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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63/304)

결혼식

결혼 전까지 수안은 강운 반도체 연구소에 꾸준히 출퇴근 도장을 찍었다.

먼저 파악한 것은 지금까지의 연구 자료였다.

반도체 잉곳(실리콘 웨이퍼 전 단계의 실리콘 덩어리)을 만드는 기초부터 시작해 마지막 패키징에 이르기까지 완전한 자료를 파악한 수안이다. 디스플레이 부분에서도 마찬가지 과정을 거쳤다. 기초를 확립한 수안은 각 단계에서 수정할 부분과 새로운 방향을 지시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물에 대한 보고가 강운 전자 사장의 손을 거쳐 강운모 회장의 손에도 들어왔다.

고작 2주 만에 이뤄낸 일이었다.

“회장님! 무어의 법칙이 깨져 버렸습니다.”

“…김 사장. 그게 무슨 소리야?”

반도체 성능은 2년마다 2배씩 좋아진다는 이론으로 인텔의 공동 창립자인 고든 무어가 주창한 이론이었다. 이는 1965년부터 지켜져 내려왔기에 법칙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수안이 아니었다면 향후에도 그대로 적용될 법칙이었지만, 수안에 의해서 깨져 버렸다.

“반도체 성능이 몇 배 좋아졌습니다. 획기적인 나노 공정으로 집적도를 높였습니다. 최소 5년은 진보한 기술입니다.”

“하하. 우리 연구원들 성과가 대단하군.”

“…연구원들이 아니라 수안 도련님이 낸 성과입니다.”

“…수안이가?”

“핵심 기술은 아직 알려 주지 않으셨지만, 도련님이 독자적으로….”

“뭐? 핵심 기술은 왜 없어?”

“도련님은 회장님이 아시는 일이라고만 하셨습니다.”

“당장 불러와!”

수안은 약속대로 했을 뿐이다.

* * *

“…부르셨습니까. 회장님.”

수안은 오랜만에 강 회장의 집무실로 찾아왔다.

“200나노 이하의 반도체 양산 기술 확보했다며? 그리고 수율까지 올리고….”

“간단한 일이죠. 포토리소그래피 기술에 들어가는 PR(Photo Resist)을 약간 개선하고 공정에 변화를 줬습니다.”

예전 삼디 전자에 투자하며 반도체 공정과 디스플레이 공정까지 눈여겨봤던 수안이다.

여기에 GL의 수율 증가 공정 기술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의 새로운 기술은 공개되지 않아 알 수 없었지만, 오래전 기술은 이미 외부에 공개되어 있었기에 일부를 기억하고 있었다. 주식에 투자하면서 투자하는 회사가 뭘 만드는 회사인지, 어떻게 성장한 회사인지 파악하는 것은 필수라고 생각했었다. 회사에 내 돈을 투자하면서 뭘 만드는 회사인지도 모른다면 그건 투자가 아니라 돈을 허공에 던지는 것과 같다는 소신이다.

물론 그럼에도 모든 돈을 허공에 날렸으니 제대로 된 투자는 아니었다.

“공정은 그렇다 치고… 개선했다는 핵심 기술은 왜 숨겨?”

“계약서 초안. 어디 있습니까? 제가 나중에 계약서 들고 다시 논의하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뻣뻣하게 고개를 들고 있는 수안이다.

“…어차피 나중엔 다 네 것이 될 회사야.”

“그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연구원들의 보상 규정 개선에 앞장서고자 합니다. 5%! 받아야겠습니다.”

“5%는 과해.”

“저야 5% 지만, 나중에 연구원들은 그보다 낮게 책정되겠죠. 그래서 5%로 시작해야 합니다. 언제나 선구자가 중요한 법 아니겠습니까?”

“…전자 사장이 향후 이로 인해 발생할 매출이 조 단위에 이를 수도 있다고 했다. 넌 지금 기업 이익으로 네 주머니를 채우겠다는 뜻이냐? 제 살을 깎아 먹어야겠어?”

“더 큰 이익을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셔야죠.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서커스 단장이 다 먹겠다는 심보는 이제 통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눠주는 돈은 매출이 아니라 영업 이익이고, 거기서도 5%에 불과합니다.”

“…….”

“눈앞의 이득에 눈이 멀어 거위의 배를 가르시렵니까? 제가 강운 랩실에서 연구원들과 함께한 이번 반도체 공정 개선은 첫 단추일 뿐입니다. 거위에게 먹이만 잘 주고 예뻐하면 계속 황금알을 낳을 텐데요? 넘어야 할 산도 많죠. 반도체 제조 공정에서 발열을 잡는 방법과 수율 상승을 시킬 방법이 제 머리에 가득 들어 있습니다. 이번에 보여 드린 나노 공정은 극히 일부일 뿐입니다.”

실은 많이 남지 않았다. 아무리 과거에 봤다지만, 유행이 지나 버린 기술이 대부분이다.

지금이야 최신 기술이지만, 수안의 기억도 한계가 있다.

앞으로는 유능한 인재들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2%.”

“아뇨. 5%입니다.”

“3% 면 충분하다.”

“저 혼자 먹겠다고 5%를 요구했겠습니까? 제가 4%를 먹고 나머지는 함께한 연구원 식구들과 나눌 겁니다.”

“…4%. 네가 3.5%로 하고 0.5%를 나눠.”

“4.5%. 제가 3.5%로 하고 1%를 나누겠습니다.”

처음으로 수안이 비율을 낮췄다.

“앞으로 진행할 치킨게임도 생각해 보시죠. 영업 이익이 나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앞에선 이익을 나눠 주겠다고 하셔도 나중엔 마이너스를 기록할 수도 있는 분야입니다. 선심 쓴다고 생각하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끄응…. 좋다. 4.5%.”

“처음이라 양보했습니다. 다음 성과부터는 무조건 5%로 하겠습니다.”

“야!”

“향후 5년 동안 투입해도 될까 말까 할 연구 개발비를 제 연구 성공으로 보전시켰습니다. 이 정도는 충분히 받아도 됩니다. 이로 인해 반도체 시장까지 선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강운 전자가 얻을 이익은 해당 제품의 판매로 얻을 이익이 전부가 아닙니다.”

“휴우…. 최 실장이 계약서를 준비해 줄 거야.”

“참고로 말씀드리면, 선보상금은 18억. 영업 이익 계산 기간은 10년입니다. 치킨게임을 하시려거든 10년이 지나고 하시는 편이 좋겠군요. 그래야 저와 연구원들이 받을 돈이 많아지죠.”

“나가!!”

“감사합니다. 회장님.”

요즘 강운모 회장은 항상 아들과의 대화 마지막에 화를 내고 끝내는 편이었다.

* * *

반도체 연구소 랩실에 돌아온 수안은 자신을 기다리던 연구원들을 볼 수 있었다.

“어떻게 되셨습니까?”

“궁금해서 미치겠습니다.”

아버지에게 가기 전 이미 연구원들에게 이번 직무 발명 보상에 대한 언질을 해 두었다.

특정 공정을 숨겼다고 경영진에 보고되었지만, 숨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수안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핵심 공정을 연구원들과 함께했다.

발명 보상으로 받을 돈을 인질로 연구원들에게 함구하라고 일러뒀기에 사장에게도 핵심 공정이 공개되지 않을 수 있었다.

“이번에 개발한 제품의 판매로 인한 영업 이익 1%. 특허 출원 이후 10년간 연구원들이 나눠 받을 보상입니다.”

“우아!!!”

“오예!!”

“대바악!”

“제가 한다지 않았습니까.”

“역시! 괜히 회장님 아드님이 아니시죠. 흐하하.”

“서운할지 몰라서 미리 말하는데, 이번 개발에 제 비중이 컸으니까 제가 더 많습니다. 제 몫은 3.5%입니다.”

“당연합니다. 저희야 시키는 대로만 진행했으니까요. 솔직히 다 가지셔도 불만은 없습니다.”

“추가 보상으로 우리 연구원들이 받을 선보상금은 4억입니다. 나중에 받을 1%에서 까이겠지만, 먼저 손에 쥐는 것도 있어야죠.”

보상금 18억에서 수안의 몫인 14억을 제외하고 나머지가 4억이었다.

“우아!!”

핵심 연구원 다섯이 나누면 각자 8천을 가져갈 수 있는 돈이다.

“대신!”

환호하는 연구원들의 입이 다물어진 것을 확인하고 수안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퇴직하면 보상은 물 건너가니까 알아서 하세요. 회사 내 직원에게 적용하는 보상이니 당연한 일입니다.”

최소한의 안전장치였다.

“옙! 절대로 나가지 않을 겁니다.”

“강운이 최곤데 어딜 갑니까? 하하하.”

이번 보상이 알려지면 다른 회사에서 일하는 핵심 연구원을 빼 오기도 수월해질 것이다.

상위 핵심 인력은 언제나 보상이 우위에 있는 회사를 먼저 지원할 테니, 인재 풀도 넓어질 예정이다.

“그리고 제가 끼어들어서 4.5%를 받았지만, 앞으론 더 낮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너무 직무 보상에만 기대하지 말고 꾸준히 연구와 개발에만 집중해 주세요. 불합리한 일이 생기면 절 찾아주시고요. 제가 해결해 드립니다.”

“믿습니다. 기술고문님.”

“전 신혼여행 갔다가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결혼식 준비도 못 하셨겠네요.”

“준비는 틈틈이 다 했습니다. 다녀와서 봅시다.”

결혼식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하하하. 결혼 축하드립니다. 고문님.”

““축하드립니다!””

“얼른 돌아오십시오. 기술 고문 자리는 도련님을 위해 항상 비워 두겠습니다.”

“그럼 딴 놈 채우려고 했습니까? 계속 비워 놔요! 푸흐흐.”

살갑게 대하는 직원들을 보니 다른 직원들이 생각났다.

“아차! 그리고 이번 연구에 빠진 직원들 잘 관리하세요. 여차하면 우리 기술이 유출되는 건 일도 아닙니다.”

“네! 맡겨 주십시오. 철저하게 핵심 기술을 관리하겠습니다.”

처음 랩실에 들어오자마자 몇몇 연구원들을 제외시킨 수안이다.

중국어가 능통했던 몇몇 직원과 평소 회사에 불만이 가득했던 연구원이 포함되어 있었다.

아직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입장에서 억울할 수 있겠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핵심에선 제외되었어도 일반적인 연구는 계속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믿고 갑니다. 그리고 제가 미리 알려 드린 변형 공정이랑 신기술은 그대로 함구하고 있어요. 급하게 먹으면 체하는 법이죠. 협력사의 도움도 필요한 일이 많으니 천천히 진행합시다.”

“옙!”

막상 연구하다 보니 개선할 점이 너무 많이 보였더랬다.

당장은 위에서 이해할 수 있는 수준까지만 공개했고, 순차적으로 특허를 취득하며 기술 신장을 보여 줄 생각이다. 남은 것은 이렇게 처리하고 그 이상은 남은 연구원들의 몫이다.

이후 강운 그룹은 수안의 일로 연구원을 포함한 직원들의 직무 보상 규정을 변경했다.

잡다한 비밀유지나 계산에 대한 내용을 제외한 핵심은 이것이었다.

[직무 발명 보상 규정](변경)

-실적 포상금. 매 분기 효과 금액(혹은 영업 이익)의 5% 이내에서 책정한 직무 보상을 지급한다.

-처분 포상금. 예상되는 매각 금액의 10% 이내에서 지급한다.

관련 내용이 사내에 공지되며 직원들은 저마다 새로운 직무 아이디어를 쏟아 내기 시작했고, 직무 발명 심의 위원회는 바쁘게 자료를 검토해야 했다. 보상 규정상 금액이 적지 않았고, 이미 큰돈을 받은 연구원들의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수안의 일로 꿍해 있던 강 회장은 직원들의 아이디어를 추린 보고서를 받았다.

“…황금알이 쏟아지는구나….”

황금알을 낳는 거위는 수안 하나가 아니었다. 작은 업무 능률 향상부터 시작해 회사에 큰 이익이 될 일도 수두룩했다. 강운이 확보한 인재들이 그만한 능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동안 시킨 일만 하던 놈들이 보상을 높였다고 이렇게 움직이다니….”

아들 수안의 선견지명을 다시 평가해야 했다.

칭찬이 고래를 춤추게 하듯이, 적절한 보상은 직원을 능동적으로 일하게 만들었다.

* * *

고려 호텔에서 가장 큰 연회장은 오늘 특별한 날을 맞이하여 꽃단장하고 손님 맞을 준비를 끝내 놨다.

언론사의 취재 경쟁도 뜨거웠다. 하지만 대부분은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아무리 언론사에서 난리를 피워도 강운 그룹의 결혼식을 언론사 마음대로 할 수는 없었다.

초대받지 못한 기자들은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재벌 총수들의 모습만 찍어야 했다.

일부의 기자들만이 내부에 들어와 사진을 찍고 있었다. 이마저도 강운 비서실의 최종 검수를 받아 내보내야 했다.

일찍부터 초대받은 손님들의 차량이 하나둘씩 고려 호텔로 들어오고 있었다.

총출동한 호텔 직원들이 긴장감을 극도로 끌어올렸다.

내빈들에게 조금의 불편함도 느끼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가지.”

안내를 받는 사람들도 직원들의 서비스가 익숙했다.

평소에도 같은 대우를 받던 기업의 총수들과 사장들이기 때문이다.

수안도 일찍부터 나와서 중요 내빈들을 맞이하고 있었고, 수안에게 아는 척하는 인물들도 상당수 있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조 회장님.”

“하하하. 벌써 결혼이라니 좀 이르지 않나?”

수안의 첫 맞선 상대였던 조 양의 아비였다.

* * *

“제가 서둘렀습니다. 일찍 손주를 안겨 드리고 싶었거든요.”

“그러면 더 서둘렀어야지 이 사람아. 하하하.”

돌려 말하고 있지만, 자신의 딸을 왜 선택하지 않았냐는 타박이다.

“대학 졸업하고서야 마음먹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허허. 인연이 아니었던 게지.”

“사죄의 뜻으로 나중에 회장님 영애에게 좋은 인연을 찾아 드리겠습니다.”

마침 소개해 주고 싶은 남자가 있었다.

신라 일보 장남이 신붓감을 찾는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잘 어울릴 거야….’

조 양과 신라일보의 환상적인 만남이다.

“허허허. 그것도 나쁘지 않군.”

“회장님은 내실에 계십니다.”

수안은 곁에 있던 호텔 직원을 불러 항공사 조 회장을 얼른 보내버렸다.

“조 회장님 안으로 안내해 드려.”

“예. 도련님.”

멀리서부터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수안을 부른다.

“강수안~!”

수안이 돌아보니 익히 아는 얼굴이다.

“임 감독님!”

“하하하하.”

임경남 감독 뒤로 황형조 선수를 비롯한 강운 육상 실업팀 선수들이 들어왔다.

“잘 오셨어요. 임 감독님이 언제 오시나 했잖아. 얼른 들어가요. 형님들 잘 오셨어요. 너희도 얼른 들어가.”

실업팀 선수들 뒤로 멀리 잔뜩 움츠러든 모습으로 들어오는 몇몇 인영이 수안의 눈에 띄었다.

“우리가 이런 데 와도 되는 거냐?”

“초대했는데 그럼 안 와?”

수안이 그런 그들을 불렀다.

“빨리 안 튀어 오냐?”

“헙. 수안이가 우리 봤다.”

“빨리 가자.”

“결혼 축하한다.”

“안 오면 어쩌나 했다 태식아.”

“초대장을 보내려거든 몇 장 더 보내든가. 아버지랑 어머니가 오고 싶어 했는데….”

“야. 너랑 내가 친구지 네 부모님하고 친구냐?”

“큭.”

태식은 짧은 머리를 문지르며 어색하게 웃었다.

“군대 잘 다녀왔고? 면회 자주 못 가서 미안하다.”

“두 번이나 왔으면 됐지… 넌 안 가도 돼서 좋겠다. 군대는 안 가는 게 최선이야.”

제대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짧은 머리가 그대로였다.

“내가 올림픽에서 국위 선양을 얼마나 했냐? 당연히 빼줘야지.”

고등학교까지의 질긴 인연으로 맺어진 태식이도 초대받았고, 중고교 동창들과 법학과 대학 동기들 그리고 선후배가 집결했다. 결혼식도 수안이 바라던 일이지만, 친구들을 결혼식에 초대하는 것도 수안의 오랜 꿈이었다. 알차게 보낸 학창 시절을 자랑하듯 많은 친구가 수안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여! 창식이 오랜만이다! 잘 지내?”

정말 오랜만에 만난 동창도 있었고,

“이야… 넌 나보다 먼저 결혼했어? 애도 있고?”

아내와 아이까지 데려온 친구도 있었다.

“아이고 잘생겼다. 듬직하네. 아들이 몇 살이지?”

“…딸이다. 생일이 늦어서 돌도 안 지났는데 두 살이야.”

“…그래. 인제 보니 너무 귀엽다. 딸이 최고야.”

“괜찮아. 크면 예뻐질 거야.”

민망한 마음에 얼른 다른 친구에게 고개를 돌렸다.

“너는 언제 크려고 아직도 그대로냐?”

“네가 비정상적으로 큰 거지!”

수안이 아니라 신부에게 관심이 있었던 친구도 있다.

“난 신부 대기실부터 다녀왔는데. 대박이더라. 수안이 인생 대성공!”

“푸하하! 당연히 성공이지! 내가 누구 아들인지 잊었냐?”

“새끼는 언제 칠 건데?”

“화장실이나 가 보셔.”

“화장실은 왜? 신부 친구들 화장실 갔나?”

“…가서 거울부터 보고 온다. 실시.”

수안이 강운 그룹 아들이라는 것에 구애받지 않는 진짜 친구들이었다.

많은 하객 중 젊은 친구들은 대부분 수안의 지인이었다.

친구들을 안으로 들여보낸 수안은 다시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다시 내빈들을 맞이했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김 사장님.”

“하하하. 후배님 결혼하시는데 내가 안 올 수 있나.”

세기 통신의 김대수 사장이다. 일전에 직접 만나고 그 후로 수안이 가끔 안부를 묻고 선물도 보내고 하며 인맥을 쌓아 뒀다.

그 뒤로 수안이 강운모 회장을 따라다니며 만났던 국내 재벌가의 많은 사람이 수안의 결혼식에 찾아왔다. 내빈의 면면이 실로 대단했다. 이들이 가진 부를 더하면 대한민국 총자산의 절반 이상은 될 것이다.

“수안아.”

“김 원장님! 교수님들도 잘 오셨습니다.”

김일곤 병원장을 비롯해 어려서 수안을 가르치던 은사들도 총출동했다.

오랜만에 수안을 만났지만, 항상 나오던 불만은 그대로였다.

교수님들은 저마다 수안의 진로를 자신의 전공으로 끌어오지 못한 한탄을 늘어놨다.

“겨우 운동하려고 피아노를 그만둬?”

“그게 아니라… 저는 회사가 있잖습니까.”

“국제 피아노 콩쿠르 한번 나가자고 내가 그렇게….”

“피아노만 문제야? 내가 작품 전시회 열어 준다고 해도 귓등으로도 안 들었어.”

“수안이는 수학을 계속 시켰어야 하는데….”

“수안이가 천재는 아니었잖아. 오히려 예술에 재능이 있었지.”

“그래도 어려서부터 했으면 세계적 석학이 되는 것도 문제없었잖아.”

수안이 일찍 천재성을 드러냈지만, 전문가인 교수들에겐 훗날 실체가 드러났다.

일정 수준 이상의 머리는 있었지만, 천재라고 하긴 애매했다.

종종 볼 수 있는 영재, 그래도 약간은 이른 나이에 두뇌가 성장해 영재보다는 조금 특별한 정도(?)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어린 나이에 대학 과정까지 공부한 것은 대단한 일이지만, 빠르게 외우고 익히는 데만 재능을 보였다.

그 이후엔 천재라 할 특이점이 없었다. 빠르게 외우는 것까지가 끝이었다.

수안은 배운 것을 활용해 교수들이 생각지도 못한 무언가를 떠올리지 못했다.

이 덕분에 교수들은 수안이 천재라 할 정도는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김일곤 교수가 창의성을 강조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제자 수안은 고정된 배움에만 익숙했고, 창조적인 사고가 부족했다.

그래도 예술적인 부분은 인정할 만했다는 평을 들었다.

수안이 어머니의 감성과 손재주를 물려받아 예술적인 부분에서 두각을 보였지만, 수안이 가야 할 길은 예술가의 길이 아니었기에 교수들은 이 꿈마저도 접어야 했다.

“다들 그만하고 들어가자고. 결혼식 날에 교양 있는 교수들이 무슨 추태야?”

김일곤 병원장의 말에 교수들도 입을 다물었다. 수안을 가르쳤던 인연으로 지금도 서로 모임을 갖고 있는 분들이다. 모임의 회장은 당연히 김일곤이 맡고 있었다.

“축하한다. 수안아.”

“감사합니다. 스승님. 이따 식 끝나고 다시 인사드리러 가겠습니다.”

“오냐. 다들 들어가. 수안이 바빠.”

교수님들이 들어가시고 또 손님이 온다.

“수안아.”

뉴월드 그룹의 정지훈도 예비 신부와 함께 방문했다.

“지훈 형. 예비 형수님도 반갑습니다.”

얼마 전 아현과 같이 만나 얼굴을 익혔기에 어색하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축하드려요.”

“축하한다.”

“정신없네. 두 번 할 일은 아니야. 형.”

“하하하. 끔찍한 소리는 하지도 마.”

“고모님은?”

“곧 오실 거야. 우리 먼저 출발했어.”

“응. 먼저 들어가 있어. 이따 봐.”

“수고해. 아! 별장 부지는 어머니가 제공하셨으니까 미리 알고 있고.”

“그래? 몰랐으면 큰일 날 뻔했네. 고마워 형.”

수안은 그 후에 도착한 고모에게 감사 인사를 전할 수 있었다.

“오셨어요. 고모.”

“어쩜 이렇게 잘났어. 오늘따라 조카가 더 잘생겨 보이네?”

“하하하. 별장 부지 고마워요. 고모. 형님 결혼하면 저도 빵빵하게 선물할게요.”

“아휴. 됐어, 얘.”

“벌써 형님께 따로 얘기했어요. 우리 가족이잖아요.”

“호호. 오빠나 너나 하여튼… 네 신부 예쁘더라. 먼저 보고 왔어.”

“감사해요.”

“우리 아들만 연예인하고 결혼하면 어쩌나 걱정했잖니. 덕분에 나도 괜히 마음이 놓였어.”

“연예인도 연예인 나름이죠. 잘 적응할 거예요. 고모님이 잘해 주세요.”

“오늘 결혼하는 녀석이 별걸 다 걱정한다.”

“아버지는 저쪽에 계세요.”

“이따 보자. 수안아.”

“예. 고모님.”

손님맞이가 거의 끝나가는 시점에 특별한 손님이 찾아왔다.

초대받지 못한 사람을 거르는 호텔 직원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할 손님이었다.

“Love and congratulations on your marriage.”

“아… 어려운 걸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프랭크 빈치 부장관님.”

내빈들 중에 프랭크 미국 재부무 부장관을 알아본 사람들이 많았지만, 강운모 회장과 친분이 있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프랭크 빈치 부장관은 수안을 보기 위해 왔다.

몸을 가까이 붙이며 악수하던 프랭크 부장관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국의 대단한 기업가이자 숨겨진 자산가인 스티븐 강의 결혼식에 제가 빠질 수 없죠.”

“…감사합니다. 부장관님.”

스티븐 강이라는 이름은 미국과 일본에 BE 인베스트먼트 소유한 페이퍼 컴퍼니 대표로 사용한 이름이었다.

수안은 잠시 놀랐지만 금방 신색을 회복하고 곧 거행될 결혼식 행진을 준비했다.

겨우 이런 일로 약점을 잡을 사람도 아니었지만, 약점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아버지에게 밝혀진다 해도 큰 문제는 없지만….’

불법적인 일로 번 돈도 아니었고, 그저 해외에서 열심히 달러를 끌어모으는 건실한 투자 회사였다. 그리고 나중엔 알릴 일이기도 했다.

‘그래도 지금은 알려지지 않는 편이 좋은데….’

멀리 프랭크 부장관이 아버지 강운모 회장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괜히 먼저 알게 된다면, 자신의 필요가 아니라 아버지의 필요와 결정에 따라 일부 자금을 사용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내빈 여러분께 안내 드립니다. 곧 결혼식이 시작되겠습니다.

사회자는 내빈에게 함부로 자리에 앉으라는 부탁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식이 시작된다고 알릴 뿐이다.

강운 그룹 회장 장남의 결혼이다.

내빈은 알아서 나누던 대화를 멈추고 식이 거행되길 기다렸다.

음악이 깔리고 핀 조명이 수안을 비추었다.

-신랑 입장.

수안은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붙잡고 버진 로드를 뚜벅뚜벅 걸어갔다.

평소 많은 사람 앞에 섰던 것과는 전혀 다른 감상이었다.

‘드디어 결혼이다.’

-헌앙한 신랑의 모습을 우리만 볼 수는 없겠죠. 신부도 애가 닳도록 보고 싶다고 합니다. 오늘의 주인공인 아름다운 신부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모두 박수로 맞이해 주십시오.

짝짝짝짝.

아현이 핀 조명을 받으며 아버지의 손을 잡고 사뿐사뿐 걸어 나오고 있었다.

“우아….”

-이야! 제가 만나 본 신부 중에 가장 아름다운 분이셨군요. 순백의 신부가 신랑에게 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습니다. 신랑이 조금 조급해 보입니다. 더 이상 신랑을 기다리게 하면 큰일 날 것 같습니다. 신부 입장!

스물다섯의 임아현은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완벽하게 소화하고 있었다.

빛나는 조명과 함께 버진 로드를 가로지른 아현의 손을 장인의 손에서 건네받은 수안은 함께 뒤로 돌아 식을 거행하고 혼인 서약을 마쳤다.

사실 수안은 결혼식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 와중에 결혼 반지를 주고받은 것이 용했다.

기억나는 것은 눈부시게 빛나는 아현의 아름다운 모습뿐이었다.

“아들! 얘가 아주 얼이 빠졌네. 수안이 이런 표정은 처음인데?”

어머니의 말을 듣고서야 번뜩 정신을 차린 수안이다.

“아. 어머니.”

“얼른 옷 갈아입고 나와.”

“네.”

수안은 한복으로 갈아입고 찾아온 내빈들을 찾아다니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곁에는 역시 한복을 입은 아현이 함께하고 있었고, 수안이 아현과 함께 나서면 내빈들의 입이 한껏 벌어졌다.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야. 드레스와는 또 다른 느낌이네.”

“고마워요. 고모. 아현 씨 인사드려. 뉴월드 그룹 강지수 회장님.”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회장님.”

“한복이 정말 잘 어울리네. 단아하고 고풍스러워. 강운가 며느리 자리에 잘 어울리겠어.”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잘 살겠습니다.”

“목소리도 너무 차분하고 품격 있네. 수안이 너는 꼭 너 같은 아내를 찾았어.”

“하하하. 신혼여행 다녀오면 인사드리러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잘 다녀와.”

강 회장 곁에서 아현의 자태를 보던 윤혜린도 한복만큼은 아현을 따르지 못하겠다고 생각했다.

‘어휴. 저걸 어떻게 이겨?’

이기지 못할 것이 너무 많았다.

“너도 잘 꾸며. 집안이 부족해도 저렇게 잘 포장하면 욕은 안 먹는다.”

“…네. 어머님.”

아현에겐 살갑던 강지수 회장의 말투가 혜린에겐 차가웠다.

“수안이가 연예인도 연예인 나름이라며, 앞으로 너 잘해 주라고 신신당부하더라.”

바쁜 와중에 자신까지 신경 써 준 아현의 남편이다.

“내일 시간 되지? 같이 쇼핑이나 가자.”

“예. 어머님.”

‘꼭 이길 필요가 있을까? 좋은 게 좋은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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