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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진의 다짐 (65/304)

수진의 다짐

다음 날 수진에게 가는 차 안에서 아현은 세상모르고 곯아떨어져 있었다.

피곤할 법도 했다.

‘내가 좀 괴롭혔어야지….’

“아휴. 잘도 잔다.”

요즘 하루하루가 꿈만 같은 수안이다.

정말로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게 꿈이라고 할까 봐 걱정이었다.

“신혼은 신혼이십니다. 눈에서 꿀 떨어지겠습니다.”

“배 이사도 오래전 일이 아닐걸?”

“큭. 저도 아직 신혼이죠. 결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요.”

“흐흐흐. 신혼이 좋긴 좋지. 얼마나 남았어?”

“거의 다 와 갑니다.”

대화 소리에 아현이 뒤척이다 잠에서 깼다.

“끄응… 다 왔어요?”

“마침 깼어? 거의 다 왔다네.”

“나 화장 좀 고칠게요.”

아현은 거울을 꺼내 보다가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아악!”

“왜? 무슨 일이야?”

“차 세워!”

배영성의 말에 차가 급정거했고,

끼이익. 끼이익. 끼익. 끼익. 끼익.

뒤에 섰던 모든 차량도 급하게 멈춰 섰다.

“…얼굴이 심각하게 부었어요.”

“하아… 깜짝이야. 난 또 뭐라고.”

다른 차량에 타고 있던 클락슨의 무전이 들어왔다.

-무슨 일입니까!

“별일 아닙니다. …벌레가 들어왔나 봅니다.”

-알겠습니다.

배영성은 조용히 다시 말했다.

“출발해.”

“예. 이사님.”

“당신 때문이에요. 어젯밤에 왜 라면은 먹자고 해서는….”

“같이 잘만 먹어 놓고 왜 그러신담?”

“내가 먹는 게 아니었어. 이 얼굴을 어쩔 거냐고.”

“당신은 살 좀 붙어도 예뻐.”

“여기서 살 붙으면 TV에 얼마나 크게 나오는 줄 알아요?”

“보기 좋기만 한데….”

“난 몰라요.”

부지런히 찍어 바르던 아현은 수안의 얼굴도 끌어와 화장품을 바르기 시작했다.

“당신도 미리미리 관리 좀 받아요.”

“난 피부 괜찮아. 아직 젊다고….”

“젊었을 때 관리받아야 더 효과가 좋다고요. 자외선 차단 크림은 기본으로 항상 바르고 다녀요. 여기 햇볕이 얼마나 따갑다고요.”

“흐흐.”

자신을 신경 써 주고 챙겨 주는 아내가 있다는 것.

부모님의 보살핌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뭘 잘했다고 웃어요? 앞으로 라면 먹자고 하지 말아요.”

* * *

대학가에 도착한 수안은 수진이 머물던 숙소로 들어갔다.

“오빠! 새언니도 왔어요?”

“네에. 아가씨.”

“잘 있었냐?”

“오빠 결혼한 지 이틀이거든? 내가 하루 빨리 들어왔잖아.”

“흐흐. 그래도 미국에선 처음이잖아.”

“뭐 하러 여기까지 와? 결혼식장에서 봤으면 됐지.”

“너 사는 데 좀 보려고 그런다. 어디 남자 안 숨겨놨냐?”

“이보세요. 내가 오빠 같은 줄 알아? 그리고 나랑 학교도 같이 다니는 여자 경호원이 둘이나 있는데 무슨 수로 연애를 해?”

수진의 경호원은 둘 다 여성이었고, 수진이 다니는 대학에도 처음부터 함께 입학해서 밀착 경호를 이어 가고 있었다.

“성적은 잘 나와?”

“당연하지. 여기 경호원들보다 내가 더 잘한다고.”

수진이 곁에는 평범한 대학생 차림의 여성 둘이 함께 있었다.

“뭐?”

수안의 인상이 험악해졌다. 뜬금없는 분위기였다.

“왜? 안 믿겨? 점수 보여 줘?”

수진은 자신만만했다.

“…거기 둘. 이리로.”

수안이 멀뚱히 서 있던 둘을 가까이 불렀다.

“예. 도련님.”

“손바닥 내밀어 봐.”

둘은 왜 그런지도 모르고 얼른 손바닥을 내밀었다.

짝. 짝.

수안은 둘의 손바닥을 야무지게 때리고 말했다.

“방금 따귀 한 대씩 맞았다고 생각해. 차마 내 사람이 아니라 따귀는 못 때리겠으니까.”

“……!”

“……!”

“오빠! 갑자기 왜 그러는데?”

“넌 아직도 모르겠냐?”

“뭘!”

동생 수진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한국에서 디자인학과 졸업하고 능력까지 출중한 둘을 골라서 너랑 같은 대학에 넣었다. 미국에 오기 전에 이미 영어도 완벽한 둘이었어. 그런 둘이 너보다 성적이 낮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

수안은 어느새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두 여성 경호원에게 계속 말했다.

“아무리 모시는 사람이래도 여기까지 배려하는 게 어딨어? 너희보다 낫다는 생각 때문에 얘가 위기감이 없잖아! 이것도 비서실에서 미리 지시하던가? 최 실장이 시켰어?”

“…아닙니다.”

“최 실장 맞네.”

“…….”

“남은 시간이라도 제 성적을 받도록. 강운 그룹 지원으로 여기까지 와서 유학한다지만, 너희에게도 큰 기회잖아. 배려랍시고 일부러 점수를 낮게 받아서 쓰나! 너희 시간은 안 아까워? 무려 4년이야. 회장님이 아셨으면 너흰 바로 잘렸어!”

“죄송합니다. 도련님.”

“…진짜야? 정말로 나 때문에.”

“…죄송합니다. 수진 아가씨.”

“둘은 나가 봐.”

“예. 도련님.”

둘이 조용히 밖으로 나갔고, 수진은 울먹이며 수안을 올려다봤다.

“오빠….”

“모를 수도 있다. 괜찮아. 얼마 안 남았지만,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해.”

“…난 내가 잘난 줄만 알았어. 오빠 아니었으면 아무 생각 없이 웃으면서 졸업했겠지. 두 사람에게 깜빡 속았어. 내가 저들을 얼마나 믿었는데….”

수안은 배신감에 분노하는 수진에게 다른 방향을 제시했다.

“네가 하는 일에 도움이 될 사람들이다. 너와 같은 과정을 거치고 같은 걸 배웠지. 나한테 싫은 소리는 다 들었으니 너는 다독여 줘. 그렇게 하나씩 네 사람으로 만드는 거야. 저들도 다 널 위한다고 한 일이야. 그리고… 저들보다 못한다고 네가 못난 사람이 되지 않아. 넌 충분히 잘하고 있고, 앞으론 더 잘할 거야. 넌 누구보다 잘난 내 동생이다.”

수안의 말은 수진의 분노를 차분히 잠재우고 작은 파문을 던졌다.

“하아…. 오빠한테 배울 일이 한둘이 아니었네.”

“저 둘에게 배울 것도 많을 거야. 앞으로도 마찬가지. 주변에서 배우고 또 배워. 나도 항상 배운다. 지금도 부족하고 내일도 부족하겠지만, 오늘과 내일은 달라야 하지 않겠니? 안일하게 마음먹고 있으면 평균밖에 가지 못해. 우린 평균으로 만족할 위치가 아니야. 우리가 짊어진 강운 그룹 식구들을 항상 생각해야 해.”

오빠의 말이 연이어 파문을 남긴다.

“오빠…. 내가, 아니 우리가 오빠를 두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런 얘긴 됐어.”

동생의 속마음을 끄집어낼 생각은 없었다. 수안에겐 이미 봉합되어 끝난 얘기였다.

“이것도 다 알고 있었던 거지?”

“됐다니까. 밖에서 기다릴 테니까 준비하고 나와. 밥이나 먹자. 근처… 라고 하긴 뭐한데, 괜찮은 식당 예약해 놨다.”

아현은 수안이 화내는 모습에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수안이 얼른 아현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놀랐지? 미안.”

“…아니에요. 잘하셨어요. 수진 아가씨가 몰랐던 것도 당연하고요.”

“아직 수진이가 어려서 그래. 나중엔 수진이도 이상하다는 걸 알았을 거야.”

“…수진 아가씨 당신이랑 한 살 차이예요. 게다가 지금은 다 큰 성인이고요.”

성인에게 고작 1년 차이로 어리다고 할 수 없다. 수진보다 두 살 많은 자신도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별것 아닌 말 한마디로 감춰진 상황을 단숨에 파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맏이랑 둘째의 성향 차이라고 해 두자.”

아현은 수안이 자신보다 연상이라고 생각될 때가 있었다.

‘가끔 그런 생각이….’

가끔이 아니라 종종이라고 해야 맞았다.

‘…자주 들곤 했지.’

그래서 자신이 수안에게 존대하고 수안이 자신에게 편하게 말하는 것이 익숙하게 느껴졌었다.

다른 사람 얘길 들어 보면 비슷한 나이대의 남편이라도 어린애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는데, 자신은 오히려 반대였다.

“그런데 최 실장님은 왜 경호원들에게 수진 아가씨를 배려하라고 했어요?”

“…….”

수안은 조금 말하기 난감했다. 최 실장이 왜 이런 지시를 했는지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남들보다 잘났다는 걸 수진 아가씨에게 각인시켜야 해요? 설마 재벌가의 교육 방침?”

“그런 교육 방침은 없어. 아마 나 때문일 거야.”

“당신 때문이라고요?”

“내 동생들은 나 때문에…. 매일 비교당하며 살았거든. 덕분에 애들 자존감이 많이 떨어졌어.”

“…당신이 너무 잘나서?”

“그런 셈이지.”

수안의 학습 능력, 잘난 외모와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 모든 것이 비교 대상이 되었다. 인생 2회 차와 1회 차가 비교 대상이 되는 것은 불합리했지만, 이를 모르는 부모님과 할아버지, 할머니였다. 덕분에 동생들의 자존감은 바닥을 기고 있었고, 어느 순간부터 최 실장은 동생들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이런저런 노력을 하고 있었다. 이번 일도 그런 노력의 연장선에 있는 일이다.

“…전 잘난 오빠가 아니라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현의 오빠 영수가 잘못한 것도 없이 소환되었다.

수안은 최 실장이 하는 방법으론 동생들의 자존감을 높이지 못한다 생각했다.

자존감은 스스로 높여야 했고, 동생들은 수안이라는 벽을 넘어 스스로 성장해야 했다.

그래야 진짜 알을 깨고 나와 성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수진이 나온다. 조용히 해.”

“네.”

“언니~”

“아가씨.”

수진은 울먹이던 눈물을 거두고 아까 그 경호원들과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둘은 수안을 보고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아가씨가 잘 얘기한 모양이네.’

아현은 문제가 해결되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가요. 언니. 나 배고파.”

“차에 타. 가자.”

“근데…. 저 사람들은 다 뭐야?”

이제야 집 앞을 가득 메운 차량과 미국 경호원들을 보게 된 수진이다.

“미국에서 나와 네 새언니 지켜 줄 사람들.”

“미쳤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최 실장은 잘했다고 하던데?”

“하!”

“너도 나중에 이 정도는 자연스럽게 생각해야 할걸?”

“…나도?”

“그래. 너도 네 회사를 대표하는 사람이 되고, 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될 테니까. 회사엔 여기 있는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네가 단상에 서길 기다리고 있어.”

수안은 작은 목소리로 여동생의 웅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수진은 상상 속에서 임직원이 모두 모인 장소에 당당하게 들어서고 있었고, 임직원들은 그런 그녀를 박수로 환영하고 있었다.

“나도. 나도 그래야지. 맞아.”

수진의 눈이 몽롱하게 풀려 있었다.

그러다 잠시 후 선명함을 되찾았고, 자신의 목표를 직시하기 시작했다.

“더 열심히. 더 치열하게 준비할게. 미래를 위해서! 강운을 위해서! 날 위해서!”

“그래야 내 동생이지. 하하하.”

아현은 여동생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굴리는 수안의 모습에 다시 비슷한 생각을 했다.

‘내가 한 걸음 떨어져서 보니까 아는 거지, 당하는 사람은 절대 모를 거야.’

문득 자신과 수안을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아…. 나도 꼼짝없이 당했었네.’

정신 못 차리도록 휘둘리다 집에 돌아오니 자신의 손엔 청혼 반지가 들려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도 사정없이 흔들렸다. 고작 하루 만에….

지금 와서 생각하니 전부 수안이 계획한 대로 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자신도 수진과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이 사람이 이제 내 남편이야….’

노회한 능구렁이처럼 굴어도 냉철하고 계획적으로 일을 추진해도 자신의 남편 된 사람이다.

남이라면 모르지만, 남편이라면 오히려 믿음직했다.

“아까부터 자꾸 무슨 생각을 해? 얼른 가자.”

“아니에요. 수안 씨.”

“아가씨? 우리 얼른 가요.”

“가요.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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