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명
수안은 아버지 앞에 앉아 무슨 소릴 하실까 기다리고 있었다.
“요즘 훈련에 열심히 참여하더구나.”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일입니다. 제가 열심히 하지 않을 이유가 없죠.”
대통령이 원해서 하는 운동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부모가 원하고 자신이 원하는 올림픽 출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본래 한 번 더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으니 마음을 바꿔먹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시작은 강요였을지 몰라도 지금은 스스로 앞으로 나가고 있다. 남에게 끌려가는 인생은 지난 생으로 충분했다.
“그래도 4개 종목은 무리 아니냐?”
예전 올림픽처럼 두 종목에만 출전할 줄 알았는데, 하나씩 늘더니 총 4개 종목에 출전한다고 알려왔다.
“아버지 하나 어머니 하나. 마누라 하나에 태어날 아기도 하나 챙겨야죠. 도합 네 개의 메달이 필요합니다.”
“욕심이 아주 그득그득하구나.”
“누구 아들인데요.”
강운모 회장은 말 한번 잘했다는 듯이 이어서 말했다.
“그 욕심을 왜 강운 그룹에는 부리지 않아? 회사 지분도 예전에 강운 전자 취득한 것이 전부잖아. 싼값에 주요 계열사 전환 사채 받으라는데 그게 왜 싫어?”
“아버지….”
결국은 이 얘기였다.
“혹시나 문제가 생겨도 이번 정권이라야 해결이 쉽단 말이다. 다음 정권이 들어서면 봐주겠어? 특히 정권 초반엔 뭐라도 건지려고 야단이야. 자칫 늦어지면 강운 그룹이 도마 위에 올라간다.”
“아버지.”
아버지의 마음은 충분히 수안에게 전해졌다.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아도 아버지가 자신을 크게 믿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말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지분으로 이 믿음을 표현하고 있었다.
“앞으로 회사가 더 성장하기 시작하면 쉽지 않아. 지금이 적기다. 전환 사채에 대한 법 개정은 아직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았으니 법적인 문제가 생기기 전에 얼른….”
“아버지. 전 아버지가 계신 강운이 좋습니다.”
“…….”
“강운 그룹 회장 강운모. 강운 그룹에 회장 직함과 아버지 이름 석 자가 들리는 것이 좋습니다. 아직은 회사에 제 이름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강운 그룹은 오직 아버지 것이었으면 해요. 지분 넘기지 마시고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시면서 강운 그룹 회장님으로 계셔 주세요. 이게 제 바람입니다.”
“이 녀석이….”
아버지가 다른 핑계를 대기 전에 얼른 말을 돌렸다.
“요즘 기술이 좋아졌는지 병원에서 아이 성별도 알아볼 수 있었어요. 아들 이름. 아버지가 지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전 이름을 어떻게 할지 잘 모르겠어요.”
“아들? 아들이래?”
강운 병원 김 원장님께 부탁해서 아버지에게도 숨길 수 있었다.
나중에 놀라게 해 드리고 싶었지만, 이렇게 써먹을 수 있으니 다행이라 생각했다.
생각대로 아버지는 아들이라는 말에 반색하셨다.
“예. 아들이랍니다.”
“허허허. 허허허허.”
“아버지가 이름을 지어 주시면 건강하게 잘 자랄 것 같습니다. 제가 이렇게 잘 큰 것처럼 제 아들도 잘 자라도록 좋은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말을 돌리기 위해 한 말이기도 하지만 예전부터 생각했던 일이기도 하다.
아이가 태어나면 아버지에게 이름을 부탁하고 싶었다. 할아버지가 지어 준 이름. 아들에게도 큰 의미가 될 것 같았다.
“그래. 내가 좋은 이름으로 지어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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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운모 회장은 아들을 보내고 다시 고요한 집무실에 혼자 남았다.
전처럼 책상을 두드리며 고민에 빠진 것이 아니다.
책장 구석에 박혀 있던 옥편을 꺼내 들었고, 안경을 꺼내 쓰고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손자 이름이라. 뭐가 좋을까. 무슨 좋은 뜻이 있을까.’
전환 사채에 대한 걱정은 저 멀리 사라져 버렸다.
아들이 아버지를 생각하는 마음을 듣고 이미 지분을 넘길 생각은 내려놨다.
지금은 아들 손자가 태어난다는 기대가 강운모 회장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 * *
김일삼 정부가 가속화되는 레임덕을 체감하고 있는 1996년이다.
지난해처럼 심각한 사건 사고는 뜸하지만, 내년엔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사건이 다가오고 있었다.
IMF 환란. 아직 많은 이들이 알지 못하지만, 1997년 초 한보 그룹 부도를 시작으로 위기감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이제 1년 남았다.
다가오는 위기와 별개로 수안의 더블 스타는 나날이 발전하고 있었다.
Window 95가 깔린 PC들이 각 가정에 보급되고 있었고, 덕분에 더블 스타 자회사인 SJ 컴퓨터의 실적이 쭉쭉 올라가고 있었다. 여기에 한컴의 소프트웨어도 함께 팔려나갔고, 게임을 개발하는 회사들도 웃음꽃을 피우고 있다. 팬탁의 삐삐는 여전히 잘 팔리고 있지만 이제 휴대폰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처음 CDMA 방식의 휴대폰이 선보이는 해였다. 아직은 한국 통신과 세기 통신만이 휴대폰을 개통할 수 있는 통신사였다.
그리고 올해 PCS 사업자 신청이 시작된다. 수안은 여기에도 참여하지 않을 생각이다.
나중에 세기 통신 지분을 인수할 생각이라 골치 아픈 싸움엔 끼어들고 싶지 않다.
그리고 팬탁의 박병우 사장이 007가방에 소중히 운반해 온 물건을 수안에게 열어 보여 줬다.
“저희 팬탁의 첫 휴대폰입니다.”
팬탁 박병우 사장은 그간 PCS 폰을 개발하기 위해 개발진과 함께 밤낮없이 연구에 매달렸다.
그 결과물이 이제 수안의 손에도 들어온 것이다.
수안은 수정에 수정을 더한 휴대폰을 손에 쥐고 뭉클한 감정을 느꼈다.
아직은 조잡스러운 느낌이 들지만, 기존의 벽돌 폰에 비하면 세련되고 아담하다고 표현해도 좋았다.
“딱 손에 들어오는 그립감이 좋습니다.”
“지금은 이 정도에 그쳤지만 앞으로 더 나아질 겁니다.”
수안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수정을 요구했다.
“색상은 화이트. 펄을 섞어서 반짝이는 디자인으로 구성해도 좋을 것 같네요.”
향후 팬탁의 트레이드 마크가 될 화이트 펄 휴대폰이다.
“하지만 검은색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블랙 펄과 화이트 펄. 색상은 두 가지로 출시합시다. 마지막 수정입니다.”
“그럼 인증받고 양산에 돌입하겠습니다.”
통신사는 얻지 못했지만, 휴대폰 제조업은 시작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수안은 팬탁에서 개발한 다른 제품을 언급했다.
“MP3는 잘 팔릴 것 같습니까?”
세계 최초의 MP3 Portable Player를 팬탁에서 만들었다.
수안은 MP3의 성공을 자신하고 있지만, 박 사장은 아직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판매 가격도 비싸고 용량도 부족해서 아직은 미지수입니다.”
“시작했으니 끝을 봅시다. 휴대폰은 대중화되려면 시간이 필요하고 경쟁자도 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MP3는 우리가 독보적입니다. 미국을 포함한 해외 각국에 수출할 계획도 세우고 있으세요. 우리나라는 MP3 종주국이 될 겁니다. 대표적인 기업은 박 사장님의 팬탁이 될 것이고요.”
“예. 부사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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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우 사장이 나가고 다시 통신사를 생각하다 보니 수용이 떠올랐다.
‘통신사는 나중에 수용이 시켜 볼까?’
수용이를 생각하니 이번엔 한송 그룹 큰아버지가 떠오른다. 둘의 성향이 어딘가 닮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께서 생존해 계실 때 맏아들 강병모 회장에 대한 아버지와의 대화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수안이 막 돌이 지났을 때 일이다. 수안이 알아듣고 있을 거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서로 대화한 것이다. 할아버지 품에 안겨서 들은 큰아버지의 성향 평가는 상당히 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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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모는 뭘 맡겨도 벅찰 거야. 현상 유지도 힘들어. 운모야. 믿을 건 너밖에 없다.”
“아버지….”
둘째 아들을 부회장에 올릴 때부터 이미 마음먹고 있었던 일이다.
“병모에겐 따로 땅과 현금을 내줄 생각이다. 넌 강운 그룹을 공고히 지켜 내라.”
“알겠습니다. 안전에 안전을 더해 확실하게 그룹을 지켜 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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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아버지는 강운 그룹에 욕심을 냈지만, 과도한 욕심이었다. 한송 텔레콤이 주력인 한송 그룹에서도 강병모 회장은 이렇다 할 지도력을 보여 주지 못하고 있다. 모든 진두지휘는 박수겸 사장이 맡아서 진행하고, 강병모 회장은 박 사장이 가져온 서류에 사인이나 하면서 회사를 운영한다.
강 회장이 없어도 한송 그룹은 멀쩡하게 잘 굴러갈 것이다.
강운이 큰아버지 손에 있었다면 IMF도 넘기지 못했을 게 뻔했다. 그나마 아버지가 계시던 과거엔 힘들게 IMF를 이겨내고 30대 그룹에는 이름을 올렸었다.
지금이야 수안 덕분에 대현과 1, 2위를 다투고 있었고, IMF가 지나고 난 다음의 강운 그룹은 재계 서열 1위에서 절대로 내려오지 않을 것이다. 수안이 살아 있는 한 이는 불변의 진실이다.
수용은 가진 기질이 큰아버지와 비슷했다.
욕심은 있지만, 노력은 하지 않았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면서도 깊이 있는 만남은 가지지 않았다. 수용 주변에 남는 인맥은 돈으로 만들어 낸 허상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녀석에게 인복이라면 수안을 형으로 둔 것밖에 없었다. 제 누나들에게 휘둘리기만 하고 결국은 외톨이였다.
‘나중에 세기 통신을 인수하면 차근차근 시켜 봐야겠어.’
디스플레이와 배터리를 공부하라고 했지만, 열심히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통신사로 방향을 틀어도 그냥 받아들일 녀석이다.
‘언제 정신을 차리고 공부를 하려는지….’
못났어도 동생이다.
“얘도 군대에 다녀와야 철이 들려나?”
수용이 들었다면 경악했을 소리였다.
* * *
수진은 야심 차게 강운 패션에 입사해 일을 시작했다.
오빠 수안이 준 사업 계획에 자신의 아이디어를 더해 그럴싸한 자료를 만들고 있었고, 조만간 사장님까지 모시고 신사업 계획을 발표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아직은 시일이 많이 남았다고 생각했다. 오래도록 진행해야 하는 사업이고 특히 뷰티 쪽은 새롭게 진출하는 사업이라 사업성에 대한 검토도 필요했다.
그런데 어느 날 들어간 실장급 회의에서 자신의 사업 계획과 비슷한 사업이 이미 진행 중임을 알게 되었다.
“어?”
거의 똑같다고 할 수 있었다. SPA 브랜드로의 진출과 향후 뷰티 사업으로 진출해 저렴한 고품질 화장품 사업에도 진출한다는 계획이다. 그리고 이 사업은 이미 회장님의 재가를 얻어 신규 사업부 TFT가 구성되어 있단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수진은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박 사장님 보는 눈이 있지 않아요? 저런 사업 계획을 어떻게 알아보시고 승인하셨을까요?”
“…최 실장님. 저 사업 계획 누가 입안했는지 아세요?”
수진의 물음에 최 실장이 답했다.
“박 사장님이 핵심 인재로 키워 주고 있는 정 부장님이 내신 아이디어라고 들었어요. 정 부장님 감각이 엄청나잖아요. 이번에 신사업 잘되면 나중에 부사장까지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소문이 돌아요.”
정 부장이면 수진도 잘 알고 있었다. 수진이 들어오기 전부터 뛰어난 감각으로 패션 사업을 크게 성장시킨 공신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같은 여성이라 수진이 자신의 인재 풀에 넣으려 고려하기도 했었다.
“저 디테일한 계획을 정 부장님 혼자서 하셨대요?”
“아뇨. 정 부장님이 팀원들하고 계속 회의를 거듭하셨다고 해요. 강 실장님 오기 전부터 매일 야근했다고 들었어요. 큰 얼개는 정 부장님이 만들고, 세세한 계획은 팀원들과 함께하고.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 팀원들의 잠재력까지 끌어올리는 리더십과 카리스마. 캬아. 정 부장님은 완전 워너비라고요.”
아무리 물어봐도 자신의 서류가 유출된 것 같지가 않았다. 결국 오빠의 계획은 발 빠른 누군가가 먼저 떠올리고 실행에 옮긴 것이다.
“강 실장님도 대단하다고 생각하세요?”
“하아. 나도 저 생각했었거든요.”
자신이 세운 계획은 아니지만, 여긴 실망감이 큰 것이 아니다.
이번 사업 계획이 자신에게 날개를 달아 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늦었어. 너무 늦었어.’
“어머. 그래요? 역시 해외유학파답게 감각이 있으세요. 그런데 아쉬워서 어떡해요. 지금 진행 중인 사업은 이미 팀이 단단히 짜여 있어서 들어갈 수가 없다는데….”
“한발 늦었으니 어쩔 수 없죠. 그리고 저 계획이 더 세련되고 실현 가능성이 높아 보여요. 제가 생각하지 못한 위험성 평가까지 이루어졌어요. 정 부장님 감각이 대단하시네요.”
수진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계획이다. 패션 사업의 전문가들이 달라붙어 계획을 수정했으니 수진의 눈에 허점이 보일 리 없었다.
“강 실장은 저 좀 봅시다.”
박민후 사장의 호출이다.
“예. 사장님.”
집무실에 앉자마자 꺼낸 박 사장의 말에 수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보고. 대리점 관리를 맡아 보라고요?”
“영업이야말로 회사의 꽃입니다. 대리점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직접 발로 뛰면서 살펴야 패션 사업 전반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영업을 경험하지 않고 어떻게 회사를 이끌어 가겠습니까?”
“하지만 전 디자인 팀에 속해 있는데….”
“강 실장님은 일반 직원이 아니지 않습니까. 회사를 이해하려면 전 부서를 다 돌아야 합니다. 회장님도 이 얘길 들으시면 크게 환영하실걸요?”
“예….”
“그럼 그렇게 알고 있으시고 지금 있는 디자인 팀에서 업무를 이번 주 내로 정리하세요. 다음 주부턴 대리점 영업맨과 함께 각 매장으로 가시죠. 돈 주고도 하지 못할 진귀한 경험을 많이 하실 겁니다.”
수진은 아득한 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