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원
배영성은 수안의 신혼여행 마지막 즈음에 이방효 사장에게 연락받을 수 있었다.
“어. 그래. 어쩐 일로 연락이야?”
수안은 전화를 받고 자리를 피하는 배영성의 모습에 어디서 온 연락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미스터 스티븐과 통화 가능합니까?
“매번 그렇지.”
-함께 계신 모양이군요.
“내게 말하게.”
수안이 아현과 함께 있기에 BE와 관련된 내용을 전달하기 어려웠다.
-예상했던 매각 금액을 약간 밑도는 방향으로 성사되었습니다. 파이자 제약에서 290억 달러에 인수하기로 했습니다. 비용은 예정된 그대로 지급됩니다.
처음 예상했던 금액은 200억 달러였지만, 미국 정부의 감청을 염려해 여러 내용이 빠진 결과 보고가 이어지고 있었다. 미국의 통신 감청은 대단했기에 보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용은 장관과 부장관에게 건네줄 5억 4천 5백만 달러의 로비 자금을 말함이다. 보통의 로비와 차원이 다른 규모의 금액이었다.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엄청난 금액에 배영성의 가슴이 철렁했지만, 흥분을 감추고 말했다.
“후우… 그 정도면 나쁘지 않은 소식이야. 나중에 식사라도 같이하세. 수고했어.”
-이번 거래 덕분에 중요한 끈이 공고해져서 앞으로 추진하는 일들도 탄력을 받을 것 같습니다. 금액은 적지만 여러모로 성공적인 거래였습니다. 나머지는 염려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꼭 전해 주십시오. 자세한 내용은 메일로 남겼습니다.
“…그만한 가치를 하는 법이지.”
돈의 규모가 큰 만큼 서로 간에 신뢰는 급상승이었다. 특히 그동안 연결점이 없던 재무부 장관 및 부장관과 새로운 인맥은 앞으로 BE가 미국에서 활동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아현은 신혼여행 내내 바쁘게 움직이는 배영성의 모습에 수안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배 이사님이 당신 대신에 일하느라 맨날 바쁜 거 아니에요?”
“그럼 바빠야지 놀아?”
“얼른 돌아가야겠어요.”
“안 그래도 오늘이 마지막이잖아. 벌써 끝이라니 아쉽다.”
“오늘은 느긋하게 수영이나 해요. 피로도 풀고요.”
“먼저 올라가 있어. 난 배 이사에게 그간 밀린 보고 듣고 올라갈게.”
수안은 아현이 자리를 비운 잠깐 배영성의 보고를 들었다. 배영성은 그사이 받은 메일까지 출력해 둔 상태였다.
“성공입니다. 290억 달러로 확정이라고 합니다. 관련 비용은 해외 계좌로 처리했습니다.”
“하! 프랭크 부장관이 상당히 노력했는데?”
“그만한 돈이 걸려 있으면 누구라도 그렇게 할 겁니다.”
“푸흐흐. 덕분에 BE만 바빠지겠군. 운용 자금이 늘었으니 투자할 회사도 늘어날 거 아냐.”
“고작 약 하나로 이렇게 많은 돈을 버실 줄은….”
“아직 약이 하나 더 남았어. 진짜는 이제 시작이지.”
“하하하. 꽤 놀라겠습니다. 게다가 인수 대금 절반 이상을 대출로 마련했다고 합니다. 미국 정부에 여전히 힘이 남아 있는 모양입니다.”
“자신들이 독점 생산하고 시장을 잡아먹을 거라고 자신하던 분야에 경쟁자가 나타날 줄은 몰랐을 거야. 그래도 이번에 지급한 돈은 약을 팔아 다 벌어들일 테니 문제는 없겠지.”
거액을 지급한 파이자 제약이지만, 앞으로 비아그라가 290억 달러를 벌어들이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향후 파이자 제약의 효자상품이 될 비아그라 되시겠다.
“나눠 먹어야 하는 시장인 줄은 전혀 모르겠네요. 하하.”
“그 큰 파이를 혼자 다 먹으면 체하지 않겠어? 새로운 약은 효능이 더 좋지만 말이야.”
수안은 타다라필을 원료로 하는 새로운 신약 시알리스의 성공이 눈에 잡힐 듯 그려졌다.
“저기….”
수안은 아쉬운 눈치인 배영성을 보고 의외라는 듯이 물었다.
“아직 시제품 못 받았어?”
“이방효 사장이 보안을 이렇게 잘 지킬 줄은 몰랐죠.”
철석같이 믿고 있었건만 이방효 사장은 배영성에게 시제품도 넘겨주지 않고 있었다.
“아이고. 이방효 이 사람 안 되겠네. 배 이사 미리 챙겨 주라고 그렇게 얘길 했는데.”
“흠흠… 다음에 입국할 때는 꼭 들고 오라고만 말씀하시면….”
“내가 미리 받아 뒀으니 그거 줄게. 나야 쓸 일이 있어야 쓰지.”
“우앗! 나만 쏙 빼놓고!”
수안은 한국에 돌아가서 책상 서랍에 박아 둔 약을 배 이사에게 건네주기로 약속하고 위로 올라갔다.
신혼의 마지막 밤이 지나고 있었다.
* * *
수안은 한국으로 돌아와 처가댁에 인사하고 집에 돌아왔다.
“저희 왔습니다.”
“잘 쉬고 왔어요. 아버님. 어머님.”
“그간 일은 다 들어서 궁금한 것도 별로 없구나. 그나저나… 수진이를 만났다지?”
“미국에서 어찌 사는지 궁금해서 잠깐 다녀왔습니다.”
“별문제 없었지?”
“예. 수진이가 타지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패션 분야에 대한 열정이 상당합니다.”
수안이 새로 주입한 열정이다.
“당연히 그래야지. 앞으로 패션 사업을 맡으려면….”
아예 넘겨준다는 뜻이 아니라, 말 그대로 경영만 맡겨 볼 생각이었다.
“경호원을 학교에 함께 입학시키신 것도 좋은 생각이셨습니다. 녀석이 둘을 경쟁자 삼아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아요.”
그래도 수안은 수진이 잘되길 바라는 마음에 칭찬을 늘어놓았다.
강운모 회장이 궁금한 것은 다른 일이다. 아들이 극구 미국으로 향한 이유를 알고 싶었다. 수안이 미국으로 향한 것은 동생을 보겠다는 이유 하나가 아닐 터였다.
“넌 미국에서 뭘 보고 왔어?”
‘예상 질문이네.’
뻔한 질문에 뻔한 대답이 준비되어 있다.
“크나큰 미국 시장. 앞으로 우리 강운이 진출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분야는?”
“가전과 자동차, 그리고 반도체와 디스플레이입니다.”
훗날 K-팝 문화까지 수출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시기상조다.
“자동차를 수입하는 미국에다 우리 자동차를 수출하겠다? 거기다 GE로 이름 높은 미국에 가전을 수출하자고?”
“우리나라만큼 빨리 변화하는 나라는 없습니다. 시장의 선두 주자가 정체된 사이 우리가 치고 올라가면 됩니다. 중국만큼이나 가능성이 높은 곳이죠. 중국에 진출하면 돈을 벌 것이고, 미국 시장에 진출하면 세계 일류가 됩니다.”
강 회장은 세계 일류라는 말에 일전에 수안이 말했던 단어가 떠올랐다.
“초격차….”
“예. 우리가 개발에 돈을 투입하는 만큼 벌어진 격차가 메워질 것이고, 이는 초격차로 재탄생할 겁니다. 강운 전자는 초격차를 갖고 세계 시장을 선도하는….”
어머니와 아현은 강 회장과 수안의 대화에서 한걸음 멀어져 있었다. 끼어들 수도 없는 주제로 대화가 오가는 와중이었다.
강운모 회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눈을 떴고, 수안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신혼여행으로 수안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강운에는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네 녀석 덕분에 회사에 활기가 돌아.”
“직원들의 아이디어 제안서가 쌓이는 모양이죠?”
수안의 말 대로였다. 확실한 보상을 약속하니 강운의 직원들은 있는 생각 없는 생각 다 짜내서 제안서를 만들기 시작했고, 일부 제안의 경우 원가를 획기적으로 절감하고 효율성을 크게 증가시켰다. 새로운 기술을 발명하는 경우라면 시일이 오래 걸리지만, 직무 제안은 곧장 실행할 수 있기에 당장 회사에 적용할 수 있었다. 직접적인 영향은 수치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맡은 일에 더 집중하고 문제점을 찾는 태도, 능동적인 직원들의 업무태도가 주는 이득은 수치로 따질 수 없는 것이었다.
“…확실히 직원들에게 덜 주긴 했던 모양이더구나.”
“직원들이 아버지를 찬양하겠습니다. 하하하.”
“너… 조금 일찍 들어오면 안 되겠느냐?”
수안이 자신의 회사를 위해 시간을 달라고 했었던 일을 말함이다.
“10년은 너무 길어.”
“…5년 이내에 특별한 성과가 없으면 강운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좋다. 5년이라면 길지 않지.”
분명 “특별한 성과 없으면”이라는 조건이 달렸지만 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강 회장이다.
수안은 아버지의 생각을 바로잡지 않았다. 때가 되면 그 성과를 목도할 수 있었다.
‘이번에 비아그라 특허 판매만으로 강운 전자 몇 년분 영업 이익을 벌었는지 아시면….’
290억 달러에서 로비 비용을 제해도 280억 달러에 가깝다. 그간의 개발비와 임상에 들어간 비용도 제외해야겠지만, 엄청난 이익이 생겼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강운모 회장이 목덜미를 잡기에 충분한 돈이었다.
‘나중에 즐기시라고 남겨두죠.’
비아그라 매각 금액 덕분에 IMF에 주워 담을 회사가 급격히 늘어났다. 해외 기업에 투자할 수 있는 분야도 마찬가지로 늘어났다.
“기대에 보답하겠습니다. 아버지.”
“…너무 무리하진 마라. 안 그래도 잘하고 있으니.”
쉬이 칭찬이 없는 아버지도 수안을 치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이번 보상으로 인한 회사의 변화는 오로지 수안의 공이었다.
“하하하. 안 그래도 적절히 조절하고 있지요.”
“뭐 인마?”
아직 공개하지 않은 기술에 대한 얘기라서 수안은 얼른 말을 돌렸다.
“손주부터 얼른 만들겠습니다. 이거야말로 절 낳아 주신 부모님에 대한 보답 아니겠습니까.”
“이, 이놈이!”
아현이 옆에서 듣다가 순간 얼굴을 붉혔다. 갑자기 이 얘기로 튈 줄은 몰랐다.
“흐흐흐. 손주는 몇 명이나 바라시는지….”
“나가!”
서재에서 나온 어머니는 오랜만에 수안의 등짝을 때렸다.
짜악.
“아윽.”
“너는 오늘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놓고 무슨 소릴 해? 아현이도 옆에 있는데.”
“어머니도 손주 빨리 보고 싶으시잖아.”
“…….”
아현은 시어머니가 아무 말도 없자 흠칫 놀란 얼굴이다.
“아, 아니야. 애는 천천히 낳으면 되지.”
“…노력해 보겠습니다.”
아현이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 * *
수안은 우선 더블 스타로 복귀해 신혼여행 초기에 지시했던 일을 보고 받았다.
“조사해 보니 한송 그룹에선 이미 예전부터 수를 쓰고 있었습니다. 김현성 사장이 진행하던 작은 통신사 인수가 뻐그러진 것도 결국 한송 그룹이 뒤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인수만 마무리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상대방 측에서 인수를 거절했습니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싶었는데, 배 이사의 말을 들어 보니 이제야 이해가 됩니다. 작은 통신사에서 한송 텔레콤 측의 말을 듣고 마음을 바꾼 것 같습니다.”
배영성과 김현성의 말이었다.
수안은 심각한 표정으로 자료를 읽고 있었다.
“다른 통신사 접촉은 어떻게 됐지?”
“…어떤 소문이 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통신사마다 들어 볼 필요도 없다는 듯이 거절하고 있습니다.”
“하! 아주 작정을 하셨어….”
“아무래도 강병모 회장이 단단히 마음을 먹고 있는 것 같습니다. 팬탁의 삐삐도 알아보니 한송 텔레콤 매출만 상당히 저조했습니다. 다른 통신사와 반대로 흘러갔습니다.”
“이유가 뭐야? 왜 나한테 이러시냐고. 배 이사는 왜 이러는 것 같아?”
“저희 사업 확장을 저지해도 한송 그룹에서 얻을 건 없습니다.”
큰아버지가 보는 눈빛이 이상하다고 해서 조사는 하라고 했지만, 이렇게 실체로 드러날 줄은 몰랐다. 추후 문제가 되었으면 되었지, 이전부터 뒤에서 방해하고 있을 거로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방해하는 이유를 알아내는 것이 먼저였다. 하지만 더블 스타를 방해한다고 해도 얻는 것이 없단다. 작은 통신사를 방해하고 한송 텔레콤에서 인수한 것도 아니다. 그냥 이유 없이 방해만 했다는 결론이었다.
“내 말이 그 말이야. 큰아버지가 조카인 내 사업을 방해하고 얻을 이익이 없잖아.”
“다만…. 사람 마음이 그렇습니다. 한번 미워하기 시작하면 뭐든 밉지 않겠습니까?”
“동생이 미워서 아들인 나를 적대한다고?”
아버지 강운모 회장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보이는 은원이다.
“강운 그룹은 한송에서 감히 비벼 보기 어려운 존재지만, 우리 더블 스타는 아닙니다.”
“그래도 그렇지… 큰아버지가 일부러 날?”
남도 아니고 가족이다. 아무리 밉다지만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부사장님의 성공은 결국 강운 그룹 회장님의 기쁨이죠. 이를 시기했다면….”
수안은 배영성의 보고에서 실마리를 얻었다.
“잠깐. 강병모 회장 자식들은 요즘 뭐 해? 내 사촌 형들 말이야.”
사촌이라지만 자주 만나지 못한 친척이다. 큰아버지와 교류가 별로 없다 보니 사촌 형들이 어떻게 지내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안 그래도 이 부분이 말씀드리기 어려웠습니다. 몇 해 전 해외 유학에서 돌아와 재벌가 자제들 모임에 자주 얼굴을 비춘다고 합니다.”
“거 쓸데없이 그런 데 얼굴 비추고 그래….”
수안은 재벌가 자제들 모임이 하등 쓸모없는 모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제법 문제도 많이 일으켰다고 들었습니다.”
“형들이 좀 유별나긴 했지만 문제까지는 아니었는데? 어디까지야?”
“여자 문제부터 직원 폭행, 음주 운전… 그리고 강운 비서실에서 확인 중인 심각한 일도 있었습니다.”
“하아… 여기서 더 심각한 문제가 더 있어?”
배영성은 얼굴을 찡그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최근엔 유학하며 하던 약을 국내로 들여오려 한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답니다. 아직 정확히 파악되진 않은 것 같습니다.”
“…….”
약까지 하고 있다면 쉽게 바로잡기도 힘들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