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극적인 경호
“관련 보고가 회장님께도 들어갔을 겁니다. 범 강운가의 일이니 강운 그룹 이미지 관리를 위해서도 통제할 필요가 있었겠죠.”
“그럼 큰아버지가 아버지를 통해 그 얘길 들었다고?”
“예. 아마도 직접 연락하지 않으셨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강병모 회장이 더블 스타에 벌인 일련의 일들이 무관하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큰아버지는 동생에게 자기 자식들 못난 꼴을 드러낸 것이 기분 나빴다 이거지?”
“예. 사고 치고 다니는 자식이지만, 제 품 안의 자식이죠. 남들에게 드러나는 것도 감춰왔는데 동생에게 알려지고 자식 교육 똑바로 하란 소리까지 들었으면….”
“…꼭지가 돌았겠네.”
수안은 큰아버지가 자신을 왜 방해했는지 의문을 해소할 수 있었다.
동생의 아들인 자신은 어딜 가나 미담만 존재하고 있었고, 강병모 회장의 자식들은 사고 수습에 바쁜 상황이다. 안 그래도 아버지의 모든 자산을 물려받은 동생이 미워죽겠는데, 자식까지 비교 대상이 되었다. 그 미움이 오롯이 수안에게 향한 것이다.
“대응이 쉽지 않습니다. 모르는 상대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겠지만…. 혈연 아닙니까.”
“그렇지. 쉽지 않아.”
남보다 못한 혈연이라면 수단 방법을 가릴 필요가 있을까 싶다가도 아버지의 형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그렇다고 쪼르르 아버지에게 달려가 일러바칠 수도 없는 일이다.
고작 이런 일로 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는 없었다.
‘사촌 형들의 내밀한 비밀까지 파악 중인 비서실이 한송에서 더블 스타에 이빨을 드러낸 일을 모를 리가….’
아들을 도청할 정도로 과도하게 꼼꼼한 아버지다.
이미 알고 있음에도 두고 보는 아버지의 태도로 보면, 일러바쳐도 도움을 줄 것 같지 않았다.
“김 사장은 통신사 인수 미뤄.”
“아예 포기하신다는 말씀입니까?”
“나중에 통신사 인수할 기회가 올 거야. 지금 통신사는 대형 통신사로 통합되는 분위기로 가고 있어. 어차피 지방에 작은 통신사는 인수해 봐야 키우기만 어려워. 때가 되면 세기 통신을 지분 매입으로 취득할 생각이었어. 제조인 팬탁은 강운 계열로 넘기고 더블 스타는 통신사 중심으로 가면 되니까.”
“세기 통신 지분 매입이 가능하겠습니까? 거긴….”
“지금 대기업 둘이 대주주로 있는 세기 통신이지만, 필연적으로 불협화음이 생길 거야. 그 틈에 끼어들어야 해. 후일 위기 상황이 오면 세기 통신은 우리 거야. 괜히 빌미 주지 말고 통신사 인수는 접어.”
“예. 부사장님.”
“배 이사는 전방위로 한송 그룹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어. 공격이 통신사 인수로만 향하진 않을 거야.”
“일전에 말씀드린 대로 기자들 단속하겠습니다.”
“우리가 진행하던 일들도 마찬가지야.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
“예. 부사장님.”
“그리고… 맞고 가만있으면 억울하지 않아?”
수안은 팬탁에서 생산하는 삐삐와 팬탁과 업무 협약 중인 모토로라의 삐삐를 통해 작은 복수를 할 생각이었다.
“팬탁과 모토로라 빼 버려. 거기 아니라도 팔아 줄 곳 많아. 안 그래도 매출이 저조하니 회사에 영향은 크지 않겠지.”
“예. 바로 빼겠습니다.”
* * *
한송 텔레콤에 제품을 납품하지 않자 효과는 오래 지나지 않아 드러났다.
“부사장님. 한송 그룹 강 회장님 전화입니다.”
“…연결해.”
“전화 받았습니다. 강수안입니다.”
-나다. 수안아.
“…예. 백부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지난번에 결혼식장 찾아주시고 축하해 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난 감사하다는 조카의 말이 난 믿어지지 않는데 말이야.
“제가 백부님 심기를 불편하게 해 드린 것이 있습니까?”
-왜 우리 한송 텔레콤에 물건을 납품하지 않겠다는 건지 이유나 들어 보고 싶군.
“아…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그러고 보니…. 제가 매출 하위 통신사 제외하고 메이저 통신사와만 거래하라고 지시한 적이 있었습니다. 제품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서 진행한 일인데, 하위권 매출에 한송이 끼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한송 텔레콤은 나름 메이저 통신사 아닙니까. 요즘 통신사 점유율이 떨어진 것은 아닐 테고…. 어쨌든 제품은 다시 공급하라고 지시하겠습니다. 왜 이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제 불찰입니다.”
강병모 회장은 속을 살살 긁는 수안의 화법에 조금씩 말리기 시작했다.
-…제품이 좋아야 판매 실적이 나올 것 아니냐. 제품이 허접하니 당연히 매출이 안 나오는 거지.
“저희 제품 질이 떨어집니까? 그럼 한송 텔레콤은 일부러 우리 제품을 진열하셨던 모양입니다.”
-당연하지 않으냐. 내가 특별히 조카가 일으킨 회사에서 생산한 삐삐라고 신경 써서 진열하라고 했었지. 흠흠.
“아… 죄송합니다. 백부님. 제가 또 실수할 뻔했습니다. 실력으로 인정받도록 하겠습니다. 제품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지 않으면 절대로 한송 텔레콤에 납품하지 않겠습니다.”
-뭐. 뭐야?
“제가 기어코 좋은 품질의 제품을 만들어 내겠습니다.”
-그야 당연한 말이긴 한데… 그래도 납품을 하면서 품질을 올려야 하지 않을지….
안 그래도 팬탁의 삐삐를 팔지 않으려고 하다가 점유율이 하락하는 추세였다. 팬탁 제품을 받아야 했고, 그와 연계된 모토로라의 제품도 필수였다.
“백부님 회사에 누를 끼칠 수야 없지요. 제품 완성도가 떨어지면 결국 소비자의 화살은 통신사로도 향합니다. 팬탁에서 만든 질 떨어지는 삐삐 때문에 한송 텔레콤이 영향을 받아선 안 될 일입니다. 그간 넓은 마음으로 감싸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론 죄송할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백부님.”
-…그럼 모든 통신사에 납품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니냐? 네 말대로 그런 삐삐를 어디다 납품해? 아예 모든 제품 생산을 중단하고 시간을 들여 개선해야지.
논리로 수안을 상대하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저도 은혜에 보답할 기회를 주셔야죠. 저희 질 나쁜 삐삐는 다른 통신사에 납품해서 경쟁 통신사 얼굴에 먹칠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한송 텔레콤은 질 좋은 제품을 판매하는 믿음직한 통신사로 남을 겁니다. 지켜봐 주십시오.”
-…그, 그런 짓을 함부로 하면….
“아닙니다. 이거야말로 지금까지 제 회사를 보살펴 주신 백부님 은혜에 보답하는 길입니다. 나중에 찾아뵙고 감사 말씀 다시 전하겠습니다. 그간 정말 죄송합니다.”
-어. 어 그래….
전화를 내려놓은 수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수화기를 보고 있었다.
“고작 이런 경고로 호들갑은….”
수안은 정장 재킷을 걸치고 사무실을 나서며 비서에게 말했다.
“아까 한송 그룹 강 회장에게 다시 연락 오거든 나 팬탁으로 갔다고 해 줘요. 제품 개선 때문에 앞으로 매일 팬탁 개발 연구소로 출근한다고 하고.”
“예. 부사장님. 일정으로 기록할까요?”
“…실제 일정은 아니고 말만 그렇게 하세요.”
“아. 예. 부사장님.”
수안이 로비로 내려가는 동안 비서실의 연락을 받은 운전기사와 경호원들이 로비에 대기했다.
로비에 내려오자 차량은 이미 대기 중이었고, 수안은 뒷좌석으로 자연스럽게 탑승했다.
뒷문을 닫고 빠르게 뛰어 운전석으로 돌아온 기사가 확인 차원에서 물었다.
“오늘도 강운 전자 연구소로 가시겠습니까?”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다음부터 주기적으로 방문한 연구소였지만, 오늘은 다른 약속이 있었다.
“더블 스타로 갑시다. 배 이사랑 거기서 합류할 테니 최 실장만 남고 나머진 회사로 돌아가세요.”
“예. 부사장님.”
* * *
더블 스타에 도착해서 아현과 붙어 꼼지락(?)거리던 수안은 배 이사가 도착했다는 연락에 얼른 떨어져 앉았다.
“배 이사는 뭘 이렇게 급하게 와….”
“그냥 내려가서 만나요…. 여긴 좀 그래요.”
조금 전까지 찰싹 붙어 있던 둘이다.
배 이사가 들어오면 후끈한 공기를 알아챌까 걱정이었다.
“그럼 배 이사랑 일 좀 보고 올게. 이따 집에서 봐.”
“네.”
수안은 마침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배 이사를 잡아 다시 내려갔다.
“사모님께 인사도 못 드렸는데….”
“나중에 봐.”
“급하신 것도 없는데.”
“배 이사님? 그냥 갑시다….”
“못된 짓 하다 나오셨어요?”
“어허. 못된 짓이라니. 결혼한 부부끼리.”
“뭔 일이 있긴 했나 보네요.”
“부부 사이 금실이 좋은가 보다 하고 넘어가자.”
“흐흐. 역시 불타오르는 신혼.”
“에헤이. 또 시작이다. 내가 지난번에 준 약 얘기까지 해야 하나? 잘 먹고 잘 썼어? 효과 좋드나? 나보다 더 불타오르는 신혼을 즐기시는 배 이사님?”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죠.”
배영성의 천적은 수안이다.
“얼른 가자. 골프 강사 기다리겠네.”
수안은 오늘부터 골프를 배우기로 했다. 정·재계 인맥을 다지는데 골프만큼 좋은 운동이 없었다.
고객사 대표에게 같이 단거리 100미터를 뛰자고 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수안은 밑에 내려갔다가 아현을 경호하는 정주한 팀장을 만났다.
“안녕하십니까. 부사장님.”
“정 팀장. 수고가 많아.”
“아닙니다. 기쁘게 일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기자들 어때?”
정 팀장이 아니라 곁에 있던 최 실장이 답했다.
수안이 올라가 있는 동안 따로 그간의 경호 상황을 보고 받았기 때문이다.
“취재 열기가 약간 과열된 모습을 보인답니다. 지난번엔 사모님 차량 가까이에 취재 차량이 따라붙기도 했다는데… 약간 위험하지 않을지….”
“뭐?”
순간 수안은 영국 다이애나 왕세자빈의 비극을 떠올렸다.
사고 당시엔 이혼으로 왕세자빈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공식 별거에 들어갔고 이혼이 마무리되기 전이었다. 이후 이혼이 마무리되고 1997년 8월 마지막 날. 파파라치인지 영국 MI6인지 모를 추격자를 따돌리려다 사고가 발생했고, 다이애나 전 왕세자빈은 그 자리에서 사망한다.
‘그건 안 돼!’
수안은 위험하게 취재원이 따라붙는다는 말에 큰 걱정이 생겼다.
“정 팀장. 경호 업무가 너무 소극적일 필요는 없어.”
“…어떻게 할까요?”
“이미 따라붙는 놈들 번호판은 다 확인했잖아? 아내가 사무실에 있을 때 미리 주변 한 바퀴 돌아보면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마침 녀석들 차량 바퀴는 구멍이 났을지도 모르지. 어휴. 차에 문제가 생겼으니 따라오긴 힘들겠어….”
“그런 방법이….”
“그리고 하나 추가.”
수안은 스산한 눈으로 말했다.
“기어코 따라온 취재 차량과 경호 차량 간에 실. 수. 로. 접촉 사고가 발생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걱정하지 마. 재물 손괴든 인명 상해든 우리 법무팀에서 꺼내 줄 테니까.”
“적극적인 경호. 이해했습니다.”
툭툭.
수안은 정주한 팀장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부탁해. 정 팀장. 최 실장은 오늘 이 친구들 좀 도와줘. 난 배 이사랑 갈 테니까.”
“예. 부사장님.”
* * *
수안이 나가고 장호는 정 팀장과 팀원들을 모아 놓고 명령을 이행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따라붙던 기자들 차량 번호판 다 가지고 있지?”
“예. 실장님.”
“지금부터 찾는다. 녀석들이 자리 비우면 바로 바퀴부터 아작내 버려. 자리를 안 비우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차에서 떨어트리고. 부사장님이 승인하셨잖아.”
“…역시 부사장님은 우리 마음을 알아주시죠. 흐흐흐. 안 그래도 놈들이 제 세상인 양 설치는 꼴이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칼 챙기고, 타이어 바퀴는 옆구리를 제대로 찔러. 그래야 지렁이로 못 때우니까.”
““예!””
.
.
.
그날 아현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오랜만에 조용한 분위기를 느끼고 말했다.
“오늘은 조용하네요. 기자들 다 어디 갔대요?”
지하 주차장까지 들이닥치던 기자들이다. 멀리서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차가 밖으로 나가는 지금까지 주변은 한산했다.
“부사장님이 특명을 내리셨습니다. 앞으로 적극적으로 경호에 임하겠습니다.”
“이 사람도 하여튼… 매일 오늘만 같으면 좋겠네요.”
“예. 앞으로 주변을 깔끔하게 정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