다 알아서 뭐 하나 싶었지만, 사회를 경험한다 생각하면 되겠다 싶었다.
“부사장님이 따로 지시하신다면 본래 프런트 팀으로 옮겨 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저도 정 사장님 말씀에 지극히 동의합니다. 밑바닥부터 배워야 진짜 회사를 알 수 있는 법이죠. 그대로 두세요. 정 사장님 뜻대로 하십시오.”
정 사장과 의문을 해결한 수안이 박 사장을 돌아봤다.
박민후 사장은 무슨 질문을 할지 뻔히 짐작하고 있었다.
“박 사장님도 지금 정 사장님과 같은 이유로 수진이를 영업에 보내셨습니까?”
“물론입니다. 특히 영업은 패션 사업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팀입니다. 여기에 소비자가 보는 시선이 아닌 영업적인 측면에서 대리점과 백화점 매장을 둘러보면서 의류 사업의 알파에서 오메가까지 확인할 수 있죠. 영업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패션을 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앉아서 디자인이나 할 것 같으면 그냥 디자이너로 살아야지 왜 회사를 경영합니까.”
“하나같이 맞는 말씀만 하시네요. 오늘 두 분 덕분에 많은 걸 배웁니다. 그리고 매우 놀랐습니다.”
수안은 자신이 지금까지 일러 준 계획들이 나비효과가 되어 오늘의 일을 만들어 냈다고 착각했다.
본래라면 이와 같은 사업 계획이 나올 때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의 계획이 아님에도 비슷하고 더 진보된 계획이 튀어나왔다.
뛰어난 인재를 알아보고 진취적인 사업 계획을 밀고 나갈 결정을 한 두 사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두 분 사장님이 얼마나 대단한 안목과 판단력을 가졌는지 알 수 있었어요. 그리고 본인이 맡은 분야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하시고요. 존경심이 들 정도입니다.”
“하하….”
“듣기 민망합니다. 부사장님. 저희야 시키는 대로 하는 월급 사장일 뿐입니다.”
실로 듣기 민망한 칭찬이다. 사실은 수안을 속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분은 충분히 자부심을 가져도 됩니다. 지금까지 많은 계열사 사장님을 만나 뵈었지만, 두 분처럼 능력이 넘치는 분들은 처음입니다.”
강운 계열사 사장들은 수시로 변경되곤 했다. 심하면 3년을 채우지 못하고 바뀌는 경우도 있었다. 수안은 눈앞의 둘이 강운 그룹에 오래 남아주길 바라고 있었다.
“앞으로도 강운 패션과 뉴월드 호텔을 잘 부탁드립니다. 오늘 확인한 사업 계획을 궤도에 올려놓으려면 10년으로도 부족합니다.”
앞으로 최소한 10년 이상 진행되어야 할 사업이다. 그래야 호텔 사업을 반석에 올려놓고 강운 패션이 SPA 브랜드와 뷰티 사업에 선두 주자가 될 수 있었다.
“어디 도망갈 생각하지 마시고 계속 계셔 주십시오.”
“으하하. 당연합니다. 자르지만 않으시면 저희가 어딜 가겠습니까.”
“그보다 강 부사장님이 빨리 강운 그룹으로 들어오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저희도 더 기운 나서 일을 하지요.”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회장님이 저렇게 건재하시고 강운 그룹은 지금 회장님이라는 축이 필요합니다. 전 아들로서 회장님을 경영 일선에서 오래 보고 싶습니다. 강운 그룹의 영광을 보셔야 할 분은 바로 회장님 아니십니까.”
“크흐. 저도 강 부사장님 같은 아들 하나만 있으면 정말 좋겠는데 말이죠.”
“저도 다른 건 모르겠는데, 회장님께 부러운 부분이 딱 이겁니다. 자식 농사를 어떻게 지어서 강 부사장님 같은 아들을 두셨는지 부러워 죽겠습니다.”
“어휴. 여전히 입담이 대단하시네요. 쉴 만큼 쉬었으니 다음 홀로 가십시다. 이제 안 봐 드리고 할 참입니다.”
보고를 듣느라 골프에 집중하지 못한 수안이다.
“헙! 지금까지 봐주셨습니까? 언더파를 기록하고 있는데요?”
사업 계획을 들으며 9홀을 지났음에도 수안은 보기도 하나 없이 아름다운 기록을 유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