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부 (78/304)

어부

바로 다음 날 수안은 조간신문에서 자신의 복귀 기사를 볼 수 있었다.

“…….”

‘이거 기분이 참 요상하네….’

“청와대 발 기사입니다.”

“내가 모르겠어?”

“대통령께서 단단히 마음먹으신 모양이네요.”

“이 전 총리나 빨리 만나자고 해.”

수안은 그날이 기대되는 참이다.

“아! 그리고 김 사장을 보러 가야겠다.”

“가시죠.”

수안은 김현성 사장의 방으로 불쑥 들어갔다.

“아! 깜짝이야.”

김현성 사장은 엉뚱한 짓을 하다 들킨 사춘기 중학생처럼 놀랐다.

“아차.”

똑똑.

이미 들어와서 노크하는 수안이다.

“쏘리.”

“아닙니다. 들어오십시오.”

“뭘 하다가 그렇게 놀라?”

“하하. 별거 아닙니다. 급하신 일 있으세요?”

“일전에 500억 계좌랑 무기명 채권 있잖아?”

“예. 이제 막 정리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다른 용도로 써야 해서 그러니 현금은 쓰기 좋게 준비하고, 무기명 채권은 권종을 바꿔서 준비해 줘. 현금은 조만간 쓸 거고, 채권은 나중에 쓰게.”

“어렵지 않습니다만, 어디에 쓰시려고요?”

“그건 말이야….”

* * *

수안은 약속된 장소에서 이 전 총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배 이사가 준비한 식당은 한적한 곳에 위치하고 있었고, 식사는 이미 모두 세팅되어 있었다.

식당 주인은 준비만 끝낸 다음 멀리 보내버리고 오직 수안과 수행원들만 주변을 지키고 있었다.

검은 차 한 대가 들어왔고, 차에서 내린 사람은 뚜벅뚜벅 내부를 가로질러 수안이 자리한 내실까지 들어왔다.

수안은 차오는 소리에 일어서 기다리다가 손님을 맞이했다.

“안녕하십니까. 강수안입니다.”

“강 선수는 여전히 건강하고 젊구먼. 하하하.”

이 만남에서도 수안의 호칭은 강 선수였다.

“내가 복귀 기사 보고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호의적인 표정이 자연스러워.’

수안도 입술에 호선을 그리며 다시 인사했다.

“다시 인사드립니다. 한국대 법학과 91학번 강수안 후배가 존경하는 대선배님을 뵙습니다.”

“하하하. 맞아. 강 선수가 내 직속 후배이기도 했지!”

이현창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식사는 여쭤보지도 못하고 마음대로 준비했습니다.”

“허허. 내가 후배에게 밥까지 얻어먹게 생겼어.”

“후배의 마음입니다. 예쁘게 봐주십시오.”

“그래. 앉지.”

“예. 선배님.”

수안은 이현창과 마주 앉아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부터 내뱉는 말들은 언어 선택을 조심해야 했다.

“국무총리 그만두고 많은 사람이 찾아왔지만, 강 후배가 찾아올 줄은 생각도 못 했어.”

“괜히 놀라게 해 드렸나 봅니다.”

“그래도 즐거운 경험이지. 누가 이렇게 강 선수와 겸상을 해 보겠나.”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선배님. 언제든 불러만 주십시오.”

“하하. 내가 강 후배 귀찮게 계속 부를지도 몰라.”

“청와대 호출은 귀찮지만, 선배님은 제가 기분 좋습니다.”

“청와대? 거길 다녀왔어?”

“예. 얼마 전 청와대에 다녀왔습니다. 각하께서 부르셔서 아버지와 함께 다녀온 참입니다.”

“……!”

흠칫했던 이현창은 금방 얼굴을 회복했다.

“잘 계시지?”

“예.”

“혹시 전언이라도 있던가? 각하께서 강 후배를 배달부로 쓸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어휴. 제가 어찌 그런 중책을 맡겠습니까. 그저 지시 하나 받았고, 그러겠다고 했지요.”

“그래? 무슨 지시인지 말해 줄 수 있겠나?”

“물론 말씀드려야죠. 대선배님이 궁금해하시는데요.”

수안은 이현창이 집중하고 있는 것을 보고 바로 이어서 말했다.

“저보고 내년 올림픽에 다시 출전하라 말씀하셨습니다.”

“뭐? 하. 하하하하. 그건 나랑 의견이 같았어. 오랜만에 제대로 된 명령이야. 그래서 복귀 기사가 나왔구만! 하하하.”

살짝 긴장했던 이현창의 마음을 확 풀어 주는 답이었다.

“은퇴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시 뛰어야 할 판입니다. 요즘 다시 몸을 만드느라 고생입니다.”

“당연히 뛰어야지. 올해 스물넷, 내년이라도 고작 스물다섯이잖아. 강 선수가 안 뛰면 금메달 두 개가 날아갈 판이야.”

마음을 놓은 이현창은 수안과 식사를 들기 시작했다.

그 뒤로도 수안은 본론을 꺼내지 않고 이현창과 친밀감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수안이 식사를 끝낸 이현창에게 미리 준비한 차까지 무릎을 꿇고 따라 주자, 이현창이 물었다.

“강 후배 인내심이 상당하네.”

“예?”

“무슨 말을 꺼내려고 아직도 그러고 있어? 강운 그룹의 일인가?”

이현창도 오랜 공직 생활을 해 왔고, 감사원장에 국무총리까지 역임한 정치인이다.

강운 그룹 맏아들 수안이 괜히 자신을 부르지 않았을 거란 예상은 하고 있었다.

“…제가 회사를 하나 운영하고 있습니다.”

“알지. 편하게 말이나 해 봐.”

당장 뭔가를 해 준다는 것은 아니지만 들어 주는 거야 어렵지 않았다.

“작은 자본금으로 시작해 지금은 여러 회사를 거느린 지주 회사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회사 운영하는 재미도 조금씩 알아갑니다.”

“무슨 얘길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나?”

“사실… 부탁드릴 건 없습니다. 제 회사는 누구 도움 없이도 성장할 테니까요. 강운 그룹의 도움도 필요 없는데, 하물며 선배님의 도움을 바랄 일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없습니다.”

“정말 없어?”

“예. 선배님 부담스럽게 만들고자 마련한 자리가 아닙니다.”

“허허. 진심이야? 물론 내가 다 해 줄 수는 없지만 필요한 부서에 말 정도는 전해 줄 수 있어.”

없다고 하니 오히려 도움을 주고 싶어졌다.

“정말입니다. 선배님. 그저 회사를 운영하면서 경제의 흐름과 정치권의 움직임을 보니 선배님이 무척 걱정되어 이렇게 급하게 먼저 뵙고자 했습니다.”

“…내가 걱정이라고?”

“그게… 아닙니다. 그저 제가 엉뚱한 착각을 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수안은 말을 줄이며 중요한 사실을 꺼내고 싶지 않다는 듯이 분위기를 잡았다.

“어린 후배가 걱정되는 일이라니… 내 듣지 않을 수 없겠군.”

“…다 아시는 내용일 수도 있습니다. 선배님 말씀처럼 저는 아직 배움과 경험이 부족한 어린 나이입니다.”

“내 말이 그 말이야. 자네가 내다 볼 정도의 앞날이면 나도 충분히 알고 있을 테니 어디 꺼내 봐. 내가 다 해소해 줄 테니 말이야.”

수안의 어린 나이는 나이 든 상대의 방심을 끌어내고 있었다.

“아마도 선배님은 내년도 정치에 입문하시겠지요.”

“벌써 소문이 돌아?”

“소문은 듣지 못했습니다. 대법관, 감사원장, 국무총리를 역임하시며 대쪽 같은 심성을 보여 주셨고, 국민의 호감도가 상당하니 당에서 영입했을 거로 생각했습니다.”

“그래. 그 정도야 예상할 수 있겠어. 국민 지지가 상당하니 말이야.”

“제가 걱정하는 것은 그 이후의 일입니다.”

“설마 내가 낙선할까 봐 그러나?”

“아닙니다. 선배님은 분명 당선되실 겁니다. 반론의 여지가 없는 일입니다.”

“허. 아직 출마도 하지 않았는데 그런 소릴 들으니 기분은 좋구먼.”

“당선 후에 세우신 계획은 있으십니까?”

“당선 후 계획이라니. 지금은 내년 선거만으로 골치가 아플 지경이야.”

“혹시 대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대선이란 말에 한껏 놀란 표정이었다.

“전혀 고려해 보지 않으셨습니까?”

“허허. 이봐. 후배. 나가도 너무 나갔어. 이제 고작 정치에 첫발을 들이는데 대선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않나.”

이현창은 아직 대선에 대해서 밑그림도 그려 보지 못했다. 그래서 수안의 말을 허황한 말로 치부하고 있었다.

“그래서 제가 걱정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당에서 선배님을 영입하고 국회의원으로 만들면 그다음 내부에서 치르는 당 경선에서도 당연히 선배님을 밀어붙일 겁니다. 한신당은 대선을 향해 선배님의 등을 힘차게 밀어줄 겁니다.”

“당이…. 날 대선으로 밀어붙여?”

“예. 선배님.”

이현창은 대선이라는 말에 크게 흔들렸지만, 수안의 눈은 흔들림 없이 이현창을 주시하고 있었다.

“흠…. 예상이야 누구나 할 수 있으니 그렇다 치고. 그게 문제가 되나? 아직 난 후배가 뭘 걱정하는지 모르겠어.”

아직 수안이 말한 대선의 의미를 정확히 깨닫지 못한 이현창이다.

“여당인 한신당에서 선배님이 나오시면 야당에선 누가 나오겠습니까.”

“그야….”

이제야 대선을 생각하는 이현창이지만 바로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김대준… 김대준이겠지.”

이현창도 김대준의 인기와 정치력을 잘 알고 있었다.

삼 당 합당이 아니었다면 김일삼이 김대준을 이기긴 어려웠다.

김대준은 여의도에 10만 명을 동원할 정도의 인기를 가지고 있는 정치인이다.

“예. 야당에서 김대준 의원이 나옵니다. 그럼 누가 김대준과 상대가 될까요. 선배님은 자신 있으십니까? 내년에 초선 국회의원이 되실 선배님이요?”

“내가… 버리는 패란 말인가?”

이제야 둘의 의식이 같은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물론 한신당도 선배님을 버리는 패라고 생각하진 않겠죠. 분명 가능성을 보고 밀어줄 겁니다. 지금 김일삼 대통령께서는 국정 운영에 흠잡을 곳이 별로 없지 않습니까. 국민의 지지를 받으며 전 정권의 통수권자까지 잡아넣어 버리고, 이와 연관된 재벌의 치부까지 낱낱이 까발리고 있죠. 지금 이 뒤를 이어 여당에서 걸출한 인물이 나오면 분명 당선 가능성은 높습니다.”

“…그런데도 후배는 내가 버리는 패가 될까 걱정하는군.”

지금이라는 단서가 붙기 때문이다. 이제 그 이유를 설명할 시간이다.

“예. 제가 정치인이 아니라 기업가이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 경제적인 문제가 생길 예정이란 말인가? 이 부분이라면 나도 후배의 식견을 좀 들어야겠어.”

“…지금부터 제가 드릴 말씀은 아무리 국무총리를 그만두셨다 해도 듣기 힘드실지 모르겠습니다.”

“심각한 문제인가? 왜 나는 아무런 얘기도 듣지 못했지?”

지금부터가 충격적인 본론이었다.

“김일삼 대통령은 얻은 인기를 모두 반납하고 국민에게 최악의 대통령으로 각인될 것입니다. 나라를 망하게 만든 대통령으로 역사에 기록될 테니까요.”

“……!!!”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저는 피부로 느껴집니다. 정부는 과감하게 투자하라고 은행을 통해 기업에 대출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은행은 거리낌 없이 단기 외채를 끌어다 씁니다. 그리고 마음대로 기업에 대출해 주고 만기는 언제든 연장이 될 거로 생각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여기서…. 외국 자본이 위기를 느끼고 빠져나간다면 어떤 상황이 도래할 것 같으십니까?”

“다 좋은데…. 외국자본이 왜 위기를 느낀단 말인가?”

“불과 얼마 전 멕시코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금융 위기… IMF 말인가?”

1990년대 초반 멕시코는 연 140%에 달했던 물가 상승률을 10% 미만으로 떨어뜨리고, 1980년대 말 1~2%를 밑돌았던 경제 성장률을 4% 안팎으로 올리는 등 비약적인 경제 성장으로 세계의 시선을 끌었다. 또한, 수백 개의 국유기업이 민영화되고 기업 규제도 크게 완화되는 등 미국과 캐나다 시장의 저임금 생산 기지가 될 것으로 내다보면서 해외 투자 자금도 늘고 있었다. 멕시코에 대한 세계적인 관심이 계속되고 있었지만 1994년 불현듯 금융 위기가 들이닥쳤다.

이미 그간 여섯 차례나 금융 위기를 넘겨왔지만, 이번 위기는 파장이 너무 컸다.

NAFTA 협정이 발효되고 우루과이 라운드 타결로 WTO가 출범했으며, OECD 양대 자유화 규약이 모든 시장을 전면적으로 개방시키는 한 해였다. 이러한 멕시코의 전면적인 시장 개방으로 말미암아 경상 수지는 만성적인 악화를 초래했고 페소화의 대외 가치 폭락으로 경제적 위기를 가져온 것이다. 여기에 멕시코의 정치적 불안정이 외국인 자금 이탈로 이어졌기 때문에 결정적인 원인은 정치에 있었다. 한국의 정치 상황은 안정적이지만, 금융 위기를 초래한 외국인 자금의 이탈은 어떤 이유에서든 발생할 수 있었다.

“예. 멕시코와 같은 위기가 아시아에 도미노처럼 발생할 겁니다. 그 위기 속에 우리나라가 있습니다. 아시아에 만연한 거품 경제는 외국 자본 이탈을 신호탄으로 위기가 시작될 겁니다.”

“…….”

“그 위기는 거품 경제가 일어나는 김일삼 대통령 재임 중에 일어날 확률이 높고 그렇게 되면 국민 심리의 이반은 각오해야 합니다. 여기서 대통령과 같은 당인 한신당에서 초선 의원 출신인 대선 후보가 나온다? 게다가 상대 대선 주자가 김대준인데요? 제가 선배님을 걱정 안 하게 생겼습니까?”

“허허. 허허허…. 우리나라 경제가 그 지경까지 간다고?”

“선배님이 정치하시는 것, 저는 격렬하게 응원합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떠밀려서 대선에 오르신다면 그 부분만큼은 말리고 싶습니다. 선배님께서 스스로 내디딘 걸음으로 대선에 가셔야 합니다.”

“이거… 내가 후배를 너무 가볍게 생각했나 보이.”

“아직 위기는 도래하지 않았고, 기업도 국민도 평화로운 시절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위기를 알리고 준비하게 만들고 싶지만 여의치 않습니다. 아무도 믿어 주지 않는 위기를 제가 왜 떠들고 다녀야 할까요. 하지만 선배님이 믿어 주신다면… 저는 선배님을 김일삼이 앉아 있는 그 자리에 앉게 해 드리고 싶습니다.”

이현창은 목이 타는지 식은 차를 들어 꿀꺽꿀꺽 들이켰다.

“…가능하겠나?”

“물론…. ”

2차 충격이 들어간다.

“불가능하죠.”

“……!”

* * *

“…이젠 후배가 날 가지고 노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 지경이야.”

“선배님은 국민의 신망을 잃을 수 있는 문제를 하나 갖고 계십니다.”

“대법관을 지내고 감사원장에 국무총리까지 역임한 내게 그런 문제가 있다? 나도 모르는 문제라면 문제라고 할 수 있겠나? 이거 내가 후배 말에 너무 빠져들었나 봐.”

수안은 이현창의 언짢음에 개의치 않았다. 이미 여기까지 대화가 진행되었으니 더 기분에 맞춰 줄 필요 없었다. 대선에 대한 욕심 때문에라도 엉덩이를 떼긴 어려웠다.

“두 아드님의 병역 문제만 해결되면 선배님에게 흠잡을 구석은 별로 없습니다.”

“……!!”

이현창 본인의 병역도 문제지만 그리 크게 대두되지 않는다. 문제는 두 아들의 병역이다.

“그, 그건 정상적인….”

“정상적인 병역 면제든 아니든 상관없습니다. 방위라도 보내십시오. 그래야 선배님 앞에 청와대로 향하는 대로가 열립니다.”

“그걸…. 어찌 알았나?”

미래에 병풍 사건으로 크게 문제가 된 일이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선배님을 생각하는 후배의 마음입니다. 그냥 올 수 없어서 구석구석 조사를 진행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날 대선으로 보내려고… 거기까지 조사를 했단 말인가?”

“선배님을 대선에서 끌어내릴 야당도 이 정도는 할 겁니다. 저보다 더했으면 더하겠지요.”

“…그때 내가 너무 혹하지 않았나 싶군.”

“저는 입수하지 못했지만, 관련 녹취록이 존재한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야당은 없는 녹취록도 있는 것처럼 만들 수 있죠. 언론의 힘은 강력하니까요.”

“……!!!”

“국민에게 병역은 역린입니다. 자기 자식은 무슨 수를 써도 군에 입대하는 것을 막지 못하는데, 권력자들은 잘도 빼냅니다. 여기에 많은 표가 달렸습니다. 대통령 자리에 오르겠다는 사람의 자식이 병역을 면제받았다면 국민의 지지는 절대로 선배님께 향하지 않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시면 그다음 일은 간단합니다. 절 지켜봐 주시면 됩니다.”

“후배는 자꾸 엉뚱한 말로 내 주의를 집중시켜. 자넬 지켜보라니 무슨 소린가?”

“제 아버지인 강운모 회장님도 위기가 온다는 제 말을 믿지 못하십니다. 선배님은 오지도 않은 위기를 믿을 수 있으십니까?”

“이봐. 후배! 강 회장도 믿지 못하는 일을 내게 믿으라 한 건가? 난 자네가 위기가 온다고 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그래서 절 지켜봐 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차기 대선을 치르기도 전에 위기는 올 것이고 제 행보도 보이실 겁니다. 그때 다시 저를 떠올려 주십시오. 부르시면 언제든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허허…. 정말 자네 물건이로군.”

“다시 당부드립니다. 다음 대선은 절대로 오르시면 안 됩니다. 단두대와 다름없습니다. 차라리 통 크게 양보하는 모습을 보이시는 것이 좋습니다. 한신당 의원 전부가 매달려도 절대로 안 됩니다.”

“후배 말대로 나라에 위기가 온다면. 그리고 김일삼 대통령이 민심 이반을 경험한다면 나가라고 등 떠밀어도 안 나갈 생각이야. 그리고 아들은… 재검을 받으라고 해야겠군.”

수안은 속으로만 웃음 지었다.

‘첫 단추가 무사히 채워졌어.’

대권에 대한 욕심이 이현창의 가슴에 똬리를 틀었다.

“평소 기업가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내년 선거는 어떻게 치르려 하십니까.”

“이봐. 내가 후배님에게 손 벌릴 정도로 가난하진 않아.”

“앞으로도 그러셔야 합니다. 믿지 못할 기업에 정치 후원금을 받는 순간부터 심판대는 뒤에 숨어 권력이 힘을 잃기를 기다립니다.”

수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 옆 탁자에 마련해 둔 검은 천을 잡았다.

이현창이 오기 전부터 준비한 물건이었고, 검은 천은 네모난 무언가를 감추고 있었다.

수안은 천을 확 들어서 옆으로 던지며 말했다.

“다음 국회의원 선거에 요긴하게 써 주십시오. 대선엔 따로 챙길 테니 그때도 선거 자금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래는 골드바가 네 개 깔려 있었고, 그 위는 현금 뭉치가 차곡차곡 쌓여 있다.

일전에 마련한 계좌와 금괴를 통해 마련된 자금이었다. 지금도 김현성 사장은 앞으로 정치권에 줄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골드바와 현금의 시각적 효과는 대단했다.

“……!!!”

“…선배님의 큰 성공을 바라는 후배의 마음을 거절하지 말아 주십시오. 거절하시면 저 무안해서 내년 올림픽 못 나갑니다.”

“…자네가 올림픽에 못 가면 내 탓이 되는 건가? 이 사람아, 당장 저거 가져가게!”

“처음입니다. 처음 제 손으로 이런 준비를 해 봤습니다. …저도 손이 떨리고 가슴엔 두려움이 가득합니다.”

“…….”

수안의 말은 이현창의 마음을 여지없이 흔들고 있었다.

처음부터 수안의 손바닥 위에서 춤추는 이현창이다.

“저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그 어떤 요구 조건도 없습니다. 선배님은 성공만 바라보십시오. 봉황의 자리가 앞에 있습니다.”

“이거… 후배가 단단히 준비했어.”

“이대로 정치에 발을 들이시면 대쪽 같은 선배님이 노련한 정치가들의 희생양으로 전락하실까 심히 걱정입니다. 한신당 의원들을 너무 믿지 마십시오. 한신당은 정권을 잡기 위해 북한과도 손잡을 종자들입니다.”

총풍 사건을 미리 언질한 것이다. 한신당은 대선을 위해 북한에 무력 도발을 부탁한 일이 있었다.

수안은 훗날 이현창의 신뢰를 위해 본인이 가진 많은 패를 보여 주고 있었다.

하지만 이현창은 자신이 속할 당에 대한 비난에 심기가 매우 사나워졌다.

“이제 아주 막 나가는군. 자네 대한민국 고위 공직자가 북한에 선을 댄다는 게 무슨 소리인 줄 알아?! 그것도 거대 양당의 하나인 한신당이고, 현 대통령을 배출한 여당이야!”

간첩 혐의를 적용해도 약하다. 국가 전복 세력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신당에 내란 혐의가 씌워진다는 상상은 생각만으로 끔찍했다.

“지금 믿지 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 언젠가 한신당이 바닥을 드러낼 테니까요. 그러니 지금은 선배님의 길을 가시고, 후일 저를 조그맣게 기억해 주시면 됩니다.”

“후우… 이거 정말… 오늘 마음 편히 나왔다가 아주 혼쭐이 나는군.”

이현창은 그간 수안이 보인 태도로 화를 참아 주고 있을 뿐이다. 얼굴은 이미 일그러졌고, 화는 목까지 차올랐다.

“선배님을 불편하게 해 드려 정말 송구합니다. 앞으로 제가 먼저 만남을 요청할 일은 없을 겁니다.”

“내가 불러야만 오겠다는 말인가?”

“예. 선배님.”

“…흐음.”

“결국은 제가 선배님의 심기를 어지럽히고 말았습니다. 어린 후배의 치기 어린 생각으로 여겨 주십시오. 죄스러운 마음에 선배님 앞에 앉기가 민망합니다. 먼저 일어나도 되겠습니까.”

“…가 보게.”

“건승을 기원합니다. 선배님.”

수안은 깊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식당에서 나왔다.

수안은 문을 닫고 밖에 나오자마자 미안한 얼굴을 말끔하게 지우고 차로 향했다.

‘준비한 떡밥은 다 던졌다. 이제 기다릴 일만 남았어.’

수안이 차에 타고 출발하는 동안 조용히 곁을 지키던 배영성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안에서 대화는 잘 나누셨습니까?”

“대화는 무슨, 낚시나 하고 왔지.”

“…낚시요?”

“너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캬하. 손맛 좋더라.”

편안한 표정의 수안은 이제 끝났다는 듯이 후련한 얼굴이었다.

“푸흡… 아 자존심 상하게. 이게 또 뭐라고 터지네요.”

수안의 화법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배영성이지만, 사람을 낚았다는 말에 웃음이 터졌다.

낚싯바늘에 걸려 파닥거리는 이현창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오늘 일은 그냥 잊고 살아. 앞으로 할 일 많다. 배 이사.”

“예….”

수안의 입은 더 열릴 것 같지 않았고, 할 일은 산더미 같았다.

그리고 묻지 않아도 대충은 수안이 말한 낚시의 의미를 파악하고 있었다.

‘이현창을 끌어들이셨어. 이제 기다리면 된다.’

이현창으로 뭘 계획하는지는 모르지만, 총리까지 역임했던 사람이니 작은 일은 아닐 것이다.

* * *

이현창은 수안이 두고 간 금괴와 현금을 노려보며 고심하고 있었다.

“저걸 그냥 두고 가면 나보고 어쩌라고?”

어차피 선거에 자금은 필수 요소였고, 넉넉하면 넉넉할수록 좋은 것이 선거자금이다.

이현창의 뇌리에 수안과 나눈 대화들이 스쳐 지나갔다.

‘내년 국회의원 선거와 당에서 치러질 경선 그리고 패배가 확실하다는 대선….’

“휴우…. 후배님 말대로 내 지켜보지. 후배님 뜻대로 강수안의 이름이 내 머리에 확실히 각인되었군.”

이현창이 그대로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고, 곧이어 다른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수행원은 식당에 놓인 금괴와 현금에 흠칫 놀랐지만, 곧 조심스럽게 상자에 나눠 담았다. 유력 정치인의 수행원을 자처하면서 이 정도 일은 당연히 예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차에 탑승한 이현창은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한신당이 북한과 손을 잡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아들은 군대에 보내야겠어.’

대권에 욕심이 생긴 이현창은 아들을 군대에 보낼 생각이었다.

병풍 사건의 위험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남은 총풍 사건의 위험이 있었다.

훗날 총풍이 누군가의 입에서 처음 거론되는 날 이현창이 받을 충격은 작지 않을 것이다.

* * *

“회장님… 결단을 내려주셔야 합니다. 계속 이런 식으로 진행되면 저희도 작은 통신사나 다름없는 점유율로 떨어집니다.”

한송 그룹 회장실에서 한송 텔레콤 사장이 읍소하고 있었다.

수안이 지시한 팬탁, 모토로라의 삐삐 수급 중단으로 한송 텔레콤의 점유율은 날로 하락하고 있었다. 점유율 하락이 한계치에 도달했다. 다시 물건을 받아 오지 못하면 앞으로 기기를 변경하는 다른 고객들도 모조리 이탈할 판이다. 대량의 이탈이 발생하기 전에 지금 틀어막아야 했다.

“끄응….”

강병모 회장도 다시 얘기하려고 했었다. 얼마 전 여동생 아들이 결혼할 때 다시 수안을 마주칠 수 있었고, 거기서 은근슬쩍 제품을 다시 공급하라고 얘기하려 했었다. 하지만 수안은 아버지 옆에 꼭 붙어 있었기에 제대로 말도 못 붙이고 그대로 돌아와야 했다.

차마 동생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결국 자존심 문제였다.

“말씀만 해 주시면 제가 발로 뛰겠습니다. 회장님.”

강병모 회장은 힘들게 입을 떼고 말했다.

“…박 사장이… 진행해 봐.”

자신을 대신해서 박 사장이 풀어 보라는 뜻이다. 박 사장도 강 회장의 말을 분명히 알아들었다.

“예. 회장님. 꼭 해내겠습니다.”

박수겸 한송 텔레콤 사장은 곧장 더블 스타로 찾아갔다. 만나든 만나지 못하든 계속 찾아갈 생각이었다.

* * *

“부사장님. 1층 로비에 한송 텔레콤 박수겸 사장이 와있다고 합니다.”

“약속도 없이? 음… 회의 중이라고 해 줘.”

“언제까지 기다리라고 할까요?”

“두 시간이면 충분하지.”

막 퇴근할 참이었던 수안이지만,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백기를 들고 왔다면 밑에서 기다릴 것이고, 아직도 고개가 뻣뻣하다면 바로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다.

“예. 알겠습니다.”

“시간 아까우니까 정말 회의라도 해야겠다. 사장님하고 차나 한잔 마시면서 놀고 있을게.”

“예.”

경영진 회의가 길어져 갑작스러운 미팅은 어렵다고 전달받았지만, 박수겸은 그대로 로비에 앉아 기다렸다.

지금이 아니면 통신사 점유율 하락을 막을 수 없었다. 한번 대량으로 빠져나가면 다시 회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거대 통신사로 고객이 몰리는 요즘, 향후 양대 통신사로 자리 잡으려면 팬탁을 잡아야 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직원이 다가왔다.

“박수겸 사장님.”

“이제 만날 수 있습니까?”

“…올라가시죠.”

“감사합니다.”

두 시간 넘게 기다리며 온몸에 기운이 빠졌지만, 다시 다리에 힘을 주고 위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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