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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과 거짓 사이 (84/304)

진실과 거짓 사이

다음 날 수안이 더블 스타에서 계열사 실적과 향후 사업 방향을 검토하고 있었는데, 비서실에서 손님이 찾아왔음을 알렸다.

“부사장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일정이 있었나?”

기억하지 못한 일정이 있나 싶었지만, 아무래도 기억나지 않는다.

달력을 살펴도 아무런 일정이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이어진 비서의 말에 왜 일정이 없는지 알 수 있었다.

“예정된 미팅은 없습니다. 최학주 전무님이 오셨습니다.”

“최 실장님? 최 실장님이면 물어볼 것 없어요. 얼른 안으로 모셔요.”

최학주 실장이면 약속을 잡고 오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본인도 최 실장을 찾을 때 약속하고 간 역사가 없다.

“예. 시원한 음료로 준비하겠습니다.”

“난 그냥 물.”

“그야 물론이죠. 미지근한 물로 드릴게요.”

비서가 나가고 최학주 실장이 들어왔다.

“실장님. 어서 오세요. 어려운 걸음 하셨네요.”

“오랜만에 의자에서 엉덩이 뗐습니다. 하하하. 운동 부족이에요.”

수안은 최 실장이 평소에 얼마나 바쁘게 움직이는지 잘 알고 있었다.

“운동 부족이라뇨. 최 실장님 바쁜 거 모르는 강운 직원 있습니까? 하하하. 앉으세요.”

수안은 상석이 아니라 최 실장 맞은편에 앉으며 나름의 예우를 갖췄다.

“회사가 바쁜 모양입니다.”

복도를 지나면서 직원들이 어떤 표정인지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살펴본 최학주다. 평소 강운 그룹에서도 직원들 감찰을 주로 하고 있으니 절로 눈이 갔다.

더블 스타 직원들은 나름 괜찮은 대우를 받는 모양인지 몸은 바쁠지라도 표정에 구김이 없었다.

“회사도 바쁘고 저도 바쁘고 아주 정신없습니다. 아직도 회장님이 저 운동하는지 체크하세요?”

“물론이죠. 요즘 회장님의 최대 관심사 아니겠습니까.”

“하여튼 아버지도 대단하세요.”

“요즘 여러 문제로 흔들리는 정권이라도 권력자 아닙니까. 그런 권력자에게 직접 얘길 들었는데, 무시할 수야 없죠.”

“저도 열심히 합니다. 그 얘긴 그만 듣고 싶네요.”

이젠 듣기 지겹다는 얼굴의 수안이다.

“안 그래도 신경 쓰실 텐데, 제가 괜한 말을 했습니다.”

비서가 음료를 들고 들어와 잠시 대화가 끊겼고, 수안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물었다.

“우리 최 실장님이 괜히 이렇게 오실 분이 아니라 무슨 말씀을 하실지 궁금하네요.”

“별일은 아닙니다. 도련님께 궁금한 일이 있어서 직접 여쭤보려고 들른 참입니다.”

도청 사건이 있었을 때 궁금한 것은 언제든 얘기해 준다고 했었고, 수안도 이를 기억하고 있었다.

“뭐든 말씀하세요. 숨김없이 다 말씀드릴게요.”

최 실장의 질문을 듣기 전이라 호탕하게 말했다.

“저도 말씀드리기 편해서 좋습니다. 지난번부터 지켜보기만 했는데, 강운 그룹 사장단은 왜 만나시는 겁니까? 사장단에 묻기 전에 도련님께 듣는 편이 좋겠다 싶어 왔습니다.”

“…….”

수안의 머리가 핑핑 돌아가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핵심을 찌르는 질문이지만 변명 거리는 많았다.

“방금 숨김없이 말한다는 분이 계셨는데… 어디 가셨죠?”

“나 참. 이걸 들키네요.”

“거짓으로 말씀하시면 저 이제 물불 안 가리고 조사 시작할지도 모릅니다. 그런 기회를 주시면 저야 좋지요. 요즘 전략실 직원들이 여유롭거든요.”

최학주의 부드러운(?) 경고였다.

“…기다려 보세요.”

수안은 수화기를 들고 스피커폰으로 전환해 배 이사를 찾았다.

“배 이사. 일전에 사장단에 주려고 만들었던 자료 알지?”

-예. 부사장님.

“다 가지고 와. 최 실장님한테 들켰어.”

-헙!

“그냥 가져와. 괜찮아.”

-예….

통화 내용을 들은 최학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고 있었다.

‘감출 필요가 없다? 이미 다 알려진 것? 아니면 배 이사와 사인을 맞춰 뒀을까?’

잠시 뒤에 배영성이 자료를 들고 왔고, 수안은 서류를 보지도 않고 최학주 실장에게 밀어서 건넸다.

“제가 계열사 사장들과 만나기 위해 준비한 자료입니다. 이 자료를 들고서 사장님들께 읍소했습니다.”

최학주는 의심을 가득 안고 서류를 열어 확인했다.

-멕시코 위기 상황과 동아시아 금융 위기의 상관관계.

-외화 단기 차입의 위험성.

-위기 상황에 기업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한 금융 경영의 방향성에 대하여….

‘다 아는 내용이잖아? 하지만 지금까지 외부에 알리지 않으셨지. 이번에 처음 알리신 모양이야.’

최학주도 이미 알고 있었던 내용이다. 수안이 일전에 회장님께 줄기차게 경고했던 내용이었고, 이를 누군가에게 설득할 용도로 마련한 자료임이 틀림없었다.

서류를 보던 최학주가 고개를 들자 수안은 간단하게 설명했다.

“회장님이 콧방귀도 안 뀌시니 저라도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제 눈엔 위기가 보이는데, 강운 그룹 계열사는 전혀 대비되질 않으니….”

“강운 그룹은 회장님의 뜻에 따라 움직입니다. 도련님.”

강운모 회장님 영역에 침범하지 말라는 뜻이다.

“압니다. 어제 강운 전자 김 사장님을 만났지만, 이런 자료를 볼 필요도 없다고 하시더군요. 설득이 무의미했습니다.”

자료는 볼 필요 없이 무조건 들어주겠다 했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아직 도련님은 강운에 입사하지도 않은 분인데, 사장단이 도련님의 말을 들을 리가 없죠.”

“…김 사장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어요. 다른 계열사 사장과 이런 식으로 접촉하지 말아 달라고 하시더군요.”

자료 필요 없으니 그냥 지시하라고 했었다. 이 역시 틀린 말이 아니다.

“앞으론 이와 같은 일이 없을 거로 판단해도 되겠습니까?”

“예. 괜히 나섰다가 바로 들켜 버리네요. 이제 사장단을 따로 만나는 일은 하지 않겠습니다.”

예전 배영성의 말 대로 앞으로의 경영 방침을 리스트로 만들어 보내고 말 생각이다.

만나지만 않으면 되지 않겠나. 수안은 이제 사장단과 만나지 않아도 강운 그룹의 방향을 지시할 수 있었다.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도련님.”

“괜히 최 실장님께 심려를 끼쳤네요. 그래도 제 마음 아시죠?”

“다 강운 그룹이 잘되라고 움직이셨겠죠. 하지만 이번엔 너무 과하게 참견하셨어요.”

“회장님께는 최 실장님이 보고하시겠지만….”

“따로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견고한 부자 사이에 불화를 만들어 낼 수야 없죠.”

“고맙습니다. 최 실장님.”

“다만….”

‘다만?’

“훈련장엔 자주 가십시오. 올림픽 준비에도 시간이 부족하실 것 같습니다.”

“…….”

돌고 돌아 다시 이 얘기다.

“임경남 감독이 갑자기 해외로 출국해서 더 훈련장에 안 가시는 건 아닌지….”

“정말 아버지도 너무하시네. 메달 좀 못 따면 어때서 그러신데요?”

최학주 실장의 뜻이 아니라 분명 아버지의 염려였다.

“회장님이 그런 마음이시겠습니까. BH에서 받은 지시라 걱정되시는 거죠.”

“일전에 임 감독과 기록 체크했는데 이전 올림픽 기록에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메달은 걱정 안 해도 된다고 꼭 전해 주세요.”

“오오.”

“최 실장님은 제 훈련 상황이 아니라 강운 경제 연구소나 더 닦달해 주세요. 이제 곧 위기가 온다고요.”

“회장님 성격 아시잖습니까. 눈여겨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강운 연구소도 동아시아 금융 위기를 계속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럼 저는 걱정 내려놓을게요. 알았죠?”

“하여튼. 누가 회장님 아들 아니랄까 봐 도련님도 걱정만 많습니다.”

“그냥 걱정이 아니라니까 그러네요. 이거 좀 보시라고요.”

수안은 아까 그 자료를 들이밀었고, 최 실장은 볼 것도 없다는 듯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볼일 다 봤으니 이제 가 보겠습니다.”

“나중에 일 틀어져도 제 탓 아니에요. 알았죠?”

“누가 도련님 탓을 하겠습니까. 걱정은 저희에게 맡겨 주시고 훈련만 열심히 해 주세요.”

“또 그 얘기로 가신다.”

“하하하.”

* * *

최학주 실장을 보내고 수안은 저녁 일정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안은 오랜만에 고려 호텔이 아니라 다른 호텔 커피숍에 모습을 드러냈다.

항공사 조 회장의 딸과 신라 일보 장남의 소개를 위함이다.

수안이 결혼식에서 조 회장에게 했던 말을 현실로 만들고 있었다.

“여. 일찍 와계셨네?”

“안녕하십니까. 강 부사장님. 하하. 제게 이런 기회를 다 주시고….”

신라 일보 장남 변태영이다.

“미리 말씀드리는데, 내가 도저히 시간이 안 나서 이분을 못 만났다는 거 아닙니까. 지금이야 내가 결혼해서 그렇지, 정말 좋은 분이세요.”

수안이 소개할 사람은 항공사 조영진 회장의 딸 조지수다.

일전에 수안과 딱 한 번 만났지만, 그 정도야 흠도 아니니 이렇게 변태영에게 소개해 줄 수 있었다.

“게다가 대형 항공사의 첫째 따님 아닙니까.”

변태영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조지수의 장점이다.

“…바로 그게 제일 중요하죠. 변 형이 뭘 아시네.”

“하하하.”

둘이 먼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조지수도 도착했다.

“어머. 제가 늦었나요?”

“일찍 오셔놓고 늦었다니요. 저희는 하릴없는 사람들이라 이렇게 넉넉하게 도착했죠. 하하하.”

수안이 일어나 인사하는 동안 변태영은 조지수가 앉을 의자를 빼주며 매너 좋은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자리에 앉고 나서야 서로에게 소개하는 수안이다.

“이쪽은 설명 안 해도 아시겠지만, 대신 항공 조영진 회장님의 영애이신 조지수 님. 이번 학기가 미국에서 보내는 마지막 학기고, 내년부터 바로 항공사에 근무하신다고 했고….”

“반갑습니다. 변태영입니다.”

“반가워요. 조지수입니다.”

“이쪽은 국내 굴지의 언론사 신라 일보 변태영 이사님. 지금도 신라 일보에서 중추 업무를 맡고 계시고 앞으로 쑥쑥 커나갈 언론 재벌의 선두 주자 되겠습니다.”

“부사장님. 너무 띄우지 마십시오. 아직 사회생활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뭘? 사실이잖아? 둘이 이어지면 너무 좋겠다 싶더라고.”

“언론에서 일하시면 아시는 것도 많겠어요. 제가 요즘 외국에만 있어서 국내 사정에 어두워요. 모르는 일이 많아도 이해해 주세요.”

“그 부분이라면 제가 채워 드릴 수 있겠습니다.”

변태영은 찰떡같이 답했지만, 수안의 소개는 끝이 아니었다.

“태영 씨가 평소에도 얼마나 건실한 분인지 몰라요. 예전에 제가 대학 생활하면서 친구들과 뵈었는데….”

“……!!”

변태영은 수안이 대학 신입생 시절 압구정에서 만났던 기억을 떠올렸다.

차를 타고 돌아다니며 젊은 여자들을 꾀어내던 때였다.

‘그 얘길 이런 자리에서 꺼낸다고? 미친!’

“우리 학과 여학우들이 태영 씨를 스치듯 만났는데, 소개해 달라고 얼마나 보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태영 씨가 너무 순수 청년이라 거절하시는 통에 제가 소개를 해 줄 수가 있어야죠. 친구들 말리느라 혼났어요.”

“호호호. 그러셨어요?”

‘이걸 이렇게 포장하시네. 하하.’

“제가 숫기가 없어서….”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수안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동기들에게 온갖 진상을 떨었을 변태영이다.

“어머. 순수한 분이셨네요?”

그래도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변태영의 이미지 메이킹은 성공적이다.

“두 분 얘기 나누세요. 집안에서 소개해 준 자리도 아니니 편하게 만나시고요.”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조금 더 있다 가시죠….”

수안은 붙잡을 생각도 없이 입에 발린 말을 하는 둘을 두고 자리에서 얼른 일어났다.

“제가 너무 오래 같이 있으면 눈치 없는 놈 소리를 듣죠. 두 분 좋은 인연이 되길 바랍니다.”

수안은 둘에게 인사하고 나오며 속으로 생각했다.

‘저 둘이 꼭 이어져야 할 텐데….’

수안의 가벼운 계획은 의외로 성공적이어서 훗날 둘의 결혼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K1과 UFC를 넘어서는 빅 매치를 성공시켰다.

화분과 물컵이 날아다니고 비명은 집 안을 가득 채울 예정이다.

‘그렇다고 FA 시장에 다시 나오진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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