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은퇴 (76/304)

은퇴

수안은 과거의 일은 이제 깨끗하게 잊기로 했다.

사기꾼 조동팔과 주수동을 잡으려 시작한 일이 여기까지 흘러왔지만, 여기에 더 발목 잡힐 수 없었다.

“조동팔이나 주수동은 잊고 원래 하던 일이나 계속하자.”

“예. BEST 미국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진행 중인 특허는 차질 없이….”

수안은 BE 인베스트의 보고를 들으며 앞으로 투자해야 할 미국 회사들을 체크해 배영성에게 넘겨줬다. 일본 BE의 지금까지 투자 진행 상황과 수익률을 확인했고, 끝 모르고 성장하는 투자 회사의 매력에 푹 빠져들었다.

“이러다 더블 스타에 소홀해지겠어.”

“제가 봐도 둘의 성장이 엄청나긴 합니다.”

연초 250억 달러에 달하던 미국 BE 인베스트먼트의 운용 자금은 파이자 제약에서 받은 신약 대금 290억 달러와 반기 운용 수익을 더해 700억 달러를 훌쩍 넘어섰다. 일본 BE의 경우 1994년 말 130억 달러 규모였는데, 일본 대지진 특수와 널뛰는 엔화 환율에 올라탄 결과 200억 달러 규모로 성장했다. 둘을 합하면 900억 달러가 넘는 초대형 투자 회사였다. 이런 초대형 투자사가 내미는 손을 거절할 펀드는 많지 않았다.

수안은 달력을 보며 말했다.

“지금쯤 BEST는 소로스와 맺어진 끈이 공고해지고 있겠네.”

“예. 서로 주고받는 정보의 질도 상당합니다. 그리고 내년이 끝나가는 시점부터 아시아 금융 위기가 꿈틀거리겠죠.”

미국 BE는 현재 소로스의 퀀텀 펀드와 보폭을 맞추고 있었다.

소로스는 훗날 대한민국에 동아시아 금융 위기의 주범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소로스의 퀀텀 펀드가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를 초래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거품 경제가 만연해 있는 가운데 기회를 보고 수익으로 연결한 것뿐이었다.

주도적으로 위기 상황을 연출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소로스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다른 헤지 펀드들도 끼어들지 않았을 거라고 예상할 수 있기에 소로스가 끼친 영향은 막대하다 할 수 있었다.

‘그래도 나쁜 놈인 건 사실이지.’

그런 의미에서 수안도 나쁜 놈이고 그것도 최정점에 선 배후의 악당이다.

악당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BE 인베스트먼트가 소로스와 함께하며 이익을 거둘 예정이었다.

본래 일본을 겨냥한 위기였지만, 일본은 세계무대에서도 순위권에 드는 거대 은행을 소유하고 있었고, 해외에 진출한 일본 대기업들도 많았다. 이번 지진에서 보여 준 그들의 결속력은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증거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위기가 발생했을 일본 금융권이 움직이지 않을까?

바로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동아시아의 위기를 느낀 일본 금융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국에서 자금을 회수했다. 국내 정책결정권자들은 일본 정부가 금융권을 지도하여 자금을 빼 나가지 않도록 지시하길 원하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일본 금융권의 자금 회수야말로 진정한 IMF 환란의 신호탄이었다.

한국은 연초 한보 철강의 부도부터 시작해서 기라성같은 대기업들이 뉴스를 보기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여기에 소로스가 더해진다면 최악의 상황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한국은 제외.’

일전에도 소로스는 한국에서 쏟아지는 금을 보고 공격을 포기한 바 있었다.

이젠 금이 아니라도 BE에서 소로스를 설득할 수 있을 터였다. 금융 위기는 막을 수 없지만, 아시아에서 거둔 이익으로 대한민국을 더 빨리 일으킬 자금을 마련 할 수 있다.

그 전에 강운을 챙겨야 했다.

“…강운 사장단 하나씩 보자고 해. 올해부터 준비하면 내후년 다가올 위기도 무난하게 이겨낼 거야.”

대현은 정부에 의해 강제적으로 대출이 막히며 위기를 모면하지만, 강운 그룹은 스스로 이겨내야 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수안에게서 각 사장단에게 전해질 예정이다.

“예. 한 분씩 따로 면담할 수 있도록 일정을… 그런데 동해는 언제 가시려고요?”

“동해?”

동해라는 말이 뜬금없는 소리로 들리는 수안이다.

“정 이사님께 별장 열쇠도 받았고… 사모님과 가 보신다고 하셨잖습니까.”

“아차. 동해 별장!”

동해 별장 완공 소식을 듣고 1박 2일로 간단하게 와이프와 다녀온다고 했었는데, 다른 일들에 치어 깜빡 잊고 말았다. 이렇게 가끔 배영성이 챙겨 주지 않는다면 언제까지고 미뤄질 일정이다.

“강운 그룹 사장단과의 일이 급하지 않으시면 다녀와서 만나시죠. 아니면 직접 만날 필요 없이 대강의 경영 방향만 서류로 작성, 배포해서 알리시고요.”

“흠….”

IMF 외환 위기는 특수상황이다. 지금까지 지시해 온 것처럼 세상의 변화에 기업이 한발 앞서가는 그저 그런 사업 방침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번 위기는 서류만으로 설명이 불가능하잖아. 사장단을 무슨 수로 납득 시켜?”

“오늘이 아니면 안 되는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 많은 인원을 비밀리에 만나시다 보면 한 달도 훌쩍 지날 겁니다. ”

“그건 그렇지.”

사장단 인원만 해도 서른이 넘는다. 물론 그중에서 외환 위기를 준비할 수 있는 중요 계열사 사장들이야 많지 않다고 해도 오랜만에 보는 사람들이다. 괜히 누군 만나고 누군 안 만나고 했다가 분란을 일으킬 수는 없었다.

“쉴 땐 쉬고 만나십시오. 요즘 날씨 얼마나 좋습니까. 딱 여름 오기 전이라 덥지도 않고 푸근합니다. 그리고 산마다 푸른 나뭇잎도 눈을 즐겁게 합니다. 동해 별장에서 사모님과 바닷바람 맞으면서 산책하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좋긴 좋겠네….”

“신혼여행 다녀오시고 계속 일만 하셨습니다. 부사장님이 쉬셔야 김 사장도 쉬죠.”

“김 사장이 잘도 쉬겠다. 나 없으면 오히려 자리 지켜야 한다고 더 오래 있을걸?”

김현성 사장은 지독한 워커홀릭이었는데, 그 증상은 수안이 없으면 더욱 심각해진다고 들었다.

“저는 부사장님 휴가 가시면 예쁜 마누라 수애랑 예비 월드 스타 주원이 데리고 나들이 갈 겁니다.”

“배 이사야 당연히 그럴 거고.”

“…그냥 하는 말 같진 않으세요?”

“믿는다고 해도 난리야?”

수안은 배영성의 말에 사장단 미팅을 미루고 잠시 쉬는 시간을 갖기로 결정했다.

“그럼 휴가 다녀올 테니까 금괴 잘 지켜.”

“아악! 그러고 보니 이걸 어떻게 하죠?”

펜타그램 수안의 집무실 한편에 54개의 금괴가 주르륵 깔려 있었다.

한곳으로 무게가 쏠리면 바닥이 꺼질지도 모른다며 최장호가 금괴를 펼쳐 놓고 그 위는 검은 천으로 덮어 두었다. 장호는 금괴를 몰래 옮기느라 한 시간 내내 엘리베이터로 오르락내리락했단다.

그리고 반대편엔 이번에 구입한 금고가 있었고, 이 안에는 배영성, 최장호, 김현성에게 준 세 장을 제외하고 49장의 무기명 채권이 들어 있었다.

또한 국내 계좌 500억은 이미 김현성의 손을 통해 다시 세탁이 이뤄지고 있었고, 채권도 곧 사채업자를 통해 천천히 현금화를 진행할 예정이다.

배영성은 갑자기 금괴와 무기명 채권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동안 마음 편히 있었던 것은 이 문제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쩌지? 여길 어떻게 지키지?”

수안은 불안해하는 배영성에게 느긋하게 말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금괴다.

쓰고 남은 것은 나중에 금 모으기 운동이 시작될 때 다 처분해 버릴 생각이었다.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해야지.”

“여기서 최영 장군이 왜 나옵니까? 최영 장군도 엄청난 땅을 가진 지주였어요. 땅 많고 재산 많으니까 금이라도 볼 수 있는 거죠. 일반 사람들은 황금을 돌처럼 보려고 해도 금이 없는데 무슨 수로 봅니까? 저 같은 사람은 금만 봐도 가슴이 벌렁거린다고요.”

“…배 이사 랩 해도 되겠네? 주원이가 랩 파트였던가?”

멤버 얼굴은 알지만 무슨 파트를 맡고 있는지까진 정확히 몰랐다. BTC가 나오기 훨씬 전부터 등장한 다른 아이돌 가수들도 잘 모른다.

‘하도 많아서 누가 누군지 알 수가 있나.’

“…어쨌든! 다녀오십시오. 여긴 장호랑 제가 지키겠습니다.”

“이 실장이랑 심 팀장은 괜히 있어? 금방 다녀올 테니까 둘에게 맡겨놔.”

“여기 일은 걱정하지 마시고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수안은 알아서 하라는 듯이 손을 휘젓고 정 회장에게 받은 봉투에서 수표 몇 장을 꺼내 새로운 봉투에 나눠 담았다. 둘 다 다섯 장씩 50만 원을 넣었다.

“이미 충분히 받았습니다. 장호도 그렇고요.”

“김칫국 드링킹하니 개운해?”

“…….”

“이 실장이랑 심 팀장 줄 거야. 요즘 일도 많아졌잖아.”

봉투의 나머지 수표는 다시 수안의 품으로 들어갔다.

“배 이사가 직접 줘. 누가 자길 살펴주는 사람인지 알아야지.”

“…일부러 제 앞에서 꺼내셨죠?”

“엇! 어떻게 알았지?”

“에이….”

수안은 봉투를 배영성에게 넘겨주고 이 실장과 심 팀장의 인사를 받으며 먼저 사무실을 나섰다.

“들어가십니까. 회장님.”

“수고해.”

배영성은 수안이 나가고 손에든 봉투를 하나씩 전달했다.

“수고 많아.”

“…감사합니다. 사장님.”

“우앗! 봉투! 완전 사랑해요. 사장님.”

“우리 마누라 들으면 오해할라.”

“히힛.”

배영성은 이런 재미로 수안이 봉투를 주는구나 싶었다.

갑자기 장난기가 동했다.

수안이나 배영성이나 재미를 느끼는 부분이 다르지 않다.

“어라? 봉투가 바뀌진 않았나?”

심미진이 봉투를 열어 보고 깜짝 놀라서 이채환에게 넘겼다.

“헛! 너무 많아요. 제 봉투가 아닌가 봐요.”

이채환 실장도 자신의 봉투를 열어보고 말했다.

“…나도 많은데?”

둘이 조심스럽게 수표를 꺼내 서로 같은 금액임을 확인했다.

그리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배영성을 바라봤다.

“내가 똑같이 넣었는데 깜빡했네. 간다. 아! 그리고 사무실 잘 지켜! 나 금방 다시 올 거야.”

수안에게 받은 장난을 둘에게 풀고 가는 배영성이다.

* * *

수안은 배영성과 빌딩에서 함께 내려가며 얼마 전 내보낸 기사에 관해 물었다.

“내 은퇴 기사 반응은 어때?”

얼마 전 스포츠 신문 작은 칸에 수안의 육상 은퇴 소식이 전해졌다.

괜히 떠들썩하게 은퇴하면 오히려 붙잡는 사람이 생기기 마련이다.

“예. 며칠 전에 기사는 나갔고, 여기저기서 아쉽다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그래도 올림픽 다 돼서 은퇴 소식 전하면 배신감 들잖아. 미리 포기하게 만들어야 해.”

“두 번이나 하셨으면 충분합니다. 이제 회사에만 집중해도 내후년 일을 준비하려면 빠듯합니다.”

둘은 평소와 같이 가벼운 대화를 나누며 펜타그램을 나왔고, 배영성은 더블 스타로 수안은 집으로 향했다.

더블 스타로 간 배영성은 최장호와 논의해서 둘이 번갈아가며 펜타그램을 지키기로 합의했다.

“공식적인 외박?”

“그렇지!”

“번갈아 하루씩 오케이?”

“좋지!”

둘이 일전에 받은 3억 원의 무기명 채권은 고스란히 유부남의 비자금으로 남아 있다.

쓸 곳은 많고, 쓸 시간이 없었다. 이제 공적인 업무가 생겼으니 쓸 시간도 많을 터였다.

* * *

집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아현에게 달려가 동해 별장 휴가 소식을 전하려 했는데, 아버지의 호출이 먼저였다.

“수안 도련님. 회장님이 찾으십니다.”

“아버지가 일찍 들어오셨네? 무슨 일인지 알아요?”

“다른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알았어요.”

수안은 그렇게 아버지 서재로 먼저 들어갔다.

“앉아.”

“예.”

“넌 밖에서 뭘 들고 왔어?”

아버지 말에 손을 보니 오늘 정택주 회장에게 받은 보리 굴비가 들려 있다.

아현과 함께할 휴가 생각에 깜빡하고 말았다.

“아차. 아줌마한테 주고 왔어야 하는데.”

“선물 들어왔어?”

“네. 왕 회장님이 주셨어요.”

“대현 정택주 회장이?”

“네. 오랜만에 회장님 만나서 밥 얻어먹었거든요.”

“요즘 대현이랑 엮이면 안 좋아.”

“그래도 발길 끊을 수야 없죠. 이럴 때 곁에 있어 줘야 진짜 고마운 법이잖아요.”

“정 회장이 너한테까지 돈 얘기 꺼내진 않았지?”

대현 돈줄이 막힌 것은 기업인 대부분이 알고 있는 소식이다.

“돈 얘긴 꺼내지도 않으셨지만, 저도 이제 사업가예요. 인정으로 일을 그르칠 순 없죠.”

엄청난 돈을 안겨 주고 왔지만, 자기 돈은 아니었다.

“요즘 정부 힘이 하늘을 찔러. 몸 사려야 할 때다.”

이번 정권이 시작하고 이제 절반 왔다. 레임덕은 천천히 시작되고 있었고, 그럴수록 정권의 발악은 강해진다. 문제가 많이 발생하는 95년이지만, 97년 그날이 오기까지 대통령의 권력이 힘을 잃지는 않는다. 몸을 사려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에 깊이 공감하는 수안이다.

“예. 아버지.”

“너 나랑 갈 데가 있다.”

이제 본론을 꺼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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