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태동 (93/304)

태동

수현도 수진과 비슷한 상황을 겪어야 했다.

뉴월드로 옮기고 나서부터 조금씩 한직으로 밀려나는 기분이다.

“이번엔 객실 클리닝을 맡으라고요?”

“여러 직무를 경험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향후 하시는 일에 도움이 되실 텐데요.”

강수현에게 말하는 사람은 바로 뉴월드 호텔 정진환 사장이다. 수현이 회장의 딸이니 특별히 사장이 업무를 할당하고 있다.

수현은 정 사장의 말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사장님. 저는 옮기더라도 홍보팀 정도를 예상했습니다. 못해도 지금 일하고 있는 프런트 이하로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여기 오고 1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몇 번째 제 소속이 변하고 있고요. 프런트를 경험했으니 관리 부문으로 가는 것이 적당하지 않겠습니까?”

“받아들이기 힘든 모양이죠?”

“솔직히 그렇습니다. 더러운 객실을 청소하고 빨래나 하는 클리닝으로 가라니요. 거긴 아닙니다.”

“어느 부서가 중요하지 않겠습니까마는…. 호텔에서 클리닝 부분은 특히 중요합니다. 프런트가 호텔의 얼굴이라고 생각하셨습니까? 아닙니다. 클리닝은 호텔의 깨끗한 얼굴을 보여 주는 팀이고 호텔이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음을 직접 눈으로 체감시켜 주죠. 클리닝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곧 호텔의 기본이 되지 않았다는 뜻이거든요. 그래서 관리 부문보다 클리닝이 아래에 있다는 강 실장의 말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무미건조한 말투 속에 클리닝을 깔보는 수현에 대한 질책이 섞여 있었다.

“예. 제가 실수했습니다. 클리닝을 가볍게 생각한 말은 정정하죠. 그래도 클리닝 발령은 다시 한번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관리팀도 고려해 주세요. 저 관리팀에서도 잘할 수 있습니다.”

“그럼 관리팀이 가진 역량을 보시는 것도 좋겠지요. 관리팀에서 1년 전부터 구상하던 계획이 있는데 한번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정진환 사장은 이 기회만 보고 있었다.

“좋습니다. 그 계획이 제 사업 계획보다 더 낫다면 사장님 말씀대로 클리닝 팀에서 군말 없이 일하겠습니다.”

“오오. 강 실장이 호텔 사업 계획도 짜 둔 모양이죠?”

“곧 사장님께 보고하고 사업 진행에 승인을 요청할 생각이었습니다.”

시행하려면 시일이 필요한 일이라고 해서 계획을 가다듬고 있었다. 자꾸만 한직으로 밀려날 수 없으니 미완의 계획이라도 내보여야 했다.

“뭐. 아직 완성되진 않았을 테니 저희 계획부터 보시죠.”

정진환 사장은 관리팀 남현수 차장을 불러 앞으로 진행할 호텔 사업에 대해 간략한 소개를 부탁했다.

“지금부터 향후 뉴월드 호텔이 진행할 극비 사업 계획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대외비에 속하는 사업 계획이니 지금 들으신 사업 계획은 절대로 외부에 발설하실 수 없습니다.”

경고로 시작한 관리팀 남 차장이 발표하는 사업 계획은 수현도 익히 알고 있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다.

“……!!”

‘오빠가 준 계획보다 몇 단계 진보한 사업 계획이야. 일부는 이미 진행 중이고….’

발표가 끝나는 순간까지 말이 없던 수현에게 정진환 사장이 물었다.

“어떻습니까. 강 실장의 계획이 더 낫다면 그것으로 선택하겠습니다. 미완성이라도 좋으니 한번 보죠.”

“아, 아닙니다. 제 계획은 관리팀 계획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클리닝으로… 가겠습니다.”

남 차장이 발표한 내용에는 기존 계획보다 더 거대한 계획이 담겨 있었고, 남 차장이 오래 호텔에서 일하며 쌓아 온 업무 역량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다. 그에 비하면 자신의 조악한 계획은 낙서와 다르지 않았다. 미완의 자료였고 목표까지 유사한 계획을 사장에게 내보일 수 없었다.

“강 실장님은 기회가 많을 겁니다. 설마 클리닝 팀에 몇 년씩 있을 거로 생각하진 않죠? 젊어서 고생이니 즐겁게 합시다.”

“예. 사장님. 그리고 수고스럽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남 차장님.”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강 실장님이 1년 전에만 오셨어도 이 사업에 참여시켜 드리겠는데, 이미 팀원들이 고생한 것이 있어서 참 안타깝습니다. 나중에 같이 일해 봅시다. 강 실장님.”

수진을 이 사업에 끼워줄 수 없다는 사전 거절이다.

“네….”

수진이나 수현이나 앞으로 한직을 벗어나긴 힘들 터였다.

* * *

수안은 집에서 수현의 한탄을 들어야 했다.

“오빠. 오빠. 아아아앙. 나 어떡하면 좋아.”

수현은 뉴월드 호텔에서 클리닝 팀으로 발령 났단다. 그리고 자신이 준 사업 계획은 이미 호텔 내부에서 진행되고 있는 사업이란다. 야심 차게 준비한 계획이 죽은 계획이 된 것이다.

수안은 의아해하고 있었다.

‘내 계획을 벌써 시작했다고?’

한참 뒤 미래에나 진행될 사업이다. 수안은 과거를 겪고 돌아왔으니 이런 계획을 세울 수 있지만, 평범한 사람이라면 감히 생각도 못 할 사업 계획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수현을 달래주기도 전에 수진이 울면서 방에 들어왔다.

“우아앙. 오빠아아아.”

수진이도 다르지 않았다. 이미 1년 전부터 준비를 시작한 사업 계획이란다.

‘박민후 사장과 정진환 사장이라….’

“오빠가 잘 좀 말해 줘. 클리닝 팀에서 내가 뭘 하냐고. 내가 더러운 이불 빨래 보려고 호텔에 가야겠어?”

“난 당장 다음 주부터 영업 뛰라고 했어. 지방 대리점까지 돌아다니게 생겼다고.”

“아무래도 내가 한번 만나 봐야겠어.”

“내가 얘기했다고 하면 안 돼. 알았지? 대외비로 취급하는 계획이라고 했단 말이야.”

“맞아. 패션에서 진행하는 계획도 내부 핵심 인력에만 보여 주고 일반 직원들에겐 공개도 안 하고 있었어.”

“우선 상황부터 알아보고…. 우선 맡은 일은 열심히 하고 있어.”

“히잉. 나보고 클리닝에서 일하라고?”

“진짜 영업 따라다녀야 해?”

“직장 생활이 마냥 쉬운 줄 알았어? 박 사장님이랑 정 사장님 따로 만나 보고 사정을 확인하더라도 너흰 너희가 맡은 일을 하고 있어야지.”

수안은 어디서부터 일이 틀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 * *

시누이 둘이 남편과 만나고 돌아간 것을 아는 아현이 침실에서 물었다.

“아가씨들은 무슨 일로 당신을 찾아와요?”

“둘 다 회사에서 한직으로 발령됐다나 봐.”

“네에? 회장님 따님들인데, 한직으로 발령 내도 괜찮아요? 거기 사장님들 강단 있네요.”

“아무리 회장님이 임명한 사장이라도 스스로 경영에 자부심이 있는 사람들이야. 생각이 있겠지 싶어.”

수안이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다. 예전부터 얼굴을 봐오며 서로 단단히 연결된 사장들이다.

“아가씨들에겐 해결해 준다고 하셨어요?”

“확답은 못 했지. 동생들 말만 들어 보고 판단할 순 없잖아.”

“맞아요. 양쪽 말을 다 들어 봐야 사정을 알 수 있죠. 옴마!”

아현의 놀람에 수안이 벌떡 일어나 물었다.

“어디 이상해? 아파? 다리에 쥐 났으면 내가 주물러 줄게.”

“태동이에요. 배 속에서 아기가 발로 차요.”

아현의 배는 벌써 한참 불러 있었다.

“어디, 어디!”

수안은 불룩한 아현의 배에 얼굴을 붙이고 아기의 움직임을 느끼려 했다.

하지만 아기는 조용히 숨죽이고 있었다.

“또 아기가 수줍은가 봐요. 아빠가 가까이 오니까 얼른 숨네요.”

“아빠도 좀 느끼게 해 주라. 응?”

아현은 여러 번 태동을 느꼈지만, 수안은 태동을 느낄 수 없었다. 수안이 가까이 오기만 하면 조용히 움직이지 않는 아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수안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아기가 힘차게 요동쳤다.

“오오! 오!! 아빠 목소리를 들었나 봐! 아이가 느껴져!”

아현의 배가 꿀렁대며 아기의 힘찬 발길질이 느껴졌다.

“여보. 너무 큰 목소리로 말하면 우리 아기 놀라요.”

“아차. 미안 아가. 아빠가 너무 크게 얘기했지?”

금방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수안이다.

출산 예정일인 6월 11일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

.

.

수안은 회사에 도착해 김현성 사장을 호출했다.

“김 사장님.”

-예. 부사장님.

“증권 계좌 수익 현황 자료 가져와 봐요.”

-동생분들 현황 말씀이십니까?

“아내 계좌.”

-예. 금방 가져가겠습니다.

동생을 챙기는 수안이 아내 아현을 빼먹을 리 없었다. 아이가 태어난 다음 어머니로부터 고려 호텔 지분을 인수하려면 상당한 자금이 필요했다. 결혼하자마자 아현의 증권 계좌를 따로 만들어서 운용하고 있었다.

수안이 김 사장에게 받은 보고서엔 아직 부족한 잔액이 표시되고 있었다.

“160억은 많이 부족한데….”

결혼하자마자 아현에게 계좌를 만들게 하고 이를 김현성 사장에게 맡겨 뒀다. 수익 구간이 높은 종목들로만 선별해서 투자를 거듭해 왔기에 엄청난 금액이 모여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고려 호텔 지분을 증여받고 증여세를 내기엔 많이 부족했다.

고려 호텔의 한 해 매출액이 2천억 이상이다. 자산은 재평가를 진행하지 않았음에도 5천억에 육박했다. 순수 자본으로 따지면 부채를 제외하고 2천억 원이었다. 아이를 낳고 어머니의 지분 35%를 증여받으려면 7백억의 55%인 385억의 현금이 필요했다. 물론 비상장 회사의 지분 가치야 산정하기 나름이라 더 줄일 수 있겠지만, 안정적인 금액으로 준비하는 것이다.

“동생분들 수수료가 모이는 계좌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70억 정도 모였습니다. 사모님 이름으로 해 놨으니 명의상 문제는 없습니다.”

160억에 70억. 합이 230억. 아직도 155억이 부족하다.

“동생들 계좌는 각각 60억 정도가 있나?”

30%를 운용 수수료로 뺀다고 했으니 대충 계산하면 250억에 30%가 70억이고 180억을 셋으로 나누면 60억이다.

“그에 미치지 못합니다. 각 40억 정도 됩니다. 이익에서 수수료는 제외하고 손실이 발생하면 수수료를 제하지 않습니다.”

이 부분은 일전에 김현성 사장이 따로 보고했기에 수안도 인지하고 있던 부분이다.

“훗. 녀석들이 수수료 무서운 줄 모르지.”

“손실이 발생하지 않도록 안정적인 투자를 진행하고 있습니다만, 주식 시장을 이기긴 쉽지 않았습니다.”

김 사장이 잘못한 것은 없었다. 아무리 미래를 경험하고 왔지만 수안이 모든 주식의 등락을 기억할 수는 없었다. 기억나는 몇 가지 종목과 일부 정보만 알려 줬는데, 지금처럼 높은 수익을 내는 것도 칭찬할 일이었다.

“동생들 계좌는 지금처럼 운용하고 아내 계좌는 앞으로 공격적으로 진행하자.”

안정적으로 운영했음에도 지금과 같은 수익을 보였으니 공격적으로 진행하면 더 큰 수익을 올릴 수 있을 터였다.

“사모님 명의로 다른 증권 계좌도 부탁드립니다. 강운 증권 하나로는 부족합니다.”

“바로 가져다주지.”

* * *

띠리링. 띠리링.

“전략실입니다.”

-최 실장님? 저 수안입니다.

“아…. 도련님 전화는 왠지 걱정부터 드니 참 이상하죠?”

-하하. 불쑥 찾아가지 않겠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오시려고요? 오늘 외부 일정이 있고, 내일도 모레도 있을 예정입니다.”

-아주 작정하셨네. 안 가요. 안 갑니다.

“하핫. 농담입니다. 언제든 오셔도 됩니다.”

-사실 허락 받을 일이 있어서 연락했습니다.

“허락이요? 제 허락이 필요한 일이 있으십니까? 그런 일이 있기나 하고요?”

수안이 본인의 허락을 구할 일이 뭐가 있을까 싶었다.

-지난번에 사장님 한 분 만났다가 다시는 사장들 안 본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그거 철회 좀 합시다.

“…대놓고 만나시겠단 말씀이네요.”

-그때 그 일이나 계열사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수진이랑 수현이 일 때문에 보려고요.

“아가씨들이요?”

-수진이는 강운 패션 사장이 앞으로 영업일을 하라고 했답니다. 수현이는 뉴월드 호텔에서 청소나 하게 생겼고요.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들어 보려고 합니다.

“박 사장이랑 정 사장이 왜 그랬을까요? 저도 궁금합니다.”

-저도 무척 궁금한데, 전화로 물어보는 것보단 직접 만나서 얘기 듣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실장님이 연락하면 회장님의 압력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 일이라 제가 직접 얼굴 보면서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고 싶어요.

“흠…. 그런 일이라면 제가 허락하지 않을 수 없죠.”

-허락 감사합니다. 실장님.

“푸훗. 진짜 허락해 주는 기분이네요. 허락은 농담입니다. 편하게 보십시오. 미리 사장들과 친분을 만들어 두면 나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도련님은 회장님 아드님이고 언제든 강운 그룹으로 들어오실 분입니다. 제게 더 당당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제가 함부로 그럴 수야 있나요. 저도 위아래는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인생 선배님이기도 하고 회사에서도 까마득한 선배 아닙니까. 저보다 아버지도 오래 보셨죠? 여러모로 제가 실장님께 비빌 깜냥은 안 되죠.

“하하. 정 사장과 박 사장 보시고 나중에 다시 연락해 주십시오. 뒷얘기가 궁금하네요.”

-예. 편안한 곳에서 약속 잡고 만난 다음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들어가십시오.

“예. 도련님.”

전화를 내려놓은 최학주는 자신의 얼굴에 미소가 어려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 참….”

평소 웃을 일이 별로 없는 최학주다. 항상 굳은 얼굴로 직원들을 감시하고 외부 인사들과 만나도 속마음이 들키지 않도록 감정을 죽이며 살아왔다.

그런 그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어린 것이다. 먼저 농담을 던지기까지 했다.

“수안 도련님은 사람을 즐겁게 하는 재주가 있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