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즈음에
이제 7월 초. 동해에 다녀오고 여름이 더 가까워졌다.
수안은 내년 올림픽을 위해 훈련장과 회사를 오가며 생활하고 있었다.
그리고 임경남 감독은 수안의 요청대로 어린 볼트를 데려왔다.
진짜로 데려왔다.
볼트의 가족과 형제들을 모두!
수안은 속으로만 환호성을 질렀다.
‘볼트! 볼트다! 전설의 레전드! 볼트!’
하지만 즐거움은 잠시였다.
“죄송합니다만, 잠시 해외여행 하는 셈 치고 왔다는데요?”
“뭐?”
기분을 확 잡치는 배영성의 말이다.
“자메이카에서 떠날 생각은 없었답니다. 임경남 감독이 비행기 표에 돈까지 안겨 주며 한국으로 와 달라고 해서 왔지만, 한국에서 살 생각은 없답니다.”
“하! 그럼 뭐야? 영입은 물 건너갔어?”
“임 감독도 어린 볼트의 가능성은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래놓고 나 보곤 성공했다고 연락을 해?”
수안이 400m 계주 출전을 무를까 싶어서 볼트의 가족 전부를 한국으로 데려온 임 감독이다. 말 그대로 한국에 데려온 것이 전부다.
“추가 보상을 진행할까요?”
배영성이 말하는 지원은 더블 스타에서 따로 진행하는 스포츠 스타 전용 지원을 말함이다.
강운 육상 실업팀에서 줄 수 있는 돈보다 더 많은 돈을 지급할 수 있을 터였다.
“그래. 여왕님을 모시려고 만든 체계를 저 녀석에게 먼저 써먹네.”
내년 피겨 퀸을 영접하기 전에 모든 준비를 끝내야 했다. 아무리 볼트가 대단한 녀석이라도 퀸에 비할 바는 아니다. 녀석에게 지원하는 모든 것은 내년 퀸을 위한 예행 연습에 불과했다.
“볼트의 부모와 접촉해 보겠습니다.”
.
.
.
배영성은 자신만만하게 볼트의 부모를 만나러 갔지만 빈손으로 돌아왔다.
“뭔데? 얼굴이 왜 그래?”
“싫답니다. 아무리 많은 돈을 제안해도 소용없습니다.”
“이유는?”
“자메이카가 좋다고 합니다. 애국자예요.”
“하….”
‘이번 올림픽 출전도 욕심인데, 볼트까지…. 내가 너무 큰 욕심을 부렸어.’
수안 자신도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자였다.
다른 나라 사람을 한국인으로 만들어 금메달을 갈취하겠다는 생각부터가 잘못된 판단이었다.
‘내가 갈 길이 아니었어.’
일이 잘못되고 나서야 후회가 몰려왔다.
국내 선수들이 어려운 환경에서 훈련하지 않는 정도로 충분했다. 미래를 통해 알고 있는 해외 스포츠 스타까지 데려오는 것은 과도한 욕심이었다.
“볼트 가족이 언제까지 한국에 머물기로 했지?”
“이번 주에 돌아간다고 합니다. 그래도 볼트는 훈련장에 보내 주네요.”
“훈련장으로 가자.”
“예. 부사장님.”
단거리 선수에게 장거리를 뛰라고 했던 임 감독은 오히려 선수들 기록이 퇴보하는 것을 확인하고 관련 훈련을 백지화시켰다. 될 수가 없는 훈련이다. 괜히 선수들만 똥개 훈련을 했다.
단거리 선수는 단시간에 폭발적인 스피드를 내며 달려야 하고 장거리 선수는 긴 시간 동안 에너지를 비축하고 달려야 했다. 서로 가진 근섬유의 기질이 아예 다르다. 단거리 선수에게 장거리를 시켰다간 오히려 이번과 같이 기록을 퇴보시키는 꼴밖에 나지 않는다.
결국, 단거리는 다시 본래 훈련 스케줄로 회귀했다.
임 감독이 약속을 이행하지 못했지만 이미 시작한 훈련을 뒤집고 출전하지 않을 수는 없다.
덕분에 수안은 본래대로 훈련받던 선수들과 같이 400m 계주(릴레이) 경기를 준비하느라 함께 구슬땀을 흘려야 했다.
400m 경기에서 필승을 위한 방법은 별것 아니다.
수안이 마지막 주자로 뛰고 최대한 많이 뛰게 할 것.
세 번째 주자가 넘겨주는 바통을 가까이 마중 나와서 이어받은 수안이 마지막 주자로서 결승선을 주파하면 된다.
수안이 세 번째 주자의 바통을 받아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고 곧 결승선을 돌파했다.
파바박!
딸깍.
임경남 감독은 기록을 크게 소리쳤다.
“38초45! 좋았어! 이대로만 가자!”
수안은 다른 선수들과 한동안 400m 계주를 연습한 다음 벤치에서 쉬고 있었고, 배영성이 음료를 들고 와 옆에 앉았다. 배영성과 함께 선수들이 훈련하는 걸 지켜봤다.
멀리서 볼트가 다른 선수들과 함께 트랙을 달리고 있었다.
어린 나이임에도 곧잘 프로 선수들의 뒤를 따른다.
곧 돌아가지만 수안의 강력한 요청에 기초적인 육상 훈련을 받고 있었다.
“전설이 달리네요.”
“그래. 전설이 한국에서 달리네.”
“그런데 키도 참 큽니다. 9살이라면서요?”
“나중에 195cm까지 클 녀석이야.”
국내 또래 아이들 신장과 비교해 월등하게 큰 볼트였다.
“우아.”
“내가 없는 자리를 저 녀석이 채울 거야. 물론 한국인 볼트가 아니라 자메이카의 볼트가 되겠지만….”
볼트가 16세 되는 해에 열릴 2002년 제9회 세계 선수권 대회부터 녀석은 두각을 드러낸다.
이후 2008년 베이징 올림픽부터 세계 선수권 대회와 올림픽을 모조리 녀석이 독식할 예정이었다. 수안의 자세한 설명에 배영성의 입이 쩍 벌어졌다. 정말 수안의 기록을 뛰어넘을 녀석이었다.
“한국에 있는 동안 가족들이 편하게 관광하도록 직원을 붙이겠습니다.”
“그래. 한국에 좋은 인상이라도 남겨 줘.”
“맡겨 주십시오.”
‘미안했다. 볼트.’
수안은 일어나서 임경남 감독 가까이로 갔다.
“임 감독님. 볼트 좀 불러 줘요.”
“왜?”
“이번 애틀랜타 올림픽에 저 녀석도 초대합시다.”
“뭐? 잠깐 여행이나 왔다는 녀석을 왜 자꾸 챙겨 줘?”
“우리나라 사람 아니라도 저 녀석이 날 이어받을 녀석입니다. 미리 뭐라도 해 주고 싶어요.”
“야. 수안아.”
“볼트!!”
임 감독이 볼트를 불러 주지 않아 직접 볼트를 불렀다.
볼트가 달려오는 사이 임경남 감독에게 확정적으로 말했다.
“임 감독님이 안 하시면 내가 초대하면 되죠. 난 저 녀석이랑 훈련 좀 해 보겠습니다.”
“같이 뛰자! Let's Run!”
“Okay! Sir.”
수안은 볼트 곁에서 달리며 보조를 맞춰 줬다.
이런 훈련 모습은 카메라를 든 배영성에 의해 사진으로 남겨지고 있었다.
‘전설과 전설의 만남. 나중에 대단한 사진이 될 거야.’
* * *
SN 엔터테인먼트에서 야심 차게 준비한 아이돌 그룹이 지상파 음악 프로그램을 통해 데뷔하고 벌써 두 달이 흘렀다. 예전엔 태지와 아해들이 은퇴하고 난 후에 데뷔했지만, 수안으로 인하여 이른 데뷔를 한 것이다.
데뷔는 달라졌지만, 그 인기는 예전과 다르지 않았다. 자신감 넘치고 통통 튀는 매력의 다섯 남자 가수는 사춘기 여학생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학원 폭력을 노래한 데뷔곡에 이어 사탕이라는 후속곡이 이어지며 메가 히트 급 대박이 나 버렸다.
10년만 흘러도 다양한 컨셉의 아이돌 그룹이 춘추 전국 시대를 이루지만, 지금은 오로지 이들의 독무대다. 이 시대의 완벽하고 유일한 10대들의 아이콘. 이들이 바로 HOT이다.
수안은 선물을 챙겨 이수남의 회사로 향했다.
“안녕하십니까. 부사장님.”
“제가 대박 난다고 했잖아요.”
이수남도 수안이 무슨 말을 하는지 단번에 알아듣는다.
“흐하하. 제가 요즘 걔들 때문에 안 먹어도 배가 부릅니다.”
“그래도 밥은 먹고 살아야죠. 그 친구들 모아 놨죠?”
“예. 부사장님. 회의실로 가시죠.”
이수남을 따라 회의실에 도착하니 수안의 얼굴을 알아보고 후다닥 일어나 인사하는 다섯 멤버다.
“안녕하십니까!”
“하나. 둘.”
““우리는 H.O.T! 입니다!””
“하하하. 나한테는 안 그래도 되는데….”
수안은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금방 그들의 얼굴을 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이 어린 친구들은 요즘 정신없이 바쁘다. 갑작스럽게 불어난 인기에 여기저기 쇼 프로그램에 불려 다니고 있었다. 지금도 차에서 자다 일어나 회의실에 들어온 모양이다.
“잠이 부족한가 보네.”
“예. 요즘 방송 일정이 너무 많아서 잘 시간도 부족합니다.”
“이런 인기 쉽게 오지 않아. 지금 바쁘게 움직여야 인기를 제대로 누릴 수 있어.”
“예!”
수안은 선물을 꺼내기 전에 물었다.
“아직 첫 정산 전이지?”
“…….”
아직 어린 가수들은 이수남 사장의 눈치를 심하게 보며 답을 하지 못했다.
수안은 이수남 사장에게 직접 다시 물었다.
“이 사장님. 아직 정산 전이죠?”
“…예. 아직 분기 정산을 하려면 시일이 좀 남았습니다.”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지만, 수중에 돈은 한 푼도 없었다.
아직 첫 정산도 받지 못하고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는 다섯의 전사들이다.
그래서 수안이 준비했다.
“배 이사.”
“예.”
수안의 부름에 배 이사는 가져온 종이 가방에서 큼지막한 물건을 하나씩 꺼내서 어린 친구들 앞에 하나씩 내려놨다.
퉁. 퉁. 퉁. 퉁. 퉁.
수안은 멤버들이 놀라는 얼굴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고, 이수남은 똥 씹은 표정이었다.
“우아!!”
멤버 하나에 벽돌처럼 묶은 돈뭉치가 하나씩 놓였다. 천만 원이다. 앞으로 이들이 벌어들일 돈에 비하면 큰돈은 아니다.
“어차피 앞으로 많이 벌 테니까 용돈으로 쓰라고 가져왔어. 이건 회사 정산하고 전혀 관련 없이 내 자비로 지출한 돈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받아.”
리더가 얼른 멤버들 옆구리를 쳐서 일어나라고 하고 다시 큰 목소리로 인사했다.
“키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작 이 정도 크고 만족하려고? 더 커야지. 하하하.”
바쁜 가수들을 얼른 내보내고 이수남 사장과 다시 마주했다.
“후속 가수들 준비는 어때요?”
“차질 없이 준비 중입니다. 다음 달에 바로 출격합니다.”
“좋습니다. 다른 소속사에서 저들의 인기를 보고 새로운 보이 그룹을 내놓을 겁니다. 타도 HOT을 외치며 나오겠죠.”
“카피는 원본을 이길 수 없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죠. 그리고 이거 받아요.”
수안은 큰 봉투 하나를 이수남 사장에게 건네줬다.
“이게 뭡니까?”
“열어 봐요.”
이수남은 봉해지지 않은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꺼냈다.
내용물은 많지 않았다. 딱 한 장이다.
“허업!”
“쟤들 키우느라 고생했고, 앞으로도 고생 많을 테니까 미리 주는 겁니다.”
무기명 채권을 바꾸면서 만들어 둔 1억짜리 양도성 예금 증서였다.
“일억!!”
“애들은 천만 원 줬는데, 사장이 폼 안 나게 덜 받을 수 있습니까.”
“제 몸을 갈아 넣어서라도 다 성공시키겠습니다!”
“이 사장님을 갈아 넣으면 그 뒤는 어쩌려고요. 쉬엄쉬엄합시다. 아셨죠?”
“옙!”
수안은 돌아가는 차 안에서 라디오를 틀어보라고 했다.
혹시나 다섯 아이의 노래가 나오려나 싶었기 때문이다.
또 하~ 루~ 멀어져 간다. 내뿜은 담배 연기처럼….
수안의 바람과 다른 노래였지만, 그래도 수안이 매우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였다.
“캬아. 예전에 이 노래 진짜 좋아했는데 말이야.”
서른 즈음에 말고도 이 가수의 수많은 명곡이 있었다.
힘든 시절 그의 노래는 힘겹던 금용의 삶을 어루만져 줬다.
수안의 말을 들은 배영성이 가볍게 대꾸했다.
“작년 노래가 예전은 아니죠.”
“……!!”
지금은 95년. 서른 즈음에가 담긴 앨범은 94년 발매한 김광식의 네 번째 앨범이었다.
고작 1년 전 노래를 예전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 가수 좋아하시면 소극장 공연 티켓이라도 끊을까요? 종종 라이브 공연하는 걸로 압니다.”
“헙! 이분이 아직 살아 계셔?”
수안은 노래의 주인공이 한참 전에 죽었다고 생각했었다.
“부사장님. 김광식이 갑자기 왜 죽습니까? 멀쩡히 공연도 한다니까요.”
“다시 SN… 아니다 더블 엔터로 가자. 차 돌려! 빨리!!!”
이런 일은 김기수 사장이 제격이다.
김광식이 정말로 자살했는지 아니면 일부 사람들이 의심하는 것처럼 주변인에 살해당했는지는 지금 알 수 없다.
그래도 자살이든 타살이든 살아만 있다면 수안이 얼마든지 살릴 수 있다.
우울해서 자살을 결심했다면 우울하지 않게 만들어 주면 된다. 누군가 주장했던 것처럼 타살이라면 그 원인을 제거할 수 있었다.
김광식은 살아 있다면 반드시 살리고 싶은 사람이다.
“김 사장님!”
“예, 예!”
‘무슨 일로 여길 오셨지? 내가 사모님께 밉보인 일이 있었나?’
“포크송 가수 김광식 씨 알죠?”
“알죠.”
“데려오세요. 판권 가진 음반 회사가 킹레코드였던가요? 판권도 다 가져와요.”
“아….”
“그리고… 김광식의 아내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갈라 놔요.”
“……!!”
“수단과 방법을 따지지 않겠습니다. 이유는 묻지 말고요. 돈이 얼마가 들어도 좋아요. 이런 일이야말로 김 사장님 주특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능력 좀 보고 싶은데 말이죠.”
“수단과 방법을 따지지 않으면… 불가능이 있겠습니까. 하하하.”
김기수는 한껏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리고 겸사겸사 회사도 하나 더 인수할 생각입니다.”
“……!!”
‘회사를 겸사겸사 인수한다고?’
“사이비 종교 교주가 운영하는 음반 유통 회사가 있어요. 신나 레코드라고. 검찰, 국세청에서 도와줄 테니까 김 사장은 앞으로 거기도 겸업하면 되겠어요.”
“헙!”
“어딘지 압니까?”
“가수 김광식의 판권을 가진 킹레코드가 바로 그 회사 산하에 있습니다.”
일이 이렇게도 연결될 수 있구나 싶다.
“하! 딱 잘 걸렸네요. 인수하면 판권도 알아서 해결되겠어요. 그럼 김 사장은 김 사장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요. 난 내가 움직일 수 있는 곳을 움직일 테니까.”
“예! 부사장님.”
“배 이사!”
“예!”
“김 사장이 쓸 돈 부족하게 않게 내줘. 이런 돈을 회사에서 지급하진 못하잖아.”
“예. 알겠습니다. 김 사장님. 필요한 자금은 제가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김 사장님.”
“예!”
“김광식 씨 소속사로 데려오고 필요한 지원이 있다면 바로바로 실행하세요. 특히 이혼 후에 남을 김광식 씨 아이를 위한 보육에 특히 신경 써야 합니다.”
“나머지는 제게 맡겨 주십시오.”
“배 이사. 최학주 실장 보러 가자.”
“예.”
검찰과 국세청을 움직이려면 최학주 실장을 만나야 했다.
* * *
“한 번쯤은 연락하고 오셔도 될 텐데요.”
“하하하. 죄송합니다. 최 실장님.”
오늘도 무작정 찾아온 수안이다.
수안은 음료 한 박스를 탁자에 가만히 내려놨다.
“이거라도 드시면서 하세요….”
최학주는 음료수는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잘 오셨습니다. 안 그래도 조만간 한번 뵈어야 할 일이 있었거든요.”
“그래요? 저랑 마음이 통했나 봅니다.”
“…무슨 얘길 하시려고 이렇게 저자세로 나오실까요?”
수안에게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내는 최학주다.
“하하하….”
검찰과 국세청에 청탁을 넣어야 하는 일이다. 쉬운 일은 아닐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