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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해한 패션의 세계 (66/304)

난해한 패션의 세계

아현은 수진과 식사하며 많은 대화를 나눴고, 몰랐던 수안의 어린 시절 얘기도 들을 수 있었다.

“오빠가 어렸을 때 얼마나 대단했는지 말하자면 끝도 없어요. 그림부터 시작할까요? 오빠는요….”

국민학교 시절 그린 그림이 어머니가 일하기 시작한 미술관에 걸리기도 했었단다.

작가를 알리지 않고 전시했는데, 그림을 사고 싶다는 사람이 많아 결국 그림을 내려야 했다고 한다.

“우아. 그 나이에?”

“이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미술뿐 아니라 악기도 잘 다루고 공부도 잘하고 운동은 말하지 않아도 알죠? 올림픽까지 나가서 금메달을 따올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요. 어쨌든 만능 오빠 때문에 우리만 맨날 모자란 애들 취급이었어요.”

‘이렇게 살았으니…. 아까 수안 씨 말이 다 맞았어.’

아현에게도 말했지만 수안은 동생들이 느끼던 열등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잘해 주고 싶었고, 더 감싸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수안의 모습조차 부모님의 시선엔 맏이의 믿음직한 모습으로 보여 악순환이 이어졌다.

이런 이유로 나중엔 동생들과 거리를 뒀다. 거리를 두고 스스로 성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그 방향이 비록 자신과 반대편이라도 상관없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가족이었고, 아끼는 동생들이다.

이제는 상황이 약간 달라졌다. 결혼해서 아내가 생겼고, 마냥 성장을 기다려 줄 시간이 없었다. 아현과 자신의 아이가 태어나고 장성하기 전에 형제들에게 떼 줄 것을 떼어 줘야 했다.

이제는 동생들이 반대편에 서지 않도록 할 생각이다. 그리고 빠르게 성장시킬 생각이다.

아현은 이제 수안을 향해 물었다.

“악기도 잘 다뤄요? 뭘 배웠어요?”

“뭐… 이것저것 잡다하게.”

수진이 덧붙여 말했다.

“잡다하게 한 것 치고는 너무 잘 다룬다고 생각하지 않아?”

“난 수안 씨가 악기 연주하는 것 한 번도 못 들어 봤어요.”

“오빠 뭐야? 언니한테 피아노 한 번을 안 들려 줬어?”

“수안 씨 피아노도 잘 쳐요? 나 듣고 싶어.”

“에헤이. 그게 언제 일인데.”

“저기에 마침 피아노가 있네?”

수진은 레스토랑 한편에 있던 그랜드 피아노를 가리켰다.

“미국은 이게 나빠. 아무 데나 피아노가 있어?”

“언니 신청 곡 말해 봐요. 언니가 부탁하면 오빠도 할걸?”

“차이콥스키 좋아해요. 피아노 협주곡 1번.”

“하아. 하필이면….”

“왜요? 이건 안 돼요?”

“내가 집중적으로 연습한 곡이잖아. 그 곡은 쉽게 잊어버리지도 않아요.”

“푸흡. 이봐. 오빠가 언니 부탁이면 할 줄 알았다고.”

수안은 배영성에게 부탁해 레스토랑의 허락을 얻고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따다다당 땅~♪ 따다다당 땅~♪

수안의 연주가 시작되자 아현은 입이 벌어지는 것도 모르고 연주에 빠져들었다.

수안은 피아노 건반에 감정까지 가득 얹어 열정적인 연주를 이어 갔다.

어린 시절 조막만 한 손으로 치던 피아노였지만, 그 이후에도 꾸준히 곡을 연주하며 잊지 않으려 노력해 왔다. 그 성과가 지금 나타나고 있다.

건반의 감촉은 익숙하고 편안하며, 피아노 선율은 수안의 온몸을 통과해 퍼져 나간다.

악보가 머리에서 계속 다음 장을 넘기고 있었고, 손가락은 건반을 오가며 춤추고 있었다. 수안의 격정적인 연주는 계속되었다.

클라이맥스를 지나 마지막을 연주하고 손을 뗀 수안은 건반의 여운을 느끼며 눈을 떴다.

‘자주 연습해야겠네. 바쁘게 살아온 날들을 보듬어 주는 기분이야.’

스스로가 만족스러운 연주였다.

식당 여기저기 앉아 있던 사람들의 박수가 들려왔다.

짝짝짝짝.

수안은 공연을 마친 피아니스트처럼 답례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우아…. 진즉에 들려 주지. 나 너무 감동했잖아요.”

아현의 말에 수안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쳤다.

“아끼고 아꼈다가 내 매력이 떨어지면 보여 주려고 했지. 수진이 때문에 들켜 버렸네.”

“훗. 오빠 아직도 많이 남았잖아.”

“또 뭐 할 줄 알아요? 다른 악기는 없으니… 이거 말고 또 연주할 수 있는 피아노곡 있어요?”

아현의 말에 답하려 하는데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근처에 있던 경호원이 그를 막아섰다.

“I Just….”

“Sorry….”

들어 보니 육상 선수로서의 자신을 알아본 팬이 다가왔던 모양이었다.

수안은 일어나서 경호원이 막아선 사람과 인사하고 직접 양해를 구했다.

‘팬은 그냥 지나칠 수 없지.’

수안은 팬을 가로막은 경호원들을 조심스럽게 비집고 들어가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괜찮으세요? 제가 신혼여행 중이라 방해받고 싶지 않다고 말해 뒀거든요.”

“오! 강 선수가 결혼했군요.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피아노 연주도 무척 인상 깊었습니다. 너무 잘 들었어요.”

“하하. 아내를 위해 연주했습니다.”

“한 곡 더 부탁드리려 했는데, 신혼여행 중이니 힘들겠습니다.”

“미국에서 처음 알아봐 주신 팬을 위해 한 곡 더 하죠.”

“영광입니다. 미스터 강.”

수안은 아현에게 눈을 찡긋하고 다시 피아노에 섰다. 주시하던 사람들이 다시 손뼉을 치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안 그래도 한 곡은 아쉽던 참이야.’

수안이 선택한 곡은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3악장이었다.

따라다라디디디딩~♪

수안이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가 다시 레스토랑을 가득 채웠다.

* * *

“오빠는 피아노 연주만 해도 먹고 살겠다.”

수진의 부러움이 가득한 말이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서로 식사비를 계산하려 해서 잠시 소란이 있었지만, 레스토랑에서 수안의 연주에 고맙다며 식사비를 받지 않겠다고 했다. 상황은 그걸로 종료였다.

“네가 음악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 오빠는 패션의 세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잖아.”

그림으로 어머니의 심미안을 통과한 수안이 설마 패션을 모를까.

‘패션은 수진이 영역이야.’

수진이가 패션을 맡는 한 수안은 지금까지 이해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될 예정이다.

“가끔 패션쇼에 가 보면 내가 지금 뭐 하는 짓인가 싶더라. 옷이면 다 옷이지 뭐 달라? 차라리 운동장 한 바퀴 달리는 편이 더 생산적이지 않겠니?”

“당신.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아현은 못 믿겠다는 듯이 수안을 보고 있었고, 수진은 얼굴에 미소가 짙어졌다.

“내가 패션을 꼭 맡아야 할 이유가 늘었네?”

“너 아니면 맡길 사람이 없지. 암. 내가 맡으면 다 말아먹어 버릴걸?”

차로 수진의 숙소까지는 금방이었다. 겨우 50분 걸렸다.

그사이 수안은 수진에게 하려던 말들을 할 수 있었다.

“한국 더블 스타의 김현성 사장 알아?”

“음… 일전에 들었던 것 같아. 그 사람은 왜?”

“통장에 돈 있으면 맡겨 놔. 불려 주게.”

“오오. 자신 있어?”

“나머지는 나중에 설명하마. 한국에 돌아가면 수현이랑 수용이에게도 같은 얘길 할 거야. 원금은 확실하게 보장하지.”

“진즉 오빠를 믿어야 했는데 말이지….”

수안은 손을 휘저으며 수진의 입을 막았다.

그 후 수진은 아현과 조잘거리며 수다를 떨었다.

“흐흣. 언니 오늘 즐거웠어요. 어서 남편 데리고 가요. 나 때문에 시간 많이 낭비했죠?”

“아니에요. 아가씨. 너무 즐거웠어요. 덕분에 수안 씨 새로운 면도 발견한걸요?”

“다행. 다행. 오빠 이제 가. 나 쟤들 따라잡으려면 지금부터 열심히 공부하고 디자인해야 하거든.”

수진이 가리키는 사람은 두 경호원이었다. 둘은 어색하게 서서 먼 산을 바라봤다.

아까 밖에 나오기 전, 둘이 숨겨오던 포트폴리오를 수진에게 보여 줬었다.

결과물은 상상 이상. 입이 쩍 벌어지는 디자인의 옷들이 눈을 어지럽혔다.

포트폴리오의 완성도 또한 본인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수진은 둘과의 수준 차이가 상당히 벌어져 있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은 참이다.

“남은 시간이 없긴 하지. 하지만 대학이 전부가 아니야. 알지?”

“알았어. 평생 배우고 또 배우라고?”

“잘 알아들었네. 오빠 간다.”

“오빠…. 오늘 고마워.”

수진은 고맙다는 말만 남기고 쏙 들어갔고, 두 경호원은 수안에게 깊이 허리를 접어 인사하고 들어갔다.

“오길 잘했네요.”

“용돈이나 두둑하게 줘야겠다.”

배영성이 곁에 있다가 얼른 답했다.

“제가 나중에 전달하겠습니다.”

“부탁해. 배 이사.”

아현은 차를 타고 가다가 물었다.

“수진 씨 용돈은 아버님이 주시지 않고 수안 씨가 주고 있어요?”

“아… 뭐. 오빠로서 조금 보태 주는 거야. 내가 돈을 못 버는 사람도 아니고.”

“돈 많은 오빠가 있으니 수진 씨는 유학 생활도 넉넉하네요. 집도 저렇게 크잖아요.”

한국에서라면 저택이라고 부를 만한 거대한 집이었다.

큰 수영장도 있었고, 운동을 위한 장소도 별도로 마련되어 있었다.

“집은 아버지가 얻어 주셨고, 나야 달러나 조금 주는 수준이지.”

미국에 위치한 BE 인베스트에서 비롯된 돈이다. 항상 넉넉하게 주고 있었다.

“나 오늘은 수안 씨 집에 대해서 좀 알고 싶어요. 강운 그룹이요. 이제 알아도 되지 않아요?”

“신혼여행까지 와서 공부하려고? 집에 가서 확인해도 충분해. 그리고 몇 개 계열사 이름만 알면 끝이야. 그건 지금도 알잖아.”

“배 이사님?”

“예. 사모님.”

“정리해서 알려 주실 수 있어요?”

배영성은 수안의 눈치도 보지 않고 바로 답했다.

“물론입니다. 강운 그룹 계열사를 정리해서 내일 드리겠습니다.”

“휴.”

‘이러다 더블 스타까지 다 알려고 하겠는데?’

수안이 포옥 한숨을 쉬자 아현이 말했다.

“오늘과 내일은 달라야 한다면서요. 항상 배우고 익히라며. 나도 그래야죠. 시누이만 배우라는 법 있어요?”

“하긴… 당신도 고려 호텔 경영 성과라도 확인하려면 공부를 해야지.”

“그건 내 것이 아니고요.”

“당신 회사가 될 거잖아. 배우려면 확실하게 배워야지. 배 이사. 고려 호텔 수익 구조와 체계를 아현 씨가 알 수 있게 정리해 줘. 전국 지점이랑 관련 회사 전부 파악할 수 있도록. 겸사겸사 더블 스타 계열사 자료도 취합해서 알려주고. 강운 그룹은 상세하게 만들기 힘들지만, 더블 스타는 아니잖아. 이 기회에 우리도 한번 정리하면서 상세하게 만들어 보자.”

의심하지 않도록 아예 더블 스타를 끼워 버린 수안이다. 방대하게 자료를 주고 다른 생각은 하지도 못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예. 알겠습니다.”

“…일을 너무 키우진 말고요. 그걸 언제 다 봐요.”

“누가 시험 봐? 천천히 느긋하게 보면 되잖아.”

“그건 또 그러네요.”

남편의 말에 홀딱 넘어간 아현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왠지 당신 손바닥 위에 올라가 있는 것 같단 말이죠…. 수진 아가씨처럼 말이에요.”

보다가 질려서 스스로 포기하게 만들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아니면 내가 생각도 못 한 다른 의도가 있을지도….’

“에헤이. 비약이 심해. 내가 언제 당신하고 수진이를 손바닥 위에 올렸어?”

“아니에요? 수진 아가씨는 내가 확실하게 봤는데? 당신이 눈 반짝거리면서 요리조리 아가씨를 의도대로 굴리는 거?”

아현은 남편의 눈을 보며 진실을 요구하고 있었다.

“…다 수진이 잘되라고 그러는 거지.”

“이봐. 이봐. 내가 다 봤다니깐.”

“눈치 빠른 와이프 씨. 우리 신혼여행 중입니다. 정신력은 아까 다 쏟았어. 나 당신한테 머리 안 굴려.”

“…정말이죠?”

“응.”

다만 아주 조금 감추는 일이 있을 뿐이다.

“알았어요. 배 이사님. 자료는 여행 끝나고 천천히 주세요. 괜히 여기까지 와서 일하지 마시고.”

“수안 도련님이 저 쉬라고 의도하신 모양이네요. 성공입니다.”

“풋. 그랬을지도 모르고요.”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하나도 억울하지 않지만 억울한 척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 * *

수안과 아현은 보통의 신혼여행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느긋하게 호텔에서 쉬고 내키면 나가서 돌아다녔다.

다른 커플과 함께할 일은 없었고, 계획된 일정에 끼워 맞추듯 움직이지 않아도 됐다.

그러던 어느 날 계획에 없던 방문자가 찾아왔다.

총으로 무장한 미국 경호원들도 막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여기서 뵙네요. 미스터 강.”

“아… 프랭크 부장관님. 여기까지 찾아주셨습니까. 부르시면 될 텐데….”

결혼식에도 참석했던 프랭크 빈치 재무부 부장관이다.

“하하하. 그래도 직접 찾아오니 수고가 덜지 않았습니까. 안 그래도 허니문을 방해하는데요.”

“괘념치 마십시오. 프랭크 부장관님은 언제든 환영입니다.”

두 번째 만남이다.

그리고 이곳은 재무부가 아니라 외부였다. 수안은 부장관이 바라는 바를 몇 가지 짐작할 수 있었다. 부장관까지의 닿는 선이 없어 연결하지 못했던 로비 혹은 다른 어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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