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볼트 (82/304)

볼트

‘젠장… 오랜만이라 감을 잃었어.’

임 감독은 즐거웠지만, 수안은 난감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평소 연습을 많이 할 때는 기록을 정확히 관리할 수 있었지만, 매일 아침 운동만 하며 기록을 재지 않았더니 이런 결과가 나오고 말았다.

기록을 조절하는 감을 잊어버린 것이다.

임 감독은 수안의 속도 모르고 얼굴이 활짝 피었다.

“우리 수안이가 나 몰래 얼마나 연습한 거야? 비결이 뭐냐? 혼자 감추지 말고 얘기 좀 해 봐. 우리 소속 선수들도 알려 주게.”

“…죽도록 뛰면 됩니다. 뛰고 뛰다가 정신이 몽롱해질 정도가 되면 몸이 스스로 한계를 돌파해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임경남 감독은 수안의 비결을 금과옥조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다.

“오케이. 좋았어. 다른 선수들도 연습량을 대폭 늘려야겠어. 우리 수안이가 그래서 마라톤을 그렇게 같이 달렸구나?”

멀리서 지켜보던 선수들은 임 감독의 말을 듣고 얼굴이 거무죽죽해졌다.

“…강 코치님은 왜 저런 말을 했을까?”

“우리 죽으라고?”

“우리 뒈지라고?”

“우리 사망하라고?”

“…어쨌든 이제 우리 X 됐다는 소리야.”

단거리 선수들은 이제 마라톤 훈련에 참석할지도 모른다는 슬픈 예상을 했다.

“이봉준!”

“예! 감독님.”

수안이 영입을 희망했던 이봉준 선수도 이제 강운 육상팀 소속이다.

내년 올림픽 마라톤 은메달은 이봉준으로 인해 확정적이다.

“앞으로 단거리 선수들도 전부 너랑 같이 훈련 뛴다. 알았어?”

“예! 제가 동생들 챙겨서 같이 훈련하겠습니다.”

슬픈 예상은 왜 항상 현실이 되는 걸까.

“…….”

“…….”

“…….”

“…진짜 X 됐다.”

.

.

.

수안은 그 뒤로 기록 관리에 신경 쓰며 몇 번 더 달렸고, 두 번 다시는 아까와 같은 기록을 보여 주지 않았다. 예전과 같은 수준이나 그에 못 미치는 기록들이 기록지에 적혀 있었다.

“…처음이라 힘이 넘쳤나? 아까 그 기록이 왜 안 나와? 너 제대로 안 뛰어?”

“임 감독님이 잘못 눌렀겠지. 맨날 코치들에게 맡겨 두니 이제 손가락이 굳은 거 아닙니까?”

수안이 세계 신기록을 크게 뛰어넘었다는 선택지보다 현실적이다.

“젠장… 그랬을지도 모르겠네. 괜히 좋아했어.”

수안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임경남 감독에게 말했다.

“들어가요. 할 말 있으니까.”

“뭔데? 훈련 더 안 해?”

“내 기록 보고도 훈련하자 소리가 나와요?”

“…넌 얼마나 오래 쉬었는데, 기록에 변화가 없냐.”

여전히 아쉬운 표정으로 기록을 살피는 임 감독이다.

“빨리 들어와요. 나 얘기 끝내고 집에 가서 마누라 봐야 하니까.”

“에라이.”

* * *

수안은 사무실로 들어와 임 감독에게 특명을 전달했다.

“…뭐? 나보고 어딜 다녀오라고?”

“자메이카요.”

“자메이카가 어디 붙어 있는 나란데? 그리고 내가 거길 왜 가?”

“거기에 제 후계자가 있으니까요.”

Usain St. Leo Bolt.

우사인 볼트로 불리는 육상 선수가 있다. 훗날 올림픽 육상 3연패를 달성하는 전설적인 육상 선수였고, 그가 태어나 성장하고 있는 나라가 바로 자메이카였다.

나라 이름만 봐서는 아프리카 어딘가에 붙어 있을 나라 같지만, 미국의 도시 마이애미 아래 쿠바가 있고 바로 그 아래에 있는 북아메리카 작은 섬나라가 자메이카다.

볼트가 자메이카에서 1986년 8월 21일 출생했으니 1995년 현재는 만 9살이 되지 않았다.

“후, 후계자? 단거리?”

“네. 단거리 맞아요.”

“이름! 나이! 어디 살아?”

지금까지 수안의 후계자로 키우기 위해 국내 선수들을 발굴해 봤지만, 어디서도 수안의 후계자라고 할 만한 선수는 찾을 수 없었다. 수안의 입에서 후계자라는 말이 나왔으니 못해도 자신과 비슷한 수준은 된다는 뜻이라고 생각했다.

“이름 우사인 볼트. 당연히 자메이카 살고 있고… 나이는 현재 8살? 9살인가?”

잔뜩 기대했던 임경남 감독은 나이를 듣고 금방 얼굴을 바꿨다.

“…야. 지금 나랑 농담해? 9살이 무슨 육상이야?!”

“제가 추천하는 선수 못 믿어요?”

수안이 추천했던 황형조가 떠오른 임 감독이다. 그리고 밖에서 트랙을 달리는 이봉준도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준수한 성적을 기록하고 있으니 메달권이라고 할 수 있었다.

수안의 안목을 믿지만,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인도 아닌 외국인. 그것도 고작 9살 먹은 애를 네가 어떻게 아는데?”

당연한 의문이다. 그리고 수안은 미리 준비했던 답을 내놓았다.

“해외 아동 후원으로 알았어요. 나도 얼굴은 못 봤는데, 달리기는 잘한다고 했어요.”

임 감독에게 말하기 전부터 우사인 볼트를 찾고 있었고, 수안은 얼마 전에야 녀석이 사는 곳을 알 수 있었다. 배영성과 전략실 직원들이 볼트를 찾느라 고생 좀 했다.

본인이 육상을 은퇴한다 생각하며 대한민국 육상의 미래를 위해 찾았던 볼트다.

이제 볼트를 찾았으니 은퇴만 하면 성공이었는데, 수안의 은퇴는 대통령의 호출과 함께 멀어졌다.

비록 은퇴는 늦춰졌어도 볼트는 데려와야 했다.

“강 코치. 육상이 애들 장난은 아니잖아….”

“감독님.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육상 금메달리스트 소원도 못 들어줍니까?”

“끄응….”

“당장 국대로 넣어 달라는 것도 아니고, 우리 강운 육상 실업팀에서 좀 봐달라는 거잖아요.”

강운가 맏아들이자 강운 실업팀 코치인 수안의 부탁이면 강운 육상팀에 넣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국대는 어림도 없다고 생각했다.

당장이고 나중이고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국대는 개뿔. 다른 나라 애를 어떻게 국대로 넣어?”

“지금이야 타국인이지만, 귀화시키면 되잖아요.”

“…너 진심이야?”

“100% 진심.”

수안의 눈은 진지함을 가득 풍기고 있었다.

“…수안아. 네가 인정으로 이럴 줄은 몰랐다.”

“인정이든 뭐든 걔 좀 데려다가 키워 줘요. 감독님.”

“하아….”

임경남 감독의 한숨에 수안은 준비해 둔 마지막 제안을 던졌다.

“감독님이 볼트 데려오면 내년 올림픽에 메달 하나 추가하겠습니다.”

“뭐? 무슨 수로?”

“400m 릴레이. 우리 선수들과 같이 출전하죠.”

“오오!!!”

400m 릴레이는 100m, 200m와 함께 출전할 수 있는 종목이다.

4명이 뛰는 릴레이는 선수 각자의 기량이 전부 중요하지만, 여기에 수안이 끼어든다면 메달권도 노릴 수 있었다. 예전엔 국제 대회에서 놀 만한 선수가 없어 수안이 있어도 힘들었지만, 이제 국내 선수들의 기량도 상당히 올라왔기 때문이다. 몇 초 차이 정도는 수안이 충분히 커버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감독님이 볼트 데려와서 육상 실업팀에서 키워 줘요. 400m 릴레이 출전에 앞서는 요구 조건입니다.”

“내가 당장 비행기 표 알아볼게!”

그제야 수안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볼트를 한국으로 데려올 수 있었고, 강운 육상 선수들도 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다.

수안이 메달 하나를 추가해야 하는 이유는 또 있었다.

‘이제 와이프 것도 필요하다고.’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걸어 줄 금메달 두 개뿐 아니라 아내를 위해 나머지 하나가 더 필요했다. 금메달 세 개가 필요해진 이유였다.

“주소는 따로 보낼게요. 감독님.”

수안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샤워장에 들어갔고, 간단하게 씻은 다음 차로 향했다.

날이 어둑해져도 선수들은 여전히 구슬땀을 흘리며 훈련에 임하고 있었다.

“너희도 나와 같이 올림픽으로 가자.”

수안 때문에 연습량이 늘어난 선수들이지만, 그만한 보상이 함께할 것이다.

* * *

수안은 미리 준비한 물건들을 차에 싣고, 부모님께 인사까지 마치고 나온 참이다.

“이제 차로 가자. 준비 끝이야.”

“짧게 다녀온다고 해도 여행이라니까 설레는 거 있죠?”

아현은 남편과 가는 여행에 내심 들뜨고 있었다.

“나도 그래. 신혼여행 말곤 처음이잖아.”

지하 주차장에 도착해서 수안은 장막으로 감춰 둔 무언가를 공개했다.

“짜잔!”

장막 뒤에 숨어 있던 녀석은 웅장한 모습을 자랑했고, 아현은 눈에 가득 들어오는 존재에 기함했다.

“허! 이건 뭐예요? 당신 정말….”

“크고 단단한 내 물건이지. 음화화.”

“이이는 참. 말장난하지 말고요. 이런 차가 도로에서 달려도 괜찮아요?”

수안은 아내 몰래 거대한 차 한 대를 샀다.

오늘처럼 단둘이 놀러 갈 때를 생각해 한참 전 주문해 둔 차량이었다.

미국에서 직수입되었다. 수안의 말대로 차는 아주 커다랗고, 단단해 보였다.

높이뿐 아니라 좌우로도 거대함을 자랑하는 대형 SUV의 끝판왕이다.

태생은 군용 자동차로 만들어졌지만, AM 제너럴이 군용을 민수용으로 개발하며 만든 허머(Hummer)라는 브랜드의 차량이 바로 수안이 구입한 차량이다.

고기능성 다목적 차량 (High Mobility Multipurpose Wheeled Vehicle)을 의미하는 험비(HMMWV)로 불리기도 한다. 수안이 구입한 모델은 허머 중기 모델로 6.5L 디젤터보 엔진과 4단 자동변속기를 탑재해 최고 출력 215마력, 60kg.m의 최대 토크를 발휘하는 괴물 같은 차량이다. 다만 연비가 좋지 않아 64리터의 보조 연료탱크가 필요했다.

훗날 GM에 매각되며 Hummer H1으로 이름을 변경하지만, 지금은 2002년이 아니라 1995년이고 AM 제너럴이 판매하는 단일 모델 허머(Hummer)가 정식 명칭이다.

수안이 예전 정금용으로 살던 때엔 돈이 없어 가슴에 로망으로만 품었던 차량이었다. 지금은 은행에 이자가 붙는 몇 시간만으로도 이 차량을 살 수 있었다.

‘이거야말로 진짜 남자의 차! 남자의 로망!’

“이 정도는 되어야 혹시 사고가 나도 안 다치지. 그리고 이 차량 차폭은 우리나라 차선 한계에 정확히 일치해. 달려도 문제없어.”

차선 한계에 일치한다는 말이 달려도 문제가 없다는 말과 동일한 의미는 아닐 것이다.

어딜 가도 주차하기 힘들고, 차선을 빠듯하게 맞춰 달리며 양쪽 차량을 위협하는 차량이었다.

“안전해 보이긴 하네요. 그것도 우리만….”

그 어떤 차라도 이 차량과 부딪치면 상대방 차만 박살 날 것 같았다.

수안은 안전과 과거의 로망,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눈앞의 결과물이 너무 만족스러웠다.

“출발 한번 힘들다. 이제 가자.”

“네.”

그렇다고 단둘이 떠나는 여행은 아니다.

수안이 운전하는 차량 뒤로 경호 차량 한 대가 함께하고 있었다.

수안은 일전에 차가 처음 도착하고 시동을 걸며 이미 들어 봤지만, 차의 시동을 걸 때마다 짜릿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우르르릉. 우릉.

6.5L 터보 엔진의 웅장한 배기음이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

“크흐아. 끝내준다.”

“푸흣. 당신 얼굴 지금 대단했어요. 그렇게 좋아요?”

아현은 남편 수안의 얼굴이 마치 생일날 장난감을 선물 받고 좋아하는 아이의 행복한 표정 같았다.

“그럼 좋지! 이제 달리자! 다크 프라임!”

“푸핫. 당신 차에 이름도 지어 줬어요? 다크 프라임이 뭐야. 진짜 장난감 같잖아요.”

검은색 차량에 맞춰 이름을 다크 프라임이라고 지은 수안이다.

수안의 다크 프라임은 주차장을 벗어나 동해 별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동해까진 상당히 오랜 시간을 달려야 했다.

중간에 휴게소에 잠시 들르기도 했다. 경호원 셋이 붙어 있었지만, 역시 많은 사람이 수안을 알아봤다.

“강 선수! 복귀 축하해요!”

“잘 달려요!”

“항상 지켜보고 있습니다! 강 선수가 최고예요!”

차마 곁에 오지 못하고 응원의 말을 건네는 사람들에 수안도 큰 소리로 답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응원 고맙습니다! 아자! 아자!”

이미지 관리에 들어간 수안의 표정은 아현도 처음 봤다.

그리고 수안이 인파를 피해 건물 안으로 들어오자 원래 표정으로 변해 버렸다.

“방금 굉장히 선량해 보이는 남자가 있었는데 금방 사라져 버렸네요?”

“어허. 배우님이 그런 말씀 하시면 쓰나.”

“당신 연기에 소질 있었어요? 내 상대 배역으로 딱 맞는데?”

“소질은 무슨… 그냥 재벌 3세 이미지 관리 차원이야. 어려서부터 어머니가 특별히 강조하셨거든.”

“어머님이 그런 쪽으론 대단하시죠.”

“딴소리 그만하고 먹을 거나 골라봐. 얼른 사서 차로 가져가자. 이러다 여기 휴게소에 있는 사람 다 모이겠다.”

“아! 알았어요. 알감자랑 핫도그! 그리고 휴게소에 왔으면 가락국수도 먹어야 하는데.”

“우선 가락국수부터 가자. 나머진….”

수안이 뒤를 돌아보자 따르던 경호원 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착한 경호원들이 사다 줄 거야.”

“호영 씨. 동료들 먹을 것도 넉넉히 다 사요. 알았죠? 아차! 오징어도 추가요!”

“예. 사모님.”

“벌써 이름도 기억했어?”

“그럼요. 매일 우리 지켜 주시는 분들인데 이름도 모르면 안 되죠. 그리고 요즘엔 배 이사님이 가져다주신 계열사 현황 자료도 얼마나 열심히 보고 있다고요.”

“오오. 그럼 다 외우고 있는지 시험 좀 볼까?”

“…시험 안 본다며… 나 울어.”

글썽이는 아현의 눈빛이 애처롭다.

“문제 나갑니다. 강운 그룹 계열사 중 시가 총액 세 번째 회사는?”

“뭐야. 내 연기도 안 통해? 당장 시험을 어떻게 봐요?”

“하하하. 농담이지. 우는 얼굴도 귀엽단 말이야. 자꾸 괴롭혀 주고 싶어.”

“에잇! 얼른 가락국수나 먹으러 가욧!”

깨가 쏟아지는 둘의 신혼은 여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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