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훈련 (81/304)

훈련

수안은 약속한 골프장에서 강병모 회장을 만났고, 언제나처럼 예의를 잊지 않았다.

무엇보다 사과가 우선이었다.

“백부님. 아량을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속이 좁았습니다.”

“…….”

조금 꾸중할 생각도 있었지만, 처음부터 이렇게 나오니 말 한마디라도 잘못하면 오히려 속 좁은 사람이 될 판이다.

“거기다 이렇게 먼저 손을 내밀어 주시니 조카로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제가 미리 챙겼어야 했는데….”

“내가 우리 집안에 큰 어른이 돼서 한 일이 너무 없었다. 이제라도 조카들을 챙겨야지 싶었어.”

“형만 한 아우 없다더니 딱 그 말이 맞습니다.”

강병모 회장은 뻔히 속이 보이는 아부성 멘트에도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인제 보니 수안이 넌 제수씨 이 관장을 더 닮았나 보다. 하하하.”

이 관장은 수안의 어머니를 이르는 말이었다. 수안의 어머니는 타고난 미적 감각을 살려 강운 미술관 관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강병모 회장은 조카와 골프를 치며 편안하게 대화로 풀어나갈 생각이었다.

골프를 치며 모르는 것이 있으면 가르쳐 주고, 스윙도 교정해 주고 하다 보면 어느새 친해질 거로 생각했다. 수안이 골프를 시작한 지 오래되지 않았다 했으니, 오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강 회장은 필드에 오르며 수안에게 물었다.

“수안이 애버리지는 얼마나 되누?”

어느 정도 치는 줄을 알아야 수준에 맞춰 지도할 수 있었다.

“음… 70타요.”

“뭐, 뭐?”

수안이 지난번 첫 경기를 치렀고 2언더파를 기록했으니 70타가 평균이었다.

“…170타가 아니라 그냥 70타?”

“네. 2 언더파 70타입니다.”

“…운모가 상당히 신경 써서 가르친 모양이구나.”

“운동하느라 아버지에게 골프 배울 시간은 없었어요. 강사에게 열심히 배워 잠깐 잘 쳤을 뿐이죠. 백부님도 소개해 드릴까요? 지훈 형도 소개해 줬어요.”

“…이따 명함 남겨 놔라.”

“예.”

수안은 이번에야말로 접대 골프를 제대로 연성할 생각이었다.

.

.

.

카앙!

“백부님 나이스 샷! 우아! 비거리 장난 아니신데요?”

“하하하. 수안이 너도 많이 연습하면…. ”

아까부터 자신과 비슷한 거리를 날리는 수안이다.

“…이 큰아버지는 비교도 안 되게 멀리 날아갈 게다.”

“저는 골프에 큰 재능은 없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쳐도….”

투앙!

“…어휴. 이번엔 페어웨이를 살짝 벗어나네요.”

어쩐 일인지 수안은 일전과 전혀 다른 스윙을 보여 주고 있었다.

“자세가 살짝 틀어졌어. 어깨가 너무 늦게 열렸다.”

“그래요? 백부님이 매일 이렇게 봐주시면 실력이 일취월장하겠어요. 일전엔 운이 좋아서 잘 맞았나 봐요.”

“그래도 홀 하나 지날 때마다 자세를 다 교정하는 널 보니 괜히 국가 대표가 아니다 싶어.”

수안은 적극적으로 강 회장의 조언을 반영하며 조금씩 나아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강병모 회장은 수안을 지도하는 것이 상당히 즐거웠다.

수안의 기록을 듣고 처음 자신의 계획이 틀어지나 싶었지만, 결국은 생각대로 경기가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대의 생각을 읽으면서 둥둥 띄워 주면… 이렇게 마음이 열리는구나.’

오늘 경기의 흐름은 강 회장이 아니라 수안의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이러다 저 프로 골퍼 되면 어쩌죠?”

“뭐? 하하하. 내년에 올림픽 나갈 육상 국가 대표 선수를 내가 골퍼로 키우고 있었구나.”

“헤헤헤.”

즐거운 분위기는 라운딩이 끝날 때까지 이어졌고, 강병모 회장은 지금까지 수안과 있었던 불화를 잊어갔다.

씻고 나와 적당한 근처 식당에 들어가 마무리에 들어갔다.

“형들은 입대했다고 들었어요….”

“아… 그래. 하도 뺀질거려서 나도 전부터 군대라도 가야 정신 차리지 싶었다.”

“형들 나이도 있는데, 고생이겠어요. 같이 생활하는 선임들이 다 어리잖아요.”

“그러니 일찍 갔어야지. 아니면 너처럼 뭐 하나 잘하는 거라도 있든지.”

“…….”

아무나 딸 수 있는 메달이었으면 나라에서 괜히 병역을 면제해 줄까 싶었지만, 수안은 형들이 잘했던 운동을 기억해 냈다.

“형들이 다른 건 몰라도 말은 잘 탔다고 들었어요. 승마로 나갔어도 잘했을 텐데요.”

“…나도 운모처럼 허락할 걸 그랬다. 괜히 녀석들 공부시킨다고 원하지도 않던 유학을 강제로 보냈더니….”

창수, 창식 형제는 승마에 관심이 많았었다. 하지만 강병모 회장은 승마 선수로 키울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승마를 하겠다고 떼쓰던 자식들을 책상머리에 앉혀 놨다.

힘들게 공부시켰지만, 한번 엇나가기 시작한 자식들은 바로잡기가 힘들었다. 해외 유학 결정도 결국 국내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눈앞에서 보이지 않는 해외로 보낸 것에 불과했다.

‘그래서 결국 이 사달이 났지….’

“그 얘긴 그만하자. 어차피 군대는 갔고, 잘 적응하는 것 같더라.”

“면회 다녀오셨어요?”

“그래. 자대 배치받았다고 해서 잠깐 다녀왔지. 아! 거기서 재미있는 얘길 들었지 뭐냐.”

“재미있는 얘기요?”

“같은 날 소대에 배치받은 동기 중에 전 국무총리 아들이 있다더구나. 나만 아들을 늦게 보낸 줄 알았더니 이 전 총리도 마찬가지였어. 나도 둘, 이 전 총리도 둘. 재미있지 않아? 하하하.”

“아….”

이현창 총리 아들의 입대 소식을 여기서 듣게 됐다.

‘잘하셨네. 이 전 총리가 생각대로 움직이고 있어.’

하지만 형들 군 생활이 편해지면 좋을 것이 없었다.

제대로 굴러서 새사람이 되어야 했다.

“형님 군 생활이 상당히 편해지겠는데요?”

“편해져?”

편해지면 안 되기 때문에 일부러 말했다.

“자대에 전 총리 아들이 둘이나 있고, 백부님 사회적 위치가 낮지 않잖아요.”

“…….”

강병모 회장은 동생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운모가 군대 다녀와서 버르장머리 못 고치면 정신 병원으로 보낸다고 했는데….’

“신병에게 잘못했다간 사단장 밑으로 주르륵 집합할지도 모르죠. 아주 상전 취급이겠는데요?”

“내가 개인적으로 8사단 사단장을 잘 알아. 안 그래도 연락 었는데…. 이 전 총리와도 친분이 있었나 보더구나.”

괜히 자신까지 연락해서 사달을 만들었지 싶었다.

‘애들에게. 하등 도움이 되지 않을 연락이었겠지….’

“어휴. 그럼 연대장부터 벌벌 떨고 있겠어요. 그 아래는 말할 것도 없고요.”

“한 번 더 연락해야겠구나.”

아들이 정신 병원까지 가는 꼴은 볼 수 없었다.

* * *

“통신 보안. 돌격! 8사단 16연대… 예! 사단장님!”

다시 사단장에게 연락받은 연대장의 입은 희미한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돌격!”

조용히 수화기를 내려놓은 연대장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괜히 걱정했잖아. 으하하.”

.

.

.

소대에는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는 이등병이 넷이나 있었다.

강병모 회장의 아들인 강창수와 강창식 그리고 이현창의 자식인 이상호와 이상진이다.

자대에서 편히 생활하던 창수는 말년 병장과 노닥거리고 있었는데, 최 상병이 환한 얼굴로 들어왔다.

최 상병은 방금 중대장의 당부를 듣고 오는 길이다.

“강 이병. 또 재미있는 얘기 좀 해 봐. 그쪽 세상 얘기는 들을 때마다 왜 이렇게 신선하냐.”

김 병장은 창수가 더울까 봐 앞에서 부채까지 흔들고 있었다.

“예. 김 병장님. 제가 재벌가 모임에 갔을 때 말입니다….”

강창수의 말을 자르고 최 상병이 경례를 붙였다.

“돌격. 김 병장님. 중대장님 특별 지시 사항 있습니다.”

“강 이병님이 중요한 말씀 하시는데 왜 그래?”

“사단장님 특별 지시가 내려왔다고 합니다.”

“뭐? 사단장님이 여기 내려오신다고? 젠장 또 다 뒤집어야 해?”

“오시진 않고, 이번 신병에 대한 당부 말씀입니다.”

“아휴. 우리가 얼마나 살뜰히 챙기는데, 여기서 얼마나 더하라고….”

“제대로 굴리라 하십니다.”

“…뭐?”

“강 이병과 이 이병을 제대로 굴려서 8사단 정예로 키우라는 명령입니다. 이병들 배에 군살 생기면 영창 갈 각오로 제대로 굴리라고 하셨답니다. 크흡…. 좋은 시절이 돌아왔습니다. 병장님.”

툭.

김 병장의 손에서 부채가 떨어져 내렸다.

강창수는 떨어지는 부채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투영했다.

“…최 상병. 방금 보고에 거짓은 없으렷다?”

“중대장님께 다시 확인하셔도 좋습니다.”

구부정했던 김 병장의 허리가 펴지고 어깨가 벌어졌다. 옆에서 대화를 들은 강창수의 편했던 자세도 어느새 자대를 처음 배치받았던 당시처럼 변하고 있었다.

‘…아버지 제게 왜 이러세요….’

“야.”

툭.

조금 전까지 강 이병님이라고 했지만, 이제 관등 성명도 필요 없다.

“이병 강창수!”

“좋은 시절이 왔다네? 삽질은 못 해서 죄송합니다? 또 해 봐.”

“이병 강창수!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김 병장은 강창수의 말을 듣지도 않고 최 상병에게 물었다.

“최 상병. 진지 공사 언제냐? 얼마 전에 들었던 것 같은데.”

“마침 이번 주에 있지 말입니다.”

최 상병은 진지 공사가 이렇게 반갑기는 처음이었다.

김 병장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나머지 이등병을 찾았다.

“이 새끼는 화장실 간다고 하더니 똥통에 빠졌나…. 최 상병. 이등병 새끼 잡아 와!”

“바로 끌고 오겠습니다! 돌격!”

소대원들에겐 좋은 시절이 왔지만, 강창수와 이상호는 반대였다.

* * *

큰아버지와 라운딩을 끝내고 회사로 돌아왔더니, 이번에 따라오지 못한 배영성이 도끼눈을 뜨고 기다리고 있었다.

“육상 훈련은 언제 가십니까?”

“…내일 휴가 갈 건데?”

“그래도 훈련장엔 가 보시죠. 올림픽 나간다고 기사 나간 지가 언젠데 아직 한 번도 안 가셨잖습니까.”

“나 방금 라운딩 끝내고 왔거든? 또 운동하러 가라고?”

“100m 달리는 데 10초밖에 더 걸립니까.”

“…오늘 왜 이래? 누가 나 훈련 안 한다고 뭐라고 해?”

“최 실장님이 연락하셨는데, 회장님이 직접 거론하셨다고 합니다. 부사장님 훈련 언제 하는지 좀 알아보라고 하셨는데, 안 한다고 하니 당장 시켜야 한다고….”

최학주 실장이 강 회장으로부터 받은 지시가 다시 배영성 이사에게로 전해진 것이다.

이렇게 전해진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배영성은 버티고 버티다 이제야 얘기하고 있었다.

“아버진 평생 안 그러다가 왜 그러셔?”

“회장님도 걱정이 크시겠죠. 대통령이 직접 명령한 일입니다. 그러니 생전 알려고도 안 하던 부사장님 육상 훈련까지 체크하며 신경 쓰고 계시지 않겠습니까.”

“…내가 대통령 때문에 정말… 아오. 두고 봐. 두고 보라고!”

수안은 이현창을 대통령으로 만들고 말겠다는 각오를 단단히 다졌다.

딱히 이현창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서 뭘 하겠다는 대단한 생각은 아직 없다.

지금은 그저 은퇴라도 편히 해 보자는 심정이다.

* * *

아버지 말을 잘 듣는 효자 아들 수안은 결국, 그날 오후 늦게 강운 육상 실업팀 훈련장을 찾았다.

“임 감독님!”

“이게 누구야. 멋지게 은퇴 번복하신 강 코치님 아니셔?”

“…….”

수안은 임경남 감독을 지그시 노려보다 빙글 몸을 돌렸다.

“나 집에 갈래.”

“에헤이~ 얘들아. 우리의 스타! 강 골드 코치님이 오셨다. 환영의 박수!”

선수들은 환호와 박수를 보냈고,

“우아아아아!”

짝짝짝.

“강수안! 강수안! 강수안!”

임경남 감독은 얼른 달려가 토라진 수안을 붙잡았다.

“수안아 이제 들어가자~”

“내가 진짜. 응? 가만있으니까. 응? 내가 번복하고 싶어서 했나? 대통령이 하라는데 그럼 어떡해?”

“알지. 알아. 그냥 해 본 소리 가지고 왜 이렇게 민감해?”

“에효….”

대통령의 강요로 운동을 하려니 기분이 살짝 나빴을 뿐이다.

“내 스파이크 아직 그대로 있죠?”

이럴 땐 시원하게 달려줘야 속이 풀린다.

“크헤헤. 수안이 복귀 기사 보자마자 진열장에다 모셔놨던 네 스파이크를 도로 가져왔다.”

“…나 많이 기다리셨나 보네. 연락이라도 하시지.”

“어휴. 감히 육상 감독 따위가 강운가 아드님을 오라 가라 할 순 없잖아.”

“…감독님. 오늘 나랑 운동을 하자는 거요 말자는 거요?”

대통령 덕분에 오늘 수안이 좀 삐딱하다.

“큭. 쏘리. 쏘리. 내가 기록 체크할 테니까 얼른 옷 갈아입고 나가자.”

“나 기분 상하면 그냥 집에 갈 겁니다. 마누라 기다린다고요.”

“푸흐하하. 이제 보니까 집에 모셔둔 마누라 보고 싶어서 그랬구만!”

“이제 알았어요? 간단하게 체크만 해 보고 집에 갈 테니까 그런 줄 아세요.”

수안은 가벼운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트랙에 섰다.

오랜만에 신는 스프린터용 스파이크가 발에 착 감긴다.

‘내 발에 맞춰서 주문한 스파이크가 안 맞으면 이상하지.’

달리기 전 잠깐의 스트레칭으로 몸의 긴장을 털어냈다.

멀리서 기다리고 있던 임 감독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스타팅 블록(Starting Blocks)에 발을 얹었다.

임 감독은 수안이 준비된 것을 확인하고 메가폰을 들었다.

“출발!”

파박!

수안의 몸은 여전히 전성기의 그것이었다.

100m 라인을 통과하자 스톱워치를 들고 있던 임 감독이 소리쳤다.

“9초 45!!!! 야! 너 미쳤어?!”

강운 그룹 육상 실업팀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고, 임 감독의 외침도 들었다.

“우아….”

“쉬셨다며. 왜 기록이 더 좋아져?”

“9초 45라니… 이걸 누가 깨냐? 앞으로 영원히 안 깨지겠다.”

임 감독의 외침을 들은 수안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지난 92년 올림픽 기록이 9초 56이었으니 오랜만에 연습인 지금은 그보다 못한 기록이 나와야 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