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여행
식을 마치고 나니 늦은 저녁이었다.
둘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고려 호텔 최상층 스위트룸에 들어와 쉬고 있었다.
어머니의 배려였다.
수안은 방금 샤워를 끝냈다.
“후아. 씻었더니 좀 낫네. 당신 다리는 괜찮아?”
“종아리가 퉁퉁 부었어요. 아깐 발바닥이 뜨끈했는데, 지금은 느낌도 안 나요.”
다리뿐 아니다. 하도 몸을 굽혀 인사하는 통에 허리도 뻐근했다.
잔뜩 긴장하고 있었기에 내일 자고 일어나면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이 아플 터였다.
“선수 출신인 나도 녹초가 됐으니 아현은 더했겠지.”
평소 바쁜 일정에도 힘든 줄 모르던 수안이었지만, 오늘만큼은 피로가 느껴졌다.
“신혼여행이 내일부터 시작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그리고 호텔에서 따로 묵으라고 하신 것도 정말 고마워요. 시댁으로 들어갔으면 제대로 쉬지도 못했을 텐데.”
신혼여행지로 떠나는 비행기 편이 내일 점심으로 잡혀 있다.
덕분에 내일 아침까지 마음 놓고 쉴 수 있었다.
“이리 와. 내가 다리 마사지해 줄게.”
“아녜요. 당신도 힘들잖아요. 그냥 편히 쉬어요.”
“당신 화장도 지우고 씻기도 했잖아. 침대에 누워 봐. 아예 전신 마사지를 해 줄 테니까. 나 마사지 전문가야.”
아현은 더 입씨름할 기운도 없었다.
“아구구. 나도 모르겠다. 마음대로 해요.”
수안은 무방비하게 침대에 엎드린 아현을 정성스럽게 주물렀다.
“…진짜 마사지한다는 말이었어요?”
“풋! 기대했어? 아이고. 내가 눈치가 영 꽝이라….”
“워워. 진정해요. 나 정말 피곤해서 오늘은 기운 없다고요.”
“알았어. 걱정하지 말고 편하게 누워있어.”
아현은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수안의 손길을 느끼며 말했다.
“아…음…. 마사지는 언제 배웠어요?”
보통 수준이 아니었다. 충분히 전문가라고 할만했다.
“내가 국가 대표 선수로 지낸 시간이 몇 년인데 이런 것도 못 하겠어? 내가 육상 선수들 코치도 겸하고 있잖아.”
목부터 시작한 마사지가 발바닥에 이르는 동안 아현은 까무룩 잠들어 버렸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엎드려 잠든 아현을 바로 눕히고 얇은 이불을 덮어 줬다.
“…잘 자.”
부모와 동생들에 이어 오늘 자신의 가족이 하나 늘어났다.
“사랑하는 여보.”
수안에게 아내가 생겼다.
전생엔 결혼을 꿈도 꿀 수 없었건만 지금은 일생에 한 번 마주치지도 못한 그녀와 결혼식을 올렸다.
“마치… 꿈만 같네.”
수안은 잠든 아내의 얼굴을 보다 곁에서 조용히 잠들었다.
* * *
다음 날 수안과 아현은 느긋하게 일어나 호텔에서 조식을 먹고 공항으로 가는 차에 올랐다.
“…와이프가 뭐라고 안 해?”
수안이 차량 조수석에 타고 있는 배 이사에게 하는 말이다.
“요즘 밤에 잠도 못 잡니다. 아들 녀석이 밤마다 울어 재끼는 통에….”
“내 말이. 둘이서 애 보다가 혼자 봐야 하니 얼마나 고생이겠어. 지금이라도 다른 비서에게 맡기고 가지?”
배영성은 수안의 신혼여행까지 따라갈 예정이었다.
“어머니 집에 와 계십니다. 괜찮습니다.”
“나 때문에 배 이사 모친까지 고생이네.”
“그렇다고 부사장님을 누구 손에 맡깁니까? 당연히 제가 수발을 들어야죠.”
“앞으로는 밑에 직원들 시켜. 언제까지 내 뒤치다꺼리만 하려고?”
“봐주십시오. 흐흐. 사모님 어젠 정말 대단하셨습니다. 결혼사진 잘 나오겠던데요?”
“호호. 고마워요. 배 이사님.”
“아! 그리고 부사장님. 어제 한송 그룹 회장님 보셨습니까?”
“어제 인사는 드렸지. 왜? 무슨 일 있었어?”
“술이 좀 과하셨던 것 같은데… 나중에 부사장님 보는 눈빛이 약간 날카로웠습니다.”
결혼식장에서 배영성은 수안이 아니라 주변에 집중하고 있었다.
즐거운 날에 웃지 않는 사람이 바로 내일 적이 될 사람이었다.
그런 배영성의 눈에 띈 한 사람. 바로 한송 그룹 회장이었다.
“…큰아버지가 아직 악감정이 남으셨나?”
한송 그룹 회장은 사사로이 수안에게 큰아버지였다.
수안의 아버지인 강운모 회장이 강운 그룹을 집어삼켰으니 그 위의 형인 큰아버지가 불만이 없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였다.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큰아버지가 집에 오시면 큰소리가 오가곤 했었다. 큰아버지는 일부 현금성 자산을 물려받아 한송 그룹을 일으키고 회장에 올라섰지만, 강운 그룹에 비하면 작은 재벌가였다. 고모가 계열 분리로 가진 뉴월드 유통 그룹에 비해서도 작았다.
“죄송합니다. 좋은 날 이런 얘길 했네요. 다녀와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냐. 잘했어. 작은 문제도 미리 아는 편이 좋아. 그래야 미리 대비하지.”
“그럼…. 전략실에 국내 한송 그룹 움직임을 파악해 보라고 지시해 두겠습니다.”
“그렇게 해. 무뚝뚝한 큰아버지 얼굴에 표정이 드러날 정도면 언제 일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아.”
“…….”
아현은 이제야 재벌가에 속한 기분이었다.
수안이 옆에 앉은 아현의 손을 꼭 잡았다.
“당신은….”
‘난 신경 쓰지 말라고 하겠지? 하지만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당신은 여행 다녀와서, 남자 연예인들하고 엮일지 모를 스캔들 조심하고 평소에 편하게 하던 외부 활동도 조심해. 특히 기자들 눈에 띄는 걸 가려야 해.”
아현은 약간 서운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고 답했다.
“…예.”
“당신이 유일한 내 약점이야. 다른 곳으로 치고 들어오는 것은 얼마든지 받아 줄 수 있는데, 당신 건드리는 건 용납 못 해. 당신을 물고 늘어지면 나도 물불 안 가리고 덤빌 거라고.”
“네에.”
‘…역시 내 남편.’
배 이사는 수첩에 필기하고 있었다.
“배 이사 뭐 해? 수첩에 뭐라고 적어?”
“저도 나중에 수애한테 써먹으려고요. 명언입니다. [당신이 내 유일한 약점이야.]라니… 수애가 뻑 갈 겁니다.”
“됐고. 전략실에 전화나 넣으셔.”
“옙!”
* * *
한송 그룹 회장실.
강병모 회장은 한송 텔레콤 박수겸 사장과 마주하고 있었다.
“박 사장. 진행 중인 일은 어떻게 됐어?”
“현재 더블 스타에서 통신사로 진출하지 못하도록 틀어막고 있습니다.”
더블 스타 김현성 사장이 괜히 통신사를 인수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한송 텔레콤에서 전방위로 손을 쓰고 있었다.
“그게 전부야?”
“추가로 한송 텔레콤 영업점에서 팬탁에서 나온 삐삐를 권유하지 않는 방향으로 영업 기조를 잡고 판매를 진행 중입니다.”
“어린 녀석이 제멋대로 날뛰니 한 번쯤은 밟아 줘야지.”
“…하지만 이 때문에 한송 텔레콤 점유율이 약간 내려갔습니다.”
“팬탁 아니라도 삐삐 제조 업체가 한 둘인가? 팬탁 하나 뺐다고 점유율 떨어진다는 핑계가 말이 되냔 말이야?”
“팬탁의 삐삐는 새로운 디자인과 특수 기능으로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영업점에서 팬탁 삐삐가 없다고 하면 다른 통신사를 찾는다고 합니다.”
“하! 그럼 더블 스타를 물 먹일 다른 방법이라도 생각해 내야지!”
“다른 분야는 저희가 힘쓰기 어렵습니다. 특히 컴퓨터와 소프트웨어는 저희와 연관이 없습니다.”
“엔터테인먼트는?”
“…기자들을 동원해 보겠습니다.”
“특히 이번에 결혼한 임아현… 뒤를 캐 봐. 여자 연예인이라면 구린 구석이 있을 수 있잖아.”
“예. 회장님.”
‘운모… 네 놈에게 다 빼앗겼으니 아들이라도 잡아야겠다. 네 아들이 질질 짜는 꼴을 보고 싶구나. 네 잘난 아들이 어떻게 망하는지 잘 지켜봐라.’
강운모 회장에게 앙심을 품고 있지만 강운 그룹은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수안의 더블 스타는 아직 대기업 반열에 들지 못하는 작은 기업이었다.
얼마든지 요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하지만 더블 스타… 철저하게 망가트려.”
“예!”
* * *
한국에서의 일을 뒤로하고 수안은 미국 땅을 밟았다.
“일전에 세계 선수권 대회 참석할 때 오고 오랜만이네. 항상 느끼지만, 비행기는 정말 지겹다.”
“저도 피곤해요….”
“호텔부터 가자. 피로 풀고 시차 적응하고 천천히 움직이자.”
공항을 나서자마자 배영성은 잔뜩 긴장한 모습이었다.
“두 분 이쪽으로 오시죠.”
“배 이사. 천천히 가자. 천천히. 우리 시간 많잖아.”
배영성은 수안의 말을 귓등으로 들으며 멀리 다가오는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Come here!”
검은 정장의 거대한 덩치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쟤들 다 뭐야?”
“미국에서 경호할 친구들입니다. 실력 좋은 팀을 섭외했습니다.”
“너무 많잖아?”
눈앞에 스물은 되는 숫자의 덩치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흑인과 백인, 히스패닉까지 골고루 섞여 있었다.
“밖에 주차된 차량에 나머지 반절이 있을 겁니다. 이 정도 경호는 받으셔야 합니다.”
수안을 따라 한국에서 출발한 사람들도 있었으니 50명이 넘는 사람들을 끌고 다녀야 한다는 뜻이다.
“반갑습니다. 미스터 강. 미국에서 경호를 총괄할 클락슨입니다.”
덩치 중에 가장 앞에 서 있던 인물이 나섰다. 수안도 큰 편인데, 이 사람은 수안보다 머리 하나가 더 있었다.
“이왕 이렇게 됐으니 잘 부탁합니다. 미스터 클락슨.”
“우리 팀원들은 전부 전문 군사훈련을 이수한 정예입니다. 맡겨 주십시오.”
저마다 총기류를 소지한 경호원들이었다. 수안이 보기에 미군에서 전역한 군인 출신으로 보인다.
“배 이사… 과하다. 과해.”
“전혀 과하지 않습니다. 여기 미국입니다.”
수안과 아현이 탄 차량의 앞뒤로 검은 캐딜락이 줄지어 공항을 빠져나갔다.
* * *
“오늘 일정은 없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나도 알아. 배 이사도 좀 쉬어.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건데?”
배영성은 공항에서부터 바짝 날이 서 있더니 호텔 룸에 도착한 지금까지도 그대로였다.
“앞으로 일정과 동선을 클락슨과 공유하고, 경호를 사전에 조율해야 합니다.”
“나 참. 내일은 수진이만 만나면 되지 않나?”
“여러 일정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나머지는 그저 관광인데? 사람 많은 데서 공연을 보겠다는 것도 아니고.”
“관광도 일정이죠. 오히려 경호를 강화해야 합니다.”
아현도 끼어들어 궁금한 것을 물었다.
“배 이사님. 수진 씨 있는 지역은 여기서 멀어요?”
“멀지 않습니다. 차로 세 시간이면 갑니다.”
“…가깝네요.”
미국에서 차로 세 시간이면 가까운 거리다.
“쉬십시오. 내일 아침에 뵙겠습니다. 잠시라도 외출하시려거든 꼭 연락해 주시고요.”
배영성이 인사하고 나가자 수안이 푸념했다.
“배 이사는 날이 갈수록 참견이 심해져.”
“수안 씨 걱정돼서 그러잖아요. 여기 한국 아니라 미국이에요. 권총 강도는 물론이고 재력가를 납치하는 일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어요.”
그나마 치안이 좋은 곳으로 선택한 미국이었지만, 개인에 대한 총기 소지가 합법화되어 있는 곳이다. 유럽도 생각하고 있었지만, 나중에 얼마든지 갈 수 있었기에 제외했다.
“그래서 나도 군소리 않고 따르잖아.”
“어제 쉬었는데도 피곤이 덜 풀렸나 봐요. 난 얼른 씻고 쉴래요.”
“전화부터 하고.”
잘 도착했다고 연락하는 것이 우선이다.
“지금 한국은 오밤중이에요.”
“최 실장은 안 자.”
“그럼 나 먼저 씻어요.”
수안의 예상대로 최학주 실장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
-도련님. 도착하셨습니까?
“회장님은 주무실 것 같아서 이쪽으로 연락합니다. 내일 말씀해 주세요.”
-잘하셨습니다. 아침에 양가 모두 연락하겠습니다.
“그래 주면 고맙고요. 그래도 따로 전화는 하겠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미국이라지만 조심하십시오.
“안 그래도 배 이사가 경호원을 40명이나 불렀어요.”
-적당한 수준에서 타협했군요.
“…과하다고 하실 줄 알았더니.”
-도련님은 미국에서 회장님보다 더 알려졌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마음 놓으시면 언제라도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저 같으면 넉넉하게 80명은 불렀을 겁니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로 세계 언론에 오르내린 수안이다. 육상에 관심이 많은 미국인이라면 얼마든지 수안을 알아볼 수 있었다.
“불만이 쏙 들어가네요. 예. 조심하겠습니다.”
전화를 끝낸 수안은 아현이 들어간 욕실을 보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후히 후히. 나도 이제 씻어 볼까나?”
진짜 허니문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