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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83/304)

시선

수안은 동해 해변 도로를 달리다가 갑자기 떠오른 상념에 차를 잠깐 세우고 밖으로 나갔다.

“파도 소리 좋다. 그쵸? 음~ 바다 냄새.”

“…어. 좋네.”

수안의 눈은 강릉 바닷가 절벽과 철썩대는 파도를 향해 있었지만, 아현과 다른 걸 보고 있었다.

<강릉 무장 공비 침투. 북한 소형 잠수함 강릉시 부근에서 좌초. -1996년 9월 18일>

번뜩 뉴스 화면이 떠올랐다.

‘젠장. 이걸 잊고 있었네.’

북한 잠수함이 좌초된 곳이 수안이 지금 차를 세운 이곳이었다. 덕분에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바닷가에 북한 잠수정이 좌초되어 있었고, 무장 공비들은 산으로 숨어들어 국군과 교전을 벌인다. 우리 군에도 사망자가 발생했고, 북한 무장 공비도 대부분 그 자리에서 죽었다. 무려 한 달이 넘도록 무장 공비를 추격해 나온 결과였다.

‘아직 시일이 남았어. 앞으로 1년 조금 더 남았으니까…. 충분히 피해 없이 잡을 수 있어.’

뉴스로 무장 공비 침투 사건을 알게 되었지만, 당시 대운 자동차 하청 공장에서 근무하던 금용은 한참 뒤 회사 술자리에서 실제 목격담을 듣기도 했다.

“젠장. 내가 그때 강릉을 지나고 있었다는 거 아냐.”

“네에? 차장님이 공비 사건 때 강릉에 있었어요?”

“그래. 내가 여름휴가를 못 써서 여름 다 지나고 늦게 썼잖아.”

“그러셨죠.”

회사에 부품 주문이 쌓여 여름에 휴가를 못 간 직원이 태반이었다.

그래도 박 차장은 다른 사람보다 먼저 쓴 것이고, 금용과 공장의 다른 직원들은 아직 갈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새벽에 낚시하러 단단히 준비하고 저 길을 지나는데, 똑같이 하얀 티 입은 남자들이 절벽에 나란히 앉아 있더라고.”

“우아….”

“내가 바다 쪽으로 고개만 돌렸어도 좌초된 잠수함을 봤을 텐데, 아무 생각 없이 이상한 애들이 놀러 왔나 보다 하고 그냥 차를 타고 지나갔어. 내가 저 택시 기사보다 더 일찍 봤다니까. 그때 신고만 했어도 돈이 얼마냐?”

TV 뉴스에서 처음 간첩선을 신고한 택시 기사가 받을 포상금에 대해서 떠들고 있었다.

“간첩 신고하면. 1억 정도 하지 않아요? 간첩선은 1억 5천이고요. 아! 간첩선은 어업 종사자만 신고할 수 있다고 하니 못 받겠네요.”

1995년에 기존 3천에서 1억으로 포상금이 증액되었기에 신고만 했다면 상당한 포상금을 받을 수 있었다.

“돈이 아깝긴 한데, 그래도 거기서 머뭇거렸다간 죽었겠지?”

“그럼요. 군인들도 죽어 나갔잖아요. 군인들이 헬기에서 줄 타고 내리다가 저놈들 총에 죽기도 했으니까요. 박 차장님이 차에서 내렸으면 엄청나게 위험했을걸요? 신고한 저 택시 기사도 몰래 돌아와서 벌벌 떨면서 지켜봤다고 하잖아요.”

“그래. 내 목숨 붙어 있는 걸로 감사해야겠다. 목숨 구한 기념으로 한 잔 마시자!”

“예!”

“금용아. 술 적당히 먹어. 내일 철야 근무 들어가려면 힘들어.”

“흐흐흐. 예.”

‘박 차장님이 사람은 참 좋았는데….’

수안은 아련한 표정으로 과거의 기억을 반추했다.

“쉬었으면 가자. 이제 거의 다 왔어.”

“당신 표정이….”

“내 표정이 뭐?”

“애틋한 뭔가를 추억하는 것 같았거든요? 누구예요? 누구랑 여기 와 봤는데요?”

“푸흡! 내 사랑 아현 씨. 저 아현 씨랑 여기 처음 왔습니다요.”

“아냐. 분명 누군가를 생각했다니까? 여자의 감을 당신이 잘 모르나 봐요? 갑자기 여기 차 세우자고 한 것부터 이상했다니깐요.”

“아니라니까. 얼른 타. 이러다가 해지겠다.”

“아닌데? 분명 누군가 떠올린 얼굴이었는데?”

“나랑 평생 같이 살아 보면 알겠지. 일편단심 당신만 귀찮게 할 테니까.”

“그 거짓말. 우선은 믿어 줄게요. 가요.”

‘미안하지만 당신에게도 숨길 수밖에 없어.’

비밀을 공유하는 사람은 배영성과 최장호만으로 충분하다.

자신의 입으로 누군가에게 이 비밀을 공개할 생각은 없었다.

“생각해 보니까 대학생 때 춘천에 동기들하고 놀러 온 적은 있었다.”

“여자?”

“주원이라고 내 남자 동기 하나랑 여자 동기도 둘이 있었어.”

“오~ 뭔가 있긴 있었네. 아주 쌍쌍이 놀러 오셨다?”

“있긴 개뿔. 그냥 여기서 저녁 먹고 집에 갔거든요?”

“나중에 최 실장님에게 물어볼게요.”

어려서부터 경호를 맡은 최장호라면 뭔가 알 거라고 생각했다.

“…경호원들 따돌려서 모를 건데~”

“쳇! 완전 범죄를 꿈꿨어요?”

“범죄는 무슨. 밥만 먹고 집에 갔다고요.”

“더 얘기해 봐요.”

수안은 일부러 대학 생활 얘기를 꺼낸 참이다. 덕분에 수안은 별장에 도착하기 전까지 대학 생활에 대한 얘기만 계속해야 했다.

* * *

차에서 내린 부부는 처음으로 바닷가 별장의 전경을 눈에 담았다.

“우아. 너무 예뻐요.”

“그러게. 마감이 상당한 수준인데?”

수안은 전생의 전공을 살려 별장을 살피고 있었다.

일용직을 전전했지만, 대부분 했던 일은 건축과 관련된 일이었다.

제대로 지은 건축물과 허접한 물건은 설계부터 차이가 나지만, 가장 심하게 벌어지는 차이는 바로 디테일에 있었다. 사촌 형 지훈이 선물한 별장은 마감재의 품질과 마무리가 상당히 뛰어났고, 이는 좋은 재료와 품삯 높은 인부들을 고용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형이 돈깨나 들였겠어.”

“나중에 감사 전화라도 해야겠어요.”

“나중에 여기서 한 번 더 만나지 뭐.”

“그래도 되겠네요.”

수안과 아현은 초록색으로 물든 잔디가 가득 깔린 푹신한 정원을 밟으며 별장으로 들어갔다. 소나무 숲에 위치한 별장은 바다 쪽으로 향해 있었고, 거실 창문으로 바다를 볼 수 있었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며 수안은 다시 전공을 살렸다.

‘내가 공사판에서 불 땐지가 몇 년인데.’

추운 겨울 공사판에서 남은 각목이나 나무 쪼가리로 페인트 통에 모닥불을 피우곤 했었다.

그 모닥불이 있어 손과 발을 녹이고 다시 공사 현장에서 일할 수 있었다.

“예쁘다….”

지금은 페인트 냄새도 없고, 검은 연기도 없는 그저 아름다운 모닥불이다.

멍하니 불을 보고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앉아 있어. 금방 고기 구워 줄게.”

수안이 능숙하게 실외에서 식사를 준비했다.

“나도 도울게요.”

“밖에 나왔으니까 아무것도 하지 마. 눈치 볼 사람도 없잖아.”

“히힛. 나 진짜 놀아요?”

“오늘은 당신 쉬는 날이야.”

“아~ 편하고 좋다!”

수안이 손을 걷어붙이고 일을 시작하자 직원들이 만류했다.

“도련님. 저희가 하겠습니다. 사모님과 같이 쉬시죠.”

“그럴 거였으면 이렇게 놀러 나오지도 않았어. 직접 해야 더 재미있다고. 내 재미를 빼앗을 거야?”

“…알겠습니다.”

수안은 능숙하게 준비해 온 밑반찬을 세팅하고 집게와 가위까지 준비한 다음 적당히 타오른 숯불 그릴에 고기를 올렸다.

치이이익.

“호영 씨. 서 있지 말고 앉아. 다른 직원들도 앉고. 오늘 뭐라 할 사람 없어.”

“저희도요?”

“그럼 멀쩡히 있는 사람을 굶겨? 같이 먹자. 고기 많아.”

“고기는 저희가 굽겠습니다.”

“이거 한우다. 안 태워 먹을 자신 있어?”

“…….”

“오늘 고기 집도는 내가 한다. 다들 입 벌리고 있어. 고기 들어간다.”

수안은 경호를 위해 따라온 세 명의 직원도 자리에 앉혔다.

수안이 알맞게 익힌 한우가 접시에 탁탁 올라갔고 아현은 소금을 살짝 찍어 수안의 입에 먼저 넣어줬다.

“음… 딱 좋아. 얼른 먹자!”

“다들 드세요. 이이가 너무 많이 사 왔어요. 여러분이 도와줘야 다 먹겠어요.”

고기가 앞에 있어도 쉬이 젓가락을 대지 못하던 이들이다.

“아…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이제야 고기에 손을 가져가는데, 고기가 푹푹 사라진다.

먹성 좋은 경호원들이었다.

수안은 흐뭇한 얼굴로 이들이 먹는 모습을 보며 열심히 고기를 구웠다.

.

.

.

식사 자리가 끝나고 정리를 마친 수안은 한껏 여유를 즐겼다.

경호원들도 지금 경호가 필요치 않다는 말에 별장에 마련된 방으로 들어가 쉬고 있었다.

지금은 수안과 아현 단둘이었다.

빨간 모닥불을 멍하니 지켜보며 시간을 죽이는 느긋한 저녁이다.

“여기서 회사 워크숍을 할 예정이라 난 자주 오게 될 거야.”

BE 인베스트와 펜타그램 직원들을 여기서 만난다.

그 일정을 위해 미리 밑밥을 깔아 놔야 했다.

“직원들이 좋아하겠다.”

“일도 하겠지만, 말로만 일이고 쉬러 오는 거지. 낚시도 하고 해변에서 일광욕할 수도 있고.”

“아쉬워요.”

“뭐가?”

“내일이면 난 집에 가야 하잖아요.”

1박 2일의 짧은 일정이 아쉽다는 말이다.

“우리야 언제든 또 오면 되지.”

“자주 데려와 줘요. 약속이에요?”

“그래. 자주 오자.”

수안은 아현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을 이었다.

“허음. 이제 들어갈까?”

“…그럴까요?”

부부의 시간이다.

* * *

수안은 짧은 휴가를 마치고 회사로 돌아왔다.

이제 강운 그룹 사장단을 만날 차례였다.

수안은 사장단을 설득할 생각에 많은 자료를 준비하며 설득에 어려움을 예상했다.

“…….”

역시 수안의 위기 설명과 금융 계획 방향을 들은 강운 전자 사장은 엉뚱하다는 표정이다.

“…부사장님.”

“김 사장님. 아직 제 설명이 더 남았는데요… 조금 더 들어 보시면 왜 이렇게 준비해야 하는지….”

수안은 전자 사장이 이해를 못 하는가 싶어서 얼른 다른 자료를 꺼냈다.

“이걸 보시면 이해하실 수 있어요. 이번 금융 위기는….”

“그게 아닙니다. 뭐 하러 이렇게 자료를 다 준비해 오셨습니까?”

“김 사장님 이해를 돕기 위해서죠.”

“…그냥 지시만 내리십시오. 저는 부사장님 말씀을 믿습니다.”

“아….”

밑도 끝도 없이 그냥 믿는단다.

김 사장은 수안이 강운 전자 연구소에서 보여 준 능력까지 본 사람이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수안이고, 지금까지 제안한 수안의 사업적 제안도 너무나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강운 경제연구소의 예측보다 수안의 예측이 항상 정확도에서 앞섰다.

이런 수안을 믿지 않을 도리가 없는 강운 전자 사장이다.

“앞으로 은행 차입 줄이고, 해외에서 입금된 달러는 최대한 보유하겠습니다. 언제부터라고 하셨죠?”

“내년 중반부터 97년까지 재무 건전성을 유지하고 달러를 충분히 확보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차입을 갑자기 줄이면 유동성에 문제가 있으니까 97년에 돌아오는 차입이 없도록 장기 대출로 전환해야 한다고도 했습니다. 변동 금리 말고 고정 금리로 하시고….”

“어려운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다가올 위기에 대비해 회사 안정을 꾀하자는 지시인데, 거부하고 말 것도 없습니다. 저 말고 다른 사장단도 만나셨습니까?”

“김 사장님이 처음입니다.”

“다음 사장단부터는 그런 자료까지 가져다 부하 직원이 발표하듯이 말씀하지 마십시오. 부사장님 명령이면 지금까지 부사장님을 겪어 알고 있는 사장단 전부가 따릅니다.”

“…이거 참. 괜히 헛수고했네요.”

수안은 손에 들고 있던 자료를 다시 내려놨다.

“회장님이 지분만 안 주셨다 뿐이지, 부사장님은 회장님 바로 아래 부회장님이나 다름없습니다. 저희를 어려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강운 전자 사장의 말에 큰 힘을 얻은 수안이다.

“제가 우리 김 사장님 사랑한다고 했던가요?”

“흐하하. 남자의 사랑 고백은 거절이지만, 강 부사장님은 환영입니다. 아! 그리고 언제까지 부사장님으로 계실 겁니까? 얼른 회사로 들어오셔서 부회장을 맡으셔야죠.”

“그건 좀 기다려 주시고요. 나갑시다. 오늘 제가 맛있는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식사까지요? 하하. 가시죠.”

둘은 환히 웃으며 수안이 예약한 한적한 식당으로 향했고, 그런 둘을 지켜보는 시선이 있음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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