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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복 (77/304)

번복

‘언제 어딜 가는지도 다 말씀을 하셔야죠.’

그중에서 수안에게 중요한 것은 시기였다.

“언제요?”

“내일.”

“…미룰 순 없겠죠?”

“일 있어? 있어도 안 돼.”

“대답도 안 했는데 단칼에 끊으시는 거 보니… 중요한 일인가 보네요.”

“넌 무슨 일인데?”

“아내랑 한 이틀 놀다 오려고 했는데 미뤄야죠.”

“별일 아니네.”

“이번 일로 아버지가 할아버지로 바뀔지도 모르는데요? 동해에 별장을 선물 받아서 이번에 처음 제대로 사용하려고….”

“…….”

아버지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고 수안은 가벼운 태도를 버렸다.

“농담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내일 어디로 가면 됩니까?”

“청와대.”

갑자기 청와대가 왜 나온단 말인가.

“…청와대요? 아버지와 저만 갑니까?”

“부르는데 가야지. 다른 기업인들은 부르지 않은 것 같아.”

“대선에서 성의가 부족했을까요? 아니면 요즘 정권에 밉보인 일 있습니까?”

“그런 일 없어. 성의도 다른 기업에 비해 두 배는 보였다. 강운 자동차가 괜히 출범했겠어? 아직 이유는 나도 몰라. 가 봐야 알아.”

이전 정권에서 허락받지 못한 강운 자동차를 이번 정권에서 허락받은 이유가 있었다.

그만큼 김일삼 정권에 해 준 것이 많은 강운 그룹이다.

“휴우… 지금은 부를 이유가 없는데….”

“가서 VIP 만나거든 금융 위기 같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소용없다 생각하십니까?”

“헛소리한다고 생각할 거야. 그 양반이 듣기 싫은 소리는 안 듣는 양반이라.”

본인도 다 믿지 못하는 말인데, 대통령 앞에서 하게 놔둘 수는 없었다.

“저도 입 아프게 같은 얘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사실 IMF 금융 위기의 원인 중의 하나가 바로 이번 정부의 금융 정책에 있었다.

괜히 얘기했다간 찍히기만 한다. 이번에도 아버지의 결정이 옳았다.

“대통령 입에서 나올지 모를 예상 질문과 답변은 비서실에서 준비해 줬으니 읽어 보고.”

두툼한 보고서가 아버지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수안은 서재에서 나와 예상 문답 보고서를 넘기며 고작 이런 질문을 하려고 불렀을까 싶었다.

그러다 가장 마음에 걸리는 일이 뇌리에서 튀어나왔다.

‘혹시… BE 인베스트먼트?’

수안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미국 정부에서 한국 정부로 정보가 전해졌다면 충분히 아버지와 자신을 묶어 부를 수도 있었다.

‘그건 안 되는데….’

BE에 대한 걱정이 수안의 머리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 * *

다음 날. 수안은 아버지와 함께 청와대로 향했다.

여전히 수안의 마음속엔 먹구름이 가득했다.

수안의 얼굴에 근심이 어린 것을 본 강 회장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별일 없을 거야. 걱정하지 마라.”

“예. 아버지.”

수안은 오늘따라 아버지가 더 커 보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남의 입으로 내 얘길 들으시면….’

끈끈한 부자 관계에 금이 갈 수도 있는 일이다. 평소 꼰대 스타일의 정석을 보여 주는 아버지라도 수안에겐 누구보다 중요한 사람이다.

수안은 고민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버지….”

“뭘 달라고 해도 내가 내주면 된다. 더블 스타는 네가 일으킨 네 회사다. 정권에 아부하는 것은 나 하나로 족해. 앞으로 세상이 달라질 거다. 나중에 강운 그룹이 힘이 더 커지면 오히려 정권이 우리에게 아부하게 된다. 네가 그렇게 만들어.”

“…예.”

차마 더 얘기를 꺼낼 수 없었다.

‘어차피 오늘 얘기하는 건 늦었어. 대통령 입에서 그 얘기가 나오면. 집에서 싹싹 빌어야겠네.’

두 부자는 청와대 출입절차를 꼼꼼하게 거치고 상춘재로 들어섰다.

“상춘재?”

수안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 강 회장이 조용히 말했다.

“별일 아닌 모양이다. 중요한 일이면 본관 집무실로 가야 했을 거야.”

“다행이네요.”

“이쪽으로 오시죠.”

자리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일삼 대통령이 모습을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대통령 각하.”

“안녕하십니까. 각하.”

각하라는 호칭이 쓰인 마지막 대통령이 바로 김일삼이다.

둘은 얼른 일어나 함께 인사했고 김일삼은 작은 눈에 호선을 그리며 인사를 받았다.

“이게 누꼬? 반가운 얼굴이 왔어.”

“저도 오랜만에 뵈어 무척 반갑습니다. 각하.”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악수를 하고 자리에 앉은 김일삼은 당장 본론을 꺼낼 생각이 없었는지 아버지 강 회장과 국내 경제에 관한 얘기와 기업의 고충이나 요즘 세계 시류에 대한 잡다한 얘길 나눴다.

수안은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듣고만 있었다.

잠시 후 김일삼의 시선이 수안에게 향했다.

“우리 강 선수가 예전에 참 대단했지. 강 회장도 뿌듯했겠어?”

“저도 그렇게까지 잘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리고 김일삼의 말이 불쑥 이어졌다.

“내년에 한 번 더 따야제?”

“……!!”

“……!!”

이 주제를 꺼내려고 둘을 청와대까지 부른 김일삼이다.

수안이 선수 생활을 은퇴한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모른다. 아직 늦지 않았다 판단하고 둘을 한꺼번에 부른 참이었다.

“전 대통령 시절엔 두 번이나 국위 선양했잖아. 나 때는 올림픽이 한 번뿐이라 너무 아쉬워.”

마치 승낙이 기정사실인 양 말하는 김일삼이다.

‘무조건 목적을 달성할 생각이야….’

강 회장은 김일삼의 말투와 표정을 읽고 어쩔 수 없다고 판단했다.

“아들이 은퇴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운동은 빼먹지 않고 하더군요. 수안아 가능하겠어?”

“아….”

수안도 아버지의 눈을 읽었다.

아버지의 눈짓은 그냥 하라는 의미였다.

“할… 수 있습니다. 각하.”

수안의 확답에 김일삼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역시 강 선수. 내가 사람 잘못 보지 않았제.”

“기대에 보답하겠습니다. 각하.”

“다음 올림픽 금메달 두 개는 내 덕에 확보했군. 하하하.”

식사하고 가라는 말에 대통령과 점심을 함께했지만 수안은 밥이 어디로 넘어가는지도 모르고 먹었다. 차량에 탑승해 청와대를 빠져나오는 두 부자는 말이 없었다.

“…….”

“…….”

강 회장은 집에 도착해서 서재로 수안을 불렀다.

“들어와라.”

“예.”

서재에 도착해서도 물끄러미 아들을 보는 강 회장이다.

“…….”

“출전해야겠죠?”

“대통령 앞에서 한다고 했는데 해야지. 그럼 안 해?”

“저 올림픽 나가라고 부르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나도 비서실도 전혀 예상 못 했다.”

덕분에 비서실이 준비한 문답 예상지는 쓰레기로 변해 버렸다.

“…당연하죠. 누가 알았겠어요.”

수안은 BE 인베스트 건이 아니라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안 빌어도 되겠네….’

무릎이 닳도록 빌어야 할 줄 알았다.

“출전은 출전이고… 정말로 메달이 가능하겠어? 너 운동 한참 쉬었잖아.”

“…회사 운영과 병행해도 메달 따는 데는 무리 없습니다.”

“하! 누가 들으면 금메달 예약한 줄 알겠다.”

무리가 없으니 없다고 했을 뿐이다. 게다가 내년이면 육상선수에게 절정기라고 할 수 있는 25살. 나이가 들어서 못 뛴다고 할 수도 없었다.

“지금부터 준비 잘해.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면 불벼락 떨어질지도 몰라.”

“그럴 일 없지만, 준비는 제대로 하겠습니다.”

“이번엔 네 어미 차례라고 했었지?”

“기억하시네요.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니 두 분께 하나씩 걸어 드릴게요.”

“큼. 나가 봐.”

“예. 아버지.”

수안은 집에서 나와 배영성이 기다리는 자신의 차로 향했다.

“잘 다녀오셨습니까?”

“…출발하자.”

“…예.”

그 뒤로 수안은 말없이 창밖을 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대통령.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그렇게 대단했던가?’

수안의 고민은 내년 올림픽에 출전한다는 것에 있지 않았다. 오늘 청와대에서 마주한 대통령의 권력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리 국내에서 힘 있는 기업 총수라 할지라도 권력의 최정점인 대통령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악수해야 했다. 다음 올림픽 출전을 반대하던 아버지도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말을 뒤집었다.

차에서 보인 아버지의 태도, 대통령 앞에서 순한 양처럼 굴던 아버지.

수안은 그 권력의 힘이 무척 탐났다.

‘그 힘. 나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킹메이커…. 불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데?’

“배 이사.”

“예. 부사장님.”

“이현창 전 국무총리와 자리 마련할 수 있을까?”

“…문민정부에서 끈 떨어진 인사를 만나시려고요?”

김일삼이 이현창을 국무총리로 임명했지만, 대쪽 같은 이현창의 심성을 제대로 겪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총알받이 역할을 하던 기존 총리상에서 벗어나 소신 있는 총리상을 만들어 내며 국민의 인기를 얻은 이현창 전 국무총리였다. 하지만 이런 국무총리의 역할을 원하지 않았던 김일삼은 자진 사퇴 형식의 경질 과정을 거쳐 내보냈다.

말 그대로 문민정부에서 끈이 떨어진 인사였다.

수안은 킹메이커 계획의 첫 단추로 이현창을 선택했다.

본래는 무려 세 번이나 대통령 선거에 도전하고 또 낙선한 사람이다. 이현창 전 국무총리는 내년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고 당 대표를 역임, 경선을 무난하게 승리하고 다음 15대 대통령을 뽑는 대선까지 직행한다.

하지만 현재는 정계에 입문하지 않은 상태였다. 물론 내년에 국회의원에 출마하려 준비 중이겠지만 당장은 대선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을 것이다.

‘차기는 IMF 환란으로 무조건 야당 김대준이 될 수밖에 없고….’

지금까지 대단한 인기를 얻고 있는 김일삼의 정책 방향은 나무랄 것이 없었지만, IMF가 그간의 공을 모두 사라지게 만들고 대한민국 국민들 뇌리에 최악의 대통령으로 각인시켜 버린다.

김일삼 다음은 야당이 당선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상대가 김대준이면 누가 나와도 힘들었다. 이현창이 김대준을 이기지 못한 것은 필연이었다.

그리고 그다음은 16대 대선이다. 김대준의 뒤를 이은 여당 대선 주자가 나왔지만, 여기서 이현창은 또 낙마하고 만다. 무죄로 밝혀졌지만, 병풍 사건으로 불리는 아들의 병역 문제가 큰 원인 중 하나였다. 진실이든 거짓이든 언론이 물고 뜯으면 지지율은 속절없이 떨어진다.

‘군대는 어떻게든 보내버리면 된다.’

수안은 이현창의 자식들을 군대에 보내 버릴 생각이었다. 이미 면제를 받았어도 상관없었다.

멀쩡한 사람을 면제받게 하는 게 쉬울까 면제받은 사람 다시 군대 가게 하기가 쉬울까.

명백히 후자가 쉽다.

자식들에게 잠깐(?) 미안하면 대통령 자리가 굴러들어온다.

‘그래도 16대는 당선이 확실하지 않아. 하지만 17대는 확실하지.’

17대 대선은 야당에서 누가 나와도 대통령에 오르는 시기였다. 이현창이 대선에 함부로 나오지 않고 야당을 지배하고 있으면 얼마든지 가능했다. 경쟁자를 미리미리 치워 버리면 얼마든지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수안은 생각을 멈추고 배영성에게 다시 물었다.

“되는지 안 되는지만 말해 봐.”

“이미 작년에 국무총리를 사퇴했으니 어렵진 않을 겁니다. 대법관까지 하셨던 분이고… 그러고 보니 부사장님과 동문입니다. 한국대 법학과 출신이니까요.”

“그럼 식사 한 번 정도는 같이 할 수 있겠네? 후배가 선배님 밥 한번 대접하겠다는데.”

처음부터 대선 주자를 손아귀에 넣겠다는 심보는 아니다. 지금은 자신을 기억시킬 정도로 충분했다.

“자리 마련하겠습니다. 어렵지 않을 겁니다.”

수안은 본래 세운 미래계획에 큰 계획 하나를 더했다.

“…그런데 오늘 BH(Blue House: 청와대)에서 무슨 소릴 들으시고 이 전 총리를 찾으세요?”

“나 내년에 올림픽 출전하려고.”

“네? 또 하신다고요? 회사는 어쩌고요? 은퇴 기사도 이미 나갔잖습니까.”

“VIP 특명이야. 무조건 해야 해.”

“……!!”

충격에 한참 말이 없던 배영성의 얼굴에 물음표가 떴다.

“…좋습니다. 출전하신다 치고. 그게 이 전 총리와 무슨 상관입니까?”

배영성은 둘 사이에 존재하는 상관관계를 예상할 수 없었다.

‘올림픽과 이현창 전 국무총리가 무슨 연관이 있지?’

“있을 것 같아서 물어?”

“없어요?”

“없지. 그냥 내 변덕이야.”

“헙! 이게 더 충격이네요.”

“큭. 나중에 일이 더 진행되거든 알려 줄게. 지금은 그냥 따라와.”

“역시…. 저 기대해도 되는 거죠?”

“1, 2년 걸리는 일이 아냐. 그냥 잊고 살아.”

“우와… 더 기대되는데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갈 참이다. 입방정은 언제나 조심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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