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 캐리
특별한 유산
델마와 루이스
안부를 묻는 사람
거래
은퇴
번복
어부
오뚜기
입대 X 4
훈련
볼트
시선
진실과 거짓 사이
서른 즈음에
사이비=사기
스타와 팬
백김치와 소고기뭇국
3+1
하드 캐리
수안은 착실하게 버디와 파를 가져가고 있었고, 지훈은 계속해서 보기와 더블보기, 간간이 파를 기록하며 들쭉날쭉하고 있었다. 지훈은 9홀에 이르러서 수안에게 말했다.
“야. 나중에 접대 골프는 어떻게 치려고 이렇게 막 치냐?”
“접대 골프? 그건 뭔데?”
그냥 골프만 함께 치면 접대 골프라고 생각한 수안이다.
“상대 수준을 봐가면서 페어웨이까지 비슷하게 간 다음, 벙커에도 한 번씩 빠져 주고 하면서 인간다운 모습을 보여 줘야지. 그리고 온 그린 상황에선 티 나지 않도록 깔끔하게 실력을 보여 주며 마무리. 온 그린에서 퍼팅이 흔들리면 말짱 꽝이야. 퍼팅에서 헤매면 완전히 실력 없는 상대라고 판단하거든. 퍼팅을 잘해야 상대가 일부러 자신을 배려해 준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자신과 비슷한 수준으로 생각한단 말이지.”
접대 골프를 치는 고급 기술이 줄줄 흘러나왔다.
“…그렇게까지 해야 해?”
“지금까지 너랑 나랑 같이 붙어 있었냐?”
“어…. 아니?”
수안은 페어웨이 중앙 아니면, 멀찍이 그린에 가깝게 공을 붙였다. 하지만 지훈은 페어웨이 옆으로 가거나 한참 뒤에 있었기에 서로 다른 경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수안은 기다렸고 지훈은 열심히 공을 때렸다.
“그럼 상대방하고 대화는 언제 할 건데? 접대 골프라면 서로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있어야 하잖아.”
“아… 그렇겠네.”
접대한다고 해 놓고 상대와 수준 차이로 인해 물리적 거리가 벌어진다면 대화할 타이밍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상대 기분만 상하게 만들 수 있었다.
“골프가 끝이 아니야. 접대의 마지막은 사우나. 서로 즐겁게 운동하며 땀 빼고 서로 자연인의 상태로 만나 편안하게 마음을 열게 되는 거지. 그사이에 계속해서 자신이 대접받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면 그야말로 베스트.”
“역시. 형님한테 배울 게 많네. 오길 잘했어.”
지훈은 고작 이런 것을 가르쳐 줄 생각도 없었다.
“…내가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네. 지금은 접대 골프 아니니까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래도 연습은 해 봐야지. 형이 먼저 티샷 쳐 봐.”
“…너 지금 날 상대로 연습하겠다고?”
“그럼 내가 누구랑 이런 연습을 하겠어. 나 오늘 머리 올리러 왔다니까.”
머리 올리러 온 초보자에게 깔끔하게 밀리고 있는 본인의 처지는 이제 새삼스럽지도 않다.
“그러시든가….”
카앙!
수안은 지훈의 티샷에 환호와 박수로 화답했다.
“와우! 굿 샷!”
짝짝짝.
“…….”
새삼스럽진 않지만, 불쑥불쑥 성질이 올라오는 걸 참아야 했다.
“나도 갑니다~”
타앙!
이어진 수안의 티샷은 지훈의 공 근처로 떨어졌다.
“나도 괜찮네.”
“뭐야?”
“왜? 가까이 붙어야 서로 대화를 한다며.”
수안은 티샷으로 거리와 위치까지 조절 가능한 프로 초보였다.
“…말을 말자.”
덕분에 9홀부터는 지훈과 붙어 다니며 게임을 진행했다.
지훈의 말대로 대화하며 그린을 걸을 수 있었고, 카트를 타고 가면서도 조금 더 친밀하게 대화할 수 있었다.
‘이래서 비슷하게 가야 하는구나. 확실히 달라.’
“동해 별장 완공이다. 서류랑 집 열쇠는 우리 직원이 너 따라온 비서에게 줄 거야.”
“오오. 안 그래도 배 이사한테 홍콩에 만든 달러 계좌 넘기라고 했는데, 우리 마음이 통했네.”
“큭. 통하긴. 내가 언제 얘기하나 기다리고 있었겠지.”
자신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홍콩 계좌 얘기를 꺼내는 수안의 태도에 다 짐작한다는 투로 말했다.
“벌써 줬을걸?”
“뭐? 진짜?”
“내가 이런 일을 뭐 하러 그렇게 복잡하게 해. 말 그대로 선물이잖아. 내가 그동안 정신이 없어서 깜빡했어.”
“나만 못된 놈이지 또.”
“사촌 동생 결혼 선물로 별장까지 주는 사람인데 누가 못된 사람이래?”
“됐어. 마지막 홀은 네 마음대로 쳐 봐.”
“오~ 케이. 9홀부터는 공이 잘 안 맞았는데, 18홀은 잘 맞을 예정임.”
“지금 그걸 배려랍시고 하는 말이냐? 이제 놀리는 것도 가지가지야.”
“알아챘어?”
수안은 킥킥거리며 샷을 날렸고 마지막 홀도 간단하게 끝을 봤다.
“…내가 살다 살다 머리 올리러 와서 언더파 치는 사람을 만나네.”
9홀부터 지훈에게 맞춰 주며 보기를 여러 차례 기록했지만 8홀까지 기록한 버디가 보기를 상쇄했다. 마지막 18홀에서 이글을 통해 2언더파 70타의 기록으로 18홀을 끝낸 수안이다. 반면 지훈은 100타를 훌쩍 넘겼다.
“아쉽다. 중간에 실수만 안 했어도….”
수안은 2언더파의 기록도 아쉽기만 했다.
“그게 실수냐?”
“의도된 실수도 실수지.”
실수가 아니라 접대 골프를 배우는 중에 생긴 당연한 결과였다.
“앞으로 다시는 나랑 골프 치자고 하지 마.”
“말은 똑바로 하자. 나 형이 불러서 왔거든요?”
“어쨌든!”
이어진 사우나에서도 지훈의 투정은 이어졌다.
“너 이놈!! 대체 뭘 먹고 이렇게 컸어?”
“밥 먹고 컸지. 술 먹고 컸겠어? 그런데 어딜 보는 거야?”
지훈은 짙은 패배감에 사로잡혔다.
골프에서 진 것과 비교도 할 수 없는 큰 패배감이다.
“저리 가! 가까이 오지 마!”
“…사우나에서 자연인의 상태로 마음을 연다며?”
“사람 나름이지! 너 함부로 옷 벗지 마. 접대에 하등 쓸모없어. 에잇!”
사우나에서 나와 지훈과 헤어진 수안은 배영성과 차량에 탑승했다.
“처음 가신 라운딩부터 기록을 세우시네요.”
“확실히 놀리는 재미가 있는 형이야. 큭.”
“라운딩하시는 동안 정지훈 이사님과 동행한 직원에게 서류와 열쇠를 수령했습니다.”
“마침 통장 넘겨주라고 안 했으면 큰일 날 뻔했잖아.”
별장 완공을 대충 예상하였기에 통장을 넘기라고 얘기한 수안이다.
“정 이사 결혼식 이후로 별장 방문 일정을 잡아 보겠습니다.”
“BEST 관련 회의는 나중으로 미루고 와이프와 먼저 다녀올게. 간단하게 1박 2일로.”
“그게 좋겠습니다. 사모님도 남편이 어디 가서 놀고 오는지 미리 확인하면 안심하시겠죠.”
배영성은 BE 인베스트 관련 미팅 일정을 뒤로 미루고 수안의 휴가 일정을 조만간 잡아야 한다고 수첩에 기록했다. 그리고 오후에 예정된 일정을 보고했다.
“오늘 저녁 고려 호텔에서 약속이 있으십니다.”
수안은 수현과 수용을 불러 밖에서 따로 저녁을 먹기로 했다.
“호텔 룸으로 잡았지?”
괜히 사람들이 알아보는 것도 그렇고, 외부에 회동을 알리고 싶지도 않았다.
“예. 고려 호텔에 컨퍼런스 룸이 딸린 특실로 잡아놨습니다.”
“김 사장도 오는 거고?”
“예. 김현성 사장도 시간 맞춰 도착할 겁니다.”
“우선 서울로 가자.”
* * *
“누나. 형이 우리 왜 불렀는지 짐작 가는 거라도 있어?”
“음…. 글쎄. 오빠가 괜히 부르진 않았을 건데, 나도 딱히 짐작이 안 되네.”
앞으로 회사에서 자리잡고 능력을 보이라고 주문했던 오빠였다.
능력이 있건 없건 일부를 떼어준다고 확언했으나, 아버지가 멀쩡히 살아계신 지금은 그 이상의 일을 진행할 수 없었다.
“큰누나도 없는데 우리만 불러서 무슨 얘길 할지 되게 궁금하네.”
“언니는 신혼여행에서 만나고 왔다 했어. 오빠랑 언니는 이미 얘기가 끝났을지도 몰라.”
둘이 커다란 호텔 룸에서 궁금증을 드러내고 있을 때 수안이 들어왔다.
“일찍들 왔네.”
“오빠 왔어?”
“형.”
수안은 자신과 함께 들어온 사람을 소개했다.
“우선 인사해라. 여긴 더블 스타 김현성 사장님.”
“안녕하십니까. 더블 스타 홀딩스를 맡은 김현성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김 사장님. 강수현입니다.”
“반갑습니다. 수현 아가씨.”
“안녕하세요. 강수용입니다.”
“하하. 수용 도련님도 상당히 미남이시네요.”
둘은 수안이 왜 갑자기 더블 스타의 인물을 데려왔는지 의아해하며 김현성과 악수를 했다.
“얘기 나누시는 동안 저는 잠시 따로 있겠습니다. 부사장님 얘기 끝나면 불러 주십시오.”
“오래 안 걸릴 겁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남들 앞이라 김현성 사장에게 함부로 말하지 않는 수안이다. 앞으로 나눌 대화의 내용 때문에라도 김현성 사장을 귀하게 대접한다는 뉘앙스를 풍겨야 했다.
“예. 부사장님.”
김현성 사장이 문을 닫고 나가자 컨퍼런스 룸에 털썩 앉은 수안이 둘을 앉혔다.
“앉아. 빨리 얘기하고 끝내자. 그래야 같이 저녁을 먹지.”
“안 그래도 궁금해 죽는 줄 알았다고.”
“형. 뭔데 불렀어?”
“기다려 봐.”
수안은 수화기를 들어 번호를 누르고 상대가 전화를 받자 스피커폰으로 돌렸다.
-다 모였니?
“수진 언니?”
“큰누나?”
“이제 다 모였네. 바로 본론 시작할게.”
-…….
“…….”
“…….”
미국에 있는 수진은 수화기에 귀를 기울였고, 수현과 수용은 수안의 입만 주시했다.
상당히 중요한 얘기를 전하기 위해서 부른 것이 확실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일전에 얘기했던 너희 몫에 대한 주제의 연장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벌써?”
이 주제는 아닐 거라고 예상했기에 수현이 끼어든 것이다.
-수현아. 오빠 얘기 끊지 말고 들어. 감도가 멀어서 알아듣기 힘드니까.
“…알았어.”
수안은 수진의 타박에도 수현이 가진 의문에 착실하게 답했다.
“벌써가 아니야. 지금부터 준비해야 나중에 잡음이 없어.”
“…무슨 얘기가 나올지 더 궁금해졌어.”
-나도 궁금하네.
“내 계획을 간단하게 말해 줄게. 수진, 수현, 수용. 너희가 지금까지 모아온 자금을 모두 내가 소개한 김현성 사장에게 맡겨. 증권 계좌 트고 거기에 다 넣어놔. 자금 운용을 맡긴다고 생각하면 될 거야.”
“그게 무슨 계획이야?”
“우리 돈을 전부?”
-…….
“설명을 더 해야겠네. 너희가 원하는 회사. 그 계열사 지분을 증여받으면 증여세는 무슨 수로 낼 거야?”
“그야…. 아버지가 내줘야 하지 않나?”
수안은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예를 들어서 가치 1조 원 회사 지분을 20% 받으면 2천억이고, 증여가액이 5억 이상 초과하면 세율이 55%가 넘어. 그 세금을 현금으로 다시 증여받아서 납부하겠다? 대충 50%로 계산해도 얼마인 줄 알아? 지분 2천억에 증여세 1천억 그리고 세금으로 낼 1천억을 주려면, 추가 증여세 5백억을 더 내야 해. 2천억 지분 증여하면서 세금만 1천 5백억을 내야 하는데… 아버지는 돈이 썩어나?”
“어쩔 수 없잖아. 그럼 우리가 무슨 수로 지분을 받아? 비서실에서 알아서 방법을 알아 오겠지.”
“그래서 너희 계좌를 달라고 한 거야. 물론 CB(Convertible Bond, 전환 사채)나 BW(Bond with Warrant, 신주인수권부사채)를 통한 편법 증여도 있겠지만, 아버지가 생각도 하지 않는 상황에선 불가능해. 지금은 나중을 위해 내가 너희 자금력을 키워 주는 방법이 최선이야.”
아직 일반화되지 않은 증여 방법이었다. 96년도에 삼디 그룹에서 써먹는 수법이었고, 훗날 관련 전공자들에게 필수 스터디 케이스로 등장하는 편법 증여 방식이다.
우리나라 증여세는 포괄주의가 아니라 열거주의를 택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방법이다.
물론 삼디 그룹의 일로 훗날 포괄주의로 바뀌겠지만, 먼저 써먹는다면 세무 당국의 증여세 과세를 피해갈 수 있었다.
“증권 계좌만 만들면, 우리 돈이 알아서 새끼 치고 증식해? 오빠. 말도 안 되잖아.”
“CB니, BW니. 나는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네….”
-나도 수현이 말에 동의해. 오빠. 주식이 어디 마음대로 되는 거야? 아니잖아.
전생에도 주식을 했었고, 현생에도 주식을 하고 있다. 전생엔 다가오는 위험을 인지하지 못하고 위기 때마다 말아먹었지만, 지금은 그 위험이 언제 올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게다가 자본금 자체가 달랐다. 전생엔 꿈도 꾸지 못했던 대형 기업들을 손댈 수 있었고, 해외에도 투자할 여건도 마련되어 있다.
“왜 말이 안 돼? 내가 지금까지 회사를 어떻게 키웠는데.”
“응?”
“…형이 회사를 키운 방법이야?”
“지금이야 회사가 알아서 성장하고 있으니 이 부분은 빼고, 초기 미약한 자본금으로 회사들을 인수할 수 있었던 배경이 있지 않겠냐? 아까 내가 너희에게 소개해 준 김현성 사장. 그 사람이 바로 내 브레인이야. 백억으로 수십 배를 뻥튀기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이제 너희 계좌를 관리해 줄 거야.”
“……!!!”
“……!!!”
-우앗!!
“혹시 아버지 마음이 바뀌고 CB나 BW를 발행했다 치자. 너희가 그걸 인수하려고 해도 돈이 들어. 이래저래 너희 자금은 지금부터 마련해야 해. 그래야 나중에 증여세를 납부하고 정당하게 회사를 인수해 너희 품에 안을 수 있는 거야.”
“후아… 오빠….”
“형이 인복이 좋았네.”
-그 사람 난 언제 봐?
“김현성 사장 탐내지 말고, 우선 너희 모아 둔 돈이 얼마나 있는지 까 봐. 대학 입학하면서 아버지에게 선물로 통장 하나씩 받았잖아? 용돈도 다 쓰진 않았을 테고.”
“…….”
“…….”
-어. 음….
다들 말이 없었다.
“종잣돈이 얼마나 있는지 알아야 자금 운용 계획을 잡지. 얼마나 있냐고? 반절은 남겼을 거 아냐!”
수안의 재촉에 수용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한… 5억 있나. 조금 안 되던가?”
“뭐? 다 어디다 썼어? 아버지가 얼마 주셨는데?”
“…20억 주셨지.”
“그사이 15억을 다 쓰셨다… 그런데 용돈은? 평소 걸핏하면 용돈 타갔잖아?”
머리 크고 받은 용돈만 모아도 수십억은 되어야 했다.
“그건 그때그때 다 썼지. 쥐꼬리만 한 용돈을 어떻게 남겨?”
“너… 입학하고 아직 1년도 안 지났거든? 그럼 15억은 어디에 썼는데?”
“일전에 형이 그랬잖아. 차라리 집을 사야 한다고. 그래서 아파트 몇 개 샀지.”
“…아파트. 그래. 그건 잘했네.”
어딜 투자했어도 오르지 않을 아파트는 없다.
아파트를 샀다면 크게 나무랄 일은 아니다.
“…수현이 넌?”
“나도. 한 3억.”
“뭐? 3억? 썼다고 남았다고?”
“쓸 데가 좀 많아서… 다 쓰고 3억 남았어.”
평소 부족함 없이 쓰던 수현도 남은 돈이 별로 없었다.
“너도 20억 받았어?”
“응….”
“내가 수진이 준 것만큼 준다고 4억 따로 줬잖아. 그런데 3억이 남아? 고려 호텔에서 월급도 받으면서?”
“…….”
동생처럼 아파트를 산 것도 아니고 말 그대로 다 써 버렸다.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는 수현이다.
“끄응….”
남은 건 미국에 가 있는 수진이다.
“수진아. 넌 왜 말이 없니?”
-아. 음. 난 파리에 자주 가서 패션업계 동향을 조사하느라… 이것저것 많이 샀지. 게다가 항공편이 좀 비싸잖아. 미국 유학이 의외로 돈이 많이 들기도 하고….
수진의 드레스 룸은 언제나 명품으로 가득했다. 미국에 가서도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말도 안 되는 핑계 대지 마라. 비행기 표도 회사에서 다 끊어줬잖아. 내가 용돈은 한두 푼 줬어? 그래서 얼마 남았는데?”
-…1억 하고 10만 달러쯤.
수안이 한국 들어오기 전에 용돈으로 10만 달러를 줬으니 한국엔 1억이 남아 있다는 말이다.
“이것들이 증말…. 이런 정신머리로 회사를 어떻게 물려받아?!! 제 돈도 관리 못 하는 놈들이 회사는 무슨 수로 경영하겠어?!!”
“오빠. 미안….”
“형….”
-쏴리….
“…….”
수안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컨퍼런스 룸에는 숨 막히는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
“…….”
-…….
자신과 동생들은 달랐다. 재벌가에 태어나 돈 쓰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고 살아온 동생들이다. 전생을 기억하고 곤궁함을 사무치도록 체감했던 자신과 비교하는 것은 불합리했다.
그래도 다른 재벌가 자식들에 비하면 오히려 청렴하다 할 정도로 덜 쓰고 살아온 동생들이다. 어려서부터 수안이 주입한 절약 정신이 남아 있어 이 정도에 그쳤음을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휴우… 좋다. 그래 좋아. 알았어.”
수안은 가까스로 올라오는 화를 가라앉히고 눈을 떴다.
수안의 말에 동생들도 바짝 긴장했던 몸을 풀었다.
“휴우….”
“…형. 화내면 무서워.”
-다시 말하지만. 쏴리. 브로.
“…계획에 약간 변경이 필요해졌어. 괜히 안 나가도 될 돈이 나가겠네.”
“어떤 변경?”
수안은 계획의 일부를 요약해 말해 줬다.
“본래 너희 각자가 20억 이상은 갖고 있을 거로 생각했다. 향후 그 돈을 수천억 단위로 불려서 지분을 증여가 아닌 정당한 인수까지 가능하게 할 자금을 만들 생각이었지.”
지분 증여가 아니라 지분 인수를 생각했던 수안이다. 앞으로 다가올 IMF와 IT 버블,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 비트코인까지 더하면 20억을 수천억이 아니라 조 단위 자금으로 불리는 것도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비트 코인 하나만 해도 가능한 일이다. 피자 한 판을 살 수 있던 1만 개의 비트 코인이 2천 5백억 가치를 갖는 날이 온다. 물론 누군가는 피눈물을 흘리겠지만, 한국만 아니면 된다. 비트코인은 훗날 전 세계에서 자유롭게 거래하는 전자화폐였다.
“…20억을 수천억으로? 오빠. 그게 무슨 소리야?”
“형. 그건 너무하지 않나? 형 돈 찍어내는 기계라도 있어?”
-오빠. 소설 써? 아니면 아까 오빠가 말한 사람 사기꾼 아니야? 신뢰가 확 떨어지는데?
“다들 닥치고…. 그냥 들어라.”
수안의 말에 다시 합죽이가 된 셋이다.
“…….”
“…….”
-…….
“중간에 기회가 있다면 얼마든지 계획은 변경될 수 있어. 어쨌든, 너희 자금으로 불려서 너희가 갖는 회사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싶었는데… 이젠 내 돈이 나가게 생겼다. 각자 10억. 너희 계좌에 입금해 주마. 이 돈으로 공평하게 시작한다.”
피 같은 자신의 돈을 써야 종잣돈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래도 동생들이라 이렇게라도 해 주는 거지 남이라면 보일 수 없는 호의였다.
“오!”
“역시 형.”
-그럼 우리 돈 안 들어가?
“대신!”
수안은 목소리를 높여서 떠드는 동생들 입을 막았다.
“매년 계좌 수익의 30%는 수수료로 제하겠다. 내가 지정한 계좌로 이 수수료가 빠질 거야. 어차피 너희 입장에선 내가 준 돈이고, 너희가 운영해 얻은 이익도 아니니까 불만은 없을 거로 생각하겠다. 거절은 거절하지.”
본래 5% 이하의 운용 수수료를 생각했지만, 계획이 변경되었으니 수수료도 변경해야 했다.
괜히 일을 어렵게 만들어 자신의 돈을 토해내야 하는 상황을 만들어 낸 것이 원인이다. 30%는 빌려준 돈의 이자로 책정된 것이다.
‘다 네놈들 때문이니까 너희도 손해는 감수해야지.’
“…우리 돈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긴 하지.”
“형 말대로 운용도 아까 그 사장이 한다며. 수수료는 지불해야지. 불만 없음.”
자신들 손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돈이 밖에서 운용되고, 알아서 이익이 생긴다니 불만이 생길 수 없었다. 잃어도 그만 따도 그만이다.
-근데. 20억으로 수천억까지 불리는 일이 가능한 사람이 왜 오빠 밑에 있어? 있으면 자기가 따로 회사 차려도 충분하지 않나?
수진의 의문은 실로 타당했다.
“자금 운용을 그 사람 혼자서 하겠니? 김현성 사장 밑으로 인재들이 사무실에서 빡빡 기고 있어. 집단 지성의 힘을 우습게 생각하지 마. 길게 볼 것도 없다. 연말에 계좌 수익 금액을 들여다보면 너희도 느끼겠지. “불가능이 아니었구나.”라고….”
“뭐. 오빠가 이렇게 확신한다면… 못해도 수백억은 만들겠지.”
“말 그대로 공돈이네.”
-오빠 말이니까 기다려 볼게.
“나중에 그때 수수료를 너무 높게 잡았다느니 어쨌느니 헛소리하면 확 엎어 버릴 거니까 그렇게 알아.”
수현은 왠지 오빠 말대로 될 것 같았다. 수수료를 낮추려면 지금이 기회였다.
얼른 손을 들고 말했다.
“오빠. 지금 얘기하면 안 될까?”
“수현아…. 오빠가 거절한다고 한 말 못 들었니? 빠지고 싶으면 지금 빠져. 대신 나중에 지분 증여로 인한 세금은 알아서 내는 거다? 세금 못 내면 지분 하나도 못 가져간다. 오케이?”
“알았음… 진짜 불만 없음.”
수현을 따라 수용이 손을 들고 말했다.
“난 중간에 빼 달라고 해도 되나? 갑자기 주식이 하락해 손해 볼 수도 있잖아.”
“…….”
수안은 말없이 수용을 노려봤다. 조만간 화가 폭발할 것 같은 무표정한 얼굴이다.
“우리가 선택지가 어딨어? 까라면 까야지. 수용이 너! 군소리 말고 그냥 오빠 말 들어.”
-누가 오빠 말에 토 달고 있니? 수용이 너! 자꾸 삐딱선 탈 거야?
“…이젠 둘이서 아주 날 잡아먹으려고 하네.”
“조용히 해…. 이제 김 사장님 모셔올 테니까.”
수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까부터 밖에서 기다리던 김현성 사장을 들어오라고 했다.
“김 사장님. 이리로 들어오세요.”
“논의가 길어지신 모양입니다. 하하하.”
수현과 수용은 아까와 다른 눈빛을 보였다.
‘저 사람이… 오빠의 핵심 인재.’
‘아깐 동네 아저씨처럼 보였는데, 지금은 금덩이로 보이네.’
-…….
“여기 제 명함입니다. 강운 증권에 주식 거래 계좌 만드시고 계좌에 20억을 입금하시면 제가 맡아서….”
강운 증권 대표 이사도 수안 품에 있는 사장단의 일원이다. 아버지 귀에 들리지 않도록 하려면 강운 증권이 최선이다.
수안은 논의 중에 변경된 사항을 얼른 말했다.
“미안하지만 계획에 수정이 불가피합니다. 기초 자금은 10억. 종잣돈은… 제가 입금합니다.”
“…부사장님.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정면으로 반박하는 김현성이다.
“그게 말입니다….”
“차라리 부사장님 개인 돈을 맡아 불린다면 이해하겠습니다. 뭐 하러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형제는 결혼하면 남이나 다름없습니다.”
수안과 사전에 논의하긴 했었지만, 그때도 내심 불만이 있었던 김현성 사장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강수안은 희대의 투자가였고, 얼마든지 돈을 불릴 수 있는 분석력과 미래 예측을 보여 줬다. 그런 수안이 동생들의 돈을 불려준다는 말에 불쑥 거부감이 치솟았지만, 그래도 원금이 동생들의 주머니에서 나온다는 말에 터지려는 불만을 억눌렀었다.
‘보통의 사모 펀드처럼 생각하면 되니까… 하지만.’
종잣돈마저 수안이 지불한다면 호구나 다름없었다. 김현성은 이 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어떻게 남입니까. 그래도 형제인데….”
“지금까지….”
수안의 기록적인 투자 수익에 대해 말하려던 김현성 사장은 동생들이 함께 있어 말을 삼켰다.
“…부사장님과 저희는 힘들게 자산을 증식하고 회사를 키워왔습니다. 이 모든 과실은 강 부사장님의 것입니다. 대가도 없이 어떻게 동생들에게 내주려 하십니까.”
‘우리가 듣고 있는 걸 뻔히 알면서 저렇게 대놓고 반대를 해?’
“…….”
‘아오. 형 앞이라 뭐라고 하지도 못하겠고….’
“…….”
“…너희는 먼저 가 봐. 아무래도 식사는 나중에 같이해야겠다.”
* * *
수현은 김현성 사장이 능력 있는 만큼 목소리도 낼 줄 아는 사람이라 판단하는 계기가 되었다.
진짜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오빠한테 큰 소리도 낼 줄 아는 사람… 이쪽이 진짜 브레인이고 최측근이야. 배 이사는 비서일 뿐이었어.’
“아. 응.”
“알았어….”
“수진이 너는 강운 증권 계좌 알아서 챙겨놔. 여기 일 처리 맡길 사람은 있어?”
-마침 경호원 한 명이 한국에 들어가 있어. 만들라고 할게.
“다시 연락할게.”
-오케이. 바이~
동생들을 내보내고 수화기를 내려놓은 수안이 화가 난 김현성 사장을 자리에 앉혔다.
“앉아봐. 왜 그렇게 화가 났어….”
“그렇잖습니까. 작게 시작해도 부사장님 손을 타기 시작하면 무섭게 불어날 겁니다. 지금까지 제가 봐 와서 잘 압니다! 철도 들지 않은 부사장님 동생들… 아직 뭐가 고마운지도 모릅니다. 부사장님은 강운가 장남입니다. 나중에 강운 그룹을 물려받으실 분이고요. 형제들은 때가 되면 분명히 부사장님 반대편에 선단 말입니다. 그런 형제에게 왜 자본금을 만들어 준단 말입니까. 그것도 본인 돈으로 말입니다.”
수안도 충분히 이해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실제로 준비까지 하던 눈치였다.
“김 사장….”
“이건 아닙니다. 부사장님 형제들에게 비롯된 자본금이라면 어찌어찌 조금 불려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시작부터 부사장님 돈으로 시작한다면 저는 반대하겠습니다. 형제를 어떻게 믿습니까? 제가 직접 겪은 일을 말씀드릴까요?”
김현성 사장이 형제를 믿지 않는 이유가 있었다.
“…저희 아버지는 첫째였습니다. 그 뒤로 셋이나 되는 남동생과 막내 여동생이 있었죠. 할아버지 집이 부유했던 것도 아닙니다. 조막만 한 논과 텃밭 여기에 집이 하나 있었어요. 아버지가 할아버지 할머니 다 모시고 살았는데, 아버지 형제들은 어느 것 하나 양보하지 않더군요. 양보? 그냥 똑같이 나눴어도… 아니, 동생들에게 다 나눠줬어도 불만 하나 없었을 아버지였어요.”
수안은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사람들 참 독합니다. 형에게 사기 치고 보증 서게 만들고… 한 집안 망하게 만드는 것은 순식간이었습니다. 지금은 서로 연락도 안 하고 삽니다. 그 작은 유산을 가진 집도 이 모양 이 꼴이 났습니다. 하물며 강운 그룹입니다. 부사장님이 아무리 사랑으로 대해 주고 돈을 줘도, 형제들이 나중에 만족할 것 같습니까? 더 달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빼앗고 싶은 마음. 안 들 것 같습니까? 적당히 챙겨 주시면 뭐라 안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건 아닙니다.”
“…아버지는 요즘 자신의 형제들을 어떻게 생각하시던가.”
“하아. 지금도 명절에 대문만 보고 있습니다. 문 열고 동생들이 들어올까 싶어서… 그 꼴을 보면 정말 답답해 미치겠습니다.”
보증으로 집을 망하게 만든 형제지만, 여전히 형제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아온 김현성이다. 만약 정말로 그들이 돌아왔다면, 아버지는 싫은 소리 한마디 안 하고 반기셨을 분이다.
‘고생한 자기 자식들에게 미안하면 그러면 안 되죠. 아버지.’
지금까지도 김현성은 아버지 형제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 사람들 때문에 어려운 집에서 힘든 학창 시절을 보내야 했고, 겨우겨우 자신만 공부해서 대학을 들어갈 수 있었다. 동생들은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바로 직장 생활을 해야 했다.
“…김 사장도 밑에 동생들 있잖아. 항상 잘 챙겨 준다고 알고 있는데….”
“제 동생들은 정말 고생 많이 했습니다. 충분히 대우받아도 되는 애들입니다. 아버지 형제들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김현성 사장이 평소 동생들을 얼마나 살뜰히 챙기는지 알고 있었다. 수안에겐 그 아버지에 그 아들로 보인다. 그래서 동생들에게 해 주는 것도 이해할 줄 알았던 수안이다.
“…그런데 김 사장.”
“예. 부사장님.”
“날 너무 띄엄띄엄 보는 거 아냐?”
김현성은 정신이 확 돌아왔다. 대차게 들이받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내가 무슨 짓을….’
“제, 제가 형제분들 계신 가운데 너무 언성을 높였습니다. 죄송합니다.”
얼른 일어나 허리를 굽혔지만 수안도 급하게 일어나 김현성 사장의 굽힌 허리를 일으켜 세웠다.
“김 사장. 내 말은 그 얘기가 아냐.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목소리 키워도 괜찮아. 내가 그런 일로 김 사장 타박할 사람은 아니잖아.”
“그럼 무슨 말씀이십니까.”
“동생들이 돈 좀 쥐고 있다고 해서 내가 휘둘릴 사람인가?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할 것 같아?”
“훗날 생길지 모를 불상사라면 미리 막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여전히 완고한 생각을 가진 김현성이다.
“그럼 김 사장. 내가 고작 강운 그룹 갖자고 동생들과 싸우겠어?”
“강운 그룹 포기까지 생각하십니까?”
“난 말이야. 그냥 나 먹고살 수 있는 정도 돈만 있어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어.”
김현성은 방금 사과도 잊고 또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강운 그룹은 그저 그런 경영자가 경영할 수 있는 회사가 아닙니다. 강운 그룹에 딸린 식구가 몇인 줄 아십니까? 일하는 직원들과 그 가족들까지 모두 강운의 식구입니다. 수십만 강운 가족의 무게를 어깨에 짊어지려면 엄청난 역량과 책임감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이런 말씀은 외람되지만, 부사장님 동생들은 그만한 역량이 보이지 않습니다. 부사장님이 강운 그룹을 포기한다는 것은 수십만의 강운 식구를 길거리로 내모는 일입니다! 왕좌를 차지하고 싶으면 왕관의 무게도 견딜 수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재고해 주십시오!”
수안은 동생들을 다독이던 것과 다른 방법이 필요함을 느꼈다.
“어허. 우리 김현성 사장. 인제 보니 강운 그룹 사람이었어?”
농담처럼 한 말이지만, 돌아온 대답은 가볍게 여길 수 없었다.
“저는 강수안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강수안이 강운입니다.”
“…….”
수안은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가슴을 울렁이게 만드는 말이었다.
‘김현성 사장이 언제부터 이런 마음을 먹고 있었어.’
“…나 참. 이렇게 또 충성 서약을 받네.”
“…….”
‘충성에 걸맞는 대가는 믿음이지.’
수안은 꺼내지 않았던 미래 계획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강운 그룹 포기한다는 뜻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시작하기도 전에 싸움을 끝낼 테니까.”
“…네?”
“아버지가 강운을 물려준다고 해야 싸움이 나잖아?”
“…그렇죠. 회장님께서 미리 지분을 넘긴다면 모를까… 필연적인 분쟁입니다.”
“그런데 내가 물려주기도 전에 강운 그룹 주요 지분을 다 갖고 있네? 그럼 물려줄 강운 그룹이 있어? 싸움 날 일이 있냐 이 말이야.”
“……!!”
수안은 1997년부터 23%까지 확대되는 국내 법인에 대한 외국인주식투자 한도에 맞춰 BE 자금을 국내에 들여오고, 강운 그룹 지분을 차근차근 늘려갈 생각이었다. 올해 이미 15%까지 올라간 참이라 일정 수준까지 지분매입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지만, 아직 달러를 들여올 적절한 시기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예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해외에서도 국내 회사의 지분을 매입할 수 있었기에 BE에서 만든 페이퍼 컴퍼니를 통해 일부 지분을 매집 중이다.
그리고 지분이 아니라도 강운 그룹 전 사장단이 수안의 지시를 듣는다. 여기에 지분이 더해지면 철옹성이 완성되는 것이다. 형제간 지분 싸움은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그래. 그 지분 싸움. 하나도 걱정하지 마. 동생들 자본금 돌려주기 전에 내 지분은 내가 착실히 챙겨둘 테니까. 설마 아버지가 강운을 쪼개려 마음먹어도 그 전에 강운은 내 주머니 안에 있을 거야.”
‘충분히 가능한 일. 최근 급격하게 증가한 미국 BE 인베스트먼트 자금이면….’
“그리고 나도 김 사장과 같은 마음이야. 내가 낳은 피붙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어려서부터 내가 돌봐 온 내 동생들 아닌가. 형이 최고의 기업을 거느린 세계 최고 부자가 될 건데, 고작 돈 몇 푼과 계열사 일부가 대단하진 않잖아. 나한테는 이게 적당한 수준이라고.”
김현성 사장이 적당히 챙겨 주면 뭐라 하지 않겠다고 했던 말의 답변이었다.
“역시! 역시! 부사장님은 충분히 되실 겁니다. 세계 최고 부자. 확실히 가능합니다.”
김현성 사장은 이제야 걱정을 내려놨다. 수안이 가진 미래의 계획을 굳게 믿기 때문이다.
‘부사장님이 마음먹었으면 무조건 된다. 강운을 부사장님이 갖고 세계 최고 부자가 된다!’
김현성은 강수안을 신봉하고 있었다.
“나도 내 동생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그래서 미리미리 사회를 경험하고 힘든 시간도 보내게 만들려고 했는데, 내 자식이 태어나면 내 자식이 우선일 거잖아. 그렇지 않아?”
“물론입니다. 내가 낳은 자식을 가장 우선해야죠.”
김현성은 지극히 동의하는 바였다. 자식을 낳았으면 아버지가 되어야지 형, 오빠가 되면 안 되는 법이다. 부모가 자신의 위치를 잊으면 자식들은 고달픈 삶을 살아야 했다. 자신도 동생들을 아끼긴 하지만 자식을 우선으로 두고 있었다.
“내가 애 낳고 더 크기 전에 동생들 미리 챙긴다 생각해 줘. 그래야 나도 집안 걱정을 덜지.”
“제가 원대한 뜻을 모르고 조급하게 나선 모양입니다.”
“그리고 좀 전에 김 사장도 봤겠지만, 김 사장이 자신들 신경도 안 쓰고 막말하는데 뭐라 하는 놈 있었어?”
“아. 그러고 보니 다들 아무런 말씀도 안 하시고 그냥 나가셨네요?”
크게 한 소리 들어도 이상한 상황은 아니었다.
“내 동생들이 어려서부터 나한테 치이고 살아서 그래. 소심하게 주변 눈치 보는 게 생활이야. 이런 동생들인데 내가 어떻게 신경을 안 쓰나.”
“저런. 안타까운 분들 앞에서 제가….”
김현성은 수안의 동생들이 많은 것을 챙겨 줘야 할 부족한 사람들로 보이기 시작했다.
“괜찮아.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는 거지. 그래도 다음엔 미리 깜빡이 좀 넣자. 김 사장이 갑자기 치받으면 나 많이 놀라.”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벌 좀 받자. 김 사장은 오늘 일에 대한 벌로….”
‘무엇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나랑 밥 먹자. 김 사장 덕분에 동생들 쫓아내서 밥도 못 먹었잖아.”
‘이건 벌이 아니라 상이 아닐지….’
“예약은 취소하지 않았을 겁니다. 바로 준비시키겠습니다.”
룸서비스가 예약되어 있었다.
“배 이사 불러서 같이 먹자. 예약 숫자 맞춰야지.”
“예!”
김현성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룸에서 나설 수 있었다.
다니던 회사에서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쫓겨나고 배영성과의 작은 인연으로 시작된 수안과의 인연이었다. 처음엔 돈을 위해서 따랐지만, 하루하루 수안을 겪으며 자연스럽게 사람의 향기에 젖어 들었다. 배영성, 최장호, 이방효, 차진호. 자신보다 먼저 수안을 따르던 중요 인물들 모두가 그랬다.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고압적이고 안하무인일 줄 알았던 재벌 3세 수안은 누구보다 사람다운 사람이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도 그 매력에 푹 빠져 있었다.
오늘도 그 모습 그대로였다. 자신처럼 동생을 사랑하고 챙겨 주는 맏이였고, 부하 직원의 실수도 감싸 줄 수 있는 포용력 넘치는 오너였다. 철철 넘치는 매력에 김현성의 믿음은 더욱 굳건하게 수안을 향했다.
‘세계 최고가 목표다. 나는 강수안의 칼이고 총이다.’
김현성은 앞으로 수안이 가는 길에 있을 걸림돌을 모조리 치워 버릴 생각이다.
‘직접 못하시겠다면 제가 하면 됩니다. 동생들은 제 선에서 적당히 챙겨 드리고 치워 드리겠습니다. 부사장님.’
수안에겐 따를 것처럼 말했지만, 여전히 김현성의 생각은 완고했다.
수안이 안타깝게 생각하는 동생들이지만, 김현성에겐 아무런 가치도 없는 사람들이다.
거리낌 없이 치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