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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비=사기 (86/304)

사이비=사기

“올림픽 준비나 하시면 좋겠는데. 자꾸 이렇게 회사 일에 손을 놓지 못하시면 회장님이 더 염려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바로 그겁니다. 제가 갖고 싶은 회사가 있는데, 이걸 해결할 수가 없어서 훈련할 마음도 안 납니다.”

“하아. 그걸 핑계라고 대십니까?”

“흐흐. 좀 봐주세요. 실장님.”

“…어딥니까? 그 회사가.”

수안의 살가운 태도에 최학주 실장도 들어나 보자는 마음이다.

“신나 레코드. 사이비 종교 교주가 운영하는 음반 유통 회사입니다. 음반 팔아 번 돈으로 사이비 종교를 일으키고 지방에 땅을 사서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했어요. 거기서 진짜 왕처럼 살고 있죠.”

“설마 그런 회사가 있을까 싶은데요? 요즘 소설도 쓰십니까?”

지금은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일이다. 믿어지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조사하면 다 나오겠죠. 아는 검사 있으시면 힘 좀 써주십시오. 음반사 수익도 빼돌리고 있다고 합니다. 사이비 종교를 이끌려면 돈이 필요했겠죠. 국세청에서 좋다고 할 것 같지 않으세요? 사이비 종교가 관련되어 있으니 언론에서도 관심을 가질 만한 정보가 아니겠습니까. 몇 개월 전에 일본 지하철에서 터진 사린가스 테러도 사이비 종교 단체가 벌인 일이라고 시끄러웠죠. 언론도 이번에 제대로 한 건 하겠네요.”

“검찰에 국세청. 거기다 언론까지 움직여야 합니까?”

“검찰을 움직이면 국세청이 따라올 것이고, 언론은 검찰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냄새를 맡지 않을까요?”

“말은 쉽게 하십니다. 에효….”

“국세청에서 괴롭히고, 검사는 구속을 하느니 마느니 겁을 줍니다. 언론에선 사이비 종교 교주가 운영하는 회사라고 떠들겠죠. 사이비 교주가 안 팔고 배기겠습니까?”

“실제로 그런 회사라면 별문제는 아니지만 실제로 건실한 회사라면 저희 검찰 라인도 난감합니다.”

“걱정 마세요. 진짜 사이비 교주가 일으킨 회사니까요. 그리고 국세청과 검찰이 달라붙어서 탈탈 터는데 먼지 안 날 회사 있습니까?”

“흐음.”

“솔직히 제가 아는 검사만 해도 상당합니다. 제가 쌓은 인맥을 활용해도 되지만, 일을 원활하게 처리하려고 최 실장님 찾아오지 않았겠습니까.”

“벌써 일을 이렇게 처리하시면….”

‘정공법을 배우기도 전에 공권력을 활용하는 꼼수를 배우면 안 되는데….’

최학주가 걱정하는 것은 다름 아니다. 공권력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그 자체는 상관없다. 이렇게 일을 처리하는 방식을 먼저 배우는 수안이 걱정이었다.

“이제 제 얘긴 다 했습니다. 최 실장님이 왜 절 보려 하셨는지 들어 볼까요?”

“제 대답은 듣지도 않으십니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잖습니까. 죄 많이 지은 회사가 있으니 범죄자를 잡는 검사가 당연히 가서 잡아야죠.”

“…알겠습니다. 칼잡이 하나 투입해 보죠.”

“고맙습니다. 실장님. 흐흐흐.”

“제 볼일은 별거 아닙니다. 조만간 강운 홀딩스에서 발행할 전환 사채에 대한 내용입니다.”

“……!!”

‘…그걸 왜 우리가 먼저 발행한단 말입니까.’

수안은 아득한 심정을 감추고 말했다.

“강운 홀딩스에서 저가에 전환 사채를 발행할 생각인가 보네요. 마침 강운 홀딩스는 비상장 회사이니 주주가 전환 사채 취득을 거부하면 해당 전환 사채를 특정인에게 임의 배정할 수 있죠?”

“…전문적인 정보를 어떻게 다 알고 계십니까?”

“저 법대 나온 사람입니다. 그리고 회사 운영하면서 그런 것도 모르고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서 미리 공부 좀 했습니다. 제가 김칫국 마시는 걸지도 모르겠는데… 저보고 인수하라 그 말씀이세요?”

“회장님께서 지시하셨습니다. 도련님만 알고 계셔야 합니다.”

“동생들은 제외라는 말씀이네요.”

삼디 그룹은 장자뿐 아니라 여자 형제들에게도 일부 배분했는데, 아버지는 그마저도 허락지 않으신다.

“…회장님 마음이 향하는 곳이 어딘지는 도련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안다. 잘 알고 있다.

동생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수안에게 비교하긴 쉽지 않다.

아버지가 일을 처리하는 복잡한 방정식.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위험을 삭제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지극히 안정적인 경영. 여기에 더해 완고하고 단단한 기업가 정신. 아버지 눈높이를 맞출 수 있는 자식은 수안 하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 얘기를 듣고 보니 동생들이 느낄 허전함과 실망감이 먼저 생각났다.

“강운 홀딩스는 강운 그룹의 순환 출자 고리 중 하나였죠?”

“예. 맞습니다. 여기에 강운 생명보험, 강운 전자와 강운 무역이 포함됩니다.”

“전환 사채로 인한 문제가 없으리라고 자신하세요?”

“언론에서 떠들 수 있지만, 법적으로 문제가 있는 건 아닙니다. 편법 증여라 할 수는 있겠지만… 편법이라 표현하는 이유는 불법이 아니라 적법이기 때문이죠.”

“압니다. 증여세는 포괄주의가 아니라 열거주의를 택하고 있으니까요. 법적인 문제가 아니라 도덕적인 문제가 남으니 해 본 말입니다. 이 일이 그대로 진행되면 전 헐값에 전환 사채를 매입해 강운을 홀랑 가져가는 천하의 나쁜 놈이 됩니다. 올림픽 스타로 쌓아 온 이미지가 저 하늘에서 저 땅 밑으로 추락하는 거죠.”

수안의 손가락이 하늘과 땅을 번갈아 가리켰다. 이 일로 삼디 그룹이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뻔히 기억하고 있었다. 결국은 법정으로 가는 사안이다. 형사 사건으로는 무죄가 선고될지라도 민사로는 배임에 해당하는 사건으로 결론지어진다. 당시 삼디 그룹이 검찰과 법원에 보유한 힘의 크기를 보여 준 결과였다.

아주 재미있는 판결이 아닐 수 없다.

“국민들에게 보이는 이미지 때문에 강운 그룹이라는 견고한 성을 무너트릴 수 없습니다.”

최학주는 김현상 사장과 마찬가지로 아버지를 진심으로 따르는 골수 강운 그룹 사람이다.

수안의 이미지와 강운 그룹 사이에서의 선택은 당연히 강운 그룹이었다.

“누가 무너트린답니까? 딱 2년만 지나고 합시다.”

“2년이요?”

“제가 말씀드린 금융 위기. 그 위기라면 헐값에 전환 사채를 발행해도 문제 삼을 사람은 없을 겁니다.”

“위기는 오직 도련님의 예상일뿐입니다. 불확실하죠. 게다가 시일이 지날수록 위험이 커지는데….”

“시일이 지나 위험한 일이면 그땐 안 하면 됩니다. 아버지가 위험을 감수하고 일을 실행한 적 있습니까?”

“없으시죠.”

“부탁드립니다. 제가 강운을 갖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때가 아니라서 그렇습니다. 나중엔 오히려 제가 부탁드려야 할 일이죠. 적절한 시기가 오면 그때 다시 진행합시다. 실장님.”

수안은 삼디 그룹의 모든 것을 빼앗고 있었지만, 이런 나쁜 타이틀까지 빼앗고 싶은 마음은 없다. 삼디 그룹이 먼저 실행하고 문제를 일으키면 쏙 들어갈 얘기였다. 그리고 IMF 시기에는 누구든 납득할 수밖에 없다. 회사에 돈이 없어 발행한다는데 누가 뭐라 한단 말인가.

“우선 보고 드리죠. 만약 그래도 강행하신다면 그때는 못 막습니다.”

“좋습니다. 저도 회장님이 그렇게 결정하신다면 따르겠습니다. 정 안 되면 내년 올림픽이라도 끝나고 진행하자 해 주세요. 그래야 제가 마음 편히 달리지 않겠습니까.”

“그 부분도 말씀드리죠. 알겠습니다.”

수안은 최 실장을 보고 나오며 마음이 무거웠다.

동생들은 쏙 빼고 자신만 전환 사채를 주려 한다는 말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나눠 주셔야죠. 아버지….’

수안은 무거운 마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갔다.

* * *

집에 돌아온 수안의 얼굴에 그늘이 진 것을 보고 아현이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아냐. 그냥 회사 일.”

“회사 일이라고 뭉뚱그리지 말고 얘기해 봐요.”

“에효….”

수안은 갑자기 나온 지분 이동 건에 대해서 대강 설명했다.

“아버지께서 미리 지분을 넘기시려는 것 같아. 강운 홀딩스에서 전환 사채를 발행할 테니 나보고 인수하는 게 어떠냐고… 최 실장을 통해 들었어. 난 지금은 아니라고 말씀드렸고. 나중에 다시 생각해 봤으면 했거든.”

“강운 홀딩스라면… 중요 계열사 주식을 많이 가지고 있잖아요.”

아현도 열심히 강운 그룹에 관해 공부해서 강운 홀딩스가 갖는 위치를 이해하고 있었다.

“맞아. 강운 홀딩스가 강운 그룹 순환 출자 고리 중 하나야.”

“그런데 당신만? 시누이들과 도련님 얘기가 없네요?”

“동생들은 단 1%도 없어. 동생들에겐 얘기도 꺼내지 말라고 하더라.”

“…….”

“녀석들 생각하니까 기분이 별로야.”

“어쩜 좋아요….”

그래도 아내에게 털어놓으니 조금은 나아진 기분이다.

“내일 같이 쇼핑 갈래?”

“쇼핑하면 기분이 나아지죠. 좋아요.”

* * *

아현과 쇼핑하며 기분을 조금 풀고 회사로 돌아온 수안은 살짝 들떠 있는 배영성과 김현성 사장을 만날 수 있었다.

“뭐야? 좋은 일 있어?”

“지난번 일과 비슷한 일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수안이 자리에 앉자 배영성이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수안은 배영성의 설명을 들으며 끅끅거리다가 얘기가 끝나자 더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푸흐하하하. 배 이사 덕분에 내 기분이 확 풀린다.”

“그렇죠? 좋은 기회인 것 같죠?”

배영성은 주변에 발이 넓은 편에 속했고, 이런저런 인적 라인을 통해 찾아오는 사람도 많았다.

이번에 찾아온 사람도 그런 부류의 사람 중 하나였고, 배영성은 그들의 말에 홀딱 넘어간 상태였다.

배영성의 말을 요약하면 간단했다.

해외 권력자와 비밀 기관의 자산을 관리하던 비밀스러운 사람이 찾아왔다.

그 권력자는 죽었고, 이제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그 자산을 회수해야 하는데 달러로 보관 중이다. 달러를 감추기 위해 모종의 화학 처리를 해 놨는데, 이를 복원하려면 특수 용액과 시설이 필요하다.

시설을 구비하는 데 필요한 일부 돈을 투자해 주면 큰돈으로 보상해 준다고 했단다.

일전에 주수동의 일로 권력자의 돈맛을 봐서 더 쉽게 넘어간 것이 틀림없다.

웃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푸하하하. 날 죽일 셈이야? 그만 좀 웃겨. 하하하.”

김현성 사장도 배영성의 주장을 믿고 있었는지 말을 보탰다.

“저도 그 사람이 준 달러를 은행에 맡겨 봤는데… 위조지폐는 아니었습니다. 바로 입금해 주던데요?”

“그렇습니다. 그 사람은 권력자 대신 보관하던 수십조의 자산을 가로채서 현금화하고 나라에도 많이 기부하겠다고….”

“아이고. 이 순둥이들아. 그런 돈이 있는 놈이 미쳤다고 돈을 나누겠어?”

“사기란 말씀입니까? 외국인도 함께 있었고, 국내 정치권 인물들과 같이 찍은 사진도 보여 줬는데….”

“다음에 만날 때 경찰이라도 불러. 그런 놈들에게 당하는 사람이 더 생기지 않게.”

“…사기가 확실한가 보네요.”

수안의 확고한 답에 배영성은 사기로 확신했다.

“논리에 허점은 보여 주지 않았을 거야. 눈앞에서 검은 종이가 달러로 변하는 것을 보면 넘어갈 수밖에 없지. 김현성 사장도 이번에 사기꾼이 어떻게 사기를 쳤는지 잘 기억해 둬. 진짜 사기꾼은 자신도 속이는 종자들이야.”

“제가 사탕발림에 넘어가 허튼소리를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부사장님.”

“세상에 사기꾼이 참 많아.”

“그놈들은 은팔찌 채워서 유치장으로 보내겠습니다.”

“속았다고 생각하니… 기분 정말 더럽습니다.”

“녀석들 잡으면 언론에도 알려. 그래야 다른 피해자를 막을 수 있어.”

“이놈들이 끝이 아닙니까?”

“아마. 배후에 국제적 조직이 있지 싶은데?”

“후아.”

수안은 잠시 기분을 풀어 준 사건 덕분에 동생들에 대한 미안함을 잊고 업무에 집중할 수 있었다.

“배 이사는 강운 그룹 계열사 사장단에 배포할 자료 정리해서 사장들 비서에게 가져다줘. 이번에도 최 실장에게 들키면 큰일이야.”

“예. 부사장님.”

강운 전자 사장은 앞으로 지시만 내리라고 했었다.

그래서 각 사장단이 앞으로 진행할 위기 상황 준비 작업을 간단하게 정리해 전달할 생각이었다.

최학주 실장에게 만나지 않겠다고 했으니 약속은 지킬 생각이다.

‘직접 만나지만 않으면 되지 뭐.’

“김 사장은 신나 레코드 인수 준비 시작해. 어제 최학주 실장에게 검찰과 국세청 동원해 달라고 했으니 곧 공격을 시작할 거야. 신나 레코드는….”

수안의 상황 설명에 김현성은 기함했다.

“허! 사이비 교주가 운영하는 음반 회사가 있습니까? 신도들을 노동력으로 활용해서요? 인건비는 싸게 먹혔겠네요. 허! 나 참.”

배영성은 이미 어제 들어 알고 있었지만, 다시 들어도 신기하고 새롭다.

“새천년이 다가와서 그럴까요? 여기저기 사이비 종교가 말썽이네요.”

“세상천지에 사기꾼 없는 곳이 없습니다.”

“정치인도 결국 높은 자리에 앉은 사기꾼일 뿐이야.”

“풋. 그것도 맞는 말씀이시죠.”

수안과 일행이 정치인을 입에 담는 그때 이현창 전 총리는 한신당 의원들과 자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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